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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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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7대 국왕 아신왕 | 阿莘王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370년대 추정[1] | ||
백제 위례성 한성 별궁 (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사망 (음력) | 405년 9월 (향년 30대) | ||
백제 위례성 (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왕태자 | ||
연대 미상 ~ 385년 11월 | |||
백제 제17대 국왕 | |||
392년 11월 ~ 405년 9월 (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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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아신(阿莘) · 아방(阿芳) / 아화(阿花)[2] · 아미(阿美)[3] / 아휘(阿暉)(?)[4] | ||
부모 | 부왕 침류왕 모후 왕후 진씨[5] | ||
형제자매 | 부여훈해, 부여설례, 부여홍, 동생[6] | ||
왕후 | 왕후 해씨 | ||
자녀 | 태자 부여전지 왕자 부여신 왕녀 부여신제 | ||
종교 | 불교 | ||
왕호 | 아신왕(阿莘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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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 而雪恥也.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이제는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부끄러움을 갚아야 할 것이다.
393년 8월, 외삼촌이자 좌장(左將)인 진무를 출전시키며 이른 말. 고구려가 정복한 고토 탈환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이제는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부끄러움을 갚아야 할 것이다.
393년 8월, 외삼촌이자 좌장(左將)인 진무를 출전시키며 이른 말. 고구려가 정복한 고토 탈환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백제의 제17대 군주이자 건길지. '아신왕'이라는 호칭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으로서 《일본서기》의 '아화왕(阿華王)'을 잘못 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화(華)'는 '미(美)' 및 '방(芳)'과 자형이 비슷하며 《석일본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가타가나로 '아퀘(アクヱ)'로 기록했고, 《진서》에 등장하는 백제 왕세자 '휘(暉, 중고한어 발음 hüei)'가 '아화'의 뒷글자를 달리 적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아신왕의 본래 이름은 아훼~아휘 정도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2. 생애
2.1.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다
아신왕은 침류왕의 장남으로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다. 이 날 신비한 빛이 사방을 비추며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 설화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아신왕을 가리켜 "기개가 무척 호방하였고,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라고 서술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아신왕은 상당히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아신왕의 부왕인 침류왕은 385년 11월에 승하했다. 아신왕은 부왕인 침류왕의 태자로서 엄연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그가 침류왕 사후 곧바로 임금으로 즉위했어야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부여아신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그의 숙부였던 부여진사가 대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본래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빼앗았다'고 꽤 직설적으로[8] 기록하고 있다.
아신왕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그가 태어난 시기는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다. 침류왕이 죽었던 385년에 아신왕이 '유년의 나이'라 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 진사왕이 즉위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의 아신왕은 많아도 15세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때문에 아신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370년대 가량으로 볼 수 있다.#
단, 진사왕이 즉위하고 불과 9년 뒤인 394년에 부여전지가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405년에는 숙부인 부여설례와 왕위 다툼까지 벌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신왕은 385년에 이미 아들까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때 그가 어렸다고 하는 기록은 다소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진사왕의 즉위는 다른 모종의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간에 이로 미루어보아 아신왕은 원래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좌를 진사왕에게 찬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
2.2. 숙부에게 복수하고 왕위를 되찾다
〈광개토대왕릉비〉, 《일본서기》 등을 종합해보면, 왜국에 있던 부여아신[9]은 392년 귀국하여 왜국의 도움으로 숙부인 진사왕을 시해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 便立阿花爲王而歸.
이 해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 그래서 키노 츠노노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 야시로노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와노스쿠네(石川宿禰), 츠쿠노스쿠네(木菟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에서는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 츠노노스쿠네 등은 아화(阿花: 아신)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웅신 3년(392년)[10]
《일본서기》 특성상 마치 왜국이 상전이고 한반도의 국가들이 신하인 것처럼 적어놓은 윤색과 과장이 있음을 명심하자. 특유의 프로파간다를 걷어내고 보면 아신왕은 숙부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며, 키노 츠노노스쿠네 등의 왜인들의 협력을 얻어 진사왕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 해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 그래서 키노 츠노노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 야시로노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와노스쿠네(石川宿禰), 츠쿠노스쿠네(木菟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에서는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 츠노노스쿠네 등은 아화(阿花: 아신)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웅신 3년(392년)[10]
391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관미성[11]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이에 고구려의 추가 공격을 막아낼 군사력을 다듬기 위해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 행사를 벌이는 틈을 노려 부여아신이 귀국할 때 같이 온 왜인들의 도움으로 진사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추정된다.[12]
공교롭게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다음해인 392년에 집권했다. 엄밀히 말해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덕분에 아신왕이 즉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석현성과 관미성을 함락하는 등 광개토대왕 초반의 의욕적인 팽창에 밀려 정통성에 하자가 있었던 전왕 진사왕의 입지가 좁아졌고, 이 틈을 타 아신왕의 정변이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다.
2.3. 치욕을 씻기 위해 고구려ㆍ신라와 싸우다
즉위하자마자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393년, 자신의 외삼촌이며 용맹과 지략을 겸비했던 좌장 진무에게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진무는 꽤 뛰어난 장수로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용맹히 싸웠고 저번에 빼앗겼던 관미성을 포위까지는 했지만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지 군량미가 부족해 그냥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다음 해 394년, 전지[13]를 태자로 삼아 후계 구도를 굳힌 뒤 7월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수곡성에서 백제군을 격파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계속된 공격이 신경 쓰였는지 8월에 남쪽 지역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5년에도 아신왕의 북벌은 계속되어 8월 진무를 다시 시켜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갔다. 백제군의 규모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군보다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기병 7,000기를 이끌고 와서 전투한 결과 백제군이 대패해 8,000명이나 전사했다고 한다.[14] 아신왕은 복수하기 위해 11월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본인이 직접 7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려 했으나, 한강을 건너 청목령까지 갔을 때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얼어죽기에 이르자 되돌아와 한산성에서 군사들을 위로했다.
아신왕의 공격은 매번 실패하고 있었지만, 거의 1년에 한 번씩 연례적으로 쳐들어갈 정도였고, 적이 백제 하나뿐이 아니라 후연, 거란 등등 싸우고 있는 적이 많아서 고구려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슬렸다. 이렇게 계속되는 아신왕의 공세에 폭발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향해 전격적으로 진격하고,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비롯한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포박한 뒤 아신왕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때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쳤으며 왕의 아우와 신하 10명과 그 지역 주민들이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고, 덤으로 58성 700촌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이때 아신왕이 외쳤다는 노객(奴客)에는 종 노(奴)자가 들어가 있다.[15] 그러나 '노객'이라는 호칭은 매우 의례적인 것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 그의 신하였던 모두루의 묘지명에서도 노객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진짜 노비 수준으로 굴욕적인 타이틀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奴)는 그냥 왕족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 쓰던 관용구 같은 명사였다고 한다.[16] 그렇기에 '노객'은 신하 또는 소인이라고 의역할 수 있으며, 현대의 관념으로는 소시민 정도의 뉘앙스였을 것이다.[17] 물론 한 나라의 왕이 이웃나라, 그것도 적국의 왕에게 소시민을 자청하며 항복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치욕이기 때문에 아신왕의 권위는 물론 백제의 국격에도 상당한 타격이 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百殘)[18]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서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써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2면, 영락 6년(396년) 기사
이때 빼앗긴 땅이 한강 이북뿐만이 아니라, 강원도 영서 지역과 충주 지역 주변 충북 지역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강원도 영서 지역과 충주 지역을 빼앗기면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친선 관계가 된다. 그래도 아신왕은 포기하지 않았고, 광개토대왕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그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일 뿐이지 진심으로 항복한 건 아니었다. 아신왕은 한강 남쪽에서 연합군을 사열ㆍ 정비하고 있었다.백잔(百殘)[18]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서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써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2면, 영락 6년(396년) 기사
398년 8월, 아신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가야, 왜국의 지원군과 함께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아신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정벌을 중지하였다. 하지만 아신왕은 다시 가야, 왜국의 지원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을 준비했으며, 백성들이 서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로써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갔다.
399년 8월, 또 고구려로 쳐들어갈 군사를 모으기 위해 징집을 단행하다 결국 백성들이 사보타주를 일으켜 북벌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19] 이들은 징집을 피해 대규모로 신라와 왜국에 귀순했는데, 같은 시기 백제 왕족(진사왕계)으로 추정되는 유즈키노키미(弓月君, 궁월군)가 무려 120현[20]의 인구를 들고 왜국으로 망명해 갔다.[21] 계속 지니까 백제 사람들도 군대 가봐야 개죽음 뿐이라 생각해 전쟁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백제의 군사력도 덩달아 고갈되어서 아신왕은 더 이상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대신 당시 사이가 좋았던 가야와 왜국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때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왜국과 화통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점을 생각해보면 신하가 되겠다고 빌었던 게 대놓고 식언을 한 셈이 되었으니 광개토대왕을 기만한 것이다.
이후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전략은 계속 실패하니 일단 접어두고, 당시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다 백제와 가야, 왜국과 사이가 나쁘던 신라를 먼저 공격해 고구려 정벌에 방해물을 없애는 쪽으로 수정하여, 가야와 왜국의 협조까지 받아 셋이서 신라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신라까지 보낸 군사 50,000명에게 왜군에 가야군까지 셋이서 한꺼번에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근초고왕 때 가야 지역까지 구축해 놓았던 한반도 남부의 패권까지 한꺼번에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 중심의 백제 - 가야 - 왜국의 연합도 가야가 격파되면서 무너져 내린 건 덤. 그동안 가야권의 맹주였던 금관국(금관가야)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큰 타격을 받아, 532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패권 다툼을 못한 채 작은 성읍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22]
아신왕 입장에서는 더 이상 쓸 방법이 하나도 없었기에 400년부터는 가야와 왜국과의 외교에 집중한다. 그래야 이들의 협조를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아직기, 왕인을 왜국으로 보낸 것도 이 시기로 보인다. 403년 7월 가야, 왜국과 또다시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당시 신라에서는 실성 마립간이 왜국에 미사흔을 보내는 등, 항상 사이가 나빴던 신라와 왜국의 관계가 회복될 조짐이 보였던 것과 연관짓기도 한다. 왜국은 405년부터 다시 신라에 적대적으로 돌아서서, 백제와 가야, 왜국의 밀월관계는 계속되었다.
404년에는 다시 가야와 왜를 끌여들여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공격했다. 흥미롭게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할 때 썼던 수륙병진책을 따라해서 수군과 육군으로 황해도의 석성(石城)을 짓밟은 후 평양성까지 쳐올라갔다. 사실 400년에 백제-가야-왜가 하도 참혹한 참패를 당한 탓에 광개토대왕 입장에서는 이들이 또 다시 무리해서 허튼 짓을 하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고, 또한 400년도에 고구려 주력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고구려에게서 대단히 많은 영토를 빼앗아 간 원수 후연을 응징해 줘야 할 차였기에 그 시기엔 후연을 응징해야만 했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잃은 영토를 되찾은 건 물론 아예 요서를 넘어 후연의 수도 근처까지 진출해서 두들겨주고 요서 일대에 확고한 고구려 영토를 확보하던 동안에, 근성가이 아신왕이 분명히 400년도에는 실패했었던 그 전략을 또 들고 나온 것이다. 이는 정말이지 잦은 패전 탓에 피폐해진 나라의 국왕이 할 행동이라곤 볼 수가 없는 미친 짓이었다. 그야말로 아신왕이 아닌 다른 군주라면 도저히 시도하지 못했을 정신나간 행태였다. 여기에서까지 실패했다면 아신왕의 왕자리가 위태로운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아신왕 때문에 또 자국군을 대량 살상당하게 되는 왜와 가야가 백제에게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책임 추궁을 했을 것이었다. 혹은 광개토대왕이 간발의 차로 400년도와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했던 순간 더 빨리 도착했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신왕이 이겼다.
이것이 스포츠라면 아무리 강팀을 이겼다곤 하나 약팀 셋이서 베스트 멤버 꾸린 다음 1군 없는 강팀의 2군 선수단을 상대로 간신히 이긴 격이라 뭐 대단할 것 있겠냐고 하겠지만, 전쟁은 일단 이기면 장땡인 국가지대사. 이번에는 한북 일대 경기도, 황해도 일대를 수복하여 고구려가 마음만 먹으면 한성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어쨌든 앞서 언급했듯 고구려군은 정예 본대가 후연으로 나가 없는 상태에서 뒤치기당한 것이고 그마저도 왜-백제-가야가 온갖 남은 전력을 다 끌어모으고 달려온 터라 제3자가 보기엔 대단할 것 없는 승리였으나, 왜군에게도 대대로 자랑할만한 전과로 남았다.
물론 사태가 좀 커지자 돌아온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이 직접 와서 길을 막은 뒤 좌우로 공격하여 이번에도 3국 연합군에게 패배를 안겨주긴 했다. 이때 특히 왜군이 많이 죽었다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 신라 공격 직전에 백제가 왜국과 화통하였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왜군이 가야군[23]과 먼저 합류해서 백제에 왔다가 함께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공격은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다. 그전까지의 아신왕이라면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무리하게 고구려군과 정면승부를 벌이다가 또 대패했겠지만, 깨지기 시작하자 개성으로 물러나서 방어전으로 버틴 것이다. 광개토대왕과의 실력차를 인정한 조치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로왕 때도 입증되었지만 개성 일대가 확보되지 않으면 현대 대한민국처럼 임진강 일대에 현대식 무기체계로 마지노 선을 건설하지 않는 이상 한성 방어는 거의 불가능했던 데다가, 개로왕 시기에 한성이 함락된 이유로 개성 일대의 방어체제보다는 한성의 도성 방어체제에만 집중했던 것이 우로 지적되고 있기 때문. 이때 무리해서 개성 방어선을 돌파하지 않고, 일단 그 선에서 물러선 다음 대백제 전선에 안정을 기하고, 점령한 요서 일대 영역에서 더욱 안전한 후방 방어선으로 물러서서 후연에게 안도감을 줌과 함께 대후연 전선에도 신중을 기한 광개토대왕의 결단 또한 대단한 인내심과 정확한 전략적 판단으로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가 간신히 한숨 돌리는 정도 결과밖엔 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 당시 상실했던 강원도 영서 지역, 충북 지역은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영영 되찾지 못했다. 또한 이때 빼앗긴 충북 지역 중 추풍령 일대가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진격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영역이 된다. 이 지역은 아신왕의 선대 백제왕들이 고이왕 때부터 비류왕 때까지 거의 수십 년에 걸치는 목지국 잔여세력의 반항을 무찌르고 어렵게 장악한 영토였는데, 눌지 마립간은 기원후 464년에 고구려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불과 몇 년 만에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얻어내고 만 것이다. 이 일대는 눌지계-무열왕계 신라 임금들의 특혜와 집중적인 투자를 받아 신라 왕실 직할령으로 거듭나서 신라 왕실이 육부병들의 수장들인 진골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며, 더 나아가서는 훗날 백제를 겨누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24] 한편 이 당시 잃은 강원도 일대 루트를 통해서는 고구려가 훗날 흡사 드릴처럼 점으로 이어진 군사 거점 건설로 공주 지역까지 단번에 쓸어버려 장수왕의 원수인 백제를 처단할 전략을 짜면서, 백제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된다.
2.4. 의문의 최후
405년 아신왕은 승하했다. 아신왕의 승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25]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남아있다. 아신왕이 죽기 여섯 달 전의 기사이다.오방색에 의하면 흰색 자체가 서쪽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결국 요약하면 서쪽 세력에 의해 시해됐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아신왕은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이은 실정과 전쟁의 실패로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정변으로 인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아신왕이 승하했을 때 태자 부여전지가 왜국에 머물러 있는 등 왕위 계승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자가 해외에 있었던 점이 정변을 일으키게 된 한 요인으로 작용되었을 가능성이 꽤 크다.아신왕이 죽은 후 왕의 동생 부여설례가 그의 형인 섭정 부여훈해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왜에 있던 태자는 귀국 도중 반란을 피해 외딴 섬에 피신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왜군의 호위와 대성팔족 해씨 세력 해충의 비호로 숙부 부여설례를 제거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3. 평가
백제 최고의 근성군주. 왕위 찬탈과 왕권 탈환을 위해 백제로 오는 과정에서 신라, 가야까지 제압[26]하는 활약을 보면 나름대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하나 동시대에 활약한 라이벌이 한국사 불세출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었던 것이 그의 치명적 불운이었다.사실 광개토대왕이 그 정도로 뛰어난 명장인 건 결과를 아는 후손들이나 아는 얘기고, 고구려는 이중전선 상황이었던데다 만만찮은 강적 후연을 서쪽에 둔 상황이기에 아신왕을 그저 전쟁광 암군으로 평가하는 건 대단한 무리가 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고구려가 남북 방어선에 안정적인 방어군을 확보한 다음 남는 여력으로 양쪽 전선에서 활동을 시도했겠지만, 광개토대왕은 가능한 때 대규모 병력을 한쪽에 집중시켜 해당 전선의 적을 철저히 격파해서 차후의 저항 여력을 확 꺾어버린다는 상식밖의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게 말로는 쉬워도 아무나 해내지는 못함을 염두에 둔다면, 고구려를 상대로 나름 해볼만하다고 판단한 아신왕의 판단이 그렇게까지 틀린 건 아니었다.
당시 백제는 적어도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병력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는 왜와 가야와의 긴밀한 외교로 지원군을 끌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투자가 성공한 게 딱 한 번이었기 때문에 지금 보기엔 왜와 가야도 아신왕처럼 무리하다 대패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광개토대왕이 그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것은 이들도 여러 차례 패하기 전까진 알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국가의 기초 체급에서도 아신왕의 백제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보다 한참 역부족이었음을 고려해봐야 한다. 백제가 비록 근초고왕의 전성기를 맞긴 했다. 그러나 근초고왕 때 고구려에게 거둔 치양 전투, 평양성 전투의 승리는 고구려가 전연에게 심각한 타격을 받아 꽤 약해져 있었을 때 이뤄졌고, 마침 고구려 측 배반자가 근초고왕에게 군사 기밀을 알려준 큰 행운이 있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에게 여러 차례 졌다고 아신왕을 유리한 조건에서 진 임금이라고 볼 수는 없고, 애초에 광개토대왕 자체가 고구려, 그리고 한국사 최고의 정복왕이었음도 고려해봐야 한다. 앞서 근초고왕 vs. 고국원왕의 대결에서는 국가적 역량은 고구려가 앞섰어도 국제정세의 시운과 군주의 역량은 백제 측이 유리했던 반면, 이때는 모든 점에서 불리했던 이유가 컸다.
그리고 강조할 건 재위 마지막 벌인 대고구려전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백제측의 승리였음이다. 물론 딱 한 번 이긴 것이고 기껏해야 고구려한테 죄다 잃었던 원래 영토 중 일부인 강북 일대와 개성 정도만 수복한 것에 그쳤으나[27], 여하튼 마지막 엔딩 덕택에 그나마 백제는 약 70~80년 정도는 한성 일대를 지켜낼 수 있었다.[28] 물론 이 백제-왜-가야 연합군의 승리 및 황해도-경기도 일대 실지 회복 직후, 후연을 완파하고 돌아온 고구려군이 곧바로 대백제 전선에 대군을 투입하여 백제에게 또 다시 승리를 거두긴 했다. 아신왕 입장에서 보면 죽기 직전에 또 다시 확인해야 했던 광개토대왕과의 실력차였으나, 그래도 개성 일대까지는 고수에 성공한 걸 보면 아신왕이 그제서야 스스로의 능력 부족을 인정하고 방어에만 전념했을 개연성도 크다.
게다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만약을 위해 점령한 후연 영토의 일부인 요서 지역 일부를 포기하고, 보다 유리한 방어선으로 약간 후퇴한 정황까지 드러난다. 혹시나 아신왕의 백제가 늘 그랬듯 또 다시 가야와 왜에 손 벌리고 국내에 무리를 초래해서 대병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되는데, 그러나 아신왕의 백제는 일단 이 시점에선 더 이상의 무리를 하지 않았다. 물론 아신왕이 얼마 안가 병사해서 못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나름 자제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신왕의 치세에는 전쟁과 외침, 군사력 고갈, 사보타지, 대규모 유민 발생, 외교적 고립, 지도층 분열 등 한 나라가 망하려면 발생하는 국가 막장 테크가 한꺼번에 발생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망하진 않은 이유는 그나마 이런 정도 성과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실 광개토대왕에게 1차로 항복했을 때는 광개토대왕이 나름 너그럽게 아신왕을 봐주기도 했었고, 고구려는 주로 후연을 손보고 싶어했으므로 결과만 돌이켜본다면 아신왕이 자신은 광개토대왕만 못함을 일찍 인정하고 조건부 항복을 계속 유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직접 지배화하지 못한 마한 거수국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시점에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조건부 항복한 꼴로 있는 체면 빠지는 꼴을 감수하는게 당대 백제국에게 그렇게 좋은 결과 뿐이었을지는 영 의문이다.
물론 나름대로 백제 사정을 봐줬는데 통수 맞은 격이 된 고구려 왕실이 백제, 가야, 왜 등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꼈을 상황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상술했듯 백제만 아니었다면 고구려는 대후연 전선에 보다 집중해서 요서 방면으로 더 뻗어나갔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대가는 아신왕의 손자 개로왕이 치르게 된다.
한편, 가야, 왜와 사이가 최악이었던 신라가 고구려와 더욱 사이가 밀접해졌던 것도 중요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아신왕은 백제-왜국 관계에서도 의의가 있다. 아신왕은 양국 관계의 우호 증진에 굉장히 기여했다고 해도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왜에 꽤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왜의 성장을 크게 도왔다. 진사왕을 몰아내고 즉위할 때 왜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으니 기브 앤 테이크가 된 셈이지만, 왕위 찬탈이라는 "테이크"한 것에 비해 왜에 끌려가는 모습("기브")이 여럿 나오는 터라 "누구 때문에 왕 됐는데"라는 식으로 왜한테 계속 끌려갔던 듯 하다. 게다가 아신왕은 계속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고전하던 입장이었으니 왜와 가야한테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백제가 열세에 처해진 것 덕분에 왜가 상당한 성장을 일구었다. 백제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유민 행렬로 인구가 증가함은 물론 고급 인력을 수용하게 되었고, 아신왕이 연합군을 편성하기 위해 왕인, 아직기 같은 당대의 석학을 왜에 보내어 백제의 선진 문화를 전파시키고 일본군을 용병으로 끌어오는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서 왜를 끌어들였다. 심지어 태자까지 볼모로 보낼 정도[29]로 열의를 보였다. 다만 태자 부여전지가 일본 주재로 본국을 비운 탓에, 아신왕 사후 권력 공백을 틈타 막내 동생 부여설례가 왕이 되기 위하여 찬탈을 일으켜 둘째 부여훈해를 죽이고 본인마저 전지에게 밀려 사망한 후일담도 있었다.
게다가 왜가 이걸 공짜로 백제에게서 얻어냈다고 보긴 어렵다.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연거푸 대패하는 과정에서 왜병들도 대단히 많이 살상당했기 때문으로, 왜 입장에선 결코 적지 않은 피값을 내주고 얻은 결과물이었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 사비백제가 한성백제만큼 왜에게서 용병을 데려오지 못한 건, 왜도 그동안 꽤 문화적,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자국 백성들 목숨을 다른 나라 전쟁터에 버리는 걸 주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30]가야도 아신왕 탓에 세트로 고구려에게 두들겨 맞아 많은 병력을 잃으면서 신라와의 경쟁에서 따라잡히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신라의 삼한일통에 본의 아니게 기여한 임금이기도 한 셈이다.
4. 《삼국사기》 내용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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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아신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아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二年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다
二年秋八月 진무가 석현성 등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하다
三年春二月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秋七月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우다
三年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다
四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서 20일 만에 사라지다
四年秋八月 왕이 진무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다
四年冬十一月 패수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출전하다
六年夏五月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를 파견하다[31]
六年秋七月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七年春二月 진무를 병관좌평에 임명하다
七年春三月 쌍현성을 축조하다
七年秋八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다
七年秋九月 서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시키다
八年秋八月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징발하다
九年春二月 혜성이 규와 루 성좌에 나타나다
九年夏六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 큰 가뭄이 들어 왕이 기우제를 지내다
十一年夏五月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청하다
十二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다
十二年秋七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春三月 흰 기운이 왕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다
十四年秋九月 아신왕이 죽다
사서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싸움 기록이 주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1. 만화
형민우의 태왕북벌기의 7권에서 처음 소개돼 광개토대왕의 대백제 전쟁에서 주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7권에서 연재를 급박하게 끝냈기 때문에 소개만 하고 나오는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5.2. 애니메이션
1993년 10월 22일부터 1994년 10월 21일까지 KBS 2TV에서 방영한 〈만화 인물한국사: 초롱이의 옛날여행〉 중 광개토대왕 편의 한 장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해 망했어요 짤방으로 가끔 쓰인다(...).
5.3. 드라마
5.4. 소설
-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아신왕은 담덕에게 발린 기억 때문에 정신병에 가까운 열등감[34]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나온다. 또 자기가 천재라는 듯한 자의식도 있는 성격이 꼬인 인물로 아신왕이 담덕에게 복수전을 펼치기 위해 갖가지 계략을 짜고[35] 그 계략이 멀리 가야에 있던 두 주인공 출랑랑과 사가노가 모험을 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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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아신왕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이 즈음 출생한 걸로 추정할 뿐이다.[2] 이체차로 쓰면 아화(阿華)가 된다. 주석 《일본서기》에는 아퀘(アクヱ)라는 훈이 달려있다.[3] 《일본서기》.[4] 《진서》에서 386년 백제 왕세자 여휘를 '사지절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386년은 진사왕 2년이지만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이었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부여휘는 아신왕이었으며 그가 선왕의 왕세자로서 중국 측에 정당성을 가졌다는 가설이 있다. 일단 이 사람 이후 최초로 백제왕으로 봉작되는 사람은 전지왕이기 때문에 왕세자 부여휘는 결국 아신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인은 중국 측과 교섭할 때 주로 이름의 뒷 글자를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본명은 아휘(阿暉)인 듯하다.[5] 《삼국사절요》에서 진무는 아신왕의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다.[6] 광개토대왕릉비에서만 등장. 백잔주(百殘主: 아신왕)의 아우가 396년에 고구려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위에 등장한 부여훈해, 부여설례, 부여홍 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7]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왕에 이런 식의 좋은 평가를 써놓았다. 즉 의례적으로 하는 찬사라고 볼 수 있다.[8] 아신왕의 쿠데타에 왜국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기록 역시 직설적으로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9] 진사왕이 왕위를 찬탈하자 태자였던 부여아신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왜국으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0] 기록상으로는 272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한다면 실제 연대는 392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석해야 《삼국사기》의 기록과 교차 검증이 된다.[11] 이병도는 관미성을 지금의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했다.[12]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보건대, 일본 위주의 과장이 있어 보이지만 어찌되었든 왜국에서 그의 쿠데타를 지원해 준 것만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13] 훗날의 전지왕.[14] 전멸 문서에서도 나와있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총 병력의 20~30%만 죽어도 '전멸'로 간주한다. 8,000명이 전투 불능도 아니고 죽었다는 건 가히 엄청난 피해였던 셈.[15]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왕 보고 노비가 되겠다라고 한 것이니 이만한 치욕이 없는 것이다. 현대로 치면 무조건 항복을 한 셈.[16] 진짜 노예 따위로 지칭하고자 했다면 당대에 사용하던 '노복(奴僕)' 또는 '가노(家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17] 참고 문헌: 《고대의 奴 관념》, 이영훈[18] 고구려가 백제를 부를 때 사용한 멸칭. 대충 백제 잔챙이들 정도의 뜻으로 여기면 된다. 반대로 백제는 고구려를 짐승의 이름, 이리를 닮은 짐승을 뜻하는 단어인 '박(狛)'으로 불렀다.[19] 기록에는 징집 대상 백성들이 도망가서 군대 모으기가 어려웠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20] 통일신라 말기 현의 개수가 400여 개였던 것을 보면 굉장한 숫자다.[21] 그래도 이들은 비교적 우호적인 가야, 동진, 왜국으로 갔으니 망정이지, 적국이었던 고구려나 신라로 가버렸다면 그야말로 대재앙이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신라 측에서 유즈키노키미 휘하 120현민의 왜국 망명을 방해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이 서기 400년 고구려의 백제-가야-왜국 연합군 격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엑소더스급 민족 대이동이라고 칭할 만하다.[22] 이후 반파국(대가야)이 나중에 다시 힘을 키워 가야의 맹주가 되지만 그건 50여 년 뒤의 이야기이다.[23] 반파국, 안라국, 고자국 등을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국은 400년 이미 쇠퇴했기 때문.[24] 다만 이건 처음에는 백제에게 매우 유리한 현상이었다. 백제가 고구려에게 공격받을 때 주로 이 일대에서 신라의 정예군이 편성되어서 백제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으로, 한성 공함 때 문주왕을 호위했던 신라군 또한 주로 이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였다.[25] 일각에서는 404년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그 후유증으로 승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26] 〈광개토대왕릉비〉, 《일본서기》 등을 종합해보면 신묘년 왕위에 오르며 왜의 지원을 받아 신라, 가야에 대한 영향권을 강화한 듯한 뉘앙스인 기록이 남아 있다.[27] 인천 일대, 경기 동부, 강원 서부, 충북 일대는 이때도 끝내 되찾지 못했다. 특히 충북은 동성왕~무령왕 때도 한 번도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28] 이때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고구려에게 승리한 이 전과(戰果)는 이후 왜의 야마토 왕권 대왕들이 대대로 자랑할 정도였고, 그 때문에 광개토대왕비에도 이 마지막 백제의 발악이 그토록 불쾌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29] 하지만 백제가 보냈다는 볼모에 대해서는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이 있지,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서도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 오히려 이 당시 일본으로 간 태자는 볼모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볼모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며 단순 우열관계에서의 인질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문제가 되는 그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관계에 따른 인신공납이 아니라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파견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들이 나행주를 필두로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었다.[30] 다만, 백제가 멸망할 때에는 백제와의 우호관계를 맺었던 의리 및 왜도 당나라의 침공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백제를 돕기 위해 원병을 보내주었다. 물론, 이 때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크게 패했다.[31]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신왕 5년 또는 6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이 항복한 내용이 있다.[32] 1997년 3월 KBS 슈퍼탤런트 3기로 데뷔했으며 KBS와의 전속 계약이 종료된 뒤 타 방송사에서 활동했다가 해당 작품으로 KBS 복귀를 했다.[33] 원래 태왕사신기 시놉시스에서의 담덕은 광개토태왕에서 이태곤이 연기한 담덕의 모습과 비슷하며 원래 시놉시스에서는 담덕, 수지니, 아신의 삼각관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에서 담덕, 도영, 아신 사이의 삼각 관계와 비슷한 구조다.[34] 고구려 군사들이 밟고 지나간 궁전의 바닥이 싫다고 전부 갈아 엎어 교체하라고 지시하며 술을 마시고 궁녀들과 놀다가 괜히 궁녀가 고구려군에게 잡혔던 일을 비웃는다고 생각해서 죽이려고도 한다.[35] 당연히 역사대로 공들여 계략을 짜서 성공시키지만 그래도 결말에서는 담덕에게 허무하게 또 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