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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묘사[1]한 전한시대 석판 탁본, 3세기경 작품 |
1. 개요
此地別燕丹 차지별연단
이 땅에서 연단(燕丹)과 이별하면서
壯士髮衝冠 장사발충관
장사들의 머리칼 관을 띄웠도다.
昔時人已沒 석시인이몰
그 시절의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지만
今日水猶寒 금일수유한
지금도 이 강물 여전히 서늘하도다.
낙빈왕(640년? ~ 684년?), 〈역수의 송별〉(易水送別)
荊軻이 땅에서 연단(燕丹)과 이별하면서
壯士髮衝冠 장사발충관
장사들의 머리칼 관을 띄웠도다.
昔時人已沒 석시인이몰
그 시절의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지만
今日水猶寒 금일수유한
지금도 이 강물 여전히 서늘하도다.
낙빈왕(640년? ~ 684년?), 〈역수의 송별〉(易水送別)
? ~ 기원전 227년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협객이자 유명한 자객. 진왕 영정를 암살하기 위해 함양으로 갔으나 실패한 일화로 유명하다. 형가의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사기》 〈자객 열전〉 이나 《십팔사략》에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특히 〈자객 열전〉에 있는 형가의 기록은 중국 고서상 가장 스펙타클하기로 손에 꼽는 대목이다. 전한 초기에 이미 여러 버전으로 부풀려 전해지던 형가의 일화가 〈자객 열전〉에서 이토록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은 이유는 저자 사마천의 스승인 동중서와 동중서의 친구 공손홍이 실제 사건의 목격자이자 등장인물인 하무저와 아는 사이였으므로, 내막을 자세히 알고 사마천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2]
2. 생애
2.1. 협객 시절
형가의 조상은 강제의 간신이었던 경봉(慶封)이었지만 태어난 곳은 위(衛)나라 부근이었고, 본인이 사는 곳은 연(燕)나라였다. 왜냐하면 초 영왕 때, 오나라에 의탁한 경봉과 그 일족이 초군에 의해 주살된 후, 그 후손들이 성을 바꾸고 여기 저기 흩어졌기 때문이다. 형가는 꼬마 때부터 책읽기와 검술을 좋아했다. 검술로 당시 위나라 군주였던 원군(元君)에게 출사했으나 외면당했다.형가는 개섭이라는 검객과 검술을 논하다가 틀린 사실을 말했고, 말다툼이 일어났다. 개섭이 노려보자 형가는 말 없이 도망쳤다.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머물 당시, 노구천(魯句賤)이란 사람과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을 했다. 노구천이 죽일 듯이 위협하자 형가는 도망쳤고 사이가 틀어졌다. 이를 두고 형가가 겁이 많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3세 때 사람을 죽여본 진무양이 벌벌 떨 때 태연하게 진왕 영정에게 다가가서 검을 휘두른 것만 봐도 형가는 용기와 담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사기》같은 역사서에서는 형가가 훗날 큰 일을 맡을 뜻이 있어 사사롭게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싸움을 피했다고 본다. 표현이 도망쳤다로 쓰여서 그렇지, 정황을 보면 불필요하고 사사로운 싸움은 피했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 후 시전 바닥에서 개백정인 아무개[3] 및 축(현악기의 일종)쟁이 고점리와 띵가띵가 놀며 소일했다. 그러다가 감정이 복받치면 셋이 얼싸안고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전하는데, 이때 셋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방약무인이다. 이는 원래 주변에 거리낌없는 당당한 행동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뒷날 의미가 바뀌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듯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으나 당시 연나라에서 은거하던 전광(田光)[4]이라는 사람은 형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는 형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당시 이미 진나라(秦)를 제외한 6국 중 3진(三晉)[5]이 멸망한 상태였고[6], 조나라를 평정한 진나라는 제나라를 매수해 놓은 상태에서 초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연나라를 먼저 손보려 시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2.2. 진왕 정 암살 시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전광에게 연나라 태자 단(丹)이 찾아왔다.태자 단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진왕 정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고 그 위험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객을 파견해 일거에 뒤집기를 하려는 단에게 전광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형가였다. 단이 전광에게 암살 계획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하자, 전광은 형가에게 암살 건에 대해 이야기한 뒤
"근데 태자는 내게 이 일은 국가의 기밀이니 발설하지 말아 달라 하였네. 그러니 태자를 만나면 전하게. '전광은 이미 죽었다'고 말일세"
라고 말하곤 형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기 목을 끊어버렸다.형가는 태자 단에게 찾아와, 연나라의 곡창 지대인 독항 지방의 봉역도[7]와 진왕 영정의 미움을 받아 망명한 진나라 항장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요구했다. 지도는 즉시 준비되었으나, 다정한 성격인 단은 차마 번오기의 목을 내올 수는 없었다. 망명한 후 죄도 짓지 않은자를 왕도 아닌 태자가 마음대로 목을 칠 수도 없는 일. 뾰족한 수가 없으니 형가가 그의 집에 홀로 찾아가 "진왕 영정에게 공물을 바칠 때 암살을 할 것인데, 지도와 당신의 목을 바친다면 일이 성립될 것이오. 그러니 당신의 목을 주시면 안 되겠소?" 하고 냅다 돌직구를 날렸다. 번오기는 이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놀랍게도 "아아! 저의 원한을 풀 방법을 갖고 계시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성공하시기를!" 한 뒤 형가에게 절하고 스스로 목을 찔렀다!
또한 단은 천하제일의 명검을 수소문하여, 조나라의 서부인[8]이라는 사람에게서 비수(徐夫人之匕首) 하나를 100금(百金)을 주고 구해왔다[9] 그리고 장인을 시켜 (독)약에 담금질하자(使工以藥淬之) 피가 실오라기만큼만 나와도 죽는(以試人血濡縷) 비수가 완성되었다.
그 뒤에 필요한 것은 자신과 같이 보조를 맞출 담대한 부사로 13세 때 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진무양(秦舞陽)[10]이라는 장사를 선택했다. 형가는 본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다른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그는 너무 멀리 살고 있어 제 시간에 오지 못했고,[11] 진왕 영정이 연나라를 칠 군사준비를 다 마쳤다는 첩보와 그로 인한 태자 단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진무양과 함께 거사를 치르게 되었다.
진나라로 가기 위해 역수(易水)를 건너며 형가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남아 있다.
風蕭蕭兮易水寒 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일거혜불복환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라
연(燕)나라 태자와 빈객들은 거사의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흰색의 의관=상복을 차려 입고 송별을 나와 이윽고 역수(易水) 강변에 이르렀다. 노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 장도를 기원한 후에 길을 떠날 때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타자 형가가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변치(變徵)[12]의 곡조로 부르는 형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또 곡조를 '우'(羽)로 바꿔 부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에 쓴 관이 다 들릴 정도로 머리털이 곤두섰다고 한다. 이윽고 형가가 수레에 올라타고 길을 떠났는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형가는 진의 수도 함양에 도착한 뒤 진왕이 총애하던 신하인 몽가[13]에게 뇌물을 바쳤고, 이에 기뻐한 몽가는 연나라에서 항복하러 온 사절단이라며 형가 일행과 진왕과의 만남을 주선했고 진왕도 기뻐하며 알현을 허락했다. 그렇게 아무 의심받지 않고 당당하게 진왕 정 앞까지 온 형가였지만, 뜻밖에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진무양이 갑자기 낯이 새파래지며 바들바들 떠는 바람에 의심을 사고 말았다. 형가는 태연히 웃으면서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일거혜불복환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라
北蕃蠻夷之鄙人未嘗[14]見天子故[15]振慴願大王少假借之使得畢使於前
"북번 오랑캐 시골뜨기가 일찍이 천자를 뵈온 적 없으니, 떨며 두려워합니다. 대왕께서는 작은 잘못을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자의 임무를 마치게 하소서."
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진왕은 이상하게 여겨 형가에게 부사는 놔두고 혼자 올라와 진상물로 가져온 독항의 지도를 올릴 것을 명했다. 그러자 형가가 편 두루마리가 끝까지 펼쳐지자 그 속에 숨겨둔 비수가 드러났다.[16] 이에 놀란 진왕이 재빨리 일어나는 바람에 형가가 내지른 비수는 상처도 내지 못하고 진왕의 옷소매만 스쳤다. 여기에 대해서는 형가가 짧은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진왕의 옷소매를 잡아챘는데, 그 옷소매가 북 찢어졌다는 설도 있다. 형가는 원래 한 손으로 진왕의 의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쓰면 암살이 성공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추운 북쪽 나라라 두껍고 질긴 옷을 입는 연나라에 비해 진나라에서는 훨씬 얇고 부드러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소매가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7] 또 다른 설로는 형가의 원래 계획은 부사 역을 맡은 신뢰하는 친구가 두루마리를 펼치면 형가가 재빨리 비수를 꺼내 찌를 계획이었으나 친구가 오지 못해 대신 데려온 진무양이 겁을 집어먹는 바람에 형가 혼자 단상에 올라와 지도를 펼치는 작업과 비수를 꺼내는 작업을 혼자 하느라 비수를 뺄 때 진왕이 눈치채고 피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북번 오랑캐 시골뜨기가 일찍이 천자를 뵈온 적 없으니, 떨며 두려워합니다. 대왕께서는 작은 잘못을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자의 임무를 마치게 하소서."
未至身,秦王驚,自引而起,袖絕。
몸에 닿기 전에, 진왕이 놀라, 스스로 몸을 일으키면서, 소매만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어쨌거나 형가는 포기하지 않고 비수를 쥔 채 진왕 정을 쫓아 전상 단상 기둥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 국법에 대전에서는 무기를 지참할 수 없었기에[18] 병기를 가진 사람은 진왕 혼자였고, 너무 급박한 나머지 대전 밖의 군사를 부를 겨를이 없었다. 진왕은 (허리에 차고 있었을) 의전용 보검을 집어들었으나 급박한 상황에 제대로 뽑질 못했다. 전투용이 아닌 의전용이라 허리에 찬 상태에선 뽑기에 너무 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되니 신하들이 맨손으로 형가에게 달려들었고, 어의인 하무저(夏無且)가 약주머니를 던져 형가를 방해했다. 또 신하들은 칼을 등에 지며 뽑으라고 소리쳤다.[19]몸에 닿기 전에, 진왕이 놀라, 스스로 몸을 일으키면서, 소매만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左右乃曰:「王負劍!」
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칼을 등지십시오!"
결국 진왕 영정이 장검을 칼집에서 뽑고 짧은 비수를 들고 있는 형가를 내리쳤다. 형가는 쓰러진 채 마지막으로 비수를 던졌으나 기둥에 맞았다. 그 틈을 노려 영정은 칼로 형가를 여덟 번이나 내리쳤다. 형가는 영정을 보고라고 말했다. 이후 근위병들이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칼을 등지십시오!"
전상 아래에 있었던 진무양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당연히 살해당했을 것[22]으로 추정되며, 형가를 방해한 어의 하무저는 진왕 정에게서 '그대가 나를 위해 약봉지를 던졌도다!' 는 칭찬과 함께 금 200일이라는 큰 상을 받았다.
3. 후일담
공물과 항복을 약속한 사절단이 비수를 꺼내들고 천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니, 사건 직후 격노한 진왕 영정은 왕전과 왕분 부자, 이신을 보내 연나라 침공을 시작했다. 연나라 왕 연희는 수도 계성까지 함락당하자 대나라의 왕 조가(趙嘉)[23]의 주장을 받아들여 암살을 주도한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 진나라로 보냈지만 진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연왕을 추격했다. 또 다른 설로는 도망친 태자 단을 이신이 수천 기의 병사만을 데리고 추격하여 잡아왔다는 얘기도 있다. 연왕 희는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넘을 시도를 했지만 직전에 진군에 따라 잡혀 포로가 되었다.[24]〈형가 열전〉의 후일담에 따르면 형가와 장기를 두다가 다툼으로 사이가 벌어진 노구천은 형가의 진왕 영정 암살 미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25]
"아아, 그가 칼로 찌르는 법[26]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애석하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27] 예전에 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나를 자신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멸망하자 형가의 벗 고점리는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 땅에 잠적했지만 탁월한 축 연주 솜씨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었고, 그의 축 솜씨가 진왕 영정에게 알려지자 진왕은 고점리를 용서하는 대신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악공으로 삼았다. 악공으로 일하면서 진왕과 가까워진 고점리는 축에 납을 넣어서 암살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연주를 하다 말고 진왕을 향해 축을 냅다 후려갈겼으나 어깻죽지를 스쳤을 뿐[28]이었고, 그대로 맞아 죽었다. 형가와 고점리에게 연이어 죽을 뻔한 데다가, 면전에서 눈이 먼 악사조차 자신을 죽이려드니 진왕 영정은 다시는 멸망당한 6국 사람을 자신에게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4. 평가
이처럼 멸망당하고 멸망당하기 직전인 6국의 한을 풀려는 듯한 형가와 태자 연단의 의기로운 모습은 훗날 많은 시인들과 서사가들에 의해 칭송되거나 협객이라고 평가되었다. 시황제와 통일 진나라가 선정을 베풀지 않고, 학정이 심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후에 나오는 장량 및 창해 역사와 더불어서 노래되었고, 많은 협객들과 호걸들이 형가의 모습을 따라 하고자 했다. 한나라의 유민이었던 장량 또한 형가와 태자 연단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진나라의 천하통일에 대한 관점차이로 형가의 행위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진나라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고, 반대로 진나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진시황이나 형가나 둘 다 각자의 입장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대체로 현대 중국에서는 진시황의 춘추전국시대에 종언을 내린 천하통일 공적과 형가의 의협심을 둘 다 좋게 평가한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진나라의 학정에 대해서는 악명이 자자하고, 그만큼 형가의 암살미수는 차라리 춘추전국시대가 나았다는 진나라를 제외한 6나라의 백성들에게 실패한 영웅이었다.
5. 대중문화 속의 형가
- 장예모가 주연을 맡은 홍콩·중국 합작 영화 <진용>에서 형가의 고사를 가지고 역사 개그씬을 연출했다. 환생한 옛 연인 한동아(공리)를 보고 반가워한 진나라의 낭중령 몽천방(장예모)이 동아의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지만 환생한 그녀는 당연히 그가 누군지 모르고, 진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에 맹강녀니 서시니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사람들을 호명하나 전혀 몰라 한다. 남송의 명장이자 충신인 악비의 이름을 말하지만 진시황의 치세로부터 1000여 년이나 지나서 태어나는 악비를 당연히 모를 수밖에... 그러자 "그럼, 형가는 아시겠네요?"라고 말하자 몽천방은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그런 대역적의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시오!" 라며 화를 낸다. 동아(공리)가 "아니, 형가는 폭군 진시황에게 맞선 영웅이라고요."라고 말하자 몽천방은 "무엄한 소릴! 그 자는 폐하께서 직접 참수한 대역적이오!"라면서 펄펄 뛴다.
- 그 장예모가 나중에 감독을 맡은 영화인 <영웅>이 바로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연걸이 맡은 역할인 '무명'이 바로 형가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10보 필살검은 당연하겠지만 영화상의 허구이다.《씨네 21》등 국내의 일부 영화평론가들이 시황제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 들어갔다고 비판했기 때문에 이 설이 확대 재생산이 되어 중국 정부가 주도해서 만든 영화처럼 알려졌지만, 이 영화는 홍콩의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였고, 중국 측이 각본에 개입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29] 덧붙여 이 영화에서 진시황 역을 맡은 배우는 중국의 유명 배우인 진도명으로 드라마〈강희왕조〉의 강희제, <무간도 3>의 심등, <초한전기>에서 유방 역으로 유명한 배우다.
- 진개가(천카이거)의 영화〈시황제 암살〉(荊軻刺秦王)도 형가의 열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 1990년에 만들어진 대만 드라마〈자객열전 형가〉 편이 국내에 수입되었다. 형가 역으로는 <초류향> 시리즈로 유명한 정소추가 열연했다. 여기서 형가는 진의를 감추고 풍류를 즐기는 카사노바 행세를 하는 미공자다. 마지막에 암살에 실패한 형가가 칼에 맞고 피를 흘리면서 광기 어린 웃음과 함께 진왕 영정을 저주하는 씬은 정소추의 연기가 돋보이는 명장면이다.
- TVB에서 제작한 〈대자객〉〉(大刺客)이라는 드라마 파트 중 -형가- 파트에서 형가 역을 맡은 배우가 서금강이다. 다만 〈대자객〉 드라마 자체는 첫 방송 기간 당시 홍콩의 유명 배우 신마사증(新馬師曾)의 사망 보도 때문에 화제성에서 밀렸고, aTV 경쟁작 〈비묘정전〉(肥貓正傳)에게 기세에서 밀리는 추가타를 맞아 -여사낭- 파트가 방영되지 못하고 사실상 조기종영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 2004년에는 〈형가전기〉라는 드라마가 중국에서 제작되었는데, 여기서 서금강은 명장 백기 역을 맡았다. 전체 스토리와 인물관계는 역사가 아닌 각색 위주이며, 진시황 암살[30]이 아닌, 전란의 시대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31]을 위주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 <대진부>에서는 고증대로 연태자 단이 고용한 협객 출신 자객으로 등장한다. 진나라에 항복하러 온 연나라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번오기의 목을 들고 진왕 영정의 면전 바로 앞까지 가는 데 성공한다.[32] 형가가 바친 지도를 살펴보던 진왕에게 지형을 설명해 주는 척을 하며 그가 지도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의 팔을 붙잡고 비수를 내질렀으나 진왕이 순간적으로 피해서 소매만 찌르고 실패한다. 이후 여러 차례 진왕을 찌르려고 시도하는데 진왕은 허둥대면서 운 좋게 검격을 다 피하기는 했으나 몸싸움 와중에 허리띠가 돌아가면서 본인이 차고 있던 진왕검이 등 뒤로 넘어간 것을 모르고 검을 찾으며 당황한다. 워낙 갑작스러운 상태라 신하들도 다 벙쪄있던 상황에서[33] 형가는 옥좌 밑 계단에서 도약하며 옥좌에서 굴러떨어져 있었던 진왕 정을 찔러 죽일 기회를 잡는다.[34] 하지만 기지를 발휘한 이사가 약상자를 투척해 형가의 이마를 맞추면서 또다시 진왕의 숨통을 끊는 데 실패하고, 진왕검이 등에 있다는 영혜의 말에 칼을 뽑아든 진시황의 반격에 자상을 입었으며 뒤늦게 들어온 위병들의 창 수십 개에 찔리고 사망한다. 이 사건 때문에 진나라는 연나라를 침공할 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암살 사주의 책임으로 연왕 희는 태자 단의 목을 진왕에게 바친다.
- 영화 <미이라 3: 황제의 무덤> 초반에, 진시황을 모티브로 한 황제가 중국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군막에서 잠을 청하던 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형가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허나 황제는 이를 예상하고는 잠자는 척하고 있던 것일 뿐이었고, 이내 현란한 무술 실력으로 자객들을 전부 제압해 버린다. 그런데 황제가 복수를 다짐하며 검을 던지는 곳이 연(燕)나라가 아닌 초(楚)나라다.[35]
- 국내에선 문영이라는 작가가 시장 바닥에서 형가와 함께 어울렸다는 개백정을 주인공으로 한《구도》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일반적인 역사소설이 아니라 역사를 가지고 재창작한 무협소설이었다. 국내 유일의 장르 문학지였던《판타스틱》 2008년 9월호와 《꿈을 걷다》라는 단편집에 실렸다.
- 《삼국지》 드라마인 <삼국>에서 사마의 휘하의 조위군 병사들이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상방곡에 갇힌 후 화공을 당하며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노래가 바로 형가의〈역수가〉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 음은 사라지고 현대에는〈역수가〉의 가사만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창작한 노래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당연하게 어쌔신의 클래스로 등장, TS당해 여자가 되었다. 형가(Fate 시리즈) 문서로.
- 2017년 드라마〈진시려인명월심〉에서 배우 류창이 역을 맡은 캐릭터로 공손려를 빼앗긴 복수심과 조국의 복수를 위해 시도했지만 역사대로 실패했다. 드라마의 최종 승자는 따져봤을 때 형가이기는 하다.
- 2015년 게임 <아너 오브 킹즈>에 암살자 영웅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형가의 여동생이라는 설정의 '아가'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했다.
6. 기타
허리에서는 잘 뽑히지 않던 칼을 등에 지니 잘 뽑혔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당대의 복식과 무장을 참고하면, 진시황은 허리띠에 고리로 연결된 칼집을 등 쪽으로 옮기고 칼을 기울여 뽑았을 것이다. 영상에서도 보여주다시피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등에 바짝 붙이면 길이를 줄어 쉽게 뽑을 수 있다.
-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수나라의 폭군 양제가, 고구려 사절단 사이에 숨어들어온 암살자가 쏜 석궁 화살에 혁대를 맞은 일이 있었다. 이에 수 양제는 탄식하며, 이 모든 일은 나의 부덕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저 암살자 역시 전국시대의 '형가'와 같은 이 아니겠느냐는 자조를 했다.
- 조선 후기 농민 반란의 지도자였던 홍경래는 12세 때 형가와 진시황의 고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런 시를 지었다.秋風易風水士 추풍역수장사권가을 바람이 부는 역수에서 장사의 주먹白日成陽天子頭 백일함양천자두햇빛이 빛나는 함양 땅에서 임금의 머리
... 를 내리치겠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훗날 홍경래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언젠가는 이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 왕을 없애겠다는 무서운 뜻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글을 가르치던 홍경래의 친척은 연좌제의 두려움에 빠져 그를 집으로 쫓아보내고 다시는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1] 형가가 진왕 영정을 찌르려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왼쪽의 덩치 큰 사람이 형가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도망가는 사람이 소매가 잘린 진왕 영정이며, 오른쪽 밑에 넘어져 있는 사람은 형가를 수행한 부사 진무양이다. 당황해서 달려오는 호위병과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 형가가 던진 칼이 기둥에 박혀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형가가 있는 왼쪽을 자세히 보면 그가 양팔과 한쪽 발을 들고 있고, 칼을 던지는 형가를 말리기 위해 어떤 사람이 형가의 몸을 한 팔로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2] 〈자객 열전〉 -형가- 이야기 말미에 사마천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그런데 하무저가 원 출처라 그가 시황제를 구하는 대목에서 뻥을 좀 섞었으리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자객 열전〉 -형가- 이야기에서 진나라가 형가의 암살 미수에 대한 보복으로 연나라를 공격하여 태자 단을 죽이고 그로부터 5년 뒤에 연나라가 멸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암살 미수 사건은 기원전 227년 이전이다. 공손홍이 기원전 199년생, 동중서가 기원전 179년생이므로 하무저와 이들의 나이차가 어마어마하다. 아마도 하무저가 엄청나게 장수한 듯하다.[3]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4]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용기와 지혜가 비범해서 연나라 태부인 국무의 추천으로 연나라에 출사했다고 한다.[5] 조(趙)·위(魏)·한(韓). 본디 진(晉)나라의 향(鄕)이었으나 이 세 집안이 희진을 갈라먹어 3진이라 불렸다.[6] 그나마 조나라는 왕족인 조가가 대군(代郡)에서 대나라의 왕위에 올라 진군에 저항하고 있었다.[7] 특정 나라의 사신이 자기 나라의 지도를 가지고 가서 바친다는 것은, 그 땅을 넘기겠다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한나라의 지도를 바치면 그건 고스란히 침략당할 때 알짜정보가 되어 군기밀이 다털리게 된다.[8] 여자가 아니다. 이름이 '부인'이다. 한자 표기도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부인이긴 하다(…).[9] 당시는 후기 청동기 시대로, 철을 제련하는 기술이 있었다. 그런데 철 제련은 청동 제련에 비해 훨씬 강한 화력을 요구하는데, 당시에는 고온을 유지하는 기술이 부족하여 일반적인 철기는 내구도가 낮았다. 아마도, 단이 구해온 전설의 비수는 어떠한 이유로 우연히 1540도 이상의 초고온을 낸 고로에서 철이 완전히 융용되어 나온 강철로 만들었기에 당대의 일반적인 철기나 청동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도를 지녔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10] 《사기》〈흉노 열전〉에 진무양의 집안 내력이 언급되는데, 그의 조부는 연나라의 명장인 진개로, 흉노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쳐 귀국했다고 한다. 진개는 한국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데, 고조선을 쳐서 서쪽 영토 2,000리를 빼앗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11] 《십팔사략》에는 그 사람을 예전 저잣거리에서 형가와 다투었던 노구천이라고 했다. 노구천은 형가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오다가 하필 비가 내려 제수(濟水)의 강물이 범람하는 바람에 길이 막혀서 오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과거의 사사로운 다툼이 훗날 형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장치로 작용해서 형가의 스토리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형가, 고점리와 의형제를 맺은 개백정이 그 사람이라고도 한다.[12] 동양 음악에서 5음의 각 이름을 일컫는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중 '치'를 변주했다는 뜻이다.[13] 몽가(蒙嘉)는 몽무, 몽염, 몽의 등을 배출한 진나라의 무관 명가인 몽씨 가문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이 사람이 진왕 암살 실패 후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사기》에 '형가의 암살 미수 사건 후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은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14] 일찍이 ~한 적이 없다[15] 그러므로[16] 여기서 도궁비현(圖窮匕見)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17] 연나라의 수도 계성(연경)은 현재의 베이징으로, 베이징은 평양보다도 위도가 높은 반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현재의 시안(정확히는 쌍둥이 도시인 셴양시)으로 제주도 정도의 위도에 있다.[18] 진나라만 그랬던 게 아니라 애초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원수 앞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는 법이다.[19] 야사에 조고가 외쳤다거나, 한 호녀가 저 말을 해서 이후 시황제의 총애를 얻었고 그래서 낳은 아이가 호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무저의 하드캐리가 돋보이는데, 이후 진왕 정에게 크게 치하를 받고 200금을 하사받았다. 헌데 사마천이 쓴 기록의 출처가 하무저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해들은 동중서와 공손홍이었기 때문에 약간 의심스러움이 남는다. <열전>과 <본기>의 타임라인상 암살 미수 사건 후 최소 5년 뒤 연나라가 멸망하므로 암살 미수 사건은 늦어야 기원전 227년인데 둘 중 연장자인 공손홍이 기원전 199년생이다. 하무저가 대단한 능력자라서 20대에 어의가 되었다 해도 50년 넘게 차이나는 할아버지와 손주뻘이다. 교차검증도 할 수 없는데 할배가 손주뻘 되는 이들에게 소싯적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면 본인 역할에 과장이 들어갔을 확률이 크다…[20] 하고자 하다[21] 춘추시대에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환공을 칼로 협박해 빼앗긴 땅을 받아낸 것처럼, 진왕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붙잡은 후 협박해서 불가침조약을 맺거나, 빼앗긴 땅을 돌려받으려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 사로잡아 협박할 계획이었다면 당대의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백금을 주고 살 필요도 없고, 칼날에 독을 바를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단지 태자 단의 신변을 생각해서 던진 말이라는 설도 있다.[22] 고우영 십팔사략에선 이후 진병들에게 끌려나가 형가의 시체랑 같이 아주 토막내 끔살당했다고 나온다.[23] 암군인 조도양왕의 장자이자 마지막 왕 조유류왕 조천의 이복 형이었다.[24] 이때 고조선도 진나라에 칭신했다고 한다. 고조선이 연나라 좌측에 위치해 있었던 적성국인 데다가 몇 세대 전에 영토를 침탈당한 바 있었으니, 진나라와 손잡고 연나라 멸망을 위해 같이 협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25] 고우영의 만화《초한지》에서는 이 내용을 각색하여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멸망한 뒤 노구천이 역수에 술을 부으며 "형가, 내가 뭐라던가? 검술은 이론과 고집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연나라는 망하고 태자 단도 죽었네."라고 그를 추모하는 장면이 나온다.[26] 검술에 나름 일가견이 있었던 형가지만, 진왕을 반드시 처치할 정도의 검의 달인이 아니어서 아쉽다는 뜻일 것이다. 뛰어난 검객이었던 개섭과의 일화가 그러하고, 동진시대의 시인 도연명도 형가의 검술이 미숙했던 게 아쉽다며 시로 탄식했다.[27] 형가를 욕하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라 그가 그만큼 담력있는 호걸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말이다.[28] 고점리가 살해를 시도한 공간이 궁중 악단 연주회였는데, 이 자리에 있었던 커다란 징에 진왕 영정의 목소리가 울려퍼져서 고점리의 계산이 실패했다고도 전해진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두페이지를 할애해서 고점리와 진시황의 바로 뒤의 징에 던져진 축이 그려진다.[29] 홍콩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자본인 미라맥스의 자본도 들어갔다.[30] 연출로 나오지 않고 문자로만 교대한다.[31] 메인 선역들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데, 그나마 목숨이라도 남은 고점리 부자 역시 아내와 어머니를 잃는다.[32] 여기서 형가의 지략과 담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동료인 진무양은 장대궁 정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진나라 궁궐의 위엄에 지려버린 나머지(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못 들어갔는데, 형가는 몽염의 위병들에게 쫄지 않고 당당하게 입장했고, 진왕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 천진난만하게 행동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인다.[33] 원래 조회에서는 군주만이 칼을 찰 수 있으며, 호위병이 아닌 한 무기를 맡겨두고 군주를 알현해야 한다. 군주 곁에서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신하에게 있어 굉장한 특권이다. 구석 문서로.[34] 이때 형가가 내지르는 기합소리와 경악한 진왕 정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나온다.[35] 역사적 순서로 보면 초나라가 멸망한 뒤, 형가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그 보복으로 연나라가 멸망했으며, 이후 제(齊)나라까지 멸망시키면서 천하통일을 최초로 완수했다. 즉 <미이라 3>에서는 순서가 뒤바뀐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