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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20:59:35

목라근자

[ruby(木, ruby=もく)][ruby(羅, ruby=ら)][ruby(斤, ruby=こん)][ruby(資, ruby=し)]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활약상3. 의문점4. 기타5. 현대 매체에서

1. 개요

백제근초고왕 대의 장군.참고 자료

국내나 중국사서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오직 《일본서기》에서만 존재가 언급되는 군인이다.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였던 '목(木)'씨(목라씨)로, 목씨 군인들 중에서는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장군이다. 목라근자 이후에 가야 지역을 기반으로 목씨 세력이 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목씨의 가야 정복전 자체가 일본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므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 시기인 3세기의 군인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주갑인상에 대해 고려했을 때 백제 13대 근초고왕 시기의 군인이었음이 추정 가능해진다.

즉, 근초고왕이 벌였던 백제의 가야 정복전쟁 당시에 활약한 장군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왜국의 진구황후가 주도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구황후 삼한정벌 이야기 자체가 그렇듯이 영 확증할 수 없는 기록이다. 《일본서기》 스스로 출병도 백제에서 했고, 가야 정복군 주력도 다 백제라고 적고 있다.

2. 활약상

"신공 49년(서기 369년) 목라근자는 사사노궤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탁순국(창원)에서 모여 신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비자벌(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가야를 모두 군사적으로 평정하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문점이 있기도 해서, 백제가 신라와 가야를 군사력으로 격파했다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시기 마한의 한 국가로 추정되는, 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한 국가로도 추정되는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도륙'이라는 강경한 표현을 쓴 것과 달리 가야 7개국에 대해서는 '평정(平定)'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손아귀에 넣었다는 정도 의미일 뿐 그들의 기반 자체를 완전히 해체했다거나 지배세력의 교체를 단행하는 등 극단적인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고, 이후 전개되는 기록이나 고고학을 봐도 가야 세력의 기반은 거의 그대로 온존했으며 이후 오랫동안 연합 군사작전을 펼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실제로 가야는 백제군에게 왕창 깨진 것치고는 이후로 멸망하지 않고 잘 지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성왕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가 되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기선제압을 한 후 외교적으로 회유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아들 목만치가 이 목라근자의 군공을 바탕으로 가야에서 한 벼슬했다는 기록까지 고려하면 목라근자가 어느 정도 가야권에 기반을 만들어둔 것은 맞는 듯 하다.

382년, 백제와 협력관계에 있었던 왜국의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신라측의 미인계에 넘어가 가야국[1]을 쳐서 이시품왕이 백제로 도망오자 목라근자가 다시 나서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관국왕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한편 목라근자는 훗날 신라 여자와 혼인하여 아들인 목만치를 얻었다고 하는데, 목만치는 아버지의 공이 큰 덕분에 임나[2]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백제에서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권신이 되어 높은 권세를 휘둘렀다고 한다.

3. 의문점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물격인 진구황후와 얽혀있기 때문에 목라근자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근거가 없는 왜곡된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백제가 가야를 공격한 것은 사실로 인정하는 추세다.

그 시기에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던 것이 사실이고, 《일본서기》에 존재하는 후대의 기록을 보면 성왕을 왜국의 긴메이 덴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서술했지만[3],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보였던 것과 관련 기록들은 《삼국사기》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한성백제는 신라와 가야 7개국을 묶어 강력한 패권을 형성했고, 한반도 남부의 진정한 패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현장에서 이를 직접 주도한 인물인 목라근자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4. 기타

현대 학계에서는 대성팔족 목씨의 정체를 백제에 협력한 대가로 중앙 귀족에 편입된 목지국 천안 용원리 분가 세력의 후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에 목라근자는 목지국 천안 용원리 세력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4세기 중반 용원리 목지국 분가는 용원리를 떠나는 대신 중앙 귀족으로 편입된 걸로 추측되기 때문에 목라근자는 용원리가 막 중앙 귀족으로 변모한 시기 사람일 것이며, 목씨가 사서에서 목라근자로 첫등장했을 때부터 대귀족 포스를 철철 흘리며 가야 남정에서 엄청난 맹위를 떨친 것도 이해가 간다. 목지국 본가인 청당동 세력은 4세기 전반까지 백제에 맞선 대가로 백제가 목지국의 편을 든 충북 일대의 마한 소국들과 함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에 목지국의 이름값은 용원리 세력인 목씨가 다 이어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4]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는 목협만치와 동일인물로 간주할 경우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목만치가 목협만치일 경우 목만치는 400~403년 사이 출생한 걸로 추정되는데, 369년 목라근자가 가야 남정으로 이름 날린 걸 고려하면 이때 목만치는 노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5. 현대 매체에서



[1] 어느 국가인지는 불명이나, 뒤에 이시품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금관국으로 생각된다.[2] 《일본서기》에서의 가야 지방의 통칭[3] 백제와 일본이 동맹을 맺은 사실을 일본을 우위에 놓고 황실을 신성화하기 위해서 왜곡했다는 것이 옳다.[4] 이중 충주 금릉동 마한 세력이 신라로 도망쳐 신라 김씨 왕조가 되어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5] 본 드라마는 초반부터 등장해야 할 인물들은 나오지 않고 정체불명의 인물들만 잔뜩 등장하다가, 비판을 듣자 개명드립을 비정상적으로 때려가며 해당 인물들을 실존인물들로 바꾸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때문에 본 인물은 원래 별개의 인물로 예정되었다가 비판으로 인해 적절해 때려맞춘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