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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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전투 平壤城戰鬪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371년 10월(음력) | |
장소 | ||
원인 | 고구려의 예방전쟁 실패 후, 백제의 반격. | |
교전 세력 | <rowcolor=#C00D45,white> 백제 (공격자) 승 | 고구려 (수비자)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근초고왕 (백제 국왕) | 지휘관 고국원왕 † (고구려 국왕) |
참가자 부여구수 (백제 태자) | 참가자 고구부 (고구려 태자) | |
병력 | 30,000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최고 지휘관 전사 그외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백제의 승리 | |
영향 | 백제의 한반도 주도권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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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발발한 전투. 백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전투이자, 고구려 역사상 왕이 전사한 유일한 전투이기도 하다.2. 배경
- 관련 내용은 치양 전투도 참고.
▲치양과 평양성의 위치 |
26년(서기 371년),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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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wiki style="text-align:right"
하지만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전략을 예상하고 오히려 매복을 통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는데, 근초고왕은 두 차례의 공격을 물리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진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근초고왕은 태자 부여구수와 함께 백제 정예병력 3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3. 전투 양상
371년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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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wiki style="text-align:right"
41년(서기 37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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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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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의 정예병 30,000명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고국원왕은 태자 고구부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 방어에 나섰다. 당시 평양성은 수곡성과 함께 대(對) 백제 전선을 상대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고국원왕이 갑오(甲午)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백제의 공격을 대비해 성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전투는 무척이나 치열하게 펼쳐진듯 보이는데 <근초고왕 본기>에는 '고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高麗王斯由 力戰拒之)했다는 대목이 보여진다. 고구려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황색 깃발의 백제군의 공격은 매서웠는데 때 마침 고구려의 국왕이자 고구려군의 총지휘관인 고국원왕이 적군의 눈먼 화살[1]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백제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현재까지는 고구려군의 방어도 거셌지만, 백제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퇴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4. 전투 이후
4.1. 고구려
이때 화살을 맞은 고국원왕은 10월 23일에 화살의 상처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고, 이후 고구려는 태자였던 고구부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소수림왕이다. 고국원왕은 고국원(故國原)이라는 지역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했다고 한다.[2] 고구려는 이때의 패배로 인해서인지 이후 금석문 등에 백제를 일컬어 백잔(百殘, 백제 떨거지 놈들)[3]이라는 비하적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공문서에 "북괴" 같은 비하 단어를 쓴 셈(...)[4]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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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wiki style="text-align:right"
4.2. 백제
백제는 대동강 근처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 이후 도읍을 한산성(漢山城)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는 남평양을 빼앗아 북한성으로 천도하였다고 언급된다.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서기 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수도를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州)】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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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현재는 전하지 않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책을 인용한 기록이다.}}}{{{#!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과, <소수림왕본기>에 백제가 평양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남평양=평양성으로 놓고 볼 경우 삼국유사의 오류가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남평양은 평양성이 아닌 옛 고구려 북한산군의 별칭으로 한강 이북(후의 고려의 부수도 남경이자 조선의 수도 한성부)을 가리킨다고 적혀있다. 위의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현 고려의 양주를 가리킨다고 적혀있는데 남경은 양주에서 독립한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취합해도 모순될 게 없어진다.
한편 이 전투는 백제로서는 꽤 자부심이 있던 전투였는지 훗날 개로왕이 북위에 지원을 바라는 표문에도 "그 때 우리가 고구려 왕 목을 벨 정도로 발라버려서 고구려놈들은 남쪽만 보면 지려버린당께요."라고 쓰기도 했다.[5]
쇠(釗)가 경솔하게 (우리와의) 우호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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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wiki style="text-align:right"
그리고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이를 두고 "전공을 과장했다." 고 평가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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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wiki style="text-align:right"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KBS의 사극인 근초고왕 55화에 등장. 하지만 철수가 지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언급되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언급되는 기록을 보면 평양성 전투는 371년 겨울인데 반해, 지진이 일어난 건 372년 가을이다. 드라마 진행을 위해 각색을 한 듯 보인다.
- 천년의 신화에서도 백제 마지막 시나리오로 등장. 여기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전체 시나리오를 통틀어서 한 국가의 영웅이 유일하게 모두 나오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6. 관련 문서
[1] 유시(流矢). 누가 쏘았는지 알 수 없는 화살.[2] 원래 국원이라 불렸으나 천도 후에 옛 고가 덧붙여진 것이다. 이름으로 봐서 수도 근처의 들판을 가리키는 것 같다.[3]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해 '백제 떨거지 놈들'이라는 의미로 부른 멸칭이다.[4] 반대로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기》(百濟記) 등의 백제 사서에서는 "짐승 박(狛)"자를 고구려 지칭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제에서는 고구려를 짐승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이다.[5] 아이러니한 건 이후 대노한 장수왕이 이끌고 온 고구려군에게 백제군이 개박살나고 개로왕 본인은 전장 한복판에서 아군 측에서 죄를 짓고 도망갔던 배신자들에 의해 처형당하는 고국원왕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