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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5:43:57

임둔군

한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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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666> BC 108 진번군1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2
BC 82 낙랑군3 현도군4
BC 75 남부도위 동부도위 (흥경 이현)
AD 30 폐지 (무순 이현)
AD 204 대방군
AD 314 (낙랑군 313년, 대방군 314년, 현도군 315년 요서 이현)
1 삼국유사에서는 평나군
2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3 삼국유사에서는 평주도독부
4 삼국유사에서는 동부도위부
※둘러보기 : 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


파일:한사군.jpg

臨屯郡

1. 개요2. 기록3. 고고학적 근거?4. 둘러보기

1. 개요

중국의 전한 제국 제7대 세종 무황제 유철위만조선을 상대로 1년여의 격렬한 전쟁 끝에 멸망시킨 뒤 그 땅에 설치한 군현들(한사군) 중의 하나이다.

2. 기록

위만조선 이전에는 고조선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임둔국이었다. 다른 군현들처럼 기원전 108년에 설치됐으나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하고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으며, 현도군의 일부로 합쳐졌다. 인구가 원래 적은 곳이었고, 또 고조선 멸망 이후 이탈하는 인구도 있어서 별개의 군으로 유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현도군이 고구려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뒤 옛 임둔군 지역에는 낙랑군의 부속구역인 동부도위[1]가 설치되었다.

한서》 <무제기>(武帝紀) 원봉(元封) 3년 여름[夏]조에 대하여 신찬(臣瓚)[2]이 인용한 《무릉서》(武陵書)에 따르면, 현은 총 15개[3]가 존재했고,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었다. 그런데 이 《무릉서》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진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년~기원전 117년)는 한무제가 임둔군과 진번군을 설치하기 약 9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신채호가 해당 구절의 신뢰도를 의심했다.
신찬은 “《무릉서》(武陵書)에 따르면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고 장안에서 6,138리를 간다. 15현이다.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이고 장안에서 7,640리를 간다. 15현이다.”라고 말하였다.
안사고는 “樂의 음은 낙이다. 浪의 음은 랑이다. 番의 음은 보와 안의 반절(반)이다. 暆의 음은 익과 지의 반절(이)이다. 霅의 음은 장과 갑의 반절(잡)이다.”라고 말하였다.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師古曰, “樂, 音洛. 浪, 音郎. 番, 音普安反. 暆, 音弋支反. 霅, 音丈甲反.”
《한서》 권6 <무제기> 원봉 3년 여름 조 주석

위치는 임둔군의 유적이 확실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진번군 동쪽인 현 함경남도 일대에서 강원도 북부 쪽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고 4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芚)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 임둔군의 위치를 강릉으로 비정했다.

3. 고고학적 근거?

1997년 중국 랴오닝성에서 ‘임둔태수장’ 봉니(封泥)가 출토되었다. '봉니'란 문서를 봉인할 때 진흙을 붙이고 그 위에 도장을 찍은 것을 말한다. 서양 중세를 다룬 영화에서 문서 두루마리에 촛농을 묻히고, 그것이 굳기 전에 인장(반지 겸용)으로 꾹 눌러 표시하는 것의 고대판이다.

이 봉니가 출토된 것을 두고 ‘임둔군의 위치가 이쪽으로 밝혀졌으므로 기타 한 군현과 고조선 위치까지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었고, 특히 환빠들이 이에 부화뇌동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유물 발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음이 확실한 상태에서 문헌들이 낙랑군의 동쪽에 임둔군이 있다고 전하고 있고, 랴오닝성 쪽엔 임둔군이 아니라 요동군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겨우 봉니 한두 개 나왔다고 지금까지의 지명 비정을 모두 갈아엎을 수는 없다.

게다가 단순히 출토된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봉니라는 물건 자체가 문서를 보내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모두에게 다 남아있을 수 있기에 위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부산광역시 소인이 찍인 우편 봉투가 광주광역시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광주=부산’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4. 둘러보기

원삼국시대 한국사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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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D 30년, 후한 광무제가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토착 유력자들을 귀의후(歸義侯)로 임명하여 토착민의 통치가 이루어졌다.[2] 서진(西晉) 때 사람이며, 《한서》에 주석을 달았고, 《한서집해음의》(漢書集解音義)를 저술한 학자이다. 특이한 사항은 이름인 찬(瓚)만 남기고, 성씨를 알 수 없는데, 참고로 앞 글자인 신(臣)이 성씨가 아니고, 신하를 뜻하는 글자이다. 일설에는 신찬의 성씨로 부(傅), 배(裵), 설(薛)씨 등이 언급되고 있다.[3] 이후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한 현이 총 7개이다. 기원전 75년 영서 지방에 있다가 현도군이 치소를 고구려현으로 옮기면서 단단대령 이동의 옥저와 동예는 낙랑군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단단대령 이서의 8현은 버려진 것 같다. 또는 해당 8개 현이 진한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통지》에 영서가 현도군 고구려현에 속했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