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파목(起翦頗牧) | |||
백기 | 왕전 | 염파 | 이목 |
기전파목(起翦頗牧) 이목 李牧 | ||
봉호 | 무안군(武安君) | |
성 | 영(嬴) | |
씨 | 이(李) | |
명 | 촬(繓) | |
자 | 목(牧) | |
최종직위 | 상방(相邦) | |
고향 | 불명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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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의 장수. 본명은 이촬(李繓)이고, 자가 목(牧)이지만, 본명보다는 이목(李牧)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기전파목에서 나머지 3명은 다 본명인데 본인 혼자만 본명이 아닌 자로 기록될 정도니...춘추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명장들 중 한 명이자, 중국사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명장 가운데 한 명이다. 북방을 지키면서 10여 년 동안 흉노(匈奴)를 상대로 싸워 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고,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진나라를 상대로 방어와 수성에서 무패의 기록을 세웠다. 공격과 공성에 있어서 무패의 기록을 가진 백기와는 대비되는 기록이다. 《천자문》에서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의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았다.
2. 흉노와의 전쟁
이목은 장군으로 부임한 이후, 조나라 북쪽의 국경지대인 대(代)와 안문(雁門)에서 장군직을 역임했다. 조나라는 당시 중국 최북단에 위치했기에, 이목은 장군으로 부임하자마자 흉노와의 접경 지대로 발령받은 것이다. 당시의 흉노는 훗날의 한나라 시대만큼 막강한 세력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그 당시만 해도 툭하면 중국을 괴롭히고 뒷목을 잡게 만들 정도의 저력은 지니고 있었다. 진나라의 몽염에게 박살나 약해진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이목은 부임하자마자 두 가지 규율을 강조했다. 첫 번째는 흉노의 목을 베고 온 자를 마찬가지로 참수해 버리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흉노가 쳐들어 올 경우엔 모든 백성과 군사가 즉시 성벽 안으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또한 곳곳에 봉화 등을 설치하여 흉노의 움직임 또한 기민하게 파악함으로써 흉노에 대한 사전 및 사후 대처를 완벽히 준비하니, 이목이 부임하던 시절엔 흉노에 대한 피해가 전무하다시피 했고 반대로 흉노는 이목의 대처 탓에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이목은 직접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오로지 훈련에만 전념했다.
이런 이목에 대한 대외적인 시선은 좋지 않아, 흉노는 물론 부하들 사이에서도 이목이 겁쟁이라는 말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결국 이목의 행보가 한단의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조나라 왕[1]은 이목을 크게 질책하며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했으나 그는 계속 방어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자 왕은 이목을 파직하고, 다른 장수를 부임시켰다. 이목의 후임으로 온 새로운 장수는 이목과는 정반대로 흉노가 보이는 족족 그들과 교전을 펼쳤으나, 매번 지기만 하고 제대로 된 성과를 올리지 못해 결국 북쪽 국경 일대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한단의 중앙 조정과 북쪽 국경 담당자 등 모두가 이목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다시 불러오고자 했으나 이목은 이때도 주변의 말을 전부 무시한채, 꾀병을 부리며 가택에서 버티기만 했다. 결국 조정에서 억지로 명령을 내리며 이목을 북방으로 보내려 하자, 그는 앞으로도 자신이 원래 하던 방침을 고수하겠다면서, 간섭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이에 왕은 이목의 담당구역에 대한 전권을 주고, 일절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으며, 그제서야 이목은 북방으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 이목은 원래 방침대로 방어적인 태도만 고수했으니, 이런 그의 태도에 흉노는 그저 그가 겁쟁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금 조나라의 북방은 회복되기 시작했고 손실이 사라졌으며, 자연스레 조나라의 군수품과 군마, 군인들이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邊士日得賞賜而不用,皆願一戰。
변방의 병사들은 날마다 상을 하사받았으나, 쓰이지 않자 모두 한 번 싸우기를 바랐다.
於是乃具選車得千三百乘,選騎得萬三千匹,百金之士五萬人,彀者十萬人,悉勒習戰。
이에 수레 1,300대를 골라서 갖추고 말 13,000필을 골라서 돌격대 50,000명과 활을 잘 쏘는 사람 100,000명을 뽑아 모두 싸움을 익히게 했다.
大縱畜牧,人民滿野。
크게 가축을 들에서 기르니 백성이 들판에 가득했다.
匈奴小入,詳北不勝,以數千人委之。
적은 수의 흉노가 들어오자 거짓으로 패하며 수천 명을 내버려두었다.
單于聞之,大率衆來入。
선우(單于)가 이를 듣고 많은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李牧多為奇陳,張左右翼擊之,大破殺匈奴十餘萬騎。
이목은 많은 기이한 진법을 보여 좌우의 날개를 펴서 치니 흉노의 기병 100,000명을 크게 무찌르고 죽였다.
滅襜襤,破東胡,降林胡,單于奔走。
담람(襜襤)을 멸하고 동호(東胡)를 무찌르며, 임호(林胡)를 항복시키자 선우가 달아났다.
其後十餘歲,匈奴不敢近趙邊城。
그 후 10년 동안, 흉노는 감히 조나라 변방의 성 근처로 오지 못했다.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
변방의 병사들은 날마다 상을 하사받았으나, 쓰이지 않자 모두 한 번 싸우기를 바랐다.
於是乃具選車得千三百乘,選騎得萬三千匹,百金之士五萬人,彀者十萬人,悉勒習戰。
이에 수레 1,300대를 골라서 갖추고 말 13,000필을 골라서 돌격대 50,000명과 활을 잘 쏘는 사람 100,000명을 뽑아 모두 싸움을 익히게 했다.
大縱畜牧,人民滿野。
크게 가축을 들에서 기르니 백성이 들판에 가득했다.
匈奴小入,詳北不勝,以數千人委之。
적은 수의 흉노가 들어오자 거짓으로 패하며 수천 명을 내버려두었다.
單于聞之,大率衆來入。
선우(單于)가 이를 듣고 많은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李牧多為奇陳,張左右翼擊之,大破殺匈奴十餘萬騎。
이목은 많은 기이한 진법을 보여 좌우의 날개를 펴서 치니 흉노의 기병 100,000명을 크게 무찌르고 죽였다.
滅襜襤,破東胡,降林胡,單于奔走。
담람(襜襤)을 멸하고 동호(東胡)를 무찌르며, 임호(林胡)를 항복시키자 선우가 달아났다.
其後十餘歲,匈奴不敢近趙邊城。
그 후 10년 동안, 흉노는 감히 조나라 변방의 성 근처로 오지 못했다.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
싸울 준비를 끝낸 이목은 본색을 드러내 조나라와 흉노 사이의 평원에 보란 듯이 전차 1,300대, 기병 13,000기, 보병 50,000명과 궁병 100,000명이라는 대군을 주둔시켰다. 흉노도 이런 이목의 태도를 의심하며 먼저 정찰 목적으로 선봉대를 보냈으나, 이목은 퇴각하는 척하며 수천 명의 조나라 군사를 내버려두었다.
흉노의 선우는 이를 약탈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습격했지만 이목은 '기묘한 진세'를 펼쳐 미끼를 문 흉노군을 포위, 섬멸했다. 그 결과 흉노는 전투 한 번에 100,0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고, 선우 본인도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패퇴하게 되었다. 북방의 이민족들 중 담람이라는 부족은 아예 전멸했으며, 동호는 궤멸당한 뒤 도주했고, 이를 본 임호는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흉노를 포함한 북방 민족들이 입은 피해가 엄청나, 이후 10년 동안 조나라 국경에 얼씬도 못했을 정도였다.
2.1. 이목이 흉노를 물리친 시기는?
이목의 행적이 기록된 어느 저서에도 (<염파인상여 열전>, <조세가>, <흉노 열전> 및 <진시황 본기>) 흉노를 물리친 시기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역사학자들마다 이 시기에 대한 추측이 갈린다. 예를 들어, 이목 본인의 이야기가 기록된 <염파인상여 열전>과 <흉노 열전>에는 당시 이목이 섬겼던 조나라 왕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저 조왕(趙王)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여러 창작 매체에서 이목의 나이가 제각기 다르게 묘사되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나이를 많이 잡으면 염파, 황충같은 노익장이 될 수도 있고, 나이를 적게 잡으면 평범한 중년 나잇대의 장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흉노의 기록으로 이목의 활약 시기를 유추하자니 조효성왕~조유류왕 시기에는 아예 나오질 않기 때문에 상당히 추측하기 어렵다. 일단 중국 위키피디아는 기원전 265년에 이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하는데,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편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혁해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가르쳐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을 무찌르고 그곳에 장성을 쌓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지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군을 설치했다.
(중략)
당시 중국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 후에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사기》 <흉노 열전>
(중략)
당시 중국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 후에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사기》 <흉노 열전>
(기원전 272년) 26년에 동호(東胡) 변경의 불모지를 취했다.
《사기》 <조세가> -조혜문왕-
《사기》 <조세가> -조혜문왕-
먼저 조나라측의 기록에서 이목이 파견된 안문에 조나라의 군이 설치된 시기는 조무령왕 시기로,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그 후 조혜문왕 시기인 기원전 272년, 동호라는 흉노족이 언급되는데 이 동호는 이목이 격퇴시킨 부족이다. 이후로는 조나라측의 기록에서 흉노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원전 272년을 전후하여 이목이 흉노를 물리쳤다는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전투가 벌어진 시기를 기원전 272년~260년으로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기원전 260년에 발발한 장평대전에서 조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이 시기 이후로는 아무리 이목이 훌륭한 장수였다고는 해도 흉노를 격퇴하는데 있어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었다.
- 만약 이목이 기원전 272년 이전에 안문에 부임하여 동호를 비롯한 흉노를 격퇴하고, 조혜문왕 시기에 흉노가 도망친 땅을 개간했다고 가정한다면 이목의 나이가 너무 많아진다. 이목이 기원전 272년 당시 굉장히 젊은 장수여서 25세였다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297년 출생이고, 죽은 시기가 기원전 228년이면 69세의 나이로 염파급의 노익장을 보여주었다는 것인데, 《사기》를 비롯한 어떤 저서에서도 이목이 당시 노인이었다는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물론 중국 위키피디아의 기록대로 기원전 265년에 흉노를 물리쳤다고 봐도 매우 나이가 많은 편이긴 하다. 이목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 하더라도 기원전 290년 출생인데, 이렇다면 기원전 228년엔 62세이다.
- 일단 <흉노 열전>을 읽어보면 이목보다 먼저 동호를 비롯한 흉노들을 무찌른 장군으로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언급되는데. 동북아역사재단의 추측으로는 진개가 흉노를 꺾은 시점이 기원전 281년이라고 한다. 진개의 손자인 진무양이 시황제 암살을 위해 형가가 고용한 장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기원전 281년은 연나라 최고의 전성기였던 연소양왕의 재위기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타당한 추측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하여 추측한다면,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기원전 281년에 연나라의 진개가 동호를 비롯한 흉노들을 격퇴시켜 연나라 및 조나라 북부에는 흉노의 침입이 적었고, 기원전 272년 조혜문왕의 시점에는 동호의 영역 근처까지 개간을 확대했다. 그러나 그 이후인 기원전 265년 시점에는 흉노가 다시 힘을 길러 침입해왔는데, 이때 이목이 흉노를 무찔러 큰 피해를 입은 흉노는 진나라의 몽염 시절까지 활약하지 못했다.
3. 진나라와의 사투
이목이 진나라와 치른 전투들의 위치를 정리한 글이목의 활약과는 반대로 조나라의 정계는 계속 썩어가고만 있었다. 장평대전의 참패로 약해진 조나라를 노린 연나라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간신 곽개는 과거 자신을 비난한 명장 염파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모함하여 해임시켰다. 때문에 염파는 분노하여 후임인 악승(樂乘)의 부대를 습격한 후, 그대로 위나라로 망명했다. 거기에 도양왕(悼襄王)이 창씨라는 여자에게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자 이목은 그녀가 한 집안을 망하게 한 요녀라며 격하게 반대했으나, 도양왕은 이런 이목의 직언을 무시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2]
일단 《열녀전》은 신뢰도가 매우 낮은 저서이기는 하나 이목은 당시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상방이기는 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왕이 막 천하를 아우른 다음 상국과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날 한나라 왕은 땅과 옥새를 바치면서 울타리와 같은 신하가 되길 청했다. 얼마 뒤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합종하여 진나라를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과인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조나라 왕이 그 상국 이목(李牧)을 보내 맹서를 약속하기에 그 인질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 맹서를 어기고 우리 땅 태원에서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잡았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대왕으로 자립하였기에 병사를 일으켜 쳐서 없앴다. 위나라 왕도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한, 조나라와 진나라를 습격하려 하기에 진나라 군대가 토벌하여 그들을 깨부수었다."
《사기》 <진시황 본기>
"지난 날 한나라 왕은 땅과 옥새를 바치면서 울타리와 같은 신하가 되길 청했다. 얼마 뒤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합종하여 진나라를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과인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조나라 왕이 그 상국 이목(李牧)을 보내 맹서를 약속하기에 그 인질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 맹서를 어기고 우리 땅 태원에서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잡았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대왕으로 자립하였기에 병사를 일으켜 쳐서 없앴다. 위나라 왕도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한, 조나라와 진나라를 습격하려 하기에 진나라 군대가 토벌하여 그들을 깨부수었다."
《사기》 <진시황 본기>
기원전 243년, 조나라의 태자가 진나라에서 돌아왔다.[3]
《사기》 <육국 연표>
《사기》 <육국 연표>
이목이 버티던 북쪽 방면을 뺀 대부분의 국력이 쇠락한데다가 염파마저 잃은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통일 대업을 시작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조나라는 진나라의 왕전, 환의, 양단화의 공격으로 인해 업을 포함한 9개의 성을 뺏겼으며, 이후 조나라 장군 호첩이 환의에게 죽고 군사 10만 명의 목이 베이는 듯 큰 피해를 본 상태였다.
당시 조나라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 태행산맥 가운데의 성들인 태원과 요양을 진나라가 점령했다. 따라서 진나라군은 태행산맥을 넘어 수도 한단 북쪽을 공격할 수 있었다.
- 지형을 보면 알겠지만 업부터 한단까지는 험준한 지역이 아닌 완전한 평야지대다! 다만 당시에는 추가적으로 요새와 장성이 한단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고는 한다.
- 장평대전의 45만 포로 학살 이후로도 조나라군의 피해는 《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190,000명에 달한다.[4] 게다가 이 숫자는 염파가 승리한, 정말 나라가 망할 위기였던 연-조 전쟁의 사상자수를 비롯한[5] 여러 전투의 사상자가 포함되지 않은 집계이기에 실제 피해는 이것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높다.
이목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진나라군의 침공을 연거푸 꺾는다. 괜히 백기, 왕전, 염파와 같은 기전파목의 일원에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닌 것이다.
기원전 233년 이목은 조나라 장수 호첩을 전사시킨 진나라 장수 환의와 맞붙었고, 예전에 흉노를 상대했던 때처럼 전투를 피하며 수비에 열중하면서도 장병들을 잘 먹이고 푹 쉬게 하면서 훈련을 시켰다. 의안에서 수성만 고수하던 이목을 끌어내기 위해 환의가 비하를 치러 출정하자, 이목은 바로 환의군의 본진을 습격하여 함락했다. 환의는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회군했으나, 이목은 귀환하던 환의군을 일부의 병력으로 정면을 막은 뒤 주력을 양쪽으로 나눠 협공하는 기동전술을 펼쳤고, 환의군은 사상자가 100,000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비하 전투라고 하는데, 이는 전국시대 말기 전투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전투였다. 이 비하 전투의 대승으로 이목은 조유류왕으로부터 무안군의 칭호를 받았다.[6][7]
이목은 기원전 232년에 다시 쳐들어온 진나라의 대군을 번오에서 철벽수비로 막아냈다.[8]
3년 뒤인 기원전 229년 진나라는 왕전과 양단화, 강외를 대장으로 다시 공격했다. 당시 《사기》의 기록은 이러하다.
시황제 18년(BC 229년), 군사를 크게 내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를 이끌고 정형(井陘)[9]을 공격했고, 양단화가 하내의 군사를 거느렸다. 강외(羌瘣)가 조나라를 토벌하고 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시황제 19년(BC 228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인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
시황제 19년(BC 228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인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
여기서 왕전이 이끈 진나라군이 공격한 정형은 의안 근처에 있는 성이므로 왕전은 태행산맥을 넘어서 한단의 북쪽에서 침공한 것이고, 양단화가 진나라군을 이끌고 출발한 하내(河內)라는 곳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만약 황하의 안쪽이라고 하면 황하의 이북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내가 '하내현'을 의미한다면 위(衞)[10]의 땅이었던 하내현을 뜻한다. 일단 어느쪽이건 양단화는 왕전과 달리 한단 남쪽에서 침공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정황을 보자면 양단화가 남쪽, 왕전이 북쪽에서 진군하여 조나라의 수도를 쌈싸먹기하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고, 게다가 앞서 설명했지만 요새와 도시들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한단 주변은 평야지대다!
18년에 왕전은 병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공격하길 1년 남짓, 마침내 조나라를 무너뜨리니 조왕은 항복했다. 이렇게 조나라의 땅을 모두 평정하여 군으로 삼았다.
《사기》 <백기왕전 열전>
《사기》 <백기왕전 열전>
7년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의 대장 이목, 장군 사마상(司馬尙)이 반격했다. 이목이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은 파면되었다. 조총(趙怱)과 제나라의 장수 안취(顔聚)가 그들을 대신했다. 조총의 군대는 격파당하고, 안취는 도망쳤다. 조왕 천이 항복했다.
8년(기원전 228년) 10월에 한단이 진나라의 땅이 되었다.
《사기》<조세가> -조유류왕-
8년(기원전 228년) 10월에 한단이 진나라의 땅이 되었다.
《사기》<조세가> -조유류왕-
여기서 이목과 사마상(司馬尚)은 진나라군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하여 조나라 멸망의 위기를 잠시나마 막아냈다.[11] 《사기》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기원전 229년에 시작된 전쟁이 기원전 228년 10월에서야 끝나 조나라가 멸망했으니, 이목은 1년 동안 진나라로부터 조나라를 지킨 것이다.
이로써 조나라는 한창 승승장구하던 진나라의 기세를 잠시나마 꺾어놓을 수 있었다.
3.1. 왕전은 이목에게 패배했는가?
왕전이 이목에게 패배했다는 주장이 정리된 글왕전이 이 전쟁에서 이목에게 패배했느냐, 패배하지 않았느냐는 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 너무나 기록이 부족하여 알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왕전이 이목에게 패배했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당시 조나라의 상황은 수비를 굳히고 장기전으로 들어가도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조나라는 1년 가량 버텼다.[12] 이는 진나라군이 큰 피해를 입어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했다면 가능한 일이며, 이목이 죽자 마자 왕전이 이끄는 진나라군이 바로 공세로 전환한 이유도 왕전이 이목에게 패배했다면 이목을 매우 두려워 했을테니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 이때 진나라군이 공격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조나라군은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전쟁의 사상자에 기원전 231년에는 조나라 북부에 대지진이 있었고, 기원전 230년에는 대기근까지 일어나는 등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중한 왕전이라도 망설임없이 이목과 정면승부를 벌일 만한 상황이었다.
- 왕전은 태행산맥을 넘어 정형을 공격했는데, 지형이 매우 험한 산길이어서 훗날 초나라에서 보여주는 수비적인 장기전으로 들어가기엔 보급 상황이 썩 원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정형만 뚫는다면 그 다음은 무방비 상태인 조나라 북부~동부를 그대로 공격 가능하며, 수도 한단을 포위한 양단화의 진나라군을 통하여 보급문제까지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 조나라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목도 장기전을 노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적극적으로 왕전을 도발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에 더해 왕전이 패배했음에도 시황제에게 별다른 문책을 받지 않은 이유 또한 충분히 설명 가능한데, 이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왕전이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전파목'으로 엮이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당시 이목과 왕전의 위상 차이는 굉장히 컸다. 왕전이 이때 명장 대접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 염파, 백기, 이목에 비견될 전공을 올리지는 못했으나 이목은 이미 조나라의 구국영웅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명장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목에게 왕전이 패배했다 하더라도 참작이 가능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패배를 잘 수습했으리라는 정황 증거도 있는데, 당시 이목은 빠르게 한단 전선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왕전을 무찌른 다음 추격 섬멸을 오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전은 패배했다 할지라도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진나라 군대를 잘 수습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왕전은 큰 실책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이목의 전술이 너무 뛰어나 패배한 것이었고, 시황제는 당시 상황을 감안하여 왕전의 패전을 크게 따지지 않고 넘어갔으리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3.2. 봉호인 무안군의 의미에 대한 논란
전국시대에 무안군이라는 봉호를 받은 사람은 총 3명이었는데, 합종책을 주장한 소진, 기전파목의 필두인 백기, 그리고 이목이었다.전국시대의 봉호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왕에게 하사받은 땅의 이름을 따온 봉호고, 다른 하나는 영지를 받지 않는 대신 특별한 의미를 담아 지은 봉호이다.[13]
당나라 시기 장수절(張守節)이 쓴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병사를 잘 훈련시키고, 싸우면 지지 않아 백성을 편안하게 했으므로 무안이라 칭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백기는 당대의 명장이었으므로 이 의미로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소진과 이목의 경우에는 봉호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조나라의 수도 한단 근처에 무안(武安)이라는 도시가 정말로 있었기 때문이다.[14] 소진의 경우에는 군을 지휘할 일이 딱히 없었으니 무안 땅의 이름을 따서 봉호를 받은 것이라 추측되는데, 이목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다. 어느쪽으로 보아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쪽의 인식으로는 이목이 무안 땅을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 백기에 비견될만한 명장이기에 무안군에 봉해졌다는 의견이 더 많다. 소설이기는 하나 명나라 시기에 쓰여진 《동주열국지》 105편에서 이목이 진나라 장수 환의를 꺾고 난 뒤, 조유류왕이 이목에게 '그대는 과인의 백기와 같다!' 라고 크게 기뻐하며 무안군으로 봉했다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면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4. 죽음과 조나라의 멸망
진나라는 이목이 있는 이상 조나라를 멸망시키긴 힘들다고 판단한 후, 염파를 모함했던 간신 곽개를 매수해 이목을 모함했다. 곽개의 말에 넘어간 조유류왕은 이목을 해임했다.[15]이목의 최후는 확실하지 않은데, 각 사서는 그의 최후를 다르게 서술한다. 《전국책》에 의하면 곽개가 아닌 한창(韓倉)이라는 대신의 모함을 받았고,[16] 이목은 궁궐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열녀전》에서는 곽개가 아닌 조유류왕의 어머니인 도양창후가 뇌물을 받고 나서 이목을 죽였다고 한다. 반면에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 <조세가>에 의하면, 조유류왕이 곽개의 모함을 듣고, 조총(趙蔥)과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 대신에 군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목이 명령을 따르지 않자 유류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정탐하다가 체포하여 죽이고, 사마상을 해임시켰다. <조세가> -유류왕-편에 나오는 사마천의 평가에서는
“나는 풍왕손(馮王孫)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조왕 천의 어머니는 노래하는 여자로 도양왕의 총애를 받았다.
도양왕은 적자(適者) 가(嘉)를 폐하고 천(遷)을 세웠다.
천은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았고, 아첨하는 말을 믿은 까닭에 훌륭한 장수 이목을 죽이고 곽개(郭開)를 기용하였다.’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조왕 천의 어머니는 노래하는 여자로 도양왕의 총애를 받았다.
도양왕은 적자(適者) 가(嘉)를 폐하고 천(遷)을 세웠다.
천은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았고, 아첨하는 말을 믿은 까닭에 훌륭한 장수 이목을 죽이고 곽개(郭開)를 기용하였다.’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처형을 피해 타국으로 망명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이목의 손자이자 한신(韓信)도 경계할 정도로 뛰어난 전략가였던 초한쟁패기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재건된 조나라에 중용되었다는 걸 보면, 이목의 집안은 조나라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의미이므로 신빙성은 낮다.
여기서 어떻게 이목 본인이 처형당했는데 가족들이 연좌제로 처벌받지 않고 손자가 살아남았나?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이목이 죽자 마자 진나라군은 바로 공세로 전환했고, 불과 3개월 만에 조나라가 항복한 것을 감안하면 조유류왕이 이목의 가족까지 죽이려고 할 겨를도 없이 나라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17]
이목이 죽고 사마상도 해임되자, 방해물이 완전히 사라진 진나라는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3개월도 안 되어서 도읍인 한단을 함락하고 조유류왕을 생포하여 조나라를 멸망시켰다.[18]
활약이나 능력 및 위치로 보면 그야말로 조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었고, 이목이 내부의 적에 의해서 쓰러지면서 국가가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염파처럼 조국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며 수 차례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지만, 결국은 모함을 받고 참수당했으니, 역시 내부의 적이 생겨나지 않게 하고 국론을 단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당서》<재상 세계표>에서는 연나라와 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의 장수 이신이 이목의 당조카(5촌)였다고 했지만, 정작 당태종 이세민 본인이 이연수에게 만들도록 시킨 《북사》에서는 먼 옛날에 갈라진 일족으로 나온다. 무엇보다도 당태종은 틈만 나면 역사책을 보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조작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이 직접 명령해서 만들게 한 역사책에 자기 족보가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면 그걸 그냥 놔둘까? 거기다가 1,000년 전 기록이라기엔 《신당서》의 <재상 세계표>는 쓸데없이 자세하다. 그러니까 《신당서》기록의 원전을 쓴 당나라의 누군가가 진나라의 이신은 놔두되, 조나라의 이목을 조작해서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5. 평가
기전파목 중에서 캐릭터성이 제일 부족하고[19] 화려한 활약이 적다보니 제일 저평가되었으며, 기전파목의 말석으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그러나 수도 한단 앞 50km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진나라군이 육박해 왔고, 자국인 조나라의 군인도 처절하게 많이 죽었으며, 대지진에 대기근까지 일어나는 등 하늘이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작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상황하에서도 조나라가 1년 넘게 버틴 것은 이목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백기나 왕전보다 더 뛰어난 활약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진나라와 조나라의 국력차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북베트남급으로 차이가 났다.[20] 그런데도 이목은 세 번씩이나 진나라의 침공을 막았는데 이는 백기, 염파, 왕전에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맹활약이며,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기전파목 중 전술적인 능력은 최고였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또한 진나라군을 막은 것 뿐만 아니라 흉노 토벌도 굉장히 높게 평가받는데, 이때 이목이 사용한 전술이 어찌보면 북방 기마민족을 상대하는 전술의 정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목은 정주민족이 어떻게 유목민들을 상대해야 하는지 모범적인 예시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오호십육국시대와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거치며 한족이 이민족에게 계속 패권을 내주었던 중국 현지에서 더 고평가를 하는 부분이다.[21]
5.1. 이목 vs 왕전?
이목과 왕전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명장이었으며, 둘의 장•단점도 꽤 차이가 난다.이목이 왕전보다 더 뛰어난 명장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흉노를 상대로 기병 100,000명을 전멸시켰으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나라를 연거푸 지킨 이목의 전술적인 능력을 높게 칠 것이다. 또한 이목은 왕전이 이끄는 진나라군을 상대로 1년 동안 조나라를 지키는데 성공하여 왕전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조나라군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목의 전술적 능력은 왕전보다 뛰어났다고 평할 수 있다.
그러나 왕전은 이목보다 전술적 능력이 떨어질지언정, 당시 중국 통일을 위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지휘하는데 꼭 필요한 정치력과 처세술은 매우 출중한 지휘관이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평가를 보면 알겠지만 명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단 장군이 확실하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기용을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왕전이 활약한 시기는 그 전의 전쟁과는 달리,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장기간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적국을 멸망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진나라군에 필요한 장수는 이목보다는 왕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통수권을 가진 시황제에게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자기 전략을 입안시키고 처신을 훌륭히 하여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이룩했다. 이렇게 예산과 인력을 타내기 위한 장군의 정치쇼를 마냥 부정적으로 볼게 아닌 것이 사실 이는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정말 중요한 덕목인데, 이렇게 통수권자와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며 예산을 타내는 것도 국방장관과 장군의 매우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의 U보트가 히틀러에게 잘보여 예산을 타내려는 목적으로 죽음을 무릅쓰며 감행한 스캐퍼플로 기습을 생각해보면 군인의 입장에서 어느정도 통수권자에게 보여주는 정치쇼가 필요하며, 이는 노애나 영성교의 반란을 거치며 의심이 많아진 시황제를 달래는데 필수적이었다. 즉 왕전의 정치력은 단순히 개인의 처세술로만 볼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병력 운용에 필수적인 능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린다면 두 명장 모두 필요로 하는 나라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목이 진나라에 있었다면 왕전만큼의 정치력이 없었을테니 의심많은 시황제 밑에서 제대로 활약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왕전이 조나라에 있었다면 이목만큼의 전술적인 능력이 없으니 조나라는 훨씬 빨리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명장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었기에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올랐다.
6. 대중매체에서
6.1. <심진기>
2001년 드라마 <심진기>에서 조나라의 무패의 명장으로 등장한다.2018년 리메이크작에선 부하들이 조나라 백성을 강간, 살해하자 군법대로 처리한다.
6.2.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
대부분의 장수들이 본명으로 나오는 <삼국지 시리즈>에서조차 본명인 '이촬'이 아니라 '이목'으로 나온다.
<삼국지 12> PK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 / 무 / 지 / 정 96 / 72 / 86 / 73. 병과는 궁병이며 전법은 속전 고수. 고유 전법이라서 지력을 크게 키우는 것은 필요가 없고 또한 태생적으로 귀모가 존재해 청룡 언월도, 방천 화극 등의 무력 + 호걸 특성 무기 주고 꾸준히 통솔, 무력만 키우다면 최강의 무장이 된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했으며 능력치도 전작과 동일하다.
특기는 상업 3 / 훈련 7 / 순찰 6 / 위풍 5 / 분전 2 / 연전 4 / 공성 7 / 견수 9 / 귀모 7이고, 병과 적성은 창병 B, 기병 A, 궁병 A로 중신특성 효과만 잘 받으면 기병 또는 궁병 적성을 S로 올릴 수 있다.
본작에서 견수, 방어라는 대목에서는 적수가 없는 극악의 무장이며, 진정한 철벽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다. 일단 전법이 방어력이 100 상승하고 사기를 유지시키면서 전법 지속시간도 3600으로 모든 전법 중 가장 긴 견수지휘에, 중신특성 또한 소속 부대들의 기동력이 5% 하향하는 대신 방어력이 10% 상승하는 신중견수라 여기까지만 해도 방어력이 엄청난데, 거기다가 견수 특기 레벨도 9라 진에 들어가면 방어력이 더욱 버프되며, 귀모 특기마저도 7 레벨이나 달려 있어 병격도 휙휙 피해 때려도 때려도 죽지를 않는다. 그나마 창병 적성이 B라 창병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 병과 방어력이 낮으며, PK 들어서 추가 된 이상위명을 금강불괴가 아니라 천하명장으로 부여받은 게 다행일 정도이다. 위 서술에 창병 S, 금강불괴였으면 진짜 불사의 무장이었을 것이다.
6.3. 만화 《킹덤》의 이목
진나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만화답게 최강의 적장 포스를 풍기고 있다. 역사서와 같이 북방에서 오랜 기간 복무하면서 무명의 장수로 지내다가 흉노의 대군을 몰살시킨 뒤 진나라 육대장군의 마지막 현역인 왕기를 꺾는 것으로 중화 전역에 이름을 알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뛰어난 부대 운영과 정보 은폐, 판단력 등으로 지장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검을 들고 적장을 베는 등 본신의 무력도 뛰어나다.다만, 첫 등장의 임펙트는 그러했지만 작가 하라 야스히사의 퇴화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그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다. 연재 18년차 내내 시도 때도없이 이목을 기습숭배하며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을 이목을 찬양하기 위한 도구로 쓰는 등 팬덤의 반발심만 만들어내고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이목(킹덤)/비판 문서 참조.
6.4. 만화 《달인전》
장평대전 이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나라의 하급 관리 이담이 만든 결사대 3,000명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심약해 보이는 외모를 넘어 여성처럼 보일 정도[22]라 보급 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그 진가를 알아본 이담에 의해 전선에 나서게 된다.대장인 이담은 최전선에서 사기를 복돋우며 싸우고, 이목은 중원에서 전체적인 군사의 움직임을 다잡는다. 항연은 이를 보고 심약해보이지만 아주 뛰어나다며 감탄하고, 언젠가 이목처럼 일군을 지휘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는다. 군사 지휘 능력뿐 아니라 활을 쏘는 능력도 아주 강조되는데, 기마술과 궁술을 동시에 다루며 무력적인 면 역시 강한것을 보여준다.
조나라가 승리한 이후 이담을 이어 염파와 함께 조나라의 군대를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염파가 흉노를 막는 역할을 건의하겠다며 역사대로 장군에 부임할 것을 암시했다.
신릉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진나라군을 함곡관까지 밀어붙이는데 성공하나, 각종의 정치적인 이유로 연합군이 와해되어 다시금 진나라에 맞설 길을 찾아나서는 붉은 삼협과 만나게 되는 것으로 재등장한다. 여전히 꽃다운 외모를 자랑하며 수염하나 없이 흉노를 상대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방난과 함께 10대 도척 도선, 훗날의 한고조 유방, 붉은 삼협, 망명한 염파 등과 함께 연합군을 결성해 진나라를 공격한다. 연합군의 최고 지휘관급에 속했던 《킹덤》과 달리 《달인전》에서는 확실히 방난이 총지휘를 맡고, 이목은 그 아래에서 싸우는 역할로 나온다.
여전히 우수한 궁술과 군사 지휘 능력으로 진나라군을 강하게 몰아붙이고, 미래에 계속해서 싸우게 되는 왕전과 대립각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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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왕인지 불명[2] 《열녀전》 7권 <얼폐전>-도양창후-에 의하면, 이목은 조도양왕이 음탕한 성품으로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과부인 창후(倡后)와 혼인하려고 하자 반대하면서, "여인이 정숙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불안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한 집안을 망하게 했는데, 대왕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조도양왕은 "나라가 어지럽고 어지럽지 않고는 과인이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말하며 이목의 간언을 무시하고 창후와 혼인했으며, 그 소생의 조천을 후계자로 삼았다. 허나 《열녀전》은 역사책이 아니라 교양서이기에, 역사적인 신뢰도는 낮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3] 이 시기, <조세가> -조도양왕-에서 춘평군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 조나라의 태자가 춘평군을 뜻하는 말이냐는 추측도 있기는 하나, 조도양왕의 두 자식 모두 사서에 등장하기에 춘평군이 태자였다는 추측은 무리가 있다.[4] 진나라 장수 규가 조나라군 90,000명을 죽였고, 환의가 호첩이 이끈 조나라군 100,000명을 죽였다.[5] 당시 연나라군의 침공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사기》 기준으로는 전차 2,000승, 즉 2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침공했다고 한다.[6] 백기와 같은 봉호이다.[7] 환의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엇갈린다. 죽었다는 설, 서민으로 강등당했다는 설, 연나라로 망명해 번오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설 등이 있다.[8] 당시 번오는 남번오와 북번오가 있었다고 하는데, 북번오는 의안 근처의 도시였으며, 남번오는 업 근처의 도시로 평양과 무성 근처의 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이목이 번오를 공격한 진나라군을 꺾고 위나라와 한나라의 군대와 대치했다는 기록을 보면 진나라군은 남번오를 공격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9] 초한전쟁때 한군의 명장 한신이 정형전투를 치른 곳이다.[10] 전국칠웅 중 하나인 위나라가 아니라, 상앙의 고향인 위나라를 말한다.[11] 《사기》와 《전국책》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사기》에서는 간단히 '이목과 사마상이 진나라군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전국책》에서는 '전에 이목에게 패배했던 환의가 도망치지 않고, 왕전의 부장으로 계속 종군하다가, 이때 이목에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당시 이목과 왕전은 전투를 치렀고, 왕전이 꽤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추측된다.[12] 이는 <백기왕전 열전>, <진시황 본기>, <조세가>에서 모두 확인이 되어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기원전 229년에 시작된 전쟁이 기원전 228년 10월에서야 끝나고 (<조세가>) 기원전 227년에 조나라를 정복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진시황 본기>) 당시 중국의 1년은 10개월이라는 것을 감안하자.[13] 다만 전자의 봉호를 받는 사람에게 땅을 직접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그 땅에서 걷히는 세금만큼 왕이 하사금을 내렸다고 한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고 조조의 천거로 한수정후에 책봉된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 한수는 조조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관우는 한수를 통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조가 한수 땅에서 걷히는 만큼의 재물을 관우에게 하사하는 식으로 관우를 최대한 대접해 주었다고 한다.[14] 지금도 지급시인 한단시 행정구역에는 현급시인 무안시가 포함되어 있다.[15] 조유류왕이 너무 쉽게 곽개의 모함에 넘어간 것에 대해, 이목이 유류왕의 어머니인 창씨와 악연이 있었기 때문에 조유류왕도 이목을 싫어했던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과거 이목은 창후가 한 집안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를 들어 창씨를 후궁으로 들이는 걸 반대했는데, 조도양왕은 이 간언을 물리치고, 창씨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이후 창씨의 계략으로 장자(長子) 조가를 태자에서 폐하고, 창씨의 아들 조천을 태자로 삼았으며, 본래 있던 왕후를 내쫓고, 창씨를 왕후로 삼았다. 이후 조도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조천이 조유류왕이 되었다.[16] 《전국책》 <조책>과 <진책>의 내용이 다른데, <진책>에서는 곽개가 이목을 모함했다고 하나 <조책>에서는 한창이라는 대신이 이목을 모함했다고 나온다.[17] 또한 당시 이목의 나이를 추측한다면 자식과 손자가 여럿 있을만한 나이기도 하니, 자식과 손자들 중 처형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18] 여담으로 곽개는 이후 이래저래 모아온 황금으로 여행이나 떠나며 살았는데, 어느날 도적의 습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도적이 그에게 원수진 염파와 이목의 식객들인지, 아니면 진나라의 청탁을 받은 인물들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진짜 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본인이 원한을 살만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려 본인의 안위를 지켰을 수도 있다.[19] 장평대전의 백기, 문경지교와 노익장으로 유명한 염파, 천하통일을 마무리한 왕전에 비해서 이목은 아무래도 캐릭터가 약한 편이다. 이는 이목이 저평가를 받는 원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20] 물론 진나라가 국력이 강한 것은 맞았으나, 두 국가의 국력이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 것은 조나라가 너무 심하게 망한 것이 더 컸다(...).[21] 물론 당시 흉노는 묵돌 선우가 통합하기 이전이라 후대만큼 강성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조나라도 중국의 일부만을 차지했을 뿐 후대의 중국 통일 왕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목이 유목민을 상대로 거점을 지키다가 역공을 하는 전술을 보여준 것은 훌륭한 선례라고 할 수 있다.[22] 이때문인지 작중에서 이목이 처음 등장하고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나이를 먹은 티는 커녕 수염하나 나지 않는다. 머리도 찰랑거리는 긴 머리인지라 정말로 여장수처럼 보이는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