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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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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 제후왕
부여곤지 | 扶餘昆支
<colbgcolor=#4eae47><colcolor=#fbe673> 출생
(음력)
5세기 초반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477년 7월 (향년 불명)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작위 좌현왕(左賢王)
관등 내신좌평(內臣佐平)
직위 정로장군(征虜將軍)
부왕 개로왕(蓋鹵王)(?)[1] / 비유왕(毗有王)[2]
형제 개로왕, 부여기(?)
동생 문주왕
자식 부여사마(扶餘斯麻)(?)[3], 부여모대(扶餘牟大), 아들, 아들, 아들
성씨 부여(扶餘)
곤지(昆支) / 곤(昆)[4] / 곤지(琨支) · 군(軍)[5]

1. 개요2. 개로왕과의 혈연관계3. 생애
3.1. 제후왕에 봉해지다3.2. 뜻하지 않은 좌천, 그리고 대왜 외교의 선봉3.3. 최고 관등에 봉해지다3.4. 훙서3.5. 훙서 이후3.6. 무령왕의 생물학적 아버지인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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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왕조의 좌현왕. 제21~22대 개로왕, 문주왕 시대의 왕족이다.

성씨는 부여, 이름은 곤지. 중국사서엔 성과 이름을 줄인 여곤(餘昆)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어난 해는 미상으로 알 수 없지만 형인 문주왕과 함께 457년 유송에 보낸 관작 요청 기록에 등장한 걸 보면 최소 437년 이후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2. 개로왕과의 혈연관계

삼국사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지만 일본서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둘째 동생이라 했다.

학계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간주하고 있다. 문주왕의 동생 또는 삼촌이기도 하다. 문주왕도 개로왕의 아들(삼국사기), 동생(일본서기)으로 설이 오락가락하는데, 이쪽도 대체로 동생으로 보는 편.

이름은 을 음차한 것으로 본다. 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 문주왕이 신찬성씨록에서 주군(酒君)과의 연관성이 강조되고, 반대로 부여곤지는 신찬성씨록에서 비유왕의 아들임이 강조되면서 같은 가문이 추앙하고 있다. 더불어 일본서기상 독음이 기괴하게도 건길지(こにきし)와 똑같다.

3. 생애

3.1. 제후왕에 봉해지다

송서에서는 개로왕이 먼저 하사한 작위를 인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록에서 나오는데 그리하여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좌현왕)[6]의 작위를 유송에서까지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는 왕족이나 지방 호족의 관직을 중국 황제에게 요구하는 경우도 흔했는데, 이런 건 그냥 자기가 내려줘도 되지만 중국 황제에게서 공인받은 작위를 주는 게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입장에서 더 명분이 살고, 당연히 군주 자신의 권위 신장이나 받는 쪽의 충성심을 높이는 데 기대가 컸다. 민족주의와 국가 정체성이 완전히 확고해진 현대인들에겐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같은 값이라고 해도 그 당시 동아시아 사회 대표나 마찬가지였던 중국 황제의 책봉은 매우 가치가 높았음을 잊어선 안 된다. 비슷한 예로 왜5왕이 자신들과 연합한 지방 호족 등의 작위를 황제에게 요구한 경우를 들 수 있다.[7]

당시 좌현왕이 흉노에서 태자 칭호로 쓰인 것을 보면 개로왕으로부터 그 능력을 높이 평가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좌현왕이 병권을 총괄하는 직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로왕은 해씨가 장악한 병권을 빼앗은 뒤 동생 곤지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여러 정황상 부여문주가 부여곤지보다 형인데도 줄곧 책봉에선 곤지보다 뒤로 밀린 건, 곤지가 워낙 정치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유능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8]

이 당시 문주왕 역시 개로왕 대에 상좌평을 지냈다고 하니 개로왕은 치세 동안 친족 - 왕족 중심의 정치 체제 하에서 통치를 해나간 것으로 추측된다.[9] 이후 461년,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백제가 국가적인 위기 때 태자나 왕족을 일본에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전례로 볼 때 그러한 목적을 띄고 곤지가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곤지가 태자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지나치게 유능한 곤지를 개로왕이 꺼렸을 가능성이 더욱 크기에 태자라고 보기엔 대단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10]

3.2. 뜻하지 않은 좌천, 그리고 대왜 외교의 선봉

그러나 한참 백제 중앙 정계에서 형 개로왕의 개혁 정책을 도우며 꾸준히 성과를 인정받던 곤지는, 어느 순간 받는 작위가 내려감과 동시에 일본으로 쫓겨나게 된다. 정확한 정황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알 수 없으나,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곤지 또한 백제 귀족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그의 뛰어난 능력과 귀족들과의 불화 등이 영 불편했던 개로왕이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기 위해 일본으로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정사의 기록은 없지만 전승에 따르면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는 아스카베 일대를 경영하면서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이 기반은 후에 아들인 동성왕, 무령왕의 즉위에 어느정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일본서기에 나와 있어서 정확히는 불분명하다. 현대 한국 학자들은 대체로 곤지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지만 일본 측에선 개로왕 아들일 가능성도 크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동성왕과 무령왕의 즉위는 웅진-사비 지역 귀족들의 추대로 보기도 한다. 그외에 카와치 지역의 도래계 씨족들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5년(461년)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곤지를 왜(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11]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후쿠오카 북쪽에 있는 섬인 가카라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출산했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3.3. 최고 관등에 봉해지다

그런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으로 쳐들어와 개로왕을 잡아 처형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문주왕이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자, 문주왕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477년 4월 내신좌평이 되었다. 문주왕의 이러한 요청은 개로왕 참수 당시 같이 죽었던 백제 왕족과 왕자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왕권 강화의 일환이다.[12]

내신좌평은 6좌평의 수장이면서 왕명을 출납하고 백성들에게 법률을 공포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수상과 같은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문주가 당시 개로왕에 의해 곤지에 비해 시원치 않다는 평가를 받았던 바 있고, 뛰어난 능력에 비해 다소 부족한 친화력 탓에 내쳐진 곤지의 역할을 문주가 맡았던 바가 있기에 두 형제의 관계가 늘상 좋지만은 않았을 개연성이 크지만, 문주의 요청에 곤지가 흔쾌히 응한 것을 보면 그래도 왕실의 위기 앞에서 일치단결하려 했던 것 같다. 문주왕이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한 것은 웅진 천도 이후 급추락한 왕권 강화가 문제가 아니라, 조정 기강 자체가 무너져 있었고 주변에 누가 믿을만한 신하고 믿지못할 신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문주왕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3.4. 훙서

그러나 곤지는 불과 세달 후인 477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문주왕 말기에 병관좌평 해구가 실권을 행사하며 끝내 문주왕까지 시해한 것을 보면 그 역시 해구에게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삼국사기에 보면 곤지가 죽기 얼마 전에 흑룡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곤지의 암살을 은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들 이후엔 인물의 죽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럴 가능성도 꽤 있어 보인다.

사실상 문주왕에게 급변이 있을 경우에 왕위 계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곤지였던 데다가 개로왕 대의 상황부터 감안해본다면 해씨들에게 곤지는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이었을 개연성이 높고, 굳이 해씨 아니라고 해도 문주왕이 곤지를 활용해서 왕실 친위 세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백제 귀족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컸다.

3.5. 훙서 이후

곤지의 두 아들이 즉위하는데, 동성왕무령왕이다. 나중에 즉위한 무령왕이 형이고 먼저 즉위한 동성왕이 동생.[13]

이렇게 족보가 꼬이게 된 것은 진씨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삼근왕을 죽인 후 자신들이 조종하기 쉬한 허수아비왕을 앉히려 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3.6. 무령왕의 생물학적 아버지인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곤지는 도왜하기 전에 개로왕에게 그의 첩을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왜 굳이 출산을 임박한 시점에서 그의 첩과 함께 보내달라고 요구해놓고선 개로왕의 출산하면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받들었는지를 두고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곤지가 개로왕에게 도왜하라고 명령을 받은 시기는 4월이고 6월에 무령왕이 출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단 이 시기에 부여곤지가 귀족들과 마찰을 빚고 있긴 했어도 백제 조정에서 상당한 실력을 쌓고 있었기에 그가 개로왕 요구대로 순순히 도왜하는 건 정치적으로 큰 손해였음이 지적된다. 곤지의 정치적 입지와 활동영역을 넓혀놓았던 건 다름아닌 개로왕이었기에 능력만 이용해먹다가 귀족들과 갈등이 생겼다고 커버도 쳐주지 않은 채 다른 나라로 보내버리는 이런 행태는 현대 한국의 사내 정치적으로 봤을 때도 당사자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14] 그런 상황에서 만삭에 출산을 앞둔 왕의 첩을 달라고 하는건 한마디로 가기 싫다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최근 해석되는 중이다.[15] 그런데 부여곤지를 보내버리고자 하는 개로왕의 의지가 워낙 강했던 탓에 곤지의 이 제안을 넙죽 받아버렸고, 곤지는 별 수 없이 가기 싫은 왜로 가게 되었다는 얘기.

한편 무령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자기가 개로왕 아들이라고 거짓말했다는 학설이 한국에서 대두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곤지의 위상이 백제 왕실에서 꽤 높은 편이었다는 것도 밝혀진 상황[16] 때문에 무령왕이 굳이 개로왕 아들이라고 거짓말하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는 이의도 제기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개로왕 때부터 화동했던 신하들과 귀족들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있는데 그 거짓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동성왕의 모친이 무령왕의 모친보다 신분이 높았을 가능성은 한일 학계 그 누구도 부정못하고 있기에,[17] 무령왕의 친부가 곤지일 경우 무령왕의 왕위 계승성에 다소 흠집이 커지는 상황은 여전하긴 하다.

한편 다른 정황도 있다. 무령왕의 전임자인 동성왕은 고구려와 맞서 한강 유역을 회복하려는 시도보다는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펼쳐, 전남 강진 일대와 제주도까지 영향력을 미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에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호족[18]들이 불만을 품었고 따라서 불화를 빚었던 호족들에게 암살당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19] 그도 그럴것이 삼국사기 동성왕 치세기에 기록된 “한산에서 두 호랑이가 싸웠다“라는 기록은 정말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친부로 추정되는 부여곤지도 호족 출신의 권신에게 암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 동성왕과는 차별성을 강조해야 했고, 한성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개로왕의 혈통이란 사실을 이용했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참수되었을 때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전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건 한성에 당시 있었던 개로왕의 가족들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걸 갖고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순 없다. 하지만 무령왕이 정말 개로왕의 아들이 맞는데 한성에 살지 않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차기 권력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결정적 증거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러한 정황 증거를 가지고도 부여곤지의 아들이라고 확답할 순 없다. 신라의 그 소지 마립간마저도 자기 아들을 임신한 여자를 데려오는 데 대단한 저항을 겪어야 했었던 사례가 있다.

개로왕이 피살되었을 때 부여사마(훗날의 무령왕)의 나이는 15살로 당대에는 꽤나 장성한 나이였지만 문주왕-삼근왕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에선 19살 때까지 해당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도 신변에 별 탈 없었다는 건 모친의 출신이 워낙 미천했을 영향을 아무래도 배제하긴 어렵다. 반대로 해석하면 부여곤지의 친자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고대 근세에 성인으로 받아들여지 15살의 나이에도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개로왕과 그의 처자식들이[20] 당한 참화에서 모면할 수 있었던 점은 부여사마가 개로왕의 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다.

일단 무령왕이 개로왕 아들 맞다고 주장하는 건 오히려 일본 학계고, 한국 학계는 곤지 아들설에 무게를 싣는다. 앞서 봤듯 양쪽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긴 하다.

4. 기타

드라마틱한 인물은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다뤄진 경우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최인호의 소설 '제왕의 문'[21]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뤄지는데 작품 초반부 악역으로 나온다. 여기에서는 개로왕에게 왕위와 약혼녀를 빼앗기고 웅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개로왕의 왕비(곤지의 전 약혼녀)를 납치하여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 이후에는 등장이 없지만 개로왕이 흑화하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송산리 고분군에 곤지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무령왕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되었고 당대 만들었던 무덤이 모두 온전히 남아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은 알 수 없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 중 하나인 백제신찬에서 곤지가 곤지왕(琨支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후 왕으로 추존된건지 아니면 제후왕이었던 곤지의 행적을 반영한 것인지는 불명.

일본삼대실록에 의하면 비조호조미도(飛鳥戶造彌道)가 부여곤지의 후손으로 백제숙녜(百濟宿禰)라는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사마(무령왕)와 모대(동성왕)는 곤지와 함께 백제로 돌아간 것이 확인되나 나머지 세 아들의 행방은 불명이다. 같이 백제로 돌아갔지만 사료 부족으로 행적이 남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신찬성씨록에는 곤지의 후손을 자처하거나 곤지계로 추정되는 씨족이 있기 때문에 왜에 남아서 도래계 가문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정황상 곤지의 다섯 아들 전부 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두 명 정도는 왜에 남아도 이상하지 않다.


[1]삼국사기》.[2] 《일본서기》. 다만 일본서기에서 비유왕은 등장하지 않고 정확히 말하자면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확하게 비유왕의 아들로 나오는 문건은 《신찬성씨록》.[3]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4]송서》.[5]일본서기》. 훈은 '코니'.[6] 송서에서는 좌현왕 작위는 인정하지 않고 정로장군만 인정해 주었다. 백제가 왕작을 하는 게 영 거슬렸던 듯하다. 물론 백제는 이를 무시하고 바로 왕작위를 내렸다.[7] 그들에게 선심을 쓰며 으스대면서 충성심을 요구하되, 자신과 신하들의 수직적 주종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을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라고 칭한다. 일단 왜5왕의 왕권이 그렇게 전제적이지 않음은 일본사에서 지적되고 있는 형편이긴 한데, 적어도 백제 개로왕 당시는 왕권이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8]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참조[9] 비유왕 말년의 쿠데타 정황과 이후 왕위에 오른 개로왕의 초기 기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시기에 개로왕과 해씨 세력 등 귀족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이에 개로왕이 그들의 권력을 누르고 왕권 중심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 측근 세력 차원에서 친족과 왕족을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을 운영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10] 충청남도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한성백제 및 웅진백제 편 참조[11] 여기서 부인(夫人)은 삼국시대 당시 왕후를 일컫는 호칭이다.[12] 동시에 문주왕은 자신의 아들인 삼근왕을 태자로 세우며 동시에 부여곤지에게 견제구를 던지기도 한다[13] 이상 일본서기 기록. 삼국사기엔 동성왕이 무령왕의 아버지로 나온다.[14] 그러나 개로왕의 맏이 동생 혹은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부여기가 정말 개로왕의 아들이었다면 차기권력 구도를 두고 정치적 숙청을 했다고 해석하면 납득할 수 있다. 부여기는 송나라에서 우현왕 작위를 받았으며, 이는 개로왕의 또 다른 동생인 부여곤지와 부여문주보다 높은 관작이라는 점이 이 설을 뒷받침한다.[15]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참조[16] 개로왕 때부터 높이 평가받던 실력, 그리고 일본에서의 높은 위상 등.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 참조.[17] 일본서기에 의히면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이복형)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무령왕이 나이가 동성왕보다 많은데 동성왕에게 왕위에서 밀린 이유가 모계 신분이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18]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이자 마한계인 사씨, 연씨, 백씨와 대척적에 있는 남래(南來)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이다[19] 동성왕을 암살한 백가가 무령왕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무령왕은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삼는 해씨(解氏) 귀족 해명을 이용해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그를 처형했다.[20] 왕자와 대후들도 개로왕과 함께 모두 죽었다라고 기록 되어있다.[21] 원제는 '왕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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