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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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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대사마
제67대 후한의 태위
劉虞
유우
작위 양비후(襄賁侯)[1]
최종직위 대사마(大司馬)
성씨 (劉)
(虞)
백안(伯安)
조부 유가(劉嘉)
생몰연도 ?년 ~ 193년
고향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사망지 유주(幽州) 광양군(廣陽郡) 계현(薊縣) 저잣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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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하급관리→군리(郡吏)→낭(郞)→유주자사(幽州刺史)→상서령(尙書令)·광록훈(光祿勳)→종정(宗正)→유주목(幽州牧)→태위(太尉)→대사마(大司馬) }}}}}}}}}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행적2.2. 원소에 의한 황제 추대2.3. 공손찬과의 대립과 죽음2.4. 사후
3. 삼국지연의4. 평가5. 후한서 유우전 번역본
5.1. 후한서 유우전 원문
6. 기타7.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기의 관료이자 황족 출신으로 는 백안(伯安). 서주 동해군 담현 출신이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행적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劉彊)[2]의 5대손이며[3] 할아버지 유가(劉嘉)는 광록훈을 지냈다. 아버지 유서(劉舒)와 유우는 이미 황제와 촌수가 멀었으므로 젊은 시절 현의 하급관리로 일했다. 하지만 유우는 청렴하고 학식이 빼어났으므로 군으로 불려와 군리가 되었고 군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효렴으로 천거되며 낭이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승진을 거듭한 끝에 유주자사에 이르렀는데 민정에 능하고 온후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명성과 지위에 의지해 자신을 높이지 않고 항상 겸손하며 검약한 태도를 지켰으므로 영내의 백성들은 물론 국경 밖의 여러 이민족들에게도 큰 신뢰를 얻었다. 이후 임기가 지나자 조정에서는 유우를 중앙으로 불러 상서령, 광록훈으로 거듭 임명했고, 황실의 종친으로서 예를 갖추었다고 하여 종정으로 바꿔 임명했다.

2.2. 원소에 의한 황제 추대

정사 삼국지에서는 검소하고 인의가 있어 그 덕으로 백성들과 이민족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다. 후한서에는 당초, 유우가 해를 입은 다음 공손찬이 수색했더니 처첩들이 곱고 얇은 비단과 화려한 장신구 등을 꾸며 당시 사람들이 의심했다고 하는데 유종진은 수색하다(搜)라는 글자를 굳이 집어넣어 범엽이 공손찬의 간계를 드러내고자 했다면서 만약 유우가 그전부터 사치했다면 주변에서 알리는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그제서야 밝혀질리는 없고 미리 공손찬이 사치품을 숨겨서 수색하게 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서도 영웅기와 사승 후한서에도 유우가 사치했다는 얘기는 없어서 범엽도 '당초'를 붙여 뒤로 빼놓은 것 같다고 했다.

공손찬의 상관이었는데, 공손찬은 하북에서 이민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세를 길렀기에 공손찬과는 자주 충돌했다. 황실의 종친으로서 헌제를 보호하려 시도한 적도 있지만 이 역시 공손찬과 원술 등의 모략으로 수포로 돌아갔고, 이 일 이후로 둘의 갈등은 심각한 지경으로 치달았다.

이때쯤 원소가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동탁이 천자를 끼게 된 것에 대항해 그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유우는 이 제안을 스스로 거절했는데,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유우가 스스로 대립황제 노릇을 사절했다는 사실은 그가 정통성과 인망, 그리고 충성 등 여러 면에서 흠잡을 곳 없는 인물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3. 공손찬과의 대립과 죽음

하북에서 원소가 우위를 점하게 된 이후에도 공손찬이 악행을 멈추지 않자 유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을 일으켰는데, 후한서 유우전에 따르면 처음에는 우북평 사람 위유가 공손찬 토벌에 대해 반대하자 그만두고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위유 사후 결국 군을 일으켰으나 종사 중 한 사람인 공손기는 공손찬에게 이탈해 유우의 거병을 알렸고, 이번엔 관리 정서가 출정하는 유우를 말리며 공손찬을 토벌하는 것을 반대하자 유우는 그를 참형에 처한데 이어 조리돌림을 했다. 직후 유우는 "공손찬 이외의 다른 피는 흘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4] 이러한 그에게 호응해 10만 여의 군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병력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유우는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동정심과 지휘 능력의 부재로 몇차례나 기회를 놓치고 끝내 패배하였다. 그 이후 유우는 일가족과 함께 사로잡혀 공손찬에게 저잣거리에서 참수당한다.

유우를 처형할 때 공손찬은 그를 저잣거리에 세워놓고 그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가 안 오자 그를 처형했다. 유우를 죽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듯 하기도 하고, 공손찬의 잔인한 성격상 죽음을 앞에 둔 유우를 조롱하려고 한 말일 수도 있다.[5] 관료나 학자 대신 상인이나 점쟁이를 중용했던 공손찬의 성격으로 보면, 자기 딴에는 천자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 내심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2.4. 사후

그러나 유우의 목을 벤 공손찬은 명실상부한 하북의 위험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실제로 선우보(鮮于輔), 선우은(鮮于銀), 제주(齊周) 등 유우의 휘하 관리들이 공손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염유(閻柔)를 오환사마로 추대, 오환족과 연합하고 원소와 손을 잡았으며, 원소는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6]를 대장으로 내세워 선전공작에 이용해 공손찬은 민심을 잃고 비참하게 패망하였다.

원래 공손찬은 유우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는데[7] 백성들은 유우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며, 손근(孫瑾), 장일(張逸), 장찬(張瓚) 등 몇몇 관리들은 일부러 공손찬을 비난하고 자진해서 죽임을 당했다. 유우의 휘하 관리였던 미돈은 공손찬의 사자에게서 유우의 머리를 빼앗고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유우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일족 중 한 명인, 다름아닌 유비가 결국 공손찬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다. 훗날 공손찬과는 비교도 안되는 거물이 된 유비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이는 공손찬이 결국 원소에게 참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8]

3. 삼국지연의

장거, 장순 형제가 하북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유주자사로서 계성에 군영을 설치하고 있을 때, 말단공무원 노릇하다가 독우를 때리고 벼슬을 내던진 후 대주태수 유회 밑에 숨어있던 유비 삼형제가 임관을 청할 때 받아주는 역으로 나오고 마는 엑스트라.

4. 평가

후한말 삼국시대 초반부 인지도를 높인 유력인사로써 공손찬에게 밀릴 때의 모습을 보면 삼국지버전 송양공으로 볼 수도 있다. 유우는 시대가 그렇게 흐르다 보니 군웅의 입지가 된 것이지 실제로는 난세의 간웅이라기보다는 치세의 능신이 더 적합했다 할 수 있는 인물이다.[9]

반면 유우를 정치 모략꾼인 것처럼 생각하며 공손찬이 그러한 정치모략에 전전긍긍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유우가 동탁 정권에 완벽하게 선을 긋지 않고 벼슬은 다 받았기 때문에 뭔가 통념과는 다르며 유우의 그 태도와 공손찬의 태도는 동일하다는 것이 그 근거라지만, 그런 태도를 근거로 삼기는 이상하다. 아예 황제까지 자칭하면서 막 나간 원씨 계열 군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삼국지 시절 벼슬아치들이 동일한 태도를 취했다. 만약 그 태도를 근거로 유우와 공손찬의 동질설을 주장한다면 삼국지 시절 대부분의 세력은 동질하다. 그리고 사실 그 동질함은 그들의 권위가 어떻게 되던 후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유우와 공손찬에게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동탁이 유우에게 벼슬을 줬다"곤 하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이 거머쥔 동탁이 황실을 조종해 내렸다는 의미이지 엄밀히 따지면 황명으로 벼슬이 내려지는 것이다. 즉, 순수하게 명목상이기 하지만 어쨌거나 유우에게 벼슬을 주는 주체는 황제다. 이에 반발하면 황제가 내리는 벼슬을 거부하는 꼴이니 그러기도 힘들다.[10]

이와 비슷하게 공손찬과 유우를 완전히 별개의 세력으로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말장난이다. 후한의 유주자사 유우는 공손찬의 상관이니까 당연히 두 사람은 소속이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우의 아들이 타세력에 납치되도록 꾸민 주모자가 공손찬인데, 남의 아들을 이렇게 다루는 사람과 그 아들이 납치당한 사람을 동일한 세력으로 보기란 정말로 쉽지가 않다. 그것 말고도 유우에 대한 공손찬의 폭거는 여럿 있다.

유우가 공손찬과 마침내 결별하는 것에서 지나치게 도덕적인 면모만을 발견 혹은 강조하려 하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유우가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면모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우 역시 현실 정치가이고 비록 군무는 잘 다루지 못했지만 이민족 교역과 안정까지 비롯해서 내치를 확실하게 해냈다. 그런 사람이 어느 정도 현실 정치에서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한다던가, 이민족도 아니고 명목상으로는 자기 부하이자 유능한 무관인 공손찬을 끝까지 포용하려 했던 것이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또한 이 과정에서 공손찬을 유우의 정치모략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처럼 묘사하는데, 공손찬의 행적에서 유우를 두려워하는 기색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어쨌든 간에 당시 후한말의 유력 인사로 이름을 날렸던 유우를 살해함으로 인해 공손찬은 덕망을 크게 잃었다. 당장 유비와 조운이 공손찬의 곁을 떠난 것이 유우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11]

당세대의 군웅들 중에서는 현재 기준으로도 매우 뛰어난 통치를 하였던 만큼 유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안타깝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많을지언정 유우에 대한 안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편이다.[12] 팬덤에서 공손찬이 애증어린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정 반대의 상황.[13]

5. 후한서 유우전 번역본

이하의 내용은 범엽이 지은 후한서유우전 기록을 번역해 옮긴 것입니다.
기존 번역과 문체가 다릅니다만, 내용상에서 빠뜨리거나 상충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자는 백안이며 서주 동해군 담현 사람이다. 조부 유가는 광록훈을 지냈다.

처음에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각지의 관직을 연임하던 끝에 유주자사가 되었다.

백성들에게 어진 정책을 펴고 백성과 변방의 이민족마저 그 덕에 감동했다고 하며, 본래 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던 선비, 오환, 부여, 예맥등의 무리들마저 모두 (그를 따라) 조공을 바쳤다. 변방에서는 감히 소요를 일으키는 자가 없었고, 백성들은 그의 어진 통치를 기뻐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중평 초년 임기가 차 관직을 기주의 감릉상으로 옮겼는데, 그 당시 기주의 모든 군현은 황건적의 난으로 공격당해 격파되어 있었다. 이에 유우는 스스로 푸성귀 같은 거친 음식을 먹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아랫사람들을 다스리고 피폐해진 영지를 평안히 어루만졌다고 한다.

동탁의 정권 장악 후에는 동탁도 그의 인망을 알았기에 (숙청당한 원외 대신) 그를 태위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 무렵에는 혼란해진 도로 사정으로 인해 왕명이 닿지 않았다. 당초에 조서를 내려 공손찬으로 하여금 오환을 정벌하게 하고 그 상관으로 유우를 두었으나, 공손찬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치중해 그의 병사들을 방종하게 풀어두고 심하게 백성들을 약탈했다.

이에 반해 유우는 인애로 다스렸으며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백성들의 재물을 이롭게 했다.[14] 이때부터 유우는 공손찬과 급격히 대립하게 된다.

191년. 한복원소, 하북의 여러 제장들이 모여 유우를 천자로 세울 것을 논의한다. 그만큼 황족인 유우에게는 정통성과 명분, 또한 그 외에도 백성의 지지를 받을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혈통도 헌제와 13촌이면 그렇게 황통에서 먼 편도 아니고[15] 무엇보다 광무제의 후손인, 동한계 황족이였다. 후에 황제가 되는 유비가 서한계 황족이였던거에 비하면 우위인 셈.

원소 등은 낙랑태수 장기 등을 보내 유우에게 천자의 존호를 올렸지만, 유우는 그들을 만나자 정색하며 "힘을 합쳐 왕실에 마음을 다해야 하거늘 어찌 역모를 꾀하여 서로를 더럽히는가"라고 말하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오서에 따르면 한복이 원술에게 서신을 보내 지금 황제는 효영제의 자식이 아니니 강후 주발관영이 어린 임금을 주벌하여 폐립하고 대왕[16]을 맞아 옹립한 고사를 따르고자 한다 하며, 유우의 공덕, 치행[17]이 화하(華夏,중국)에서 견줄 이가 없고 지금 공실의 방계친척이니 그 누구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했다. 또한 말하기를, "옛날 광무제가 전한 때 정왕(定王, 유발劉發)의 5대 손으로 대사마로 하북을 거느리다 경감, 풍이가 존호에 오르도록 권하니 마침내 경시제를 대신하였습니다. 지금 유공[18] 자신이 공왕(恭王)의 지별(枝別)이고 그 대수가 또한 다섯이며[19] 대사마로써 유주목을 겸하니 이는 광무제와 같은 점입니다."라고 했다. 당시 네 별이 기미(箕尾) 자리에서 모이자 한복이 도참서를 칭탁하며 말하길 신인(神人)이 장차 연(燕) 땅의 분야에서 나타날 것이라 했다. 또한 제음(濟陰)의 남자 왕정(王定)이 옥인[20]을 얻었는데 그곳에 '우(虞)가 천자가 된다.'(虞爲天子)는 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여러 징조의 해석을 후세 학자들이 해석한 것이 삼국지집해에 남아 있는데 청나라의 하작은 네 개의 별이 기미 자리에서 모인 것은 소열제 유비가 탁군에서 일어난다는 징조이고 '우(虞)가 천자가 된다'는 것은 위(魏)나라가 우[21]의 후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일청은 당시 위나라가 순임금의 후예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의문[22]이 이렇게 말했다고 쓰며 장제전에 보인다고 했다.

즉, 하작의 해석에 의하면 두 가지 사건은 유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각각 유비와 조비가 황제가 될 조짐이라는 말이다. 뒤의 우위천자(虞爲天子)에서 우(虞)는 유우가 아니라 순임금의 후예, 즉 조비라는 말인데, 장제전에 의하면 위 명제 조예고당륭이 교사를 지내는 일에 관해 논하면서 조씨를 순임금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장제가 이를 반박하는데 결국 고당륭의 주장에 따라 위나라는 공식적으로 순임금의 후예임을 표방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후 한복 등이 다시 유우에게 영상서사가 되어 천자 대신 관직의 임명을 맡아주도록 청하였으나 거듭 들어주지 않았다.

유우는 또한 연(掾)인 우북평 사람 전주와 종사 선우은을 사잇길로 보내 장안에 알현케 했다. 이전부터 헌제는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전주 등을 보자 크게 기뻐했다.

이때 유우의 아들 유화가 황제의 시중에 있었으므로 유화를 몰래 보내 무관(武關)을 벗어나 알리고, 유우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도록 했는데, 남양에 이르렀을때 후장군 원술이 이를 듣고 유화를 붙잡고는 사신을 보내 유우에게 알리고 유우가 병사를 보내면 같이 서쪽으로 가 천자를 맞이하자고 했다. 이에 유우가 유화에게 수천의 기병을 보내주고 천자를 맞이하도록 했다.

그러나 원술은 이들을 파견하지 않았다.

본디 공손찬은 원술의 속임수를 알았으므로 유우가 군사를 보내는 것을 멈추게 했으나 유우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손찬이 은밀히 원술에게 권하여 유화를 억류하고 그의 기병을 빼앗도록 했다. 유우는 이로부터 공손찬과의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유화는 노력 끝에 원술에게서 달아나 북쪽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거듭 원소에게 잡혀 그의 영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공손찬은 이미 원소에게 여러차례 패배를 거듭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오히려 원소를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유우는 이렇듯 그가 군사의 강함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함을 재앙으로 여겼다. 또한 뜻을 얻어 그대로 본뜨지 못하게 하고(且慮得志不可複製),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의 녹봉을 줄였다.[23]

공손찬은 이에 대노하여 유우의 절도를 매번 무시하고, 또한 백성들을 거듭 침범하였다. 유우는 호이(=이민족)들을 위로하여 상을 내렸는데, 이 때마다 공손찬은 유우가 내린 상을 약탈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마침내 유우는 더 이상 이를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이에 사신을 보내 상주하여 공손찬의 포악함과 약탈행위에 대한 죄를 아뢰었다.

공손찬 또한 상주하여 유우가 자신의 녹봉을 줄였다고 아뢰었다. 두 상주의 내용이 교차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고 헐뜯었다.

이에 공손찬은 계성 앞에 나란히 성을 쌓기 시작했다.

유우는 여러 차례 공손찬과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공손찬은 언제나 병이 났다고 칭하며 유우의 청에 불응하였다. 유우는 이에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 그를 토벌하고자 했고, 이에 대해 우북평 사람인 동조연 위유와 상의하였다.

위유가 말하길, "지금 천하가 목을 빼어 공을 존경하며 따라 섬기고자 하니 모신과 조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공손찬의 문무와 재력(才力=능력)은 족히 믿을만하니 비록 작은 악(惡)이 있더라도 마땅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아야 합니다."

유우가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얼마 지나 위유가 죽었는데, 이제 유우의 분노는 오랫동안 쌓여왔으므로 더 이상 공손찬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초평 4년 겨울, 마침내 직접 모든 병사들을 인솔하여 주둔했는데 따르는 무리가 10만에 이르렀고 이로서 공손찬을 공격했다.

군대가 움직이려는데, 종사인 유주 대군 사람 정서(程緖)가 갑옷을 벗고 유우 앞에 나아가 말했다. "비록 공손찬에게 지난 악행이 있으나 그 죄명으로 인해 그를 치는 것이 능히 정당하진 않습니다. 명공은 먼저 효사(황실?)에 고하여 그 행동(공손찬의 잘못)을 고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런데도 군사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국가에 이롭지 못한 일입니다. 승패를 더하여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병사를 머무르게 함만 못하니, (병사를 머무르게 해) 그 위용으로서 임하십시오. 공손찬은 반드시 회개하여 자신의 과오를 사죄할 것입니다. 이것이 싸우지 않고 능히 사람을 복종케 하는 것입니다."

유우는 정서가 일을 막으려고 책잡는 것이라 여겨 마침내 그를 베어 사람들에게 보였다. 또한 군사들에게 당부하여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며 단지 백규(伯珪=공손찬) 한 사람만 죽여야 할 뿐이오."

이때 주의 종사 공손기란 자가 있었는데, 공손찬은 성이 같다는 이유로 그를 후대하였다. 공손기는 유우의 계책을 알게 되자 밤중에 공손찬에게 가서 이를 고했다.

공손찬은 이때 부곡들이 모두 흩어져 밖으로 나가 있었으므로, 미처 대처할 방법이 없어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성의 동쪽 벽을 파고 달아나고자 했으나, 유우의 병사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백성들을 사랑하는 유우가 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영을 내려 을 지르는 등의 소란행위를 금하여 급히 성을 애워싸지 못했다.

공손찬이 이를 보고 정예병 1백명을 뽑아 바람에 맞춰 불을 놓고 그대로 유우군을 향해 곧게 충돌했다. 유우가 마침내 대패하여 관속들과 함께 북으로 달아나 거용현으로 갔으나 공손찬이 이를 뒤쫓아 공격하여 3일만에 성을 함락시켰고 마침내 유우와 그 처를 나란히 사로잡아 계로 귀환했으나, 유우로 하여금 주의 문서를 관장하게 했다.

천자가 단훈을 사자로 보내 유우의 봉읍을 더하고 6주를 감독하게 했으며, 공손찬은 전장군으로 임명하고 역후(侯)에 봉했으며 가절을 내려 유주, 병주, 청주, 기주를 관할하게 했다. 이에 공손찬이 거짓으로 고하길, 유우가 이전에 원소 등과 더불어 존호를 칭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며 단훈을 협박해 유우를 계의 저자에서 죽였다.

그는 유우를 죽이기에 앞서 방자하게 말하길,

"유우가 천자로 내세워질 정도였다면 마땅히 하늘이 비바람으로써 그를 구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마침 이때는 가뭄이 불같이 성할 때였으므로 결국 유우는 참수당해 죽었다.

유우의 머리는 경사로 보내졌는데 유우를 따르던 관리들이 그 길을 뒤따라 유우의 머리를 빼앗고 장사지냈다. 유우는 두터운 은혜로서 무리를 얻었으며 북주를 두루 편안하게 다스렸으므로 백성들 중에는 통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5.1. 후한서 유우전 원문

劉虞字伯安,東海郯人也。祖父嘉,光祿勳。虞初舉孝廉,稍遷幽州刺史,民夷感其德化,自鮮卑、烏桓、夫余、穢貊之輩,皆隨時朝貢,無敢擾邊者,百姓歌悅之。公事去官。中平初,黃巾作亂,攻破冀州諸郡,拜虞甘陵相,綏撫荒余,以蔬儉率下。遷宗正。

注謝承書曰:「虞父舒,丹陽太守。虞通五經,東海*(王)*恭**之後。

後車騎將軍張溫討賊邊章等,發幽州烏桓三千突騎,而牢稟逋懸,皆畔還本國。

前中山相張純私謂前太山太守張舉曰:「今烏桓既畔,皆願為亂,涼州賊起,朝廷不能禁。又洛陽人妻生子兩頭,此漢祚衰盡,天下有兩主之征也。子若與吾共率烏桓之觿以起兵,庶幾可定大業。」舉因然之。四年,純等遂與烏桓大人共連盟,攻薊下,燔燒城郭,虜略百姓,殺護烏桓校尉箕稠、右北平太守劉政、遼東太守陽終等,觿至十余萬,屯肥如。舉稱「天子」,純稱「彌天將軍安定王」,移書州郡,雲舉當代漢,告天子避位,□公卿奉迎。純又使烏桓峭王等步騎五萬,入青冀二州,攻破清河、平原,殺害吏民。朝廷以虞威信素著,恩積北方,明年,復拜幽州牧。虞到薊,罷省屯兵,務廣恩信。遣使告峭王等以朝恩寬弘,開許善路。又設賞購舉、純。舉、純走出塞,余皆降散。純為其客王政所殺,送首詣虞。靈帝遣使者就拜太尉,封容丘侯。

注前書音義曰:「牢,賈直也。」稟,食也。言軍糧不續也。

注肥如,縣,屬遼西郡,故城在今平州。

注峭音七笑反。

注容丘,縣,屬東海郡。

及董卓秉政,遣使者授虞大司馬,進封襄賁侯。初平元年,復征代袁隗為太傅。

道路隔塞,王命竟不得達。舊幽部應接荒外,資費甚廣,歲常割青、冀賦調二億有余,以給足之。時處處斷絕,委輸不至,而虞務存寬政,勸督農植,開上谷胡巿之利,通漁陽鹽鐵之饒,民悅年登,谷石三十。青、徐士庶避黃巾之難歸虞者百餘萬口,皆收視溫恤,為安立生業,流民皆忘其遷徙。虞雖為上公,天性節約,敝衣繩履,食無兼肉,遠近豪俊夙僭奢者,莫不改操而歸心焉。

注夙猶舊也。

初,詔令公孫瓚討烏桓,受虞節度。瓚但務會徒觿以自強大,而縱任部曲,頗侵擾百姓,而虞為政仁愛,念利民物,由是與瓚漸不相平。二年,冀州刺史韓馥、勃海太守袁紹及山東諸將議,以朝廷幼沖,逼於董卓,遠隔關塞,不知存否,以虞宗室長者,欲立為主。乃遣故樂浪太守張岐等繼議,上虞尊號。

虞見岐等,厲色叱之曰:「今天下崩亂,主上蒙塵。吾被重恩,未能清雪國恥。諸君各據州郡,宜共曒力,盡心王室,而反造逆謀,以相垢誤邪!」

固拒之。馥等又請虞領尚書事,承製封拜,復不聽。遂收斬使人。於是選掾右北平田疇、從事鮮於銀蒙險閒行,奉使長安。獻帝既思東歸,見疇等大悅。

時虞子和為侍中,因此遣和潛從武關出,告虞將兵來迎。道由南陽,後將軍袁術聞其狀,遂質和,使報虞遣兵俱西。虞乃使數千騎就和奉迎天子,而術竟不遣之。

注時獻帝年十歲。

注左傳曰,周襄王出奔於鄭,魯臧文仲曰:「天子蒙塵於外。」

注說文曰:「曒力,並力也。」左傳曰:「曒力同心。」音力凋反,又音六。

注魏志曰:「疇字子春,右北平無終人。好讀書,善擊□。劉虞署為從事。

太祖北征烏桓,令疇將觿*(止)**上*徐無,出盧龍,歷平剛,登白狼堆。去柳城二百餘里,虜乃驚,太祖與戰,大斬獲,論功封疇。疇上疏自陳,太祖令夏侯惇喻之。疇曰:『豈可賣盧龍塞以易賞祿哉?』」初,公孫瓚知術詐,固止虞遣兵,虞不從,瓚乃陰勸術執和,使奪其兵,自是與瓚仇怨益深。和尋得逃術還北,復為袁紹所留。瓚既累為紹所敗,而猶攻之不已,虞患其黷武,且慮得志不可複製,固不許行,而稍節其稟假。瓚怒,屢違節度,又復侵犯百姓。虞所賚賞典當胡夷,瓚數抄奪之。積不能禁,乃遣驛使奉章陳其暴掠之罪,瓚亦上虞稟糧不周,二奏交馳,互相非毀,朝廷依違而已。瓚乃築京於薊城以備虞。虞數請瓚,輒稱病不應。虞乃密謀討之,以告東曹掾右北平魏攸。攸曰:「今天下引領,以公為歸,謀臣爪牙,不可無也。瓚文武才力足恃,雖有小惡,固宜容忍。」虞乃止。

注黷猶慢也,數也。尚書曰「黷於祭祀」也。

注當音丁浪反。

注京,高丘也,言高築丘壘以備虞焉。解見獻帝紀。

頃之攸卒,而積忿不已。四年冬,遂自率諸屯兵觿合十萬人以攻瓚。將行,從事代郡程緒免冑而前曰:「公孫瓚雖有過惡,而罪名未正。明公不先告曉使得改行,而兵起蕭牆,非國之利。加勝敗難保,不如駐兵,以武臨之,瓚必悔禍謝罪,所謂不戰而服人者也。」虞以緒臨事沮議,遂斬之以徇。戒軍士曰:「無傷餘人,殺一伯珪而已。」時州從事公孫紀者,瓚以同姓厚待遇之。紀知虞謀而夜告瓚。瓚時部曲放散在外,倉卒自懼不免,乃掘東城欲走。虞兵不習戰,又愛人廬舍,□不聽焚燒,急攻圍不下。瓚乃簡募銳士數百人,因風縱火,直衝突之。虞遂大敗,與官屬北奔居庸縣。瓚追攻之,三日城陷,遂執虞並妻子還薊,猶使領州文書。會天子遣使者段訓增虞封邑,督六州事;拜瓚前將軍,封易侯,假節督幽、並、*(司)**青*、冀。瓚乃誣虞前與袁紹等欲稱尊號,脅訓斬虞於薊市。先坐而□曰:「若虞應為天子者,天當風雨以相救。」時旱埶炎盛,遂斬焉。傳首京師,故吏尾敦於路劫虞首歸葬之。

瓚乃上訓為幽州刺史。虞以恩厚得觿,懷被北州,百姓流舊,莫不痛惜焉。

注居庸縣屬上谷郡,有關。

注尾敦,姓名。

初,虞以儉素為操,冠敝不改,乃就補其穿。及遇害,瓚兵搜其內,而妻妾服羅紈,盛綺飾,時人以此疑之。和後從袁紹報瓚雲。

6. 기타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보면 정조가 유우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다.(홍재전서 113권 경사강의). 자치통감강목으로 신하들과 토론하는 부분인데 후한 파트에 이르자 유우가 등장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정조
한 고조(漢高祖)가 한 나라를 일으킨 근본 원인은 너그러움 때문이었고, 항우(項羽)가 패하게 된 근본 원인은 포악함 때문이었다. 유우(劉虞)가 공손찬(公孫瓚)을 칠 때에 백성들의 집도 아껴서 불태우지 못하도록 하였고 군사들에게 남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그의 마음은 흥기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공손찬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그렇다면 유방(劉邦)과 항우의 흥패도 너그러움이나 포악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인가?
유학 이영건(李永健)
너그러운 자가 패하게 된 것은 너그러움을 잘 사용하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지 너그러움 자체의 잘못은 아닙니다. 가령 유우가 공손찬을 공격하는 데 서두르지 않으면서 인의(仁義)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너그러움과 간소함으로 대중들을 통솔하였다면 간단하게 공손찬의 날랜 병사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패배를 자초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유우의 너그러움은 송 양공(宋襄公)의 인자함에 불과하니, 한 고조의 너그러움과는 같이 논할 수가 없습니다.

즉 이영건이 내린 해석은, 군주는 너그럽기만 해서는 안되고 그 너그러움을 잘 이용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7. 미디어 믹스

7.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유우(삼국지 시리즈) 문서로.

7.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파일:external/static.inven.co.kr/image_yuwu0.png

연의 비중은 거의 없다. 섬멸전에서 저코 군주로 가끔 기용되는 정도.

7.3. 토탈 워: 삼국

고유 배경이 있는 클론 무장으로 등장하며, 마이너 세력인 유우 세력의 군주로 등장한다. 배경은 성공한 상인(전문성+10, 책략+15, 권위+5, 파견 임무 잉여 자원 시장, 교역 영향력 +15%(상국 이상), 교역 협정 +1(상국 이상)). 직위가 공으로 올라가면 대(代) 공국, 삼대 세력으로 남게되면 대나라(代)로 국명이 변경된다. 유우는 한나라 황족인데

군웅할거 캠페인에서는 대군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 공손찬 플레이시 유우와 대립하는 이벤트 선택지가 있으며, 대립 선택지를 찍지 않더라도 몇 턴 뒤에 유우 AI가 선전포고를 할 정도로 관계가 나쁘다.

천명 캠페인에서는 공손찬이 휘하 무장으로 되어 있으며, 유주 전역(대군, 우북평, 광양, 요서, 요동)을 차지한 상태로 등장한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장각 세력과 인접했기 때문에 빠르게 멸망당하며 유주 지역이 장각 세력의 본진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사실 황건적의 난 직전에는 유주자사가 따로 있지만 유우가 감릉상을 지내기도 했기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퍼즐 통합 모드, TUP 모드에서는 전설장수 수준으로 격상되는데, 이때 타이틀은 인의로운 군주로 바뀐다(결의+15, 권위+35, 회복력+1, 공공질서 +6, 부패 -20%(상국 이상), 태수가 있는 군 부패 -60%).

7.4. 삼국전투기

초기 삼국전투기는 전투능력 없는 문관에 대한 대우가 매우 박했던 만큼[24] 그냥 양 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오고, 성품도 양과 같이 순한 것으로 묘사된다. 낙양 전투 (1)편에서 유우의 최후를 공손찬을 잡으려고 10만 대군을 이끌었지만 백성들의 피해를 신경쓰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해 패배하고 죽은 것으로 묘사했다.

7.5. 삼국지톡

유우(삼국지톡) 문서로.



[1] 다만, 양비후에 봉해졌으나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2] 어머니가 광무제의 첫 황후인 곽씨였는데, 광렬황후에 대한 광무제의 총애가 깊어짐에 따라 사이가 소원해졌고 투기하여 폐위되었다. 유강은 생모의 폐위 이후에도 황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스스로 부담을 느끼고 부황인 광무제에게 사퇴를 여러 차례 청한 이후에야 동해왕으로 봉해졌다. 광무제는 유강에게 아무런 과실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여러가지로 우대하였고, 이는 이복동생이자 차기 황제인 명제 또한 마찬가지였다.[3] 유우는 역시 황족 출신 조조의 참모 유엽과 먼 친척 뻘인데, 그의 조상은 광무제의 7남이자 폐후 곽씨의 소생이었던 부풍질왕 유연(劉延)이었다. 참고로 유우와 유엽은 12촌이며, 이 둘은 헌제와는 13촌 숙부 - 조카 사이이다(헌제 쪽이 조카). 그냥 황족일뿐 150여년 전에 같은 조상을 뒀을 뿐인 사실상 성씨만 같은 남과 다를바 없는 방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항렬상으로는 유우, 유비, 유엽, 유표, 유장, 영제 모두 같다.[4]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지시로 보이지만, 전쟁이라는 측면으로만 생각해본다면 백성과 병사를 죽이지 않고 적장만을 죽인다는 건 불가능한 명령이며 이는 전략적으로 크나큰 실책이다.[5] 예수가 죽기 전 조롱한 로마 병사의 사례와 매우 닮았다. 그리고 그때가 가뭄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조롱일 가능성이 높다. 이 일화는 강표전과 연의에서 손책우길을 죽일 때 에피소드와 비슷하다.[6] 헌제의 명을 받고 유우에게 가다가 남양에서 원술에게 억류되어 공손찬의 살육에서 살아남았다. 노력 끝에 원술에게서 탈출하여 북쪽으로 갔으나, 이번엔 원소에게 억류되었다.[7] 참 아이러니한 것은 공손찬은 나중에 원소에게 패배해서 은신처였던 역경에 불을 질러 일가족과 분신 자살한다. 그런데 원소는 불에 탄 시체에서 그의 목을 베어 당시 후한의 수도이자 조조의 근거지였던 허창으로 보낸다. 결국 인과응보인 셈이다.[8] 이 시기 조운 역시 형의 장례를 핑계로 낙향하게 된다.[9] 그리고 송양공은 입으로만 덕을 내세웠지 실제로는 약소국의 군주를 삶아 죽이거나 자신과 원한이 있는 초나라와 가깝단 이유로 다른 약소국을 침공하는 등 진짜 덕망있는 군주로 보긴 어렵다. 춘추시대의 패자를 노릴만큼 야망있는 군주이기도 했고. 애초에 송양지인이란 고사 자체가 전쟁 중에 적군을 배려한다는, 말도 안되는 뻘짓을 한 송양공을 비꼬려고 만들어진 말이다.[10] 연의의 창작이지만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당시 "나는 조조에게 항복하는게 아니라 한 황실에 항복하는 것"이란 말장난이 성립한 것도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어쨌거나 명목상 조조는 한 황실의 신하니까. 물론 이렇게 따지면 애초에 관우가 조조에게 적대한 것도 한 황실에 적대했다는 꼴이 되니 앞뒤가 안 맞지만, 어쨌거나 연의의 창작이니 별 의미는 없다.[11] 유비는 공손찬과 손절하고 서주에 눌러앉았으며 조운은 형의 장례를 핑계로 낙향했는데 이 시기가 절묘하게 유우의 죽음과 겹친다.[12] 도덕성에 대해 주목을 많이 하지만 경제부흥, 외교 성공, 국경 안정 등 매우 뛰어난 통치를 하였다.[13] 공손찬은 유우와 정반대로 인간성과 도덕성, 정치력에서 최하위급이나 군사적 재능이 당대 군벌들 중 톱급으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의 군재가 평가절하되고, 그의 무시무시한 군사적 능력이 발굴된 이후에도 도를 넘는 악행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진 못한다.[14] 유주의 곡물 가격이 한 석에 30전밖에 안될 만큼 물가를 안정시키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동탁의 화폐 개혁 삽질로 낙양과 장안에서 곡물 한 석 값이 수만 전까지 오른 것과 대조된다.[15] 어디까지나 유비같이 무늬만 황족인 사람에 비하면 가깝다는 거지 광무제의 아들대, 즉 백년도 더 전에 갈라져 나온 방계이고, 13촌 정도면 그냥 남이다. 물론 그래도 유비처럼 전한까지 올라가야 황실과 닿아있는 것도 아니고 후한 황실과 직접 닿아있는 확실한 황족이긴 하다. 여담으로 삼국지연의가 창작한 유비의 별칭인 "유황숙"은 사실 유우에게 딱 맞는 설정과 호칭이다. 먼 친척이기지만 황족이긴 하고, 헌제의 아저씨뻘 향렬이기 때문이다.[16] 代王, 즉 전한 문제다.[17] 治行, 정치의 행실, 실적이다.[18] 劉公, 유우를 말한다.[19] 유우가 공왕의 5대손이라는 말이다.[20] 玉印, 옥도장이다.[21] 虞, 순임금이다.[22] 義門, 하작의 호다.[23] 유우는 공손찬의 상관이었다.[24] 그나마 각주로 삼국지에서 최고로 착한 녀석이라고 서술해 주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