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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9 12:15:23

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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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성후(定陵成侯)
종요 | 鍾繇
파일:종요.jpg
작위 정릉후(定陵侯)
출생 151년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망 230년 (향년 79세)
시호(成)
최종직위 태부(太傅)
성씨(鍾)
(繇)
원상(元常)
증조부 종호(鍾皓)
아내 장창포(張昌蒲)
재임 조위의 태위
223년 8월 11일~226년 12월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원상(元常)으로 예주 영천군 장사현 출생.

영천에서 유명한 명사인 종호[1]의 증손자. 동생은 종연, 아들은 종육, 종회[2]. 아내는 장창포. 외조카는 곽원. 본래 후한에서 상서복야(尙書僕射)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후에 조조와 제휴해 후한의 정권을 장악하여 조씨 정권 성립 후에는 2대(조조, 조비)를 섬겼으며, 220년 위나라 건국 후에는 2대(조비, 조예)를 섬겼다. 조조보다 4살이나 많았으며 조조의 초창기 기반이 된 이른바 영천 호족의 일원으로서 순욱, 순유, 진군, 곽가, 두습 등의 쟁쟁한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영천 출신이고 순욱과 곽가, 진군 등 모사들과 비교되어 책사나 명사(名士)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편이나, 실제로는 조조의 서북 평정 이전까지 마등 등의 서량 군벌로부터 관중(關中)과 장안을 굳건히 지킨 잔뼈가 굵은 군사령관이었다.

2. 정사 삼국지

어린 시절에 낙양에 갔다가 관상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후에 크게 될 인물이지만 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근데 그런 말을 한지 10리도 못 가서 진짜로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 종요와 같이 있던 그의 재당숙 종유는 '이놈 진짜 크게 되겠는데?' 하고 생각하고 그의 공부 비용이나 생활비를 전부 대주어 학문에 힘을 쓰도록 하였다.

후에 종요는 음수(陰脩)에게 천거받아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각곽사가 한참 분탕질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조조가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자 뜬금없이 배알이 꼴린 이 두 명이 조조의 사자를 잡아서 가둘 생각을 했다. 이때 종요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해서 말리게 되었다. 종요는 그들을 설득함으로써 조조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게끔 했고 조조는 순욱에게 종요의 칭찬을 여러번 들은데다 이런 일이 생기자, 종요를 상당히 좋아하게 되었다. 이각, 곽사의 분탕질은 갈수록 절정에 다다르고, 황제 일행은 궁궐을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 종요였다.[3]

조조가 황제를 모시게 되고, 이번에는 마등한수가 으르렁 대면서 싸우자 조조는 그 불똥이 튈까 염려하였는데 이를 순욱에게 상담하자 순욱은 종요를 추천하였다. 이에 199년 12월, 종요를 사예교위(司隸校尉) 지절(持節)로 삼고 관중의 군벌들을 다스리도록 했다.[4] 종요는 장안으로 가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를 보내 싸우는 걸 말린다. 종요는 그들을 잘 구슬려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들을 중앙에 들여보내 벼슬살이를 하도록 설득한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인질을 보내도록 한 셈이다.

그 후 조조는 원소와 대치하며 관도대전을 벌이게 되는데, 종요는 말을 2천필이나 조조에게 지원해준다. 그러자 조조는 소하에 비견하여 상황이 아주 급할 때에 맞추어 말을 보내 주어서 대단히 고맙다. 관중의 오른쪽이 평정되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걱정거리가 없어진것은 그대의 공으로 지난날 소하는 관중을 지키면서 한고조 유방에게 군량미와 군사를 충분히 공급해 준 바 있는데 그대 또한 마찬가지라며 종요를 높이 칭찬하였다.[5] 남흉노선우 호주천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걸 진압하던 중, 원상이 임명한 종요의 외조카(!) 곽원이 하동으로 오자 그 세력이 몹시 강해졌다. 모두 하동을 버리고 달아나자고 말하는 중 오직 종요만이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이 곽원을, 장기마등을 설득해 마초가 군사를 끌고 와 전부 때려 부수었다. 자세한 내용은 곽원 문서로. 그 후 위고, 장성, 장염 등의 반란을 진압하던 종요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진 낙양 주변으로 여러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개발하여 폐허가 된 낙양일대를 재건한다. 조조가 관중정벌에 나설 때 가장 큰 힘이 된 게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종요는 대리(大理)에 임명되었다가 상국에 이른다. 그러다가 위풍의 반란이 발생하고 위풍을 추천했던 종요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집에서 놀게 된다. 이후 220년 조비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에는 정위(廷尉)가 되었다.[6] 이후 가후가 사망하자 태위에 올랐다. 종요가 태위에 오르면서 '태위 종요/사공 화흠/사도 왕랑' 이라는, 조비~조예 즉위 초를 상징하는 삼공라인이 완성된다. 조비가 어찌나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이들의 뒤를 이을만한 인물들이 나오기 힘들 거라고 찬탄했을 정도였으며 조비는 종요를 일컬어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가후 사망 이전에 대사마인 조인이 죽어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가후 때와는 달리 지휘권은 쪼개지지 않고 온전히 손에 들어왔을 테지만, 이 시기에는 별로 중요한 군사적 움직임이 없었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시작되는데, 이에 앞서 226년 12월 군부가 재편되니 종요가 태위로서 활약한 모습은 볼 수 없다.

조예 때에 이르러도 종요는 황제를 보필했는데, 황제의 스승에 해당하는 최고 명예직인 태부(太傅)가 된다. 그런데 종요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병에 걸려 건강이 좋지 않았고 나이가 많아 일어나기가 힘든지라 화흠과 더불어 수레를 타고 조회에 참가하는 게 허락되었다. 요화, 여대, 내민 등과 더불어 삼국시대에 장수한 인물 중에 하나다.

3. 삼국지연의

장안을 지키면서 서량 군벌들의 다툼을 조정하거나 곽원을 격파한 일, 혹은 이후에 문관으로서 뛰어난 면들이 거의 다 삭제되고, 마초가 장안을 공격할 때 가공동생인 종진이 전사하고 장안성을 통째로 빼앗기는 역할로만 나온다. 대표적인 연의의 피해자.

다만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하후무조진이 연달아 패배하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실각 상태에 있던 사마의를 천거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가 촉군을 막아내긴 했지만 훗날에 권력을 찬탈했고, 종요의 아들인 종회가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좀 미묘하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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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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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鍾皓, 생몰년도는 87 ~ 155년으로 자는 계명(季明). 임려의 장에 제수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며, 같은 영천 출신인 순숙(荀淑), 한소(韓韶), 진식(陳寔)도 유명했다.[2] 종요는 75세에 종회를 본 것으로도 유명하나 종육과 종회의 자를 볼때 종육은 종요의 3남, 종회는 종요의 4남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 보아 종요는 기록에 남지 않은 장남과 차남이 있었으며, 이들은 종회 입장에서 30살에서 50살 이상 차이나는 형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종육도 종회보다 최소 10살 이상 연상이다.[3] 원굉의 《후한기》에 기록된 호송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진 명단은 위장군 동승, 보국장군 복완, 시중 정충丁沖, 충집, 상서복야 종요, 상서 정부郭溥, 어사중승 동분董芬, 팽성상 유애劉艾, 빙익馮翊 (태수) 한빈韓斌, 동군태수 양중楊衆, 의랑 나소羅邵, 복덕伏德, 조유趙蕤 다. 이각에 잡혀 죽은 사성교위 저준沮儁은 추증하여 홍농태수로 삼았고 의랑議郞 후기侯祈, 상서尙書 풍석馮碩, 시중侍中 대숭臺崇을 꾸짖어 벌을 내렸다.[4] 《후한기》29권:十二月甲辰, 司隸校尉鐘繇持節鎮撫關中。12월 갑진일, 사예교위 종요에게 절을 지니고 관중을 진무(鎮撫)하게 했다.[5] 배송지는 <종요전>에서는 분명 종요가 말 2천필을 조조에게 보내줬다고 하는데 <무제기>에는 문추랑 싸울때 조조가 보유한게 6백필이라고 하니 종요가 보내준 2000필의 말 어디로 갔냐고 기록의 과장성을 비판했지만 문추와의 전투는 관도대전의 서전격 전투였고 종요가 말을 보내준 것은 조조와 원소가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보낸것이니 문추 전사 이후 종요가 말을 보냈다고 하면 모순없이 해결된다.[6] 중 2,000석의 고위직으로 요즘으로 치면 법무부 장관쯤 되는 자리다.[7] 내용은 특별한 게 없다. 일반적인 표문으로 남방의 손권을 견제하여 잘 대처해야 된다는 내용이다.[8] <삼국지 13>에서 등록무장으로 199년생 장창포를 생성하고 종요의 부인으로 지정하려고 하면 종요가 배우자 목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게임 시스템상 40세 이상 나이차가 나는 결혼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창포는 <삼국지 14>에서 정식으로 데뷔한다.[9] 삼국지 배주에 인용된 책.[10] 75세면 종요의 증조부 종호가 종요를 봤을 때의 나이보다 9살이나 많다. 종요 스스로도 기록에 안 남았을 뿐이지 종회를 보기 이전에 손자나 증손자를 이미 봤을 가능성도 작지 않다. 그 탓에 종회가 6살 때 종요는 세상을 떠나서 종회는 졸지에 아버지 없이 인생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