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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염 魏冉 | ||
작위 | <colbgcolor=#FFFFFF,#191919> 양후(穰侯) | |
최종직위 | 상방(相邦) | |
생몰 기간 | 기원전 ? ~ 기원전 265년 |
1. 소개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상방(相邦). 진 소양왕의 외삼촌이며 선태후의 이부동생이다. 작위는 양후(穰侯).2. 생애
능력은 매우 뛰어나서 소양왕과 선태후를 보좌하면서 백기를 중용해 서북쪽의 의거(義渠)를 멸망시켜 진나라의 배후를 안정시키고 영토를 넓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조나라의 연여로 호양과 함께 출진하나 조나라의 명장 조사에게 참패한 적 있다. 당시 양(穰) 땅을 봉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양후(穰侯)라고도 부른다. 수십년간 진나라의 정치를 이끌고 있다가 자신의 봉읍인 도읍을 넓히려 하다 소양왕과 범수(범저)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었다.사마천은 사기에서 '진나라가 동쪽으로 땅을 넓혀 제후들을 약화시키고 천하에다 ‘제’로 칭하여 천하가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것은 모두 양후의 공이었다' 라고 평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별개로 지나친 축재와 사치로 비판받았다. 양후의 부는 진나라 왕실보다 컸다고 한다. 위염이 범수에 의해 함곡관 밖으로 내쫓길 때, 짐을 실은 수레가 1000대가 넘었다고 한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할 때 재물을 실은 수레가 100대였다고 하니, 양후의 재산은 조씨 일가의 것의 10배 가량이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씨 일가도 조등이 환관들의 수장이었고 당시 후한의 부정부패가 심각했던 만큼 큰 재산을 모았으나 그 이상의 재물을 모은 것이다. 한 나라의 최고권력자가 청빈한 것도 곤란하긴 하지만 왕실보다 큰 부를 쌓은 것은 큰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