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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중국
태위는 3공(三公)의 하나로 고대 및 중세 중국에서 군사 부문을 담당한 재상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었으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1]삼공(三公)의 하나로 전한 시기에는 태위(太尉)[2], 후한 시기에는 사마라 칭해졌다. 사도, 사공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했다. 녹봉은 4,200석이었다가 후한 말기에 대사마(大司馬)로 명칭이 바뀌고 나서 10,000석으로 올랐고, 실질적인 승상 예우를 받았다. 시대가 변화하고 일반적인 관리들에게 최고 고위직을 경험하고 사도, 사공 등으로 임명, 추승되면 후대까지 명문가로 인정받는 명예가 지속되어 관리라면 모두 꿈꾸는 명예직 위치가 되었다.
태위로 유명한 인물로는 양수의 아버지 양표가 있으며, 이각이 황제를 겁박해 대사마의 자리를 얻었다. 가후, 만총과 사마의, 등애도 태위였다.
1.1.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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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당시 한나라 황제인 영제로부터 무려 1억 전[3]이나 주고 산 벼슬이다.[4] 물론 임관기간은 짧았지만.
가후·종요 등은 조위의 태위였다.
동탁이 황자 유협을 황제로 앉히고, 스스로 태위의 자리에 올랐었다.
- 양(梁)
- 소굉 - 양무제의 이복동생으로 2차에 걸쳐 7년을 역임했다. 그는 황족들의 으뜸이었기에 무제 소연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양나라에서 유일하게 삼공을 모두 역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굉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그가 재임하는 동안 백성들을 수탈하여 집에는 재물이 가득 쌓였으며, 심지어는 황녀 영흥공주(永興公主)과 사통까지 했으나 종실로서 죄를 참작하여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실상 후경이 대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초토화시키기 이전에 이미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이다. 소굉 본인은 후경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사망하여 그가 쌓은 실책은 그의 후손들이 처리하게 되었다.
- 원법승 - 북위(北魏)의 종실 탁발종규(拓跋鐘葵)의 아들로 본래 북위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연호를 선포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남쪽으로 망명했다. 양 무제 소연은 원법승을 후대하며 송왕(宋王)으로 책봉했고 4년에 걸쳐 태위를 역임했으나 후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양려'(襄厲)라 했다. 양나라의 태위 중 유일한 북위의 황족 출신으로 아들로는 원경륭(元景隆)과 원경중(元景仲)이 있었다.
- 곽원건(郭元建) - 태보(太保) 송자선(宋子仙)과 함께 후경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임명된 인물로 태사(太師) 왕극(王克)이나 태부(太傅) 원라(元羅)가 인망을 위해 임명된 것과는 다르게 후경이 반역하는데 일조한 인물로 추정된다. 정통 황제로 인정되지 않는 후경이 임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양서에 따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으며, 간문제의 폐위를 주장할 때 왕위와 대립하며 폐위를 반대했다. 본래 후경은 곽원건의 의견에 따르려 했으나 왕위가 결사반대하며 폐립을 주장하자 결국 본인의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태위 곽원건의 사상과 동시에 신하들에게 이끌려다니는 후경의 우유부단함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 북송
- 홍신(洪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