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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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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파일:중국 함곡 2.jpg
명칭 한국어 신안함곡관
간체 新安函谷关
정차체 新安函谷關
영어 Xin'an Hangu Pass
분류 고유지
(古遗址)
시대 전한
일련번호 7-0324-1-324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뤄양시 신안현 G310
河南省洛阳市新安县G310
등재 2013년
차수 제7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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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파일:중국 함곡 4.jpg
명칭 한국어 함곡관
간체 函谷关 [1]
번체 函谷關
영어 Hangu Pass
분류 고유지
(古遗址)
시대 진나라
일련번호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링바오시 항구관진 G 30
河南省灵宝 函谷关镇王垛村邮政编码G 30
등재 2013년
차수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급

1. 개요2. 역사3. 구함곡4. 신함곡 (한관)5. 갤러리6.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역사상 함곡관(函谷關)이라 하면 크게 두 군데가 존재하는데, 진나라(秦) 시절의 원조 함곡관(구함곡, 홍농)은 허난성 싼먼샤 링바오시 항구관진(函谷关镇) 북쪽 황하 근처 협곡 지대로, 더 서쪽으로 가면 동관이 있다. 한무제가 새로 옮긴 이후의 함곡관(신함곡, 한관)은 뤄양시 신안현 동쪽 리우완(柳湾)의 신안함곡관유지(新安函谷关遗址)이다. 현재 중국에서 설치한 함곡관 관광단지는 전국시대 시절의 구함곡 자리에 위치해 있다.

다만 2014년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의 일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은 옛 모습이 어느정도 남아있는 신안함곡관 (신함곡)으로, 최근에 정비되었다.

그외에 구함곡 북쪽에 있던 위관(魏关) 혹은 신관(新关) 역시 함곡관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중장로와 싸우던 조조가 양곡의 운송을 위해 허저에게 명하여 세운 것이었다. 후일 중일전쟁 시에 전투가 벌어졌고, 현재는 싼먼샤 댐에 불어난 황허에 수몰되어 있다.

2. 역사

파일:중국 한구.jpg
구함곡관

관중의 4개 관문(소관, 산관, 무관, 함곡관) 중 하나이며, 중원관중 사이에는 태행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관중과 중원 양쪽 어느 곳에서 다른 한 쪽으로 가려면 이 함곡관을 넘어 가야만 했으므로 천하를 다투는 전투가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원래는 괵나라가 이 부근에 있었고[2], 가도멸괵의 계책을 통해 진(晉)나라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후 삼진이 분리될 당시에는 위나라에 속했고 하동과 하서지방을 진나라에 빼앗기면서 진나라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관문 자체는 진효공 때 처음 세워졌다 하며, 진나라의 동쪽 경계에 위치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북쪽은 황허, 남쪽은 효산으로 되어 있어 중간의 길이 마차 한 대 지나갈 정도밖에 안 되어 천하제일험관(天下第一險關)으로 불렸으며 중원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로 있었으며 합종군이 몇 번씩이나 구성되어 진나라를 침공했을 때 번번이 함곡관에서 공세가 돈좌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아예 격퇴되거나 장의 같은 변설가들에 의해 함곡관을 넘지 못하고 각국이 흩어지게 되는 등 전국시대 진나라에게는 생명줄으로, 타 국가들에게는 통곡의 벽으로 기능했다. 뚫린 적이 2번 있는데, 기원전 298년 제나라 장수 광장이 제·한·위 연합군을 이끌고 3년동안 공성전을 벌여 296년 함곡관을 돌파한 적 있으나 3년이나 걸려 뚫은 탓에 관중에서 오래 싸우지 못하고 화해조약을 맺고 철수해야 했다. 그리고 기원전 207년 항우가 영포를 시켜 함곡관을 돌파했다. 영포는 샛길로 함곡관 뒤로 잠입. 함곡관을 지키는 유방의 군대를 포위해 격파했다.

진승 오광의 난부터 시작해 초한쟁패기에도 진나라 수도 함양을 지키는 관문으로 기능했다. 전국시대와 초한쟁패기가 끝나고 한고조 유방이 함양 옛자리 근처에 장안을 세워 수도로 삼으면서 함곡관도 수도관문으로서 그 중요성을 이어갔다. 이후 한무제가 기원전 114년에 관중의 지리적 범위를 확장하고자 신안현 경계에 함곡관을 새로 세우고, 기존의 함곡관에는 홍농현을 설치했다.

이 때문에 삼국지의 배경인 후한말 기준으로 함곡관은 사실 링바오현이 아니라 신안현 리우완 일대[3]이고 전국시대 진나라 관문으로써의 함곡관이 있던 자리는 홍농이란 지명으로 이름이 바뀐다. 따라서 위연이 함곡관을 넘겠다는 계책을 냈을 때의 함곡관은 홍농이 아니라 기관과 육혼관 사이를 얘기한 것이다. 이후로도 여러 왕조들이 장안을 수도로 삼을 때와 낙양을 수도로 삼을 때에 따라 그 사이에서 함곡관의 위치도 여러 번 바뀐다.

다만 위치에 상관 없이 함곡관은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장안을 방어하는 중요 거점으로 남았다. 수당교체기에도 이세민왕세충의 건곤일척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당나라 말기부터 장안과 관중 일대가 기후변화에 의해 몰락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방어 거점으로서의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으나 난공불락의 명성은 여전해 안사의 난부터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요새로 이용되어 왔다.

현재는 전국시대의 위치였던 링바오시에 함곡관을 복원해두었다. 정확히 있던 위치는 아니고 관광하기 좋게 홍농이 있던 시가지 쪽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함곡관과는 다른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신함곡인 신안함곡관에는 옛 성문이 남아있다.

3. 구함곡

파일:hangua.jpg
함곡관역사문화여행구 (函谷关历史文化旅游区)
파일:gu hangua.jpg
싼먼샤의 구함곡. 왼쪽 가운데 보이는 황금 노자상을 보면 알겠지만 현재 함곡관의 조감도로 보인다. 그러나 주변 지형과 함께 과거의 함곡관이 어땠을지 판단할 수가 있다. 그림만 봐도 옆으로는 강을 끼고 낙양 방향은 좁은 험로로 되어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걸 짐작케 한다.

요동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산해관, 삼국지로 유명해진 호로관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문협(싼먼샤)라는 이름답게 위치상으로도 중요했고 지리적으로도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진 속의 함곡관은 근래 관광단지로 조성된 것이라 과거의 함곡관과 겉모습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오른쪽에 물소를 타고 있는 노자의 상이 보인다.

앞서 서술되었듯 함곡관은 3개의 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낙양에 가까운 하나와 장안에 가까운 2개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안이나 낙양 어느 한 쪽에 수도가 세워지는 경우 반대쪽 관문을 부숴 없애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중국의 중심이 관중과 중원에서 동쪽 해안지역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이곳도 자연스럽게 쇠퇴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1992년부터 관광단지로 조성하게 된 것이다.

사실 중국에는 훨씬 더 험준한 검문관, 가맹관, 양평관, 면죽관 같은 곳도 있기 때문에 이런 곳의 사진을 보며 등산왕 등애 드립을 치다가 막상 함곡관 사진을 보고 나서 "이게 그 명성 자자한 함곡관인가?" 하고 김 빠진 듯한(?) 감상을 말하는 역덕 뉴비들이 더러 있다. 특히 위성사진으로 보면 산지가 거의 없는 평지처럼 보여서 더 그런데, 함곡관은 평지에 우뚝 솟은 구릉으로 올라가는 좁은 통로를 길막하고 세워진 관문이다. 특히 도보 이동이 아닌 짐수레가 이동하는 데에는 산맥이 아닌 몇십 미터 높이의 구릉지 절벽일지라도 길이 없다면 매우 고된 여정이 된다. 현대와 같은 토목 기술도 없고 도로사정도 열악하던 그 옛날엔 정말 천혜의 요새였던 셈. 게다가 막강한 농업 생산력, 인구 밀집 지대인 관중을 후방으로 뒀으니, 함곡관을 뚫으려면 관중의 물량을 우직한 소모전으로 갈아버리기 전엔 뚫을 수 없다! 그래서 '힘 들이지 않고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을 일컫는 '일환니봉함곡관'(一丸泥封函谷關)[4]이란 말이 있거니와, 이 글귀는 이미 그 옛날 후한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탈출할 때 밤이라 이 함곡관 문이 닫혀 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수하의 식객 중 한 명이 닭 울음 소리를 기가 막히게 내어 수비병들이 동이 튼 줄 알고 문을 열어 탈출에 성공했다는 일화가 있다. 여기서 하찮게 보이는 재주가 크게 쓰일 경우를 의미하는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또한 노자가 이곳에서 도덕경을 완성하였다 하며[5], 도교의 성지 중 하나로 관련된 관광자원이 많다. 또한 황금색으로 된 노자의 동상이 서있다.

함곡관을 지나지 않고 다른 길로 우회해서 함양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대진제국4부 대진부에서 왕전 장군이 진시황에게 함양으로 가는 길은 함곡관 말고도 두 개의 루트가 더 있다며 함곡관에 진나라의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5국 연합군이 이쪽 길들로 우회해서 쳐들어오면 겉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며 경고[6]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총사령관인 조나라방난 장군이 함곡관과 우회 루트에 병력을 분산시키고 함곡관 근처에서 동료들이 진나라 군대의 발목을 잡으며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최성쪽으로 우회해서 쳐들어가자 진나라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진나라도 위기에 몰리지만 왕전 장군과 번오기의 유격대가 함곡관 근처에 있는 연합군의 뒤통수를 쳐서 최성에 원군을 보낼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고 최성의 진나라 군대도 화살이 바닥나서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린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원군이 도착해 위기를 벗어났다. 왕전 장군과 번오기의 유격대도 연합군을 붙들며 진나라 본대가 최성을 공격하는 연합군을 격퇴하고 함곡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동안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리는데 역시 지원군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도착해서 위기를 벗어났다.

4. 신함곡 (한관)

파일:중국 함곡.jpg

함곡관은 기존에 있던 전국시대 구함곡에서 한대 (고조선 멸망전에 참전했던) 누선장군 양복에 의해 이곳의 신함곡으로 이전되었고, 한함곡관 (汉函谷关)이라 명명되었다. 줄여서 한관 (汉关)이라고도 한다. 후한 대에 낙양이 수도가 되며 한관은 그 서쪽 관문으로써 낙양팔관 중 하나로 중시되었다. 특히 양대 수도라 할 수 있는 장안과 낙양 사이의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광무제는 이곳에 행궁을 세웠고, 영제가 낙양팔관에 도위를 두었을 때에 한함곡관은 그 사령부였다. 6세기 후반 북주 시대에는 통락방 (通洛防)이라 명명되었고, 당나라 대인 660년에는 근처에 합벽궁 (合璧宫)이 세워졌다. 현재의 유적은 1923년 서북군벌 중 하나인 장팡 (张钫)이 중수한 것이다.

5. 갤러리

파일:중국 한관.jpg

파일:함곡 중국.jpg

파일:중국 함곡 1.jpg

6. 매체에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함곡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홍농'이라는 지명으로 장안과 낙양 사이에 위치한다.

[1] 혹은 함곡관역사문화여행구 函谷关历史文化旅游区[2] 싼먼샤 시에 링바오시(灵宝市)가 포함되어있는데, 싼먼샤시 중심부가 괵나라의 중심부였다.[3] 전한 시기에 낙양팔관의 하나인 한관으로 불리던 곳이다.[4] 직역하면 '흙 한 덩이로 함곡관을 틀어막는다'라는 뜻이다.[5] 그러나 위에 언급된대로 함곡관은 진효공 때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200여 년 전인 노자 시대에는 당연히 없었다. 즉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거나 아니면 노자가 후일에 함곡관이 세워질 자리에 머물면서 도덕경을 저술했을 가능성은 있다.[6] 왕전은 이렇게 경고하면서도 전쟁에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도 반드시 적들이 우회로로 쳐들어올지 자신있게 말하진 못한다며 확신은 못했다. 이 드라마 시리즈에서 왕전, 염파, 백기 같이 오랫동안 전쟁을 경험한 백전노장들은 전쟁을 벌이는 일도 섣불리 결정하면 안된다며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전장에 임하는 경우도 오랫동안 준비하고 치밀한 작전을 짜서 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조괄 같이 실전 경험이 없고 병법지식만 빠삭한 젊은 장수는 함부로 작전을 감행하다 쫄딱 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놈들에게나 멋져보이고 직접 그 참혹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스러운 것이다.[7] 장수의 통솔과 무력빨에 따라 정예창병/기병이 안 나오는 훈련도라도 동주병이나 서량병으로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