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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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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여담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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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가 서울 경기 일대에 수도를 두었던 시대. 오늘날 백제 하면 충청도, 전라도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라 한성백제를 낯설게 여기는 경우도 꽤 있지만, 실상은 도시국가 백제의 시작을 알린 곳이자 이후 영역국가로 변신하는, 백제 역사 통틀어서도 최전성기를 장식했던 시대였다.

문헌상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총 493년이라는 기간 동안 백제의 공식적인 수도였던 위례성에 백제 군주가 있던 시기이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고고학적으로는 기원후 200년대인 3세기 중반을 넘지 못해서 실제 백제 건국이 언제 이뤄졌는지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 용어를 따라 이후 웅진성,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기 백제를 웅진·사비 백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백제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을 때부터 백제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해 개로왕이 전사하고 문주왕에 의해 공주의 웅진성으로 천도하기 전 위례성에 도읍했던 시기의 백제를 뜻하는 명칭이며, 지금의 풍납토성 안의 모 아파트 뒷쪽 부지를 위례성 시기 평시 수도, 몽촌토성 일대를 전시 수도로 추정한다.

마한의 수십개 거수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목지국을 쓰러뜨리고 마한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가던 시기로, 근초고왕 최전성기 무렵엔 북으로는 371년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사망시키고, 남으로는 왜국에 칠지도를 선물할 정도의 위용을 보였으나, 475년 장수왕 군대에게 역으로 위례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좀 더 정확하겐 개로왕 사망 이후 개로왕의 바로 아래 동생 문주왕이 지원군으로 끌고 온 백제-신라 연합군의 비호 아래, 고구려군이 한강 너머 바로 북쪽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어쨌든 풍납토성에서 정식 즉위식은 거행했고, 천도도 바로 쫓기듯 내려온게 아니라 폐허가 된 위례성 궁성 자리에서 적어도 한달 정도는 위치를 심사숙고했고, 이후 오늘날 공주 지역에 천도하기로 결정하면서 궁실과 조정이 완전히 피폐해지진 않은 웅진백제를 이끌 수 있었다.

허나 한성에 비해 지역적 기반도 약했고 고구려에 대패한 왕실의 입지도 크게 줄어들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 왕권은 한성 시기에 비해 크게 약해지고 만다.[1] 기존의 제도와 관행도 무너졌기에 한동안은 지역 세력가들이 군사력만으로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키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501년 무령왕 즉위 전까지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등) 왕이 무려 3명이나 암살되거나 암살당한 듯한 기록이 나오는 만큼, 이후 백제는 정치적으로 꽤 혼란스러운 시절이 한동안 이어진다.

3. 여담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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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서기에서는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백제가 망한 걸로 기록했을 정도였다. 실제 한성백제는 이때 망했다. 어떻게 보면 제4차 십자군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일시적으로 동로마 제국이 망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2] 다만 동진이나 남송이나 꽤 오래 유지되면서 나름의 발전을 하긴 했다.[3]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 1권 참조[4] 박정희 정권 때 강남 개발 과정에서 한성백제시대 수많은 고분군이 파괴되었으나 유독 3세기 중반 이전 적석총만 족집게처럼 파괴할 수는 없었다. 아울러 그 시기에 토돈분구묘제 집단과 연합하기 전 고구려 유민 집단이 임진강 유역에 2세기 중후반에 남긴 유적도 역시 비슷한 시기 같은 개발논리로 파괴되었으나 다 부서지진 않았고, 파괴에 반대하던 학자들이 남긴 기록도 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기원전 2세기부터 고조선계 토광묘 집단 및 옥저계 중도문화유형 집단이 자리잡고 기원후 3세기 초부터 문득 토돈분구묘제 집단이 나타나 한강 유역 지배적 집단으로 자리잡은 결과가 고고학적으로 해석되는 건 어떻게 볼 것인가? 유독 조선계, 옥저계, 토돈분구묘제 집단의 묘에 대해서만 군사 정권이 보존 노력을 기울였단 말이 되는데 이는 말이 안 되는 얘기다.[5] 물론 어딘가에서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해석기법이나 발견이 이뤄지면 연대 자체는 더욱 올라갈 수 있으며, 한성백제의 고고학적 성립연대가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내려갈 개연성은 거의 드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은,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그렇다. 또한, 백제사 관련 연대 상한이 가능한 시공간을 본다면 임진강 유역 일대가 더 유력함이 사실이다.[6] 이종욱 등 극단적인 초기기록 옹호론자 제외.[7]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는 위략을 근거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략 편찬 시기에는 논란이 있으나 적어도 3세기 중반 정도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따라서 고고학계 상한선인 3세기 중반을 백제 건국 시기로 상정하면 간신히 들어맞을 수 있지만 조금 더 보수적인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으로 상정하면 오히려 삼국지와 위략의 기록보다도 늦어버리게 되어 모순이 생긴다. 또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업데이트가 조금 늦었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백제 초기사에 조금이나마 여유 시간이 생긴다.[8] 마한 54개국 내 백제국이 온조 백제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서울 동남부 일대에서 온조계의 고구려계열 적석총은 물론이고 그와 다른 양식의 유적 역시도 3세기 이전 연대에서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백제 사 출발은 3세기 이전으로 볼 여지가 있으나 풍납토성에 자리잡은 시점은 현재로선 3세기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9] 보통 15명 왕 재위기간은 200년을 상회한다. 375년에 즉위한 것이 매우 분명한 근구수왕의 연대를 이에 적용할 시 2세기 중반선까지도(13명으로 바라볼 시 2세기 후반선) 백제 건국 상한선을 올릴 수 있으며 근초고왕 등으로 올리면 상한이 더욱 올라갈 개연성이 있다. 일례로 15명의 군주가 즉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의 존속기간이 228년이며 역사가 500년 전후인 고려와 조선의 경우 군주 수가 그 두배 정도인 34명, 27명으로 30명 안팎이다.[10] 다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초기 백제사를 편찬한 백제인들 자체가 만약 기년을 고의로 올렸을 경우 대방군이 그 시기에 없었을 걸 알았을 개연성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낙랑군의 기록이 정말 초기 백제가 마주한 것이 맞는지 아니면 후대 백제인들이 기록 과정에서 조작한 것인지 여전히 논란이 있을 수 있다.[11]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한성백제 성립이 3세기란 얘기지 백제 주도 집단이 3세기에 고구려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확정적으로 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도 임진강 유역에 백제 건국 세력이 2세기에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아직 고고학계 내에서 반론도 있다.[12] 다만 두 학계 모두 신라와 백제의 건국을 기원전 1세기로 바라보는 극단적인 초기기록 긍정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입장이다. 적어도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비상식적인 초기 연대를 그대로 취급하지 않는 주류 사학에서는 고구려만을 기원전 1세기 건국으로 바라보고(기원전 37년을 그대로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 구려후 추를 추모(주몽)로 해석하는 경우 고주몽계 고구려 왕조 역시 건국 시점이 30년 정도 뒤로 밀리는 기원전 1세기 극초반으로 내려온다.) 신라는 1~2세기, 백제는 그보다 늦은 1~3세기 사이로 건국 시점을 내려 파악하는 추세이다.[13] 사실 고고학적 편년과 문헌의 불일치는 백제와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의 초기 역사에도 해당되지만 적어도 고구려는 부여에서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지역에 이주하여 지배층으로 자리잡는 동향이 관찰되는 건 사실이기에 상황이 다르다. 고구려는 삼국사기상 서기 3년에 도읍한 걸로 기록된 집안시의 국내성 유적에서 2세기 이전의 왕도로서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고 졸본으로 알려진 오녀산성에서도 기원전 1세기의 왕성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이 태조대왕~신대왕대를 제외하고 그나마 신뢰받는 것은 한서 등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의 기록에서 고구려라는 국가 집단의 실재성이 입증되며, 그것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녀산성 및 국내성이 자리잡은 소수맥 지역 일대에, 고조선이 연나라와의 쟁패에서 밀리기 전 요동 동부 일대에서 고조선 주류 문화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던 소수맥 집단이 여전히 소소하게 자치는 누리며 살다가,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각기 부여에서 내려온 전사 집단의 물질 문명 및 묘제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나타난다.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부여에서 내려왔을 전사 집단은 문헌에서도 검증되듯 송양 집단 및 주몽 집단일 개연성이 높다.(단 한서에 등장하는 구려의 실체를 고구려 왕조로 해석할 경우 삼국사기 기년보다도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앞당겨지는데 이 경우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 과연 구려나 고구려현으로 표기되는 기원전 37년 이전의 집단을 주몽의 고씨(혹은 해씨) 고구려 왕조와 연속적인 정치체로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서기 12년 엄우에 의해 살해당하는 구려후 추가 주몽이 맞다면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2세기 혹은 기원전 1세기 전반으로 잡기는 어렵다. 주몽 이전에도 (고)구려라는 이름의 정치체가 있었음이 명확하지만 이를 고구려 왕조의 역사로 편입하는 것이 맞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삼국사기뿐 아니라 고구려 당대인들도 주몽(추모)를 시조로 보았음이 광개토대왕릉비에 명확히 나오기 때문에, 기원전 1세기 후반 이전으로는 소급되기 어려운 주몽 건국시기를 삼국사기 기년보다 앞당길 수는 없다. 단지 고구려 건국의 씨앗이 기원전 2세기경 이미 잉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도성 유적과 입지만 의문시될 뿐 고고학적 흐름과 문헌적 기록에서 거의 교차검증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고고학적 증거의 미비에 한해선 백제, 신라와 상황이 다르다. 이러한 연유로 초기 기년을 언제로 잡느냐는 과제가 남은 백제나 신라와 달리 고구려의 경우 도대체 기원전 1세기~서기 2세기에 있었을 졸본과 초기 국내성의 위치가 어디냐가 학계의 주관심사인 것이다.[14] 서울 뿐만 아니라, 개성도 본디는 고구려 이전에 백제가 대방군에게서 빼앗아 경영하던 주된 북방거점이었고, 광개토대왕에게 크게 패배해 고구려가 영서 및 충북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한 이후에도 아신왕이 어떻게든 개성까진 수복해 지켜내서 다시 판도에 넣고 있었다.[15] 단, 이 환호 유적 자체는 고대 국가 백제와는 별개이다. 이걸 백제 시절의 유적으로 인정한다면 백제는 건국 초 당시에는 고구려와 아무 상관 없는 나라가 되는데 이런 해석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