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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百濟記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의 역사서로 '백제삼서' 중 하나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의 사서들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서기》가 인용을 함으로써 존재가 확인된 사서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록도 나오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백제 및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오기 때문에 일본의 관점으로 걸러졌으나 백제인 혹은 백제계 도래인이 직접 쓴 귀한 사료다.
'백제삼서' 중 가장 오래된 시점을 다룬 역사서이긴 하나, 이주갑인상 때문에 기록의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262년 기사에 나오는 기본한기의 경우, 이뇌왕으로 추정되는데 이 양반은 400년대 중반에 재위를 한 인물이고, 276년에 즉위했다는 아신왕은 392년에 즉위하는 등 인용된 날짜가 개판이다. 실제《백제기》에 있었던 기록과 달리《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이 의도적으로 날짜를 끌어다 올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주갑인상 문서 참조.
일단 고구려의 한성 함락과 개로왕 피살(475년) 기사가 가장 늦은 기사인 점으로 볼 때, 5세기 후반 ~《일본서기》가 편찬된 720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 《일본서기》의 인용문
《일본서기》에 인용된 횟수는 총 4차례로 진구 황후, 오진 덴노, 유랴쿠 덴노의 기록에서 일부가 전해진다.2.1. 신공기
신공 62년(서기 26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사치히코)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1]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에 가서 ‘천황은 사지비궤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지비궤는 신라의 미녀를 받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책(一)[2]에서는 “사지비궤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궤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 꿈에서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자 천황은 ‘어떻게 감히 비궤가 돌아올 수 있는가.’라며 몹시 분노하였다. 누이동생이 이말을 전하자 비궤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신공기 62년. 신라를 치고자 함
《일본서기》 신공기 62년. 신라를 치고자 함
2.2. 웅신기
웅신 8년(서기 278년) 봄 3월에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아화왕(阿花王)이 즉위[3]하여 귀국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를 천조(天朝)[4]에 보내 선왕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 웅신기 8년. 백제인이 옴
《일본서기》 웅신기 8년. 백제인이 옴
웅신 25년(서기 476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5]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6]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 웅신기 25년. 백제의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이 왕위에 오름
《일본서기》 웅신기 25년. 백제의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이 왕위에 오름
2.3. 웅략기
20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