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4-08 01:28:42

삼한

1. 원삼국시대 임진강 이남에 있었던 세 느슨한 소국 연합체2.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를 지칭하는 단어
2.1. 개요2.2. 용어 사용사례
2.2.1. 한국2.2.2. 일본
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
3.1. 개요3.2. 용어 사용 사례3.3. 기록
3.3.1. 금석문
3.3.1.1. 한국3.3.1.2. 중국3.3.1.3. 류큐
3.3.2. 서지문
3.3.2.1. 한국
3.3.2.1.1. 《고려사》3.3.2.1.2. 《조선왕조실록》
3.3.2.2. 중국3.3.2.3. 일본
3.3.2.3.1. 《일본서기》
3.4. 삼한갑족(三韓甲族)

1. 원삼국시대 임진강 이남에 있었던 세 느슨한 소국 연합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삼한(국가)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삼한(국가)#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삼한(국가)#|]][[삼한(국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를 지칭하는 단어

2.1. 개요

원시의 삼한(三韓)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부족국가연맹 마한, 진한, 변한을 뜻했으나, 이후 진한에서는 신라가, 예맥에서는 고구려가, 마한에서는 백제가 세력을 키워, 삼국이 한반도 일대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는 삼국체제가 형성되자, 이 '삼한'은 삼국시대 후반부가 되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발전된다. 가야는 하나의 세력이 아닌, 금관국, 안라국, 고자국, 다라국 등의 소국연합체였기에, 마한, 진한, 변한이 소멸된 삼국시대 시점에서, 삼한이라는 명칭은 가야를 포함하지 않는 삼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삼한이 삼국으로 와전된 유래는 신라인, 백제인, 가야인들에게 진한, 마한, 변한을 이르는 삼한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관을 의미했던 것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삼한인을 한인(韓人)이라고 호칭하며 고구려인과 구별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북부 예맥 문화권과의 차이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당으로 귀순한 고구려인인 고현(高玄)의 묘지명에서 그는 '요동 삼한인'이라고 기술되었는데, 묘비명은 중국인이 지은 것으로 보여서, 당시 중국에서는 삼한은 삼국을 지칭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고현 묘지명

삼한을 삼국 정립 이전, 한반도 중남부로 보는 관점은 실학자들의 고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 중·후기 이익, 한백겸,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후부터였다. 원삼국시대 당시의 사서인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위 항목대로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으로 설명했지만[1], 삼국통일전쟁이 벌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쯤 가면 이 '삼한'이라는 개념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인식되어 삼국의 다른 표현으로 여겨졌고, 그것이 1,000년 이상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고려 시대 중기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말기의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의 삼한 중 마한이 고구려, 변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와 연결된다는 의견을 정론으로 삼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시대에도 권근의 《동국통감》을 통해 이어진다.[2]

즉, 현대인들은 과거 기록을 토대로 백제, 신라, 가야를 '삼한'[3]과 연결짓고[4]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삼한과는 별도의 '예맥' 계통 국가로 인식하지만 이것은 근현대 역사학 지식이 축적된 결과물이고, 그 전에는 1,000년이 넘도록 '삼한[5]=고구려+백제+신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고증해내기 전까지 마한, 진한, 변한은 고구려, 신라, 백제로 발전 및 대체되었다는 것이 전근대 지식인들의 인식이었다. 이는 비단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룬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생긴 인식도 아니고, 삼한일통 이전이나 직후에도 그랬다.

당 태종 이세민은 주필산 대전에서 고구려군을 이끌고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고연수와 고혜진을 '마한 추장'이라고 불렀다.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幷馬韓酋長.

고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 고연수, 대형 전부군주 고혜진은 병마한 추장[6]이다.
《전당문》, 태종 황제, 645년

고구려인이 삼한인이라고 지칭된 사례는 위에서 든 예나, 당나라에서 죽은 고구려인들의 묘비명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 지역에서는 해당 사례와 같은 삼한인을 자칭한 묘지명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7] 노태돈 교수는 멸망때까지 고구려인이 자신들의 천하관을 중시한 것을 볼 때 '삼한'이라고 자칭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확장을 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인구를 흡수하여 인구적인 측면에서는 '한인'(韓人)과의 동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계루부 고씨 왕실과 지배층 내에서는 멸망의 시기까지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언어나 문화적인 면에서 유사했기에 '삼한'으로 묶어서 바라보았고, 당나라에서 죽은 고구려 지배층 인사들의 묘에 이러한 인식을 가진 중국인들이 묘비명을 썼기 때문에 삼한인으로 표현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피난민을 받아들일 때 하필 고구려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금마저(전북 익산) 땅을 내 준 것도 고구려가 기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자의 후손(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었던) 준왕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평양을 떠나 마한 땅으로 남하해서 한왕이 되었다는 전승을 근거로 해서 고구려 유민들이 마한과 자신들을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있었기에 익산 지역의 땅을 내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8]

즉, 고대 '삼한'(三韓)이란 정체성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역사학적 고증은 다른 대답을 내놓지만 고대인들이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계승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와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삼한을 계승했다는 인식이 존재한 것이다.[9]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오나라초나라 등은 각각 스스로를 '오족'과 '초족'이라 부르면서 중원의 '한족'(漢族)과는 구분짓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국시대 말기와 초한쟁패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이러한 개념이 희석되고 말았다. 따라서 고구려도 초중기까지는 스스로를 '예맥' 계통으로 인식하고, '한(韓)인'들과 구분짓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게 희미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인'(韓人)으로 동화되어버린 것이 아닌가이다.

2.2. 용어 사용사례

2.2.1. 한국

况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조 기사 中
11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 (高宗)이 조서(詔書)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칼과 도마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 (金法敏)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갔던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 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하게 되어, 사녀(士女)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651년 당 고종이 내려보낸 조서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최영, 《태조실록》1권, 총서 66번째 기사 #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민(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기사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3월 13일

2.2.2. 일본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을 일컫는 말로 진구 황후삼한정벌 문단에서 등장한다. 물론 당시 왜국의 국력으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대한 정벌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진구 황후의 기록은 훗날 정한론에 악용되기도 했다.

진구 황후 자체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이닌 덴노(垂仁 天皇) 3년 3월 조)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라는 신라 또는 가야 왕자가 일본 열도로 도래하여 하리마노쿠니(播磨國)에 거주하자 천황이 오미와노 오토모누시(大三輪 大友主)와 이치시노 나가오치(市磯 長尾市)를 하리마노쿠니에 파견하여 아메노히보코에게 왜 왔냐고 질문하니 왜국에 성황(聖皇)이 있어 왜국에 귀속하길 원한다고 하여 정착하여 낳은 후손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 후손이 천황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진구 황후로 되어 있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천황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일 창작된 글이라는 견해도 있고, 진구 황후가 벌인 삼한정벌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제 근초고왕과의 동맹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벌인 마한(침미다례국)과 변한(가야)의 전쟁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전쟁으로 각색되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

3.1. 개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삼한이라는 인식은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여 삼한을 일통했다고 이른 것으로 이어지며, 그 신라가 다시 나뉜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고 신라의 왕족을 받아들인 고려에도 이 신라의 삼한 세계관이 이어져, '삼한'은 한반도 일대 또는 한민족의 강역 혹은 세계관을 의미하는 관용적 명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조선 시대구한말때까지도 이러한 인식이 잔존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유래인 대한제국에 반영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3.2. 용어 사용 사례

고려시대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라는 공신위가 있었으며,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내리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라는 작위도 있었다.[10]

여요전쟁 이후, 요나라는 포로로 끌고 간 고려인을 모아서 내몽골에 삼한현(三韓縣)을 편성하기도 했다.

원나라 간섭기때의 제2차 입성책동 당시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명명한 통치기구의 설치를 검토했다.

충선왕의 왕비였던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결혼하면서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로 봉해졌다.

공양왕의 아버지 왕균은 사후 '삼한국 인효대공'으로 추존되었다. 왕균의 대공 작위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대공 작위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서 을사의 변때 '소가노 이루카가 한인(韓人)[11]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온다. 이를 두고 일본측에서는 덴지 덴노후지와라노 카마타리도래인은 아니고, 단지 내정과 외교 정세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의 주장이 주류지만 어쨋든 '한인'(韓人)이라는 표현 자체는 한국계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해석한다. 또한 정변은 삼한의 사신이 온 날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에 고고학적 의미의 삼한은 사라진 상태였기에 삼국 내지는 한민족 계열 국가 자체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조선을 '한토'(韓土), '한인'(韓人)이나 '한국'(韓國)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정한론이 대표적이다. 정한론이 생겨났을 때는 국호가 아직 대한제국이 아닌 조선이었을 때였다.

3.3. 기록

3.3.1. 금석문

3.3.1.1. 한국
[최사전이 이르기를]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중략)

상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삼한(三韓)을 바로 되돌리고 종사(宗社)[12]를 안정시킨 것은 공의 힘으로 한 것이다."
- 《최사전 묘지명》 中.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에 용서하시며 넉넉히 예로써 맞아주시니, 표정을 고치고 웃는 낯으로 온갖 무기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갑옷, 도성의 남녀가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께서 은사를 베푸심이라. 황제께서 군사를 물려주시니 우리 백성들 살게 되었네. 흩어진 우리 백성 불쌍히 여겨 농업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니,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단은 나날이 새로워라.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은혜로다.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 삼전도비
3.3.1.2. 중국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고현 묘지명》, 691년 中.
3.3.1.3. 류큐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 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 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의 명문

만국진량의 종[13]에서 '만국진량'은 '세상 모든 나라를 연결하는 가교(架橋)'라는 의미였는데, 각국과 교역하던 류큐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종은 1458년(조선 세조 재위기)에 쇼 타이큐(尚泰久, 상태구) 왕의 명령으로 주조된 것으로 류큐를 주변국에 비교하며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조선을 '삼한'으로 적고 있다.

3.3.2. 서지문

3.3.2.1. 한국
3.3.2.1.1. 《고려사》
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고려사》, <예종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中.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의 유조(遺詔) 中.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14]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며 왕이 있는 건 오직 삼한[15]뿐이다.
고려사》, 권 33, <충선왕 세가> 中.
(중략) 伍允孚嘗痛憤, 以爲, “此藥不宜胎産, 使三韓攴胤不蕃者, 必此人也.” (중략)

(중략) 오윤부가 분통해 하여 말하기를, “이 약은 아기를 가지는 데 좋지 못하므로, 삼한의 왕실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중략)
《고려사》, <열전>, -비-,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가 충렬왕에게 미녀를 바친 김중경을 순마소에 하옥하다. 中.
3.3.2.1.2.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16]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17]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3번째 기사
3.3.2.2. 중국
삼한(三韓)은 정말로 망하였구나.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효정경황후 대공보 1910.9.21[18]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영사지금필: 평생을 벼르던 일이 이제야 끝났구려)
死地圖生非丈夫 (사지도생비장부: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도다)
身在三韓名萬國 (신재삼한명만국: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도다)
生無百世死千秋 (생무백세사천추: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위안스카이[19]
3.3.2.3. 일본
3.3.2.3.1. 《일본서기》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 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20],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1]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22]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 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3.4. 삼한갑족(三韓甲族)

'삼한에서 인 씨족'이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으뜸가는 씨족'이라는 뜻이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해동갑족'으로 개칭되어 나온다.

[1] 그러나 마한, 진한, 변한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이를 '한'전(韓傳)이라고 쓰고 있지, '삼한'이라고 기록하고 있진 않다.[2] 다만 권근은 마한이 백제, 변한이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하였다.[3] 마한, 진한, 변한[4]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제 유전적, 문화적으로는 삼한도 예맥 계통이 맞다.[5] 마한, 진한, 변한[6] 변한+마한을 가리킨 건지 마한 전체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쓴 건지 확실하지 않다.[7] 그러나 도굴에 약한 고구려식 무덤 특성상 고구려 내부 묘지명 자체가 보존된 게 많지 않으므로 지금 남아있는 극소수 묘지명에 안 나온다고 해서 단언할 수도 없다.[8] 오늘날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실제 마한의 중심지가 충청남도 천안 혹은 전라북도 익산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고고학이 없었던 조선시대까지는 준왕이 남하하여 자리잡은 곳이 익산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단 준왕 남하와 건마국의 건국이 분명한 관련이 있음은 고고학적 발굴로 최근 입증되었다.[9] 삼한은 본래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부터 발전한 '백제, 신라, 가야'를 지칭했으나 중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였던게 영향을 미쳐 한반도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지칭하였다는 설도 있다.[10] 대표적으로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의 어머니인 지씨(智氏)가 삼한국대부인이었다.[11] '한인'의 일본식 독음은 '카라히토'로 일본어로는 韓의 훈독이 '카라'(から)이다. 그런데 韓의 우리말 상고음을 재구해보면 '가르'로 추정되어 매우 유사하다. 한편으로는 '가라' 또는 '가락'이라고 불리는 가야와의 연관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본과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국가가 가야였고 그래서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다.[12] 종묘사직.[13]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등록한 명칭은 '구 슈리성 정전종'(旧首里城正殿鐘)이다.[14] 원무종을 뜻한다.[15] 고려를 뜻한다.[16] 여기서 공은 태조 이성계를 부르는 것이다.[17] 최영이성계한테 한 말이다.[18] 경술국치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한 발언이다.[19] 안중근의 순국 이후, 보낸 애도시(詩)이다.[20]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21]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22]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