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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7:02:04

창해 역사


滄海力士

1. 개요2. 그는 어디서 왔는가?3. 한국과의 연관성?4. 창작물에서의 모습

1. 개요

사마천의 《사기》 〈유후세가〉에 기록된 인물로, 장량과 더불어 진시황을 척살하려다 실패한 인물.

장량은 120근짜리 철퇴를 다룰 수 있다는 역사(力士)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회양(淮陽)에서 동쪽으로 가 '창해군'이란 인물을 만났으며(東見倉海君), 창해군에게 그를 소개받았다. 장량은 그가 (120근짜리) 철추로 시황제가 탄 수레를 작살내는 걸 확인했으나, (도주에 성공했는지) 나중에 범인을 추적하던 관병들에게서 그 수레가 저격을 대비한 빈 수레였음을 듣게 되었고, 결국 소득 없이 하비성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소설 초한지의 영향으로 암살 실패 후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이 없어서 살아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2. 그는 어디서 왔는가?

역사상으로는 기록이 단 한 줄 나올 뿐인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게다가 창해라는 지명은 진나라에는 없는 군이다. 사기집해에서는 '창해군'을 '동이의 군장'으로 추측하였고, 당나라 시대의 인물 사마정이 집필한 '사기색은'은 한나라 때 동이의 예군(君) 남려가 투항하자,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을 근거로 해서 유사한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해서 예맥계 이민족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 무제 시절 예인 28만명이 고조선을 버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자 무제는 그들을 위해 창해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사기의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元朔元年,武帝年也。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 번역출처

일단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한데 압록강에서 동해안까지 다양하다. 창해군(蒼海郡)은 설치된지(기원전 128년) 3년만에 폐지된 행정명이긴 하지만, 만약 장량의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특정 지역이 창해라는 지명이나 집단명을 써왔고, 이것이 한무제 때 창해군(蒼海郡)이라는 행정명을 붙이는데 영향을 끼친 것이라면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초한쟁패기 혹은 그 이전부터 '창해'를 자칭하는 무리가 있었고, 후에 한무제에게 귀의한 이들이 이 이름을 계승해 사용하길 주청해 창해군이 설치된 가능성이 있다는 것.[1] 일단 사마정이 창해군(倉海君)의 정체를 예맥족으로 추측한 근거는 그러하다.

반면, 장량이 만났다던 창해군이 진(秦)나라의 현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남쪽의 이민족 제오(諸奧)의 군장으로서 월나라초나라에게 멸망하자 월왕 무강(無彊)의 아들이 독립하여 스스로를 창해군(倉海君)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3. 한국과의 연관성?

한반도에도 창해역사에 대한 전설이 있다. 이 설화가 전승되는 지역은 현재 강원도 강릉 일대 영동지역으로 옛 동예(濊)의 영역이었다. 여기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서술된 자료는 조선시대 학자인 홍만종이 쓴 순오지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국의 노파가 시냇가[2]에서 호박만한 알이 떠내려 오는 것을 주워 두었더니, 얼마 안 되어 알이 두 쪽 나며 남자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 얼굴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며, 6세가 되자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빛이 검어서 성인과 같았으므로 검을 ‘여(黎)’자를 성으로 삼고 이름은 용사(勇士)라 불렀다. 여용사가 예국의 호랑이를 퇴치하기도 하고, 만 근이나 되는 종을 옮기는 등 괴력을 발휘하자 왕은 상객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홍만종은 여러 기록을 예로 들면서 예국이 예전에 강릉에 있었으며, 진한시대부터 중국과 상통하였고, 오대산에 창해군이라는 옛터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확실히 믿음직한 말이라고 언급하면서, 창해 역사는 한국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강릉에 있던 예국실직곡국, 파조국과 함께 창해삼국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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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 역사가 썼다고 전래되는 철퇴도 남아있어 지금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황성신문 1909년 10월 27일자 기사는 영국의 허버트 키치너 육군 원수가 한국으로 와서 궁내부 박물관에 들렀다가 창해역사의 철추를 잠시 빌려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며칠 뒤인 11월 2일에는 키치너 원수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실려 있다.[3] 이 철추에 대한 행방은 동아일보 1929년 11월 7일에 등장한다. 동아일보 기사는 1909년 11월 6일자 대한민보를 다시 기록하면서 키치너 원수가 철추를 보고 돌려주었는데, 어제는 일본군 사령부가 보겠다고 가져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 철퇴는 일본군에서 반환하여 다시 이왕직에서 보관되다가 존재가 잊혀졌는데, 2021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한 전통 무기들을 정리한 책 '왕실문화도감 제5권-무구'를 발간할때 재발견되었다.#

물론 이 철퇴진시황 암살에 사용된 철퇴일리는 없다. 일단 시황제에게 날라간 철퇴가 돌고 돌아 한반도까지 오는게 가능할리가 없고, 설사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유물이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사서에 기록된 적이 없을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은 매우 산화가 잘되는 금속이다. 2천년간 저 형태를 유지하며 떠돌아 다닐 수가 없다. 다 바스라져서 형태도 알아 보기 힘들게 되었을 것이다. 당장 삼국시대의 철제 검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랜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음에도 산화가 일어나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더군다나 저 시기의 조잡한 철기 제조 수준으로 2천년간 지속된 철제 무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재발견 이후 연구가 진행된 결과, 역시 조선시대에 제작된 의장용 철퇴였다. 철퇴의 표면에 은입사 기법으로 장량과 창해 역사의 진시황 암살시도에 대한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사기> ‘유후세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었다. 이 글귀 때문에 조선 말기에 이 철퇴가 창해 역사의 철퇴라고 오해된 것으로 보인다.

4. 창작물에서의 모습


[1] 실제로 한사군 중 진번군이나 임둔군이라는 지명들이 이렇게 작명되었다. "조선"이라는 이름도 낙랑군의 치소 조선현(지금의 평양)으로 그 이름을 400년간 이어간다.[2] 일부 전승에 따라서는 강릉남대천[3] 당시 극동 순방 중이었으며 일본을 방문했을 때 열린 이토 히로부미국가장에 영국 조문 사절로 참석하기도 했다.[4] 다만 여기선 창해군이 역사를 소개시켜줬다는 부분은 나오지 않고 주점에서 진나라의 폭정에 비난하고 있던 장량의 의기를 높게 사며 우연치 않게 만난 것으로 나온다.[5] 당황하던 군졸들과 치열하게 싸웠는지 효과음과 절망하는 장량의 모습으로 그의 싸움을 짐작케하고 이후 상처투성이에 머리도 풀린채로 묶여 포획된 상태로 나온다.[6] 장량이 이유를 물어 보자 한숨을 푹 쉬며 '그것만은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한다. 거사 전날 마지막으로 거나하게 술을 나눌 때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모습을 보고 장량은 치정 문제(...)로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