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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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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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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거병과 농서 할 거2.2. 경시제에게의 귀순2.3. 광무제와의 관계
2.3.1. 귀순과 협력2.3.2. 흔들리는 마음과 배신2.3.3. 공손술에게 투항과 최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隗囂[1]
(? ~ 33)

1. 개요

“물고기는 깊은 물을 떠날 수 없으니, 신룡(神龍)이 의지할 곳을 잃으면 지렁이와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왕원(王元)[2]이 외효에게 한 조언으로 외효의 운명을 결정지은 말이다.

신나라 말기 ~ 후한 초기의 군벌. 자는 계맹(季孟)이며, 량주 천수군(天水郡) 성기현(成紀縣) 출신. 봉호는 삭녕왕(朔寧王)이다.

농서(隴西)의 대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경서에 통달한 선비로 명성을 떨쳤다. 왕망 정권에서 관료로 일했으나, 신나라가 붕괴하고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숙부 외최(隗崔) 등과 함께 거병하여 농서 일대를 장악했다. 처음에는 경시제 유현에게 귀순하여 우장군(右將軍),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었으나, 경시제 정권이 붕괴하자 다시 천수로 돌아와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을 자칭하며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

이후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 유수에게 귀순하는 듯했으나, 마원 등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며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유능한 인재들을 예우하여 서주(西州)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주변의 의견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광무제와의 관계가 파탄나고 촉(蜀)의 공손술(公孫述)과 손을 잡았으나, 후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린 끝에 33년, 병과 굶주림 속에서 분사(忿死)했다.

2. 생애

2.1. 거병과 농서 할 거

외효는 농서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경전에 밝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신나라의 국사(國師) 유흠(劉歆)에게 발탁되어 그의 속관으로 일했으나, 유흠이 모반으로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시 원년(23년), 한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경시제 유현이 즉위하고 왕망의 군대가 연패하자, 외효의 숙부인 외최(隗崔)와 외의(隗義) 등은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 이때 외효는 “전쟁은 흉한 일이니, 일족에게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라며 반대했으나, 외최 등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 명을 모아 평양(平襄)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후 외최 등은 군사를 통솔할 주장이 필요하다고 여겨, 명망이 높고 경서를 좋아하는 외효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추대했다. 외효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제 의견을 따라 주신다면 감히 따르겠습니다.”라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며 농서 지방의 할 거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외효는 군사가 된 방망(方望)의 조언에 따라 한고제, 문제, 무제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한나라 부흥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민심을 얻고 세력을 키워, 10만 대군을 이끌고 옹주(雍州)를 점령했으며, 나아가 농서, 무도, 금성,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등 여러 군현을 장악했다.

2.2. 경시제에게의 귀순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사자를 보내 외효와 외최 등을 불렀다. 군사 방망은 경시제의 앞날이 불투명하다며 반대했지만, 외효는 이를 듣지 않고 장안으로 향했다. 경시제는 그를 우장군(右將軍)에 임명했다.

같은 해 겨울, 숙부 외최와 외의가 경시제를 배반하고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외효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경시제에게 밀고했다. 결국 외최와 외의는 살해당했고, 경시제는 외효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를 삼공(三公)의 하나인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2.3. 광무제와의 관계

2.3.1. 귀순과 협력

경시 3년(25년), 적미군관중에 들어와 혼란이 극에 달하고 광무제 유수가 하북에서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외효는 경시제에게 광무제의 숙부이자 경시제 정권에서 국삼로(國三老)를 지내는 유량에게 정권을 맡길 것을 진언했다. 경시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장앙(張卬)·요담(廖湛)·호은(胡殷)·신도건(申屠建) 등 경시제의 이성왕들과 함께 경시제를 협박해서 남양 방면으로 달아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이 들통나 경시제가 집금오 등엽(鄧曄)에게 군대를 보내 외효를 사로잡으라 했고, 외효는 밤중에 부하들을 이끌고 등엽의 포위망을 돌파, 장안을 탈출하여 고향인 천수로 돌아와 다시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을 자칭했다.

당시 외효는 겸손하게 선비들을 대했기에, 삼보(三輔)의 많은 명사들이 그에게 귀순했다.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서주를 넘어 산동까지 퍼져나갔다.

건무 2년(26년), 광무제의 부하인 대사도 등우(鄧禹)가 서쪽의 적미군을 격파하기 위해 주둔하던 중, 그의 부장 풍음(馮愔)이 반란을 일으켜 천수로 향했다. 외효는 이를 요격하여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등우는 광무제의 뜻을 받들어 외효를 서주대장군(西州大將軍)으로 삼고, 량주(涼州)와 삭방(朔方)의 통치를 위임했다. 또한 적미군이 농서로 진격해오자 이를 격퇴하는 등, 후한 정권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건무 3년(27년), 외효는 광무제에게 정식으로 사자를 보내 신하의 예를 갖췄다. 광무제는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기에 국빈(國賓)의 예로 대우하였는데, 그의 이름을 로 부르며 사실상 군주와 같은 예로 극진히 환대했다. 당시 촉의 공손술과 연계한 여유가 삼보를 침략하자, 외효는 군대를 보내 후한의 장군 풍이를 도와 이를 격퇴했다. 이에 광무제는 친필 서신을 보내 "장군의 충성스럽고 예의 바른 지조에 감복했다"며, 자신과 외효의 관계를 춘추시대 관중포숙에 비유하며 깊은 신뢰를 표했다.

이후 공손술이 대사공(大司空), 부안왕(扶安王)의 인수를 보내며 회유하려 했으나, 외효는 자신을 공손술과 대등한 위치로 여겼기에 사자를 참수하고 그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다.

2.3.2. 흔들리는 마음과 배신

광무제는 외효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촉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외효는 삼보 지역의 병력이 약하고, 북방의 노방(盧芳) 세력이 위협이 된다는 핑계를 대며 출병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광무제는 외효가 천하 통일을 원치 않고 공손술과 자신을 두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예우를 점차 낮추기 시작했다.

광무제는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외효의 입조를 권했지만, 그는 번번이 사양했다. 건무 5년(29년), 광무제가 재차 사자를 보내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외효는 자신과 친밀한 내흡, 마원의 종용으로 장남 외순(隗恂)을 수도로 보냈다.

그러나 외효의 부하 왕원(王元) 등은 천하의 향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지금 천수는 부유하고 병마가 강성하니, 험지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키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물고기는 깊은 물을 떠날 수 없는 법입니다.”라고 설득했다. 외효는 이 계획에 동조하여 아들을 인질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세력을 유지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한편 광무제는 하서의 두융과 결맹하면서 외효를 견제할 확고한 토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건무 6년(30년), 광무제는 관동을 평정한 후 외효와 공손술에게 사자를 보내 회유했지만, 외효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한때 외효 밑에 있다가 광무제에게 귀순한 마원은 외효가 한나라에 배반하려 함을 알고, 자주 글로써 꾸짖어 깨우치니, 외효가 글을 보고 더욱 노하였다. 그러나 외효가 군대를 출동하여 모반하니, 마원이 마침내 글을 올리기를 "행재소에 나아가 외효를 없애는 방법을 모두 진술할 것을 들어주십시오." 하였고, 광무제가 마침내 마원을 불러서, 상세히 계책을 말하게 하였다. 결국 광무제는 외효를 토벌하기로 결심하고 장안으로 친히 행차했다. 외효는 후한군이 공격해오자, 길을 막고 저항하며 사실상 후한에 등을 돌렸다.

2.3.3. 공손술에게 투항과 최후

후한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승리한 외효는 교만해져 삼보 지역을 침략했으나, 풍이 등에게 격파당했다. 이후 외효는 광무제에게 사죄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그 내용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광무제의 최후통첩을 받은 외효는 공손술에게 사자를 보내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건무 7년(31년), 공손술은 외효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하고, 군대를 보내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외효의 군대는 후한군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건무 8년(32년), 후한의 장군 내흡이 요충지 약양(略陽)을 기습 점령하자, 외효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를 포위했다. 공손술도 지원군을 보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광무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외효의 대장 13명과 16개 현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궁지에 몰린 외효는 처자식을 데리고 서성(西城)으로 달아났고, 광무제는 그의 아들 외순을 처형했다. 후한군은 서성과 상당을 포위했지만, 때마침 공손술의 구원군 5천여 명이 도착하여 포위를 뚫고 외효를 구출해 기현(冀縣)으로 탈출시켰다. 후한군은 군량이 떨어져 퇴각했고, 안정, 북지, 천수, 농서 등의 지역이 다시 외효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이었다. 건무 9년(33년) 봄, 외효는 병마에 시달려 굶주리다 구비(糗糒)[3]를 먹다가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분사했다. 그의 사후, 부하들이 아들 외순(隗純)을 삭녕왕으로 세웠는데 공손술이 조광[4]과 전엄(田弇)을 보내 외순을 돕게 했으나, 천수태수에 임명된 풍이가 1년간 이들과 싸운 끝에 전부 잡아 참수하였다. 이듬해인 건무 10년(34년) 내흡, 경엄, 갑연 등이 낙문(落門)을 함락시키자, 외순이 후한군에게 항복하면서 외씨의 농서 할 거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3. 평가

논하여 말한다: 외효(隗囂)가 기치를 내걸고 일족을 규합하며, 신명을 빌려 제왕의 제도를 사용했으니, 그가 처음 대업을 도모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의 자취를 보면 그의 기풍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한쪽 구석에 고립되어 대국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농저(隴坻) 땅이 비록 험준하나 병사 둘로 백명을 막을만한 견고한 지세(百二之埶)는 아니었고, 고작 두 군(郡)의 미미한 힘으로 당당한 적의 예봉을 막아내려 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의 계책은 궁해지고 부역과 징발은 고갈되었으며, 자신은 죽고 무리는 흩어진 뒤에야 평정되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품을 만한 도(道)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사방의 뛰어난 인물들이 그에게 귀의했고, 선비들은 죽음에 내몰리고 길이 끊기는 상황에서도 후회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무릇 공이 온전하면 명예가 드러나고, 공업이 스러지면 허물이 생겨나는 법이다. 이미 실패로 돌아간 그의 일을 두고 논하는 자들은 (그가 가졌던 장점을)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외효의 운명이 시대의 흐름과 부합하고, 그의 적이 하늘의 힘을 얻은 자가 아니었다면, 그가 앉아서 서백(西伯)의 공업을 논했다 한들 어찌 크게 비웃음을 샀겠는가?
후한서 외효열전에서 저자 범엽의 평가
외효는 처음에 농저(隴坻)를 근거지로 삼아 겸손하게 선비들을 대우하니 호걸들이 그에게 귀의했고, 형벌과 정치는 잘 시행되었으며 병력과 무기는 풍족하고 강성했다. 한때 한 지역을 점거했던 인물들 가운데 현명한 장수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성공(聖公, 경시제)이 왕망의 패망을 틈타 무리를 모아 관중(關中)으로 들어왔을 때, 군신(君臣)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도적 시절의 옛 버릇을 고치지 못했으니 그 패망의 형세는 평범한 남자와 여자라도 모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외효는 군대를 이끌고 스스로 손을 묶어 신하를 칭하며 방망(方望)의 간언을 어기고 여러 숙부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으며, 자신만 겨우 몸을 피했다.

이후 광무제(光武帝)가 하북(河北)에서 낙양(洛陽)으로 들어와 정치를 닦고 백성들이 따르니, 현명한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도적 무리들은 열에 여섯 일곱이 사라졌다. 그러나 외효는 지난날의 재앙을 교훈 삼지 못하고, 도리어 군사를 끼고 스스로를 지키며 (진(秦)나라에 대항했던) 6국의 계책을 따르려 하니, 모신(謀臣)들은 그를 떠나고 의로운 선비들은 그를 비웃었다. 외효는 왕원(王元), 왕첩(王捷) 한두 사람과 함께 죽기로 지켰을 뿐이다. 처음에는 갱시제를 따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광무제를 배신하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니, 나아가고 물러나는 계책에 있어 하나도 얻은 것이 없었다. 결국 몸은 죽고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이상할 것이 없다.
소철, 《난성집(欒城集)》

종합적으로 외효가 능력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교양과 덕망을 갖춰 많은 인재를 끌어모았지만, 시운이 맞지 않았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판단력 때문에 뛰어난 잠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여 자멸의 길을 걸었다. 외효는 비록 양한교체기 당시 변방의 군벌에 불과했으나 초기에는 한 시대를 풍미할 영웅으로 기대를 모았고 후대의 평가도 비록 비판은 있을지언정 그 재주만은 인정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판단 착오를 반복하며 자멸한 군주로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3.1. 긍정적 평가

외효에 대해선 혼란기에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군벌치고는 보기 드문 현명한 군주라는 평가들이 꽤 존재한다. 외효는 신나라 말 혼란기에 농서(陇西) 지방을 안정시키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단순히 무력만 앞세운 다른 군벌들과는 격이 달랐으며 덕분에 왕망 패망 이후 공손술과 함께 광무제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유의미하게 큰 걸림돌이 된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괜히 외효와 공손술이 후한서에서 같은 열전의 반열에 든 것이 아니다.

외효는 겸손한 태도로 선비를 우대하여 수많은 호걸과 인재가 그에게 귀의했다. 이는 그의 세력이 단기간에 안정되고 강성해지는 기반이 되었다. 왕부지(王夫之)는 내흡이 외효를 강하게 질책했음에도 외효가 그를 해치지 못한 이유를 ‘서주(西州)의 사대부들이 내흡을 경애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는데, 이는 역으로 외효의 진영에 얼마나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지를 보여준다.

소철은 외효가 “형벌과 정치를 바로잡아 병력과 갑옷이 풍부하고 강성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군벌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지역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스릴 능력을 갖춘 행정가이자 군주였음을 시사한다. 혼란기에 자신의 근거지를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외효가 고립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한 것을 두고 '그의 도(道)에 품을 만한 점이 있었기에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이는 그가 비록 패배했지만, 따르던 이들에게는 끝까지 신의를 지키고자 했던 군주로 비쳤음을 의미한다. 비록 결과는 파멸이었지만, 그의 곁을 지키던 이들에게는 단순한 배신자로 남지 않았던 것이다.

군사적 성과로만 봐도 외효가 광무제의 군대를 쫓아내고 바로 병사한 게 광무제의 행운이었다. 후한서 외효열전에 따르면 외효는 죽기 바로 전해까지도 광무제의 군대를 상대로 크게 이길 만한 능력이 있었다.
수월 후, 왕원, 행순, 주종이 촉의 구원병 5천여인과, 높은 곳에 이르러, 북을 치며 크게 떠들며 말하기를, "백만의 무리가 왔다!"라고 하였다. 한군이 크게 놀라, 진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왕원 등이 포위망을 끊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니, 드디어 성에 들어가, 외효를 맞이해 기현으로 돌아갔다. 오한 등은 식량이 다해 퇴각하니, 안정, 북지, 천수, 농서가 다시 외효에게로 돌아갔다. (다음해인) 9년 봄, 외효가 병에 걸려 굶주려, 성에서 나가 볶은 쌀을 먹다가, 성내고 분노해 이에 사망했다.[5]
후한서 외효열전

이 기사를 보면 광무제 유수의 군대는 서성, 상규에서 외효+공손술 연합군에 대파당해서 군 4개 다시 뺏기고 쫓겨났다가 외효가 죽은 후에야 다시 량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삼국지로 치면 적벽대전 끝나자마자 주유손권이 강릉으로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병사한 급인데 광무제 유수는 후대 조조가 겪었던 저점을 단지 운 좋게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효가 죽은 이후에도 외효의 부하 고준이 1년 동안 저항하자 광무제는 고준을 정벌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가 간신히 귀순을 받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기현도 비슷한 시점까지 버틴거 보면 물자, 인력은 직후에 꽤 회복한 것으로 보이고 외순때도 꽤나 버텼으니 외효가 살아있었다면 하서의 두융도 처참하게 대패한 광무제를 보며 생각을 바꿀지도 또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외효는 한때나마 왕업의 기틀을 닦을 만한 풍모와 자질을 보여주어 광무제와 충분히 대적할만 하던 인물이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 백성을 안정시키는 능력, 그리고 따르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의리까지 갖추고 있어, 만약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탔더라면, 범엽의 평가대로 한때 이곳을 다스리던 주문왕처럼 서쪽의 패자로 남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범엽은 이를 두고 그가 패망해서 사서에 단점만 적힌것이며 공업을 세우는데 성공했다면 그의 장점이 더욱 드러났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3.2. 부정적 평가

그러나 외효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판단 착오에 있었다. 소철은 외효의 실패를 “거취를 정하는 계책에 있어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처음에는 망해가는 것이 뻔히 보이는 경시제에게 칭신하다가 결국 자기 혼자 살자고 일가 친척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이후에는 천하의 대세가 광무제에게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원(王元) 같은 이들의 말만 믿고 저항하다 자멸했다. 즉, 사람은 모을 줄 알았지만, 누구의 말이 진정으로 옳은지 분간하는 능력은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 중화민국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채동번(蔡東藩)은 외효를 공손술과 비교하며, 공손술이 과장이 심했다면 외효는 의심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의심 많은 성격이 그의 우유부단함과 결합하여, 결국 대세를 거스르는 최악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채동번은 “의심과 과장은 모두 패왕의 그릇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강력한 동맹이 될 만한 하서의 유력한 군벌인 두융은 외효보단 이미 농서와 촉 동쪽을 모두 장악한 광무제한테 천하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평가하고 광무에게 투항하였는데 이는 외효가 결국 바로 옆에 있는 두융에게도 반광무제 세력을 제대로 결집할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신뢰받지 못했음을 시사한다.[6] 이 역시 광무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외효의 능력이 부족했다고 당대에 평가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외효는 한 지방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현명한 장수’ 또는 ‘훌륭한 성주’의 역량은 갖추었을지 몰라도, 천하의 대세를 읽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패왕’의 그릇은 아니었다. 그의 겸손함과 인재 우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천하를 경영할 큰 그림과 비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그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게 비판자들의 주장이다.

[1] 본디 는 ‘들렐 효’와 ‘많을 오’ 두 가지 음훈이 있는데, 후한서의 주석에서는 오(五)와 고(高)의 반절이라 하므로, 실은 ‘외오’가 옳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어문회에서 이 한자에 대해서 ‘많을 오' 음훈을 반영하지 않은 데다가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선 이 인물을 외효로 읽는 관습이 지속되어 다들 그냥 외효라고 부른다.[2] 원래는 외효의 심복이었으나 외효 멸망 후 공손술의 성나라를, 성나라 멸망 후 후한을 섬겼다. 잠팽의 부장 장궁의 불의의 공격을 받아 침수에서 대패했으며, 왕원은 이후 장궁에게 익주 광한군 평양향에서 항복했다. 후한에서는 상채현령이 됐고, 동평국상으로 승진했으나, 개간 실패로 투옥 후 죽었다.[3] 콩, 잡곡과 쌀가루를 섞어서 말린 전투식량으로 고대 중국의 건빵이라 보면 된다.[4] 원래 외효를 따르던 군벌로, 외효가 광무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공손술에게 붙은 시점에 공손술 휘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5] 數月,王元、行巡、周宗將蜀救兵五千餘人,乘高卒至,鼓噪大呼曰:「百萬之眾方至!」漢軍大驚,未及成陳,元等決圍,殊死戰,遂得入城,迎囂歸冀。會吳漢等食盡退去,於是安定、北地、天水、隴西復反為囂。九年春,囂病且餓,出城餐糗糒,恚憤而死。[6] 경시제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바로 하서로 몸을 피한 두융 자신과 달리 외효가 경시제 정권내에서 결국 일족을 잡아먹고 간신히 몸을 뺀 뻘짓을 한 걸 두융이 모를 리 없었을 테니 이 또한 두융의 외효 저평가의 원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