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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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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파목(起翦頗牧)
백기 왕전 염파 이목


파일:왕전.jpg
봉호 <colbgcolor=#FFFFFF,#191919> 무성후(武成侯)
(王)
(翦)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고향 빈양(頻陽) 동향(東鄕)[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1. 개요2. 생애
2.1. 조나라의 멸망2.2. 연나라의 멸망2.3. 초나라의 멸망
3. 사후4. 평가
4.1. 이목 vs 왕전?
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진(秦)나라의 무장으로 빈양 동향 사람이다. 당시 남아 있던 진나라의 주변국을 모두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킨 명장이며, 그 과정에서 뛰어난 처세술을 보인 것으로 이름이 높다.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무장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왕전과 그의 아들 왕분(王賁)이 멸망시킨 국가는 연나라, 조나라, 초나라, 위나라, 제나라를 비롯한 다섯 국가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백 곳의 성을 함락시켰다. 게다가 또 다른 진나라의 명장인 백기와 달리 학살자의 이미지는 없으며, 처세술도 능통하여 의심많고 성격도 안 좋았던 진시황 휘하에서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의 지휘권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천수를 누렸다. 또한 초나라를 상대로 지구전에 들어갔을 때 왕전은 매일 병사를 쉬게 하고 목욕시키며 잘 먹이고 정성껏 어루만지며 친히 병사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병사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뛰어난 능력 덕에, 《천자문》에서는 기전파목 용군최정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장수로 꼽았다.[2]

2. 생애

출생 연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했다고 한다.

열전에서는 진 시황 11년부터 행적이 나오지만. 초나라 정벌때 진시황에게 늙었다고 구박받는 장면이 나오고, 이신이 대패하기 이전까지는 빈양에서 은거를 했던걸 보면. 진 시황의 즉위 이전부터 종군을 했을것으로 추정이 된다.

2.1. 조나라의 멸망

기원전 236년에 장군이 되어, 조나라의 연여를 공격해 아홉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29년에 왕전은 조나라와의 마지막 전쟁에 출전했는데, 이목과 엮이는 전쟁이며 이 전쟁의 기록이 굉장히 간략하기에 자세한 정황을 알기가 어렵다.

일단 당시의 기록들을 본다면 이러하다.
시황제 18년(BC 229년), 군사를 크게 내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를 이끌고 정형(井陘)[3]을 공격했고, 양단화가 하내의 군사를 거느렸다. 강외(羌瘣)가 조나라를 토벌하고 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시황제 19년(BC 228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

이를 보면 왕전은 별 무리 없이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이나, 왕전의 열전에는 조나라는 멸망시키는 데 1년이나 걸렸다는 서술이 대놓고 나온다.
시황제 18년(BC 229년), 왕전이 장수가 되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시황제 19년, 1년 만에 드디어 조나라를 점령하고 조왕의 항복을 받아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고 군으로 삼았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또한 조나라측의 기록을 보면 이목이 왕전을 훌륭히 막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천(趙遷) 7년(BC.229년), 진나라의 왕전(王翦)이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의 이목ㆍ사마상(司馬尚)이 막았다.
《사기》 <염파인상여열전>

이러한 《사기》의 기록과 더불어, 《전국책[4]에 의하면 환의가 이목에게 패배한 이후에도 계속 진군에 남아 왕전의 부장으로 종군하다가 이 전쟁에서 이목과 다시 싸워 전사했다.
秦使王翦攻趙(진사왕전공조)
진(秦)나라가 왕전(王翦)으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趙使李牧司馬尙禦之(조사이목사마상어지)
조나라에서는 이목(李牧)과 사마상(司馬尙)으로 하여금 맞서게 하였다.
李牧數破走秦軍(이목수파주진군)
이목은 여러 차례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殺秦將桓齮(살진장환기)
진나라 장수 환기(桓齮)까지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王翦惡之(왕전오지)
왕전(王翦)은 이목(李牧)을 매우 미워하여,
乃多與趙王寵臣郭開等金(내다여조왕총신곽개등금)
여러 차례 조왕의 총신(寵臣)인 곽개(郭開)등에게 뇌물을 바쳐,
使爲反間(사위반간)
그로 하여금 반간(反間)을 하도록 하였다.
《전국책》 <조책>편

《사기》에는 자세한 정황이 나오지 않아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사기》에 기록된 바로는 왕전과 이목은 수비적인 전략을 잘 썼다고 한다. 왕전은 초나라를 상대로 1년 동안이나 대치하며 기회를 노렸고, 이목 또한 흉노족과 환의와의 전투 초기에는 수비적인 전략을 선택했다. 두 명장이 수비를 선호했다면 이들이 대처한 전황은 첫 교전 이후 자연스레 교착에 빠졌을 것이다.

결국 진나라는 곽개를 매수하여 이목을 제거했고,[5] 이목이 사라지자 왕전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기원전 228년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한편, 조나라의 왕족 (嘉)는 대(代)라는 지역으로 피신하여 대나라의 왕을 자칭하고 연나라와 연합해 세력을 키웠다.

2.2. 연나라의 멸망

조나라가 멸망하자 연나라는 진나라와의 전쟁을 막아보고자 했다. 그래서 기원전 227년에 연나라는 형가를 보내 진왕(훗날의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분노한 진나라는 연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왕전과 신승(辛勝)이 지휘하는 군대를 출진시켰다. 왕전이 지휘하는 진군은 연군을 두 차례 크게 격파했고, 기원전 226년에는 연나라의 도성 계(薊)를 함락시켜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연나라의 왕 희는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연의 잔존 세력은 기원전 222년, 제나라 멸망을 앞두고 대나라와 함께 왕전의 아들 왕분에게 멸망당했다.

2.3. 초나라의 멸망

왕전은 뛰어난 전과를 올린 장군이었지만, 나이가 들자 진왕도 그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진왕은 초나라 정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왕전은 적어도 60만은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신은 20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진왕은 이신의 안을 택했고,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왕전은 퇴직하고 빈양으로 물러났다.[6] 이신과 부장 몽염의 20만 대군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으나, 초의 명장 항연의 책략에 대패하고 말았다.[7]

다급해진 진왕은 왕전을 직접 찾아가 다시 복귀할 것을 청했다. 재차 60만 대군을 요구해서 진왕의 승낙을 받은 왕전은 몽무를 부장으로 삼아[8] 초나라를 정벌하러 출전했다. 이 60만 대군은 당시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어서 진왕은 내심 반역을 걱정했다. 이를 간파한 왕전은 출전하기 전에 자신은 진나라를 위해 싸웠음에도 제후에 임명되지 못했다고 호소하며 보상을 청했고, 초나라군과 대치하는 동안에도 수차례 사자를 보내서 자손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는 많은 토지와 저택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고 왕전에게 묻자, 왕전은 반란을 걱정하는 진왕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나라를 통째로 먹을 생각이라면 굳이 왕에게 보상을 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재물을 요구하여 자신은 반역자가 아니라 수당을 바라는 충직한 부하라는 것을 계속 강조했던 것이다.

왕전의 보신책은 단지 본인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변한 전쟁의 속성[9]을 파악한 왕전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장기전을 계획했다. 그는 이전의 승리로 사기가 오른 초나라군을 약화시키고 쉴새없이 전쟁에 동원되어 지친 진나라군을 쉬게 하다가, 단번에 승기를 잡아 전세를 기울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기전은 군주에게 의심을 받아 틀어질 위험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바로 전 세대에는 멀쩡한 지휘관이 교체되는 바람에 허무하게 끝난 장평대전이라는 전례가 있었고, 왕전 본인도 이목이 조나라 조정의 신뢰를 잃는 바람에 제거당하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이었다. 염파와 이목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왕전은 진왕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미 진왕의 눈 밖에 난 전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신하를 굳게 믿은 세종대왕마저 김종서를 의심한 것[10]을 감안하면,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진왕[11]에 대한 왕전의 처세는 합리적이었다.

왕전의 보신책은 적중했다. 진왕은 안심하며 왕전을 교체하지 않았고, 왕전은 초나라군을 상대로 1년 동안 장기전을 벌일 수 있었다.[12] 대치하는 과정에서 진나라의 병사들은 투석, 멀리뛰기 시합을 할 정도로 체력이 쌓였고, 이를 들은 왕전은 이제야 싸울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초군은 수차례 싸움을 걸어도 진군이 응하지 않자 결국 후퇴했고, 기회를 잡은 왕전은 단 한 번의 전투로 초군을 대대적으로 격파했다. 이후에는 최후의 저항을 하던 항연창평군을 몽무와 함께 출진하여 죽였고,[13] 수도까지 점령하여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전은 이 기세를 앞세워 장강을 건너 남진해 백월(百越)까지 공략했다.

이 대공을 인정받아 왕전은 무성후(武成侯)에 봉해졌고, 아들 왕분 또한 상술했듯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나라의 잔당은 물론이고, 위나라와 제나라도 멸망시켰다. 부자가 여섯 나라 중 다섯을 멸망시킨 것이다. 덕분에 왕씨 가문은 몽오, 몽무, 몽염으로 이어지는 몽씨 가문과 함께 진나라 군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다.

3. 사후

손자 왕리는 진시황 사후 초한쟁패 혼란기 때, 항연손자항우에게 거록대전에서 패해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왕리의 자녀가 살아있었는지 왕전의 증손 왕원의 일맥이 한나라때 낭야에 정착한다. 바로 낭야 왕씨로, 이후 명문가 중 하나로 번성한다.

4. 평가

사마천은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왕전에 대하여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섯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왕전은 숙장(宿將)이 되었으니, 진시황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라고 말하며 그의 능력을 극찬하였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폭정을 막지 않고 일신의 안녕만을 추구하였다며 왕전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나아가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생각해 보면, 쿠데타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왕전이 진시황의 폭정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백기왕전열전 마지막 비판은 다소 급진적이고 과도하다.

왕전의 생애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기전파목'으로 같이 엮이는 백기, 염파, 이목과 달리 정치력 또한 뛰어났다는 점이다. 전근대의 장군에게 왕과 밀고 당기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정치력은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나 중국사를 통틀어 그런 능력까지 갖춘 장군은 매우 드물었다. 당장 희대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한신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부터가 군사적 능력과는 별개로 처신이 형편없어 행동거지를 경솔하게 가지다 숙청당했고, 서양사에서도 벨리사리우스 같은 명장들조차 목석같은 정치력 때문에 왕에게 받아야 할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큰 고생을 했다.

하지만 왕전은 의심 많기로 유명한 진시황 밑에서도 기가 막힌 처신을 해냈고, 결국 일신의 안위와 함께 국가의 안녕까지 같이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적당히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을 취해 받아낼 수 있는 지원은 몽땅 받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작전까지 관철하여 결국은 최대의 난적인 초나라까지 멸망시켰다. 본인의 진짜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진왕에게 자기 가문의 실속까지 알차게 뜯어냈으니 '기전파목' 중에서 성과가 가장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왕전보다 더 큰 공을 세운 백기는 장평대전 이후 입안한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각하여 유배당하는 수모를 겪다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염파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밀려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니다 결국 쓸쓸히 죽었다. 이목도 곽개의 모함으로 죽었다. 장수는 전투만이 아니라 윗선과의 소통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4.1. 이목 vs 왕전?

이목과 왕전은 각자만의 장점이 있다. 두 명장 모두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있었기에 춘추전국시대 최고 명장의 반열에 올랐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목은 흉노의 10만 기병을 전멸시켰고, 강대국 진나라를 상대로 조나라를 끝까지 지켰다. 이 과정에서 보인 행적을 보면, 전술적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왕전은 중국 통일을 위한 전략과 정치력을 갖춘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상술했듯이 당대의 전쟁, 특히 통일을 위한 전쟁은 대군과 경제력과 인내심을 요했다. 이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입증하듯이 최고통수권자와 원만한 관계가 필수적인데, 왕이라는 전근대적 권력자, 그것도 가혹한 법으로 악명높은 진나라의 의심 많은 진시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정치력이 부족한 이목이 진나라에 있었다면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을 수 있고, 전술적 능력이 비교적 부족한 왕전이 조나라에 있었다면 조나라는 훨씬 빨리 멸망했을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

5.1. 심진기

2001년 드라마 심진기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여불위 휘하의 젊은 장수였으나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여불위에게 버림받고 진왕에게 충성했으며 후에 반란을 일으킨 여불위를 체포했다.

2018년 리메이크작에선 여불위 휘하의 장수로서 역병걸린 마을 출입통제 담당자로 처음 등장한다. 줄 잘못타서 좌천됐다고 병사들에게도 무시받으며 왕전도 자포자기한 상태로 술에 취해 신세한탄을 한다. 군법을 어긴 병사들을 수십명이나 처형했을 정도로 군 기강에 진심인 장군이며 북을 이용해 명령이 전달되도록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조나라와의 전쟁에서 조나라 장군으로 출전한 젊은 영정의 가슴에 직접 화살을 박기도 했다.

5.2.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67.jpg
삼국지 12, 13

코에이삼국지 11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며 특기는 구축이나, 능력치는 통솔력 92를 제외하면 무력 71/지력 75/정치력 68/매력 79로 그야말로 평범함의 극을 달린다. 백기도 평가절하라는 평을 받지만 통솔력과, 적성, 특기(투신)는 최상급인데 왕전은 무력 관련 특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무력이 71에 불과하고 적성도 궁병만 S로 훨씬 처참하다. 백전노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노장 이미지가 있는 황충, 엄안, 황개가 친애무장이다.

삼국지 12에서는 매력 삭제에 따라 다른 능력치가 상승됨으로써 제법 쓸 만한 무장이 되었는데, 통솔력 94/무력 72/지력 82(삼국지 11때보다 무려 +7)/정치력 68이고, 병과는 창병이며 전법은 손권과 같은 전군방호가 주어졌다. 다만, 일반적인 해금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고 꼼수가 필요하다.

삼국지 13에 경우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보다 무력이 1 감소한 것 외에 변화는 없다. 중신특성은 궁술조련으로 궁 적성강화가 붙어 있고, 자신도 병과적성이 창병 B/기병 B/궁병 S라서 궁병대 운용말곤 다른 길이 없다. 통솔력이 90대라 군무중신 임명 시 명령을 2개 실행 가능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특기가 부실해서 잡 무관에게도 탈탈 털리니 막싸움은 철저히 피해야 한다. 특기는 훈련 8/순찰 6/위풍 5/신속 6/공성 8/견수 8, 전법은 공수지휘.

5.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파일:조온_왕전.png
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도독계고 성우는 이민규이다. 대사가 전부 바둑 용어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

5.4. 킹덤(만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왕전(킹덤)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5. 묵공

파일:external/www.etobang.com/d05fc248782b1d184e872e47d75e82e8_6b7ZytBsOVD9oKTdAo.jpg
진나라의 장수이자 악역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엄청난 전공을 쌓았던 장군이건만, 작중에서는 그야말로 삼류악역의 포스를 팍팍 풍긴다. 척봐도 변태아저씨 같이 볼품없는 외모에 성격도 영 찌질하게 묘사되는 편이다. 그나마 작중에서는 나름 명장으로 이름이 높다는 언급도 있지만, 그가 명장이란 말을 듣고 혁리의 동료 란주는 어이없어할 정도로 사람들이 못 미더워할 지경. 주인공 혁리와 치열하게 싸우다 죽은 초반의 주적 항엄중과 비교해보면 카리스마와 존재감 모두 후달린다.

첫등장 시의 모습부터가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여자 자객을 발가벗겨서 알몸으로 만들어버린 후, 사지를 말에 묶어서 찢어버리는 거열형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며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등 영락없는 저질이다.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혁리 일행에게 내내 고전하기만 하다가 막판에 끔살당한 언니의 복수를 노리던 낭에게 당해서 한칼에 이승 하직한다.

저 압박스러운 1:1 가르마는 나름대로 충실한 고증에 속한다. 실제로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 중에서도 장군 계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딱 저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묵공 만화에선 진나라군 갑옷같은 것은 고증을 잘했지만 그외는 상술된 왕전만 봐도 알듯이 진짜로 약 빨고 고증을 해놨기에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1]산시성(섬서) 웨이난시의 일부[2] 백기 당시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으로 국력은 키웠지만 영토 자체는 다른 6국에 비해 그렇게 크게 우월하진 않았는데, 백기가 무패 전설을 쓰며 주변 모든 나라를 다 쓸어버려서 단숨에 진나라를 전국 7웅 중 확실한 최강국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기반을 가지고 왕전이 끝내 주변국을 다 멸망시키며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켰다. 그래서 군공으로만 따지면 백기와 왕전이 춘추전국시대에서 가장 뛰어난데, 그런 백기와 왕전을 막아낼 수 있었던 당대 유일한 장수가 조나라의 염파와 이목이었기에 이 둘도 백기 및 왕전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실제로 백기와 왕전은 모두 염파와 이목(다만 백기와 염파는 둘 모두 장평대전에 참전하긴 했으나, 염파의 경질과 백기의 교체 시기가 거의 동일하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실제로 맞붙었을지는 의문이며 왕전은 이목과 싸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을 힘으로는 꺾지 못했고, 뒤로 손을 써서 첩자와 유언비어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실각시켜 승리를 거뒀다.[3] 한신정형전투를 치른 곳이다.[4]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저서기는 하나, 사기와 더불어 공통적으로 왕전이 이목을 이기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왕전은 이목의 방어를 뚫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5] 《사기》에서는 진나라 조정이 뇌물을 먹였다고 하고, 《전국책》에서는 왕전이 직접 곽개를 매수했다고 한다.[6] 《사기》의 <백기왕전열전>에 의하면, 진왕이 왕전과 이신의 말을 동시에 듣고 왕전도 늙었다고 평하며 이신을 칭찬하고 그의 안을 택했다.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진왕이 왕전과 이신을 은밀히 3자대면한 게 아니라면 왕전은 보는 눈이 많은 조정 한복판에서 왕에게 대놓고 늙었다며 구박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설사 진왕이 왕전과 이신을 은밀히 만났다고 하더라도, 젊은 이신의 면전에서 왕전을 구박한 시점에서 왕전의 입지는 수직으로 하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쪽이든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왕전이 위기를 느낄 만했던 것이다.[7] 이신과 몽염의 패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들의 패배는 <왕전 열전>에만 나오고, <초세가>, <진시황 본기>, <이장군 열전>, <몽염 열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기록이라 교차검증이 안된다.[8] <몽염 열전>에 몽무가 왕전의 부장으로서 초나라와의 전쟁에 종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9] 철기시대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전국시대부터 대량 생산되기 쉬운 철기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물량전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0] 김종서가 북방에 부임한 지 5년이 지난 후 김종서에 대한 악평이 돌기 시작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거짓말이라며 일축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김종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때맞춰 범찰이라는 이가 300여 호를 이끌고 이만주에게 귀순한 후 세종에게 김종서에게 죄를 지어 어쩔 수 없었다는 글을 보내자, 세종은 김종서의 작은 허물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런 일까지 일어나니 부끄러울 뿐이라며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행히 황보인의 노력 덕에 김종서는 의심을 벗어났고, 이후 김종서에 대한 악평은 박호문의 음해로 밝혀졌다. 박호문은 사형을 받아 마땅했으나 여진 정벌때 공을 세운점과 독자라는걸 감안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를 갔다.[11] 동생 성교의 난, 친어머니 조희와 노애(嫪毐)가 일으킨 난, 여불위(呂不韋)의 전횡을 겪었다.[12] 이를 두고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국력 차이가 이미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만큼 크게 났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만이 패하자 60만을 보내며, 그 60만을 1년 동안이나 먹여살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왕전의 군대는 매일 양과 소를 잡고 훈련을 시켜 사기를 높였다고 하니, 훈련병들은 굶주리기는 커녕 주기적으로 고기까지 먹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13] <몽염 열전>, <초세가>, <진시황 본기>에 왕전과 몽무가 항연과 창평군을 죽이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의 기록이 조금 엇갈린다. <몽염 열전>에 의하면 몽무는 왕전이 60만 대군과 함께 출진했을 때부터 왕전의 부장으로 종군하여 그와 함께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항연을 죽였으며, 다음해에 초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초나라의 왕 부추를 생포했다. <초세가>에서 몽무는 왕전이 항연을 죽인 후에 등장한다. <몽염 열전>과 <초세가>는 창평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진시황 본기>에 의하면 항연은 왕전이 초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후에야 창평군을 초나라 최후의 왕으로 옹립했고, 이후에 몽무가 등장하여 왕전과 함께 항연 및 창평군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