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12 00:18:36

이주갑인상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8080> 파일:백제 군기.svg비유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나제동맹
가족 부왕 전지왕 / 구이신왕
구이신왕
왕자 개로왕 · 문주왕 · 부여곤지
관련 장소 석촌동 4호분
관련 문서 이주갑인상
}}}}}}}}} ||

1. 개요2. 상세3. 등장 배경
3.1. 3세기 후반 이후 문자 문화권과의 교류 단절3.2. 문헌사적 암흑시대와 이를 메우려는 신화적 역사관3.3. 뒤늦은 역사의 재구성
4. 관련 기사 목록5. 연대의 복원6. 이주갑인상된 자료의 한계 및 문제점
6.1. 백제 왕계보의 문제6.2. 『고사기』와의 상충6.3. 『백제기』 등의 사실성에는 문제가 없는가?
7. 이주갑인상의 여파: 미궁에 빠져버린 왜5왕 시대의 역사
7.1. 비교 자료 1: 『일본서기』와 『고사기』7.2. 비교 자료 2: 왜5왕의 연대

1. 개요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은 2(二)주기(周)의 갑자(甲), 즉 2갑자를 끌어(引) 올렸다(上)는 뜻으로, 일본의 고대 역사서일본서기』의 특정 부분에서 사건이 일어난 시대를 일괄적으로 120년 끌어올렸다는 가설이다.

2. 상세

『일본서기』의 연대를 비교적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잡아도 5세기 중반 유랴쿠 천황 이후의 일이며,[1] 그 밖의 '비교적' 작은 연대의 혼란[2]이 대부분 사라지고 거의 그대로 환산해 쓸 수 있는 연대는 6세기 중반 긴메이 덴노 이후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 이전 『일본서기』의 연대관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점이 많으며, 심지어는 역시 비슷한 사상적 경향 속에서, 또 『일본서기』가 작성된 시기와 불과 8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시기에 편찬된 『고사기』와도 충돌한다.[3]

이와 같이 특정 국가의 국내 연대관이 혼란스러운 때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 쓰일 수 있는 것이 해외 자료와의 연대 비교인데, 『일본서기』 편찬 당시부터 이와 같이 해외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혼란을 다잡고 연대를 획정하려 했음과, 다소 당황스럽게도 그와 동시에 자국 역사를 억지로라도 끌어올리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주갑인상이다. 특히 이주갑인상은 백제와의 교류 개시를 계기로 나타나며, 246년(366년) 근초고왕 휘하의 백제진구 황후가 통교를 시작했다는 기사 이후 나타나기 시작해 오진 덴노 치세가 거의 끝나는 308년(428년) 시점까지 이주갑인상된 기사가 등장한다. 시기상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삼서' 중에도 『백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일단 이 이주갑인상설의 대상이 생각보다는 한정된 만큼, 진구 황후 46년(246 → 366) 이전, 또 닌토쿠 덴노 이후의 관련 기록을 그대로 120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이주갑인상이 나타나는 시기에 일본의 국내 기사로 나타나는 사건에도 그대로 '이주갑인상된 기사'라고 보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있다. 더욱이 『일본서기』에서 이주갑인상이 나타나는 기간 내에서도 해외 관련 기사조차 꼭 이주갑인상되어서만 나타나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며, 어느 백제왕이 직접 나타나는 것과 같이 명확한 기준이 있는 사례를 제외하고는 정확히 120년 차이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이는 오히려 『일본서기』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불러일으킨 지점도 있다. 또한 애초에 120년을 끌어 올렸으므로 그 뒤의 120년은 다시 공백이어야 하는데, 『일본서기』에 정확히 거기 대응시켜 볼 수 있는 공백은 표면적으로는 없고, 짜맞추어 보려고 해도 정확히 어떤 부분에 대응시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그 중간에 등장하는 덴노들의 역사 기록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기가 일본 열도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고대 국가가 정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연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시기의 상황에 대한 접근을 무조건 피할 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진구 황후 49년조에 대한 천관우의 '주체 교체설'은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에 한국사학계에서도 다소의 수정을 거쳐 『일본서기』의 기사를 대폭 인용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4~5세기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과 일본 열도의 관계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라고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이주갑인상설 또한 핵심적인 가설로 인용되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이 이주갑인상된 기사들의 내용 또한 연대가 확실하다고 하여 그대로 믿기에는 여러 문제점이 확인되어, 적어도 아신왕 대까지 백제 왕계보가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특정 사건의 내용에 대해 '이것은 이주갑인상된 사실로서 신뢰성이 높다'는 관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결국 점점 '정석을 외운 뒤에는 정석을 잊어버려야 하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3. 등장 배경

3.1. 3세기 후반 이후 문자 문화권과의 교류 단절

일본 열도는 이전까지 군장 사회(Chiefdom) 수준의 여러 정치체가 난립해 있던 단계이다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반 사이의 어느 시점에 히미코를 중심으로 한 연맹체 국가 야마타이국이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230년대 이후 히미코와 의 교류를 통해 수집된 정보에 기초해 기록된 『삼국지』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서의 모습이다. 히미코 정권은 247년 히미코가 사망하면서 혼란을 겪었으나, 위나라의 지원을 받는다는 수단 등을 동원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후계자인 토요에게까지 왕위를 넘겨주는 데 성공한다. 이후 266년에 왜국은 진나라에 조공하지만, 그 이후 사절을 파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고구려의 성장과 교역 중심지의 낙랑군에서 유주로의 이동,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중국의 동방에 대한 시야 또한 안개 속에 접어들어 왜국에 대한 기록이 끊기게 된다.

결국 중국의 낙랑군 등 동방 변군이 사라지고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일본 열도는 문자 기록이라는 문화를 받아들일 기회를 크게 잃었다. 그 결과 역사 기록은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채 아마도 구전을 통해 전승되는 단계에 머물렀던 듯하며, 이는 '만세일계'라는 편찬 사업의 과제를 전제로 깔고 자국의 역사를 복원하려 했던 7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문헌 편찬자들에게 크게 골머리를 앓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단절 속에서도, 이 히미코 시대의 상을 일정 부분 투영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진구 황후 시대이다. 『일본서기』 편찬자가 위나라 및 진나라와 야마타이국 정권의 교류를 이 조목에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구 황후기가 당시의 사실 그대로를 복원한 것이 아님은, 히미코의 사망과 토요의 즉위라는 사건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은 채 토요가 지워지고 히미코의 생명이 연장되어 버린 셈이 되는 진구 황후의 재위 기간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결국 후대의 입장에서 이 문헌 기록이 끊겨 버린 시대에 접근하는 시각은, 관제 역사서로서의 의도를 배제하더라도 불완전하고 어설픈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2. 문헌사적 암흑시대와 이를 메우려는 신화적 역사관

이 결과 이 시대의 역사 인식은, 명확한 연대 기록과 선형적 역사관이 정립된 중근세 이후에 보기에는 기묘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주갑인상된 기사들의 앞에 존재하는, 진구 황후 원년(201)의 일로 나타나는 이른바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파사 매금(波沙寐錦)'이 나타나는데, 신라사에서 '파사(波沙)'라고 하면 1세기의 군주 파사 이사금이며 '매금(寐錦)'은 광개토왕릉비·충주 고구려비 등에서 보이듯 4세기 후반 이후 쓰인 왕호로서 마립간에 대응된다.[4] 이 때 신라에서 야마토 정권에 질(質)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보냈다고 하고 『일본서기』 내에서 이 인물은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과 동일시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5세기 전반의 미사흔으로 비정된다. 또한 이 기록의 일설에서는 신라왕을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라고 했는데 이 '우류'는 일반적으로 석우로로 파악되어 『삼국사기』 기년상 3세기, 기년을 조정하더라도 4세기의 인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단서들을 다 끌어다 놓으면 이 사건이 1세기의 일이라는 것인지, 3세기의 일이라는 것인지, 4세기 전중엽의 일이라는 것인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의 일이라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5] 심지어 근초고왕근구수왕 등의 연대를 이주갑인상시킨 기사는 이 미사흔에 대응하는 기사보다 뒤에 나타나므로, 연대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6]『삼국사기』상 파사 이사금, 석우로, 미사흔의 활동 시기(및 '매금' 왕호가 쓰인 시기)는 모두 별개의 시대이고, 사실 『일본서기』 편찬자의 입장에서도 (이후 서술하는 인위적인 기사의 배치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여러 차례 '신라가 일본에 번번이 굴복했다'고 나누어 쓴다고 해서 자국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데 그다지 불리하거나 꺼릴 요소가 없으므로, 그렇게 쓰지 않은 『일본서기』의 이 기사는 애초에 원전 전승 자체가 서로의 연대를 구분할 수 없는 채 뒤섞여 떡이 되어 있는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이와 같이 난잡하게 여러 시대의 이야기가 뒤섞인 것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일반적으로 적어도 5세기 전반 무렵까지 일본의 역사가 문헌의 형태로 체계적으로 정리·계승되지 않았던, 문헌학적으로 볼 때 '암흑시대'에 가까운 상황이었고, 그 결과 이후 시대에 역사 문헌을 뒤늦게 정리하면서 애초에 기록을 일관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413년 또는 421년부터 478년까지 일본 열도의 왜5왕이 중국과 접촉하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앞서 언급한 원가력의 도입 흔적 등 문자 문화가 어느 정도 도입된 흔적은 보이지만, 정작 『일본서기』의 연대관은 왜5왕의 활동 연대와는 그다지 맞지 않는 등 그런 실마리조차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계승되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역사관은 그러한 엉킨 실마리를 사실적으로 풀어내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주갑인상된 백제 계통의 역사 기록으로 서술의 '역사화'를 시도한 듯 보이는 진구 황후기, 나아가 오진 덴노기까지의 내용은 역사보다 신화에 가까운 태도로 서술되었다는 분석이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진구 황후가 아이를 품고 신라 정벌을 마친 뒤 본국으로 돌아와 오진 덴노를 낳았다는 이 시대의 기록은, 신라를 비롯한 삼한의 복속이라는 성취를 이뤄내는 '신화적 세계'로부터 '귀향'하여 '신적 존재'의 아들이 태어나 지상을 다스리는, 이른바 '타계 귀환 설화'의 전형적인 유형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백제의 기록을 기본적인 출처로 하는 것으로서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이주갑인상된 기사들도, '번국의 복속'이라는 '신화'의 연장선상에서 배치되었다는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7]

다만 『일본서기』의 편찬자는, 애초에 그런 '신화'의 영역을 역사의 틀 안에 넣어 그것을 최대한 그럴싸해 보이게 하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주목받아 채택된 것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백제기』의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연대는 '동아시아 세계 속 일본의 등장'을 보여준다는 의의를 갖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백제기』가 끌려가 한반도 관련 기사가 120년이 앞당겨져 인용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이 국제 무대에 등장함과 동시에 '신국(神國)'으로서 저절로 번국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정치 신화'에 근거를 둔 연대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단서를 찾기는 했으나) 사실상 '창작'하는 동시에, 그것을 최대한 사실적인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 그 내용을 인용한다는 이중적 의도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어쩌다 보니 자료가 상당히 소실된 현대의 입장에서 고대를 들여다 보기에 그 내용은 일정 부분 사실성을 반영한 것으로서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기는 한데, 그 내용에는 고대 일본의 천황제 국가의 시선이 듬뿍 버무려져 목을 넘기기 어려운 기묘한 상황이 지금의 현황인 것이다.

3.3. 뒤늦은 역사의 재구성

이런 문자 기록의 공백 상태가 해소되는 것은 5세기 전반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후 서술하듯 백제와의 교류 양상에 다소의 의문이 있기는 하나 4세기 후반부터 특히 백제로부터 문자 문화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왜5왕의 중국 교류가 나타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유랴쿠 덴노 때부터 문자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듯한 경향이 보이기도 하고, 에타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검·이나리야마 철검 등 고분 출토 문자 자료 등도 확인된다. 그러나 5세기 말에 들어서면 덴노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일본서기』에서조차 짧은 기간 내 잦은 군주의 교체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고고학적으로도 대형 고분이 쇠퇴하는 등, 어떠한 이유로 일본 열도 내의 구심적 성격이 약화되는 현상이 보인다. 이 무렵까지도 연대기적 역사 문헌이 정확하다고 할 단계까지 정립되지 않았음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애초에 그 이전까지 수입된 문화 또한 에 보내던 표문 등 일부 전문 집단에 의해 작성되던 문건을 제외하면 이나리야마 철검이 그러하듯 간지를 이용한 간단한 연대 표기 정도에 그치고 대대로 이어지는 역사 인식은 선대의 계보를 겨우 기억하는 정도에 그친 것으로 보이며, 이나리야마 철검에 보이는 '오호히코'의 연대와 계보가 『일본서기』의 그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음 또한 그러한 상황에 기초한다.

이후 일본 내에서 각각 『고사기』, 『일본서기』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등 체계화된 역사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쓰다 소키치 등 고전적인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게이타이 덴노 무렵부터로 비정되었다. 현재는 게이타이 덴노에 대해서 또한 연대 문제가 크게 제기되고 『제기』·『구사』의 실재 여부 또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그보다는 늦추어 수정해 보는 설이 나타났지만, 어쨌든 늦어도 6세기 중반 이후 일본 열도 또한 문자 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갔음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8]

그러나 이 사이, 이미 발생해 버린 300년 가량의 단절은 뒤늦게 회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이후 620년 편찬되었다는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가 645년 을사의 변에서 불태워지는 도중에 『국기』만을 겨우 건졌다고 하는 등 역사서가 크게 훼손되는 일도 있었다. 때문에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재구성'의 과정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가운데 이주갑인상된 시대의 연대기에 대해서는 훼손 이전에 애초에 있었을지조차 추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9]

이 상황에서 어쨌든 (거의 통일된 정권 아래 존재한) 왜국의 존재를 알린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백제와 교역한 일본 열도 내의 국가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알리는 『백제기』의 내용은 일본 최초의 정사서를 엮어내겠다고 나선 이들에게 귀하디 귀한 자료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두 자료는 모두 꼼꼼히 인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주갑인상된 기사가 줄을 지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또 『백제기』의 내용을 굉장히 소급시켜 인용한 것이다. 사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짐작할 수 있을 뿐 정확히는 이제 와서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오진 덴노와 닌토쿠 덴노, 인교 덴노를 비롯한 5세기 전반까지의 덴노들의 연령과 치세가 고무줄 늘어지듯, 자연적인 것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지게 된 데는 이 이주갑인상, 또는 이주갑인상의 원인과 동일한 역사적 관점이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일본이라는 존재가 해외로 알려진 첫 시기'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번국을 거느린 위대한 국가였다'는, 신화에 가까운 역사관을 투영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의심되고 있다. 그것이 '신라와 백제, 고구려[10]는 번국, 중국과는 대등한 이웃나라'라는 8세기 당시의 세계관을 역사에 투영시켜, '일본 최초의 정사서'로 만들어질 『일본서기』를 입맛에 맞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4. 관련 기사 목록

이하 표현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본이 상국, 백제가 하위 국가라는 『일본서기』의 시각을 배제하려 했으나, 애초에 기사 자체가 『일본서기』의 입맛에 따라 짜맞춰져 쓰인 상황에서 『일본서기』 특유의 표현을 불가피하게 쓰는 경우는 붉은 글씨를 써 인용했다.[11] 또한 '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체할 명칭이 현재 굉장히 다양하게 쓰이며 주장 간의 입장차가 적지 않으므로 편의상 일본 열도의 국가 명칭은 '일본'으로 통일했다.

5. 연대의 복원

한국과 일본 역사학의 자료 교환이 거의 처음 이루어지던 18세기~19세기 전반까지의 시대에는, 우선 일본에서는 그 연대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오래된 상황이었고, 초고왕·구수왕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했으나 근초고왕·근구수왕이 아닌 1~2세기의 두 군주에 대응시켜 보는 설, 근초고왕·근구수왕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4세기 후반 이후의 상황에 투영시켜 보는 이주갑인상설 등이 난립했다. 다만 조선에서는 애초에 『일본서기』를 접한 학자 자체가 소수였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를 수입하는 차원에서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지만, 연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살펴본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러다가 메이지 시대인 1897년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상세연기고(上世年紀考)」에 들어 이주갑인상설이 확립되었고, 쓰다 소키치 등 실증주의 사학의 강경한 비판 속에서 오진 덴노 이전의 시대는 역사시대로 보기 어렵다는 풍조 속에서도 이주갑인상된 기사는 그나마 사실성을 갖는 것으로 인용되었다. 게다가 역으로 이런 시대 속에서조차 이주갑인상된 기사는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내세우며, 진구 황후 49년조를 최대한 부풀려서 인용해 나온 것이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설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일본서기』에 대한 재론이 이어진 이후, 1980년대부터 이주갑인상된 기사에 대해서도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등에 의해 새롭게 나온 해석이 3주갑인상설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진구 황후 49년(249 → 369)조에 등장하는 목라근자의 아들로 여겨지는 목만치와 475년 위례성이 함락될 때 등장하는 목협만치를 동일시하던 가설에 따라 보면, 목라근자와 목만치 사이에 지나치게 연대의 차이가 크다고 해서 나온 설이었다. 때문에 목라근자를 249년의 3주갑=180년 뒤의 429년 전후에 활동하던 인물로 보고 475년에 등장하는 목협만치를 그의 아들로 본 것인데, 일본 역사학자들 가운데 이를 계승한 연구자들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12] 다만 이 경우 애초에 이주갑인상의 단서가 된 '초고왕', '구수왕', '침류왕' 등 백제 왕들과의 대응을 버려야 하는 한계 때문에 따르지 않는 연구자도 많다.

한편 천관우로부터 시작해 진구 황후 49년조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이 내용에서 일본 열도의 국가를 배제하고 백제의 강성함을 알리는 자료로 인용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이 이주갑인상의 틀은 한국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곧 근초고왕~전지왕 대의 역사상을 복원하기 위해 이주갑인상설을 인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 분석의 진전으로 백제의 '가야에 대한 영향력', 더 나아가 '충청도 이남에 대한 영향력' 또한 4세기 후반에는 한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확인되는 등 연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주갑인상에 따른 방법론의 영향력도 점차 1차적인 형식 정도에 그치는 경향에 들어서고 있다.

6. 이주갑인상된 자료의 한계 및 문제점

6.1. 백제 왕계보의 문제

이주갑인상설은 특히 애초에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등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초반부의 왕들이 연대를 잡는 데 닻 노릇을 했던 것처럼, 아신왕 때까지의 연대에는 근본적으로 이상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 편이다. 그러나 특히 후반부의 왕들의 연대에는 『삼국사기』와 비교해 볼 때 중대한 결점이 있다.

6.2. 『고사기』와의 상충

또 한 가지 문제는 백제와 관련된 기록이 『일본서기』보다 8년 먼저 편찬된 『고사기』와도 상충한다는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오진 덴노조에서 아직기에 대응하는 아지키시(阿知吉師)와 왕인에 대응하는 와니키시(和邇吉師)가 아신왕 대가 아닌 조고왕(照古王), 곧 근초고왕 대에 파견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고사기』의 연대가 더 정확할 것이므로 백제삼서를 부정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후술하는 문제와 겹쳐, 712년 무렵까지도 아직기·왕인 등에 대한 전승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를 인용할 수도 있다. 특히 아직기와 왕인에 대한 전승이 가작(假作)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면, 『고사기』의 내용은 그에 대한 전승 자체가 애초에는 '일본과 백제의 교류가 처음 시작된 시기'에 부회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던지는 것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고사기』는 '조고왕'의 연대조차도 진구 황후가 아닌 오진 덴노에 대응한다고 적고 있다. 만일 진구 황후가 히미코-토요를 모델로 창작된 인물로 본다면, 오히려 구태여 '사실성'을 찾을 때 도리어 『고사기』를 근거로 써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문제 또한 온갖 해석이 나올 수 있어 복잡한 건이며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섣부른 예시이지만, 어찌 됐든 후대의 연구자들이 발을 대려 할 만한 디딤돌이 실은 전혀 안정된 기반 위에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6.3. 『백제기』 등의 사실성에는 문제가 없는가?

또한 아마도 이주갑인상되는 기사들의 출처가 되었을 『백제기』를 비롯한 기사들에 대해서도, 현대에 들어서는 백제가 가야에 대해 우위를 주장하던 자국 위주 역사관과, 씨족지를 출처로 특정 씨족의 선조의 연대가 왜곡되었거나 아예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때문에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백제 왕의 연대기를 잘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용의 사실성은 완전히 별개로 검토해야 하는 문제가 되어, 이로부터 추출하고자 하는 어떤 사실을 '이주갑인상'과 반드시 맞춰 보려는 의견도 많이 약해졌다.

물론 『백제기』에는 예를 들어 전지의 파견에 대해서도 "이로써 선왕 대의 우호를 다하게 하였다(以脩先王之好也)"고 하여 『일본서기』의 전반적인 시각보다는 『삼국사기』의 "왜국과 우호를 맺었다(與倭國結好)"는 표현과 유사한 문구로 기록하는 등, 백제의 원전을 나름대로 충실히 반영한 부분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많은 부분이 7세기 후반 이후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일본 조정의 시각에 의해 윤색되었고, 또 애초에 『백제기』라는 자료 자체가 백제 멸망 이후 일본 열도로 건너간 유민들이 참여하기는 했으나 『일본서기』 편찬의 사전 작업으로 7세기 후반 무렵 편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백제의 원전부터 특히 가야 문제 등에 대해서는 자국의 이권을 주장하려는 시각을 투영했을 가능성까지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상기한 이주갑인상된 기사 또한 이미 백제의 원전을 벗어나, 천황제 국가의 시각뿐만 아니라 자국 또는 자기 씨족의 이권을 반영하려는 멸망 이전 백제의 시각, 또 이미 천황제 국가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챙기는 동시에 반신라 감정이 고양되어 있었을 백제 유민 또는 백제계 도래인의 필치가 구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다양하게 제시된다. 때문에 연구가 고도화된 현재에는 개별 기사 하나하나에 대해서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7. 이주갑인상의 여파: 미궁에 빠져버린 왜5왕 시대의 역사

사실 이주갑인상된 연대는 왜5왕과는 거의 겹치지 않는다. 왜5왕 중 첫 인물인 찬(贊)의 활동 연대(421?~430? 438?)가 오진 덴노 후반기 이주갑인상된 기사의 환원된 시기와 겹친다는 정도. 다만 그보다 앞의 연대를 이주갑인상한 결과, 특히 닌토쿠 덴노와 인교 덴노의 연대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그 연대 그대로는 찬·진·제가 모두 인교 덴노에 대응되는 등 왜5왕에 대응되는 연대가 엉망이 되었다. 『고사기』는 앞에서 언급했듯 덴노가 사망한 연대만 써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는 피해갔지만, 이쪽조차 『일본서기』와 맞지 않는 것은 물론 왜5왕의 연대와도 딱히 잘 맞지 않는다. 그 결과 왜5왕과 『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덴노의 대응 관계는 지금 와서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점 때문에 1970년대까지 『송서』에 등장하는 왜국이 기나이가 아닌 규슈에 있다거나, 중간에 왕계가 교체된 것이 아니냐는 논의가 재등장했지만, 현재로서는 소수설의 지위로 밀려나 게릴라전을 펼치는 형국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규슈 왕조설을 뒷받침할 독자적인 자료가 없었기에 기나이설이 틀렸다고 해서 규슈설이 맞다고 하기에는 오히려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곧 찬이나 진 정도의 인물이 규슈의 독자적인 왕권을 구축했다고 주장하려면 규슈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작업이 거의 뒷받침되지 않았다.

반대로 왜5왕과 관련된 인명에서 왜(倭)가 성씨와 같이 쓰인 사례가 있다는 점을 들어[21] 가족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더라도 찬부터 제까지를 같은 일가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제와 흥·무의 가족 관계가 연결되므로 왜5왕은 같은 일가로 볼 수 있다는 방어 논리가 제시되어 있다.[22]

오히려 구마모토 현의 에타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검에서 확인되던 '획□□□로 대왕(獲□□□鹵大王)'이 1968년 사이타마 현에서의 이나리야마 철검의 발굴로 그 글자가 '와카타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 획가다지로 대왕)', 곧 '와카타케루노 미코토(幼武尊)'라는 이름을 지녔던 유랴쿠 덴노이자 왜왕 무(武)임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5세기 후반[23]에 이미 규슈부터 간토 평야까지를 아우르는 왕권이 성립해 있었다는 설이 주류가 되어 가설에 강펀치를 맞았다. 때문에 『일본서기』와 계보상의 차이를 보이던 이전 대의 왕들을 근거로 버티던 규슈설은 이후 1980년대부터 고고학적 자료의 축적으로 이른바 '전방후원분 체제'에서 늦어도 3세기 중후반부터 기나이 지역에 고분에서 압도적인 중심성을 보이고 물질 문화 또한 기나이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양상이 뚜렷이 확인되어 유지되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었다.[24]

물론 지금도 규슈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까지는 아니기는 하나, 상대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을 뿐 스스로의 논리를 쌓기는 너무나 힘든 설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나이설 또한 왜5왕과 『고사기』·『일본서기』를 맞춰 보기에는 비빌 만한 언덕이 전혀 없는 상황임은 여전해서, 여전히 그 게릴라전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역사학에서의 혼란상이 바로 그 놈의 이주갑인상 때문이니, 8세기에 호미로 막아보려고 했던 일을 그 때 존재했을 여러 자료들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금은 가래로 막는 신세가 된 셈이다.

7.1. 비교 자료 1: 『일본서기』와 『고사기』

대수 천황명 일본서기상 재위기간 『고사기』의 사망 연도 서기 환산
15 오진 덴노 270년~310년
(→ 390~430년?)
갑오년 394년?
16 닌토쿠 덴노 310년~399년 정유년 427년?
17 리추 덴노 400년~405년 임신년 432년?
18 한제이 덴노 406년~410년 정축년 437년?
19 인교 덴노 412년~453년 갑오년 454년?
20 안코 덴노 454년~456년 - (기록 없음)
21 유랴쿠 덴노 456년~479년 기사년 489년?

7.2. 비교 자료 2: 왜5왕의 연대


앞서 언급한 이나리야마 철검 이후로 왜왕 무를 유랴쿠 덴노로 보는 설은 확실히 주류설이며, 왜왕 제의 아들이 흥이고 흥의 동생이 무라는 점 때문에 둘을 인교 덴노·안코 덴노로 보는 설 또한 무시하기 어려운 지지를 얻어 왔다. 다만 안코 덴노를 흥에 대응시켜 보는 경우, 454년 이후 6년이나 흥이 왕세자 자리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우므로 이 설을 따를 경우 『고사기』의 연대는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한편 『고사기』의 연대와 비교해 찬을 닌토쿠 덴노로 보는 설이 일정한 지지를 얻는다. 그것을 이어서 진을 한제이 덴노로 보고 리추 덴노는 누락되었다고 정리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찬의 남동생이 진이라고 한 반면 한제이 덴노는 닌토쿠 덴노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는 큰 결점이 있다. 이에 더해 진과 제 사이의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점까지 들어 『일본서기』와 달리 찬-진과 제-흥-무의 계통을 달리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듯 성씨로 보이는 인명 앞의 '왜(倭)'를 들어 반박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고사기』의 연대와 가장 맞춰보기 힘든 부분은 찬-진 사이의 자료들 사이의 관계이다. 427년 사망했다고 정리되는 닌토쿠, 427~432년 재위했다고 정리되는 리추와 432~437년 재위했다고 보이는 한제이를 430년에 한 차례, 438년에 한 차례 사절을 파견한 왜5왕과 맞춰 보는 일이, 결코 단순히 한 명을 누락시키는 정도로 정리될 정도로 만만치 않다. 이 가설에 따르면 430년에 사절을 파견한 왕은 427년에 사망한 닌토쿠=찬일 수는 없는데, 432년에야 즉위한 한제이=진일 수도 없다. 그렇다고 432년에 사망했다는 리추가 438년 사절을 보냈다는 진일 수도 없다. 굳이 짜맞춘다면 430년 왜왕은 일단 이름이 안 써 있으므로 찬도 진도 아닌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안도 있기는 한데, 왜5왕을 졸지에 왜6왕으로 만들겠다는 시도가 모두에게 설득력을 얻기 쉬울 리가... 때문에 이 문제는 왜5왕 비정 문제 중에서도 현재까지 굉장한 난제로 남아 있다.


[1] 『일본서기』 내에서 권 14 이후에는 5세기 전반 중국에서 사용된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이, 권 13까지는 7세기 후반 중국에서 만들어진 인덕력(麟德曆)을 신라를 거쳐 수입했거나 신라에서 다소 개량해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의봉력(儀鳳曆)이 쓰였다(오가와 기요히코(小川淸彦), 1946, 「日本書紀の暦日に就いて」). 다시 말해 연대가 더 빠른 시대에 연대가 더 느린 역법이 쓰인 것으로, 때문에 그 이전 시대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더 뒷시대에 자료를 정리한 내용을 근본으로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점인 권 14가 바로 유랴쿠 천황(재위 456?~479?)기이다. 때문에 이 무렵부터 『만엽집』이 유랴쿠 천황 대의 노래로 시작하는 것 또한 그러한 '획기적인' 기점으로서 유랴쿠 천황 시대의 중요성을 감지하게 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왔다(모리 히로미치, 심경호 옮김, 2006(원서 1999),『일본서기의 비밀』, 황소자리, 259쪽 참고). 물론 후술하듯이 이 유랴쿠 천황의 연대부터 『고사기』와 차이가 있어 전승이 안정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있다고 말해질 뿐 이 덴노의 치세라는 요소가 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나마 『일본서기』의 연대를 수십 년은 수정해야 하는 전대에 비해 유랴쿠 덴노 전후가 되면 그래도 많아야 10년 정도 수정하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성이 높아진다는 딱 그 정도.[2] 유랴쿠 덴노부터 『고사기』-『일본서기』 사이의 연대가 맞지 않는 점과 5세기 후반 왕권이 쇠퇴한 이후 혼란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세이네이 덴노~게이타이 덴노 즉위 전후의 시기, 안칸 덴노-센카 덴노-긴메이 덴노로 이어지는 시기 2개 조정 병립설까지 나오게 한 기록의 혼란 등.[3] 다만 『고사기』는 이 시대에 구체적인 사건의 연대는 거의 쓰지 않고 띄엄띄엄 간지로 덴노가 사망한 연대만을 기록했으며, 이주갑인상된 시기에 간지로 표기된 연대 사이에도 한 눈에 봐도 심각하게 앞뒤가 뒤바뀐 사례는 없었기에 이주갑인상의 문제는 거의 피해갔다. 문제는 덴노의 사망 연대가 『일본서기』 및 왜5왕의 추정 연대와 맞지 않는다는 것.[4] 『삼국사기』에서는 나물(奈勿) 대에 마립간호가 나타나지 않으나 『삼국유사』는 마립간으로 썼으므로, 광개토왕릉비의 '매금'은 일반적으로 마립간으로 지목된다.[5] 최근 역사언어학 동호인계를 중심으로 실성(實聖)일성(逸聖)과 통한다든지, 실성이 (단순히 오자가 아니라) 실제로 보성(寶聖)이었다든지, 『삼국유사』 왕력에 나타나는 실성(實聖)의 이표기인 보금(寶金)의 금(金)이 '쇠'를 나타내는 것으로 '파사'의 '사(沙)'와 통한다든지 하여 이를 짜맞춰 보려 하는 견해가 제기된 듯하나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문제가 많다. 일성 이사금은 파사의 다다음 대로 연대 차이가 절대 적지 않으므로 일단 두 설부터 싸워야 할 판이며, 음차와 훈차를 임의로 오가며 둘을 교차시키는 것이나 『삼국유사』 본문보다도 늦은 14세기에 쓰였다고 추정되는 왕력에만 보이는 이표기를 다른 근거 없이 고대의 것으로 환원시키는 등, 그 동안 거의 사용되지 않은 방법론을 겹겹이 쌓는 것은 '학계'의 일반적 동향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왕명의 음가가 비슷하다고 하여 『삼국사기』에서 확연하게 연대가 떨어진 두 인물을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는 일제강점기에 신라의 '건국'을 늦추어 보면서 그 이전 시대 역사를 전설적인 것으로 폄하해 보는 차원에서 제시된 바 있어(前間恭作, 1925,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きて」, 『東洋學報』 15-2, 東洋文庫), 학계의 지지를 얻는 데는 많은 시일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흘해 이사금과 관련해 유명한 모순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듯 석우로의 활동 연대를 내려봐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석우로의 활동 연대를 조정해 보는 설 또한 4세기 전중엽으로 내려보는 설과 4세기 후반으로 내려보는 설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4세기 전중엽설의 경우 미사흔은 결국 가설에서 버려야 하며, 미사흔과 그나마 짜맞춰 볼 여지가 있는 4세기 후반설의 지지자는 사실상 이중 왕계설의 제창자인 선석열이 유일하고 학계에서 지지자가 늘어난다고 보기도 어려운 추세이다. 더욱이 선석열은 『일본서기』의 이 부분에 대해 특별한 연구를 내놓은 바 없고 선석열설에서조차 미사흔 파견 이전에 석우로는 사망한 것으로 정리되므로, 상기한 내용을 '학계'의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학자 지지자를 찾기 더욱 힘들 것이다.
[6] 여기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에 보이는 간기(干岐)는 신라 계통 금석문에서는 대체로 간지(干支)로 나타나던 표현인데, 명활산성비(551)까지는 '간지' 형태의 표현이 유지되나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부터 '지(支)'가 떨어져 나가며 '간(干)'으로 간소화되어 쓰이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라는 표현이 실려 있었던 자료는 적어도 6세기 중반 이전의 당대성을 지닌 자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런 원전 자료가 자체적으로는 확고한 연대관을 갖는 자료로 인용되지 못해 다른 자료와 뒤섞였을 정도로 엉망으로 정리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나마도 자료로 정리되기 이전 부분적으로나마 당대성을 지녔을 원전 전승이 기록 문화의 미비로 인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채로 천황제 국가의 이념적 서적인 『일본서기』에 편입되면서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서사의 일부분이 되었음은, '이주갑인상'이라는 화두를 떠나 순수하게 자료적 측면에서 당대 자료가 귀하디 귀한 한국 고대사학계에 굉장히 아쉬운 일이다.[7] 김후련, 2006, 「일본신화에 있어서의 타계의 형성과정」, 『타계관을 통해서 본 고대일본의 종교사상』, 제이앤씨를 참고.[8] 구체적으로는 『수서』에 의하면 "문자를 쓰지 않으며 나무에 새기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는데,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고 하는데, 사실 백제로부터 불교가 공인되고 공공연히 불경을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580년대 이후의 일이어서 실제보다는 늦은 서술이다. 무령왕 대 이후 백제의 박사 파견 등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며, 왕진이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 내에서 자체적인 문한 집단이 형성되는 데 동력이 된 요소로서도 불교보다는 실용적 수요가 앞섰다고 헤아려진다. 더욱이 이 무렵 왜국의 사절 파견을 중개한 백제는 앞서 중국에서 통역을 터 준 신라에 대해서도 율령을 반포하는 520년대까지 문자 없는 사회라고 전달해 그것이 중국 문헌에 그대로 기록되어 버리게 만들었던 바 있기에 중국의 외국전은 어느 정도 걸러 읽을 필요가 있다.[9] 현재 일부분만이 각종의 서적에 인용되어 전하는 『상궁기(上宮記)』라는 문헌이 있는데, 7세기 일본 궁정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계보를 저술한 문헌이다. 문제는 이 계보가 『고사기』·『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일부 해석에 따라서는 오진 덴노에 대한 계보도 후대에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본서기』와 일치하는 부분도 적지만은 않으며 애초에 5세기 후반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나리야마 철검에서 7대에 이르는 장황한 계보 의식이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확인되기에 대략적인 왕계보나 선대 의식이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겠으나, 일본 열도에서 7세기까지도 그런 계보 의식이 불완전하거나 미완성된 상태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10] 『일본서기』 편찬 시점(681~720)보다 늦으나, 이후 이 고구려에 대한 시각은 공식적으로 727년에 일본과 접촉한 발해에 대한 시각에 그대로 반영된다.[11] 후술하겠지만, 이처럼 『일본서기』 특유의 입장을 배제하고 읽어낼 수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 또한 하나하나 따졌을 때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예 사건의 실존 여부를 부정하는 정도까지 굉장히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일이 언급하지 않고 최소한에 대해서만 언급해 둔다.[12] 야마오 유키히사, 1989, 『古代の日韓關係』, 塙書房;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구마가이 키미오(熊谷公男), 2006, 「5世紀 倭·百濟關係와 羅濟同盟」, 『백제연구』 44,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등.[13] 이에 대해 비유왕이 신라와 연합을 꾀하고 친선을 도모하였기 때문에(나제동맹) 일본 열도 내 국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이 때문에 비유왕에 대한 기록이 비워지게 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후술하듯 구이신왕의 연대나 『백제신찬』에 보이는 오류를 고려하면 원전인 『백제기』에서부터 뭔가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14] 이재석, 2001, 「『日本書記 』속의 百濟 王曆 小考 -『百濟新撰』의『己巳年蓋鹵王立』기사에 대한 一解釋 -」, 『일본학』 20,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15] 『일본서기』와는 관계 없기는 하나, 구이신왕은 『송서』에서는 반대로 424년에도 전지왕에게 조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해외에서의 존재 서술이 굉장히 기묘한 왕이다.[16] 연대가 비교적 확실한 것으로 신안 배널리, 해남 외도, 고흥 길두리 안동·야막 고분 등에서 5세기 초~중엽으로 비정되는 유물이 출토된 것을 들 수 있다. 다만 고분의 축조는 이보다 다소 늦은 5세기 후엽으로 추정된다. 임영진, 2017, 「전남 해안도서지역의 倭系 고분과 倭 5왕의 중국 견사」, 『백제문화』 56,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참고.[17] 이 '방소국' 목록은 일단 표현 자체가 백제에 종속 내지 복속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뿐더러, 목록에 신라로 추정되는 '사라(斯羅)'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설령 그렇게 읽도록 유도되었다고 보더라도 그것은 실제 사실보다 더 강하게 백제의 의도가 투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18] 연민수, 2003, 「'任那日本府' 再論」, 『古代韓日交流史』, 혜안 참고.[19] 홍성화, 2009,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一考察」, 『韓日關係史硏究』 34, 한일관계사학회 및 조경철, 2009, 「백제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재론 -丙午正陽을 중심으로-」, 『百濟文化』 42,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20] 이근우, 2006, 「왕인의 『천자문』·『논어』 일본전수설 재검토」, 『역사비평』 69, 역사비평사. 같은 논문에서 아직기 계통의 야마토노 아야 씨 또한 실질적인 시조는 츠카노 오미(都加使主)로 이 인물은 5세기 중반의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이 츠카(東漢直鞠)와 같은 인물이라고 하여, 아직기는 그 연대를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처음 시작된 시기로 끌어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21] 『송서』 왜국전에 '왜찬(倭贊)'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송서』 문제기 원가 28년조에 '왜왕 왜제(倭濟)'라는 표현이 보이며, 왜국에서 송 황제에게 중국식 관직을 공인해 줄 것을 요청한 대상으로 '왜수(倭隋)'가 보인다. 익히 알려져 있듯, 전근대의 성씨는 적지 않은 경우에 동일한 부계 집단의 표현이다.[22] 다케다 유키오(武田行男), 1975, 「平西將軍倭隋の解釋 -五世紀の倭國政權にふれて-」, 『조선학보(朝鮮學報)』 77, 조선학회(朝鮮學會).[23] 『송서』 왜국전에 따르면 왜왕 무는 자국이 동방·북방·서방에 대해 다양한 정복 활동을 벌였음을 강조했는데, 물론 이 내용에는 과장된 주장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무는 이 영토의 확장이 문자 그대로는 '조부와 아버지', 관용적으로는 '선조'를 뜻하는 '조녜(祖禰)' 때부터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라면 왜국의 강역은 5세기 후반보다 더 이전, 표현으로 보아 적어도 5세기 전중반까지 올라갈 수 있는 시대부터 이어진 정복 활동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되어 더 소급될 여지까지 있다.[24] 한국에서는 왜5왕의 비합리적인 주장 등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이런 비주류설을 조금 더 편 들어주는 경향이 있었지만, 사실 이 관점도 접근하기에 따라 굉장한 난점을 안을 수 있다. 만일 5세기 초반까지 백제와 신라가 교섭하던 왜국이 규슈에 한정되었고 그 때까지는 기나이 야마토 정권이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면, 백제와 신라는 전지와 미사흔을 질(質)로 규슈의 왜국에 보낸 셈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양국이 대등 외교를 펼쳤다고 하더라도, 그 규슈와 기나이를 모두 석권한, 늦어도 6세기 후반 이후의 통일된 왜국은 이미 규슈의 덩치만으로 대등한 외교를 진행한 백제와 신라에 비해 훨씬 무게감이 큰 나라가 되어버린다. 삼국시대 국가 정립 이후 한반도와 일본 열도 교류에 대해 가장 이른 시기의 중요한 증거 중 하나인 칠지도가 기나이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모셔지고 있는 점 또한 난점이 된다.[25] 이후 주로 사절을 파견하던 경로인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와 같이 나타나는 점, 교역품이 인삼 등 고구려와 관련된 물품인 점 등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포로라는 설과 고구려와 동반했다는 설, 고구려와는 별개로 파견했다는 설이 크게 갈려 있으며, 조공한 왕조가 동진으로 다르다는 점까지 더해 일단 왜5왕과는 따로 논하는 경향이 강하다.[26] 아래 원가(元嘉) 2년(425)에 찬이 사절을 '또' 보내었다고 되어 있어 이때 찬(贊)이 사절을 보냈음이 거의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