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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지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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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폐지 후 부활
공석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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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일본 제38대 천황
덴지 천황
天智天皇
파일:256px-Emperor_Tenji.jpg
출생 626년[1]
사망 672년 1월 7일 (향년 46세)
오미노오오쓰노미야(近江大津宮)
(現 일본 시가현 오츠시)
능묘 야마시나릉([ruby(山科陵, ruby=산과릉)])
재위기간 제38대 천황
668년 2월 20일[2] ~ 672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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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카즈라키([ruby(葛城, ruby=갈성)])[3]
부모 부황 조메이 천황
모후 고교쿠 천황
형제자매 5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야마토히메 왕
자녀 7남 12녀
관저 오미노오오쓰노미야([ruby(近江大津宮, ruby=근강대진궁)])
작호 나카노오오에 황자([ruby(中大兄皇子, ruby=중대형황자)])
한풍 시호 덴지 천황([ruby(天智天皇, ruby=천지천황)])
화풍 시호 천명개별존(天命開別尊)[4]
}}}}}}}}} ||
1. 개요2. 생애
2.1. 을사의 변으로 소가씨를 몰아내다2.2. 실권을 장악하다2.3. 백제부흥운동 지원2.4. 천황 즉위 이후
3. 가족 관계4. 이설5. 백인일수6.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38대 천황.

아버지는 조메이 천황, 어머니는 고교쿠/사이메이 천황(皇極/斉明 天皇)이였다. 휘는 카즈라키/가쓰라기(葛城)이지만 존호인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로 더 잘 알려져있다.

2. 생애

2.1. 을사의 변으로 소가씨를 몰아내다

644년, 호코지(法興寺, 법흥사)의 느티나무 밑에서 타국(打毱) 경기를 하다가 가죽 신발이 제기공과 함께 벗겨져 땅에 떨어졌고, 이때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주워주자 나카노오오에 황자도 이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받은 것을 계기로 서로 친해져 마음 속에 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카마타리와 함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 밑에서 배우면서 당대의 권신으로 전횡을 일삼던 소가노 이루카를 도모할 계획을 상의하고 인재를 천거받았으며, 카마타리의 주선으로 이루카의 사촌이었지만 적대하는 관계였던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 石川麻呂)와 접촉해 그의 차녀인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蘇我 遠智娘)와 혼인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645년 6월 12일에 잇시(을사)의 변을 일으켜 이루카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2.2. 실권을 장악하다

정변으로 소가씨는 몰락했고, 고교쿠 천황은 갑작스러운 정변에 화가 나 퇴위하여 황위는 나카노오오에 황자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나 카마타리의 조언에 따라 고교쿠 천황의 동생인 카루 황자(輕 皇子)에게 양보하여 그가 고토쿠 천황이 되었다. 고토쿠 천황은 외조카인 나카노오오에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으며,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실권을 잡아 아베노 우치마로(阿倍内麻呂)를 좌대신(左大臣), 이시카와마로를 우대신(右大臣), 카마타리를 내대신(內大臣)에 임명하고 다이카 개신을 단행했다.

649년 3월 17일에 좌대신 우치마로가 죽자 고토쿠 천황 및 다른 공경들과 함께 애도했다. 소가노 히무카노 오미(蘇我日向臣)가 나카노오오에 황자의 장인인 이시카와마로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했다.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오오토모노 코마노 무라지(大伴狛連), 미쿠니노 마로노 키미(三國麻呂公), 호즈미노 쿠히노 오미(穗積嚙臣) 등을 보내 장인인 이시카와마로를 추궁했는데 그에게서 직접 천황을 뵙고 해명하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러다 고토쿠 천황이 군사를 보내 이시카와마로를 죽였고,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처리 과정에서 이시카와마로가 결백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으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부인인 오치노이라츠메가 매우 슬퍼하다가 죽자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했다.

653년에는 민 법사(旻 法師)가 죽자 사신을 보내 조문하게 했으며, 이전에 고토쿠 천황이 나니와노미야(難波宮)로 천도했었는데 나카노오오에가 다시 아스카노카와베노카리미야(飛鳥河辺行宮)로 천도할 것을 요청했으나 덴노가 거절하자 다른 공경들과 함께 아스카노카와베노카리미야로 옮겨 정치적으로 외숙부인 고토쿠 천황을 고립시켰다. 654년에 고토쿠 천황이 붕어하자 655년 어머니 고교쿠 상황을 다시 사이메이 천황(斉明 天皇)으로 즉위시켰고 660년에는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다.

2.3. 백제부흥운동 지원

661년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던 모후 사이메이 천황이 붕어하자 즉위식도 미뤄가며 국정을 이어받아 8월에 나가쓰노미야(長津宮)로 옮겨 거주하면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해 여러 장수들을 보냈으며, 9월에는 일본에 머물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에게 관직을 주었다.

661년 3월 4일 신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고구려가 일본 조정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 부분은 백제 부흥군에 대한 교류나 지원이 고구려로 오기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662년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 귀실복신과 백제의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에게 여러 물품을 지원하면서 수군 170척을 보냈다.

663년 군사 27,000명을 보내 백제 부흥군과 합세하여 나당연합군을 상대하도록 했지만 결국 역사적인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은 대패하고, 지원군은 몰살되었으며 부흥군의 근거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일본도 백제 부흥을 단념하고 한반도에 대한 직접 개입을 중단했으며, 이후 나당전쟁의 전조가 보이자 과거의 적이었던 신라와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신라와 사신을 주고받는 빈도수가 갑자기 늘어났으며, 신라의 중신 김유신에게 배를 선물하는 등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것이 무색하게 태도가 확 바뀌었다. 그리고 탐라국의 사신을 받고 견탐라사를 보내는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외교 다각화를 시도한 정황이 드러난다.

665년 백제의 남녀 400여 인을 오미국(近江國) 가무사키노코오리(神前郡)에 살게 했다. 그리고 나가토국(長門國)에 성을 쌓았으며, 쓰쿠시국(筑紫國)에도 오노성(大野城)과 기이성(基肄城)을 쌓게 했다.

666년 사에키노 무라지 고마로(佐伯連子麻呂)의 병문안을 했다. 이 해에 수도의 쥐들이 오미국으로 향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백제의 남녀 2,000여 명을 아즈마국(東國, 현재의 관동 지방)에 살도록 했다.

667년 3월 19일 오미국의 오미노오오쓰노미야(近江大津宮)로 천도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싫어하여 크게 비난했다고 한다. 7월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물건을 헌상했다. 8월 야마토국(大和國)에 행차했다. 11월 야마토국에는 다카야스성(高安城)을, 사누키국(讃岐國) 야마다노코리(山田郡)에는 야시마성(屋嶋城)을, 쓰시마국(対馬國)에는 가네다성(金田城) 등을 쌓았다.

2.4. 천황 즉위 이후

668년 1월 3일에 천황으로 즉위했고[5] 7일에 연회를 했다. 여름인 5월 5일 가마후노(蒲生野)로 사냥을 갔다.

668년 가을 9월 12일 신라가 사탁부 출신 급찬 김동업 등을 보내 조를 올렸다.

669년 여름 5월 야마시나노노(山科野)에 사냥을 나갔다. 가을 8월 3일 다카야스 고개(高安嶺)에 올라 성을 쌓는 일을 의논했다. 겨울 10월 10일 공신 카마타리의 문병을 갔다. 16일 그가 죽자 후지와라를 사성하고 19일에는 그의 집에 행차해 조서를 내리면서 금 향로를 하사했다. 또한 다카야스성을 쌓으면서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냈다.

670년 정월에 궁문 안에서 조정의 행사를 열었으며, 2월 호적을 만들어 도적과 부랑자를 단속했다. 카마후노코오리(蒲生郡)의 히사노노(匱迮野)에 가서 궁지를 살펴보고 다카야스성(高安城)을 수리해 쌀, 소금을 쌓아두었다.

671년 2월 여러 대신들을 임명했다. 9월 병이 위중해졌다.[6] 겨울 10월 호코지(법흥사)에 사자를 보내 여러 보물들을 불전에 올렸다. 17일 병이 더욱 위중해졌다. 음력 12월 3일 오미노오오쓰노미야에서 붕어했다.

67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올렸다. 겨울 10월에 신라가 사찬 김만물을 보내 조를 바쳤다.

3. 가족 관계


이외에도 원래 가가미노 오키미(鏡王女)라는 첩이 있었지만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본처로 하사했다고 하며, 이후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태어났다. 그 때문에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덴지 천황의 사생아라는 설이 많다. 또 선제 고토쿠 천황의 황후인 하사히토 황녀(間人皇女)와 볼륜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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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설

덴지 천황은 을사의 변다이카 개신이라는 공적을 남긴 고대 일본사의 영웅으로 칭송되지만, 막상 행적을 보면 '만들어진 허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을사의 변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했지만 현대에 들어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소가노 이루카가 개혁파였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당대에는 이루카의 저주로 사이메이 천황과 주변 사람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었다고 믿었다. 사이메이 천황이 죽기 직전 귀신을 봤지만 헤이안 시대 《부상략기》의 기록을 보면 소가노 이루카의 귀신이라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기 직전 신벌을 상징하는 낙뢰가 그의 집에 내리쳤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 원인이라는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죽음도 조작된 티가 너무 강하게 나서 누명이라는 것이다.

고토쿠 천황이 즉위한 뒤 나니와로 천도했지만, 그 실상은 소가노 이루카 때 이미 나니와 천도가 계획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 을사의 변이 일어나기 전 야마토의 쥐들이 서쪽으로 옮겼다는 기술이 있으며 지형적으로 나니와는 야마토 분지를 공격하기 어렵기에 사전에 계획된 일이 아니고서야 다른 곳도 아니고 나니와로 옮길 이유가 없다.

덴지 천황과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고토쿠 천황 사람들을 줄창 주살한 끝에 천황만 남기고 야마토로 돌아왔다. 하지만 백강 전투에서 대패한 뒤 입지는 다시 변하게 된다. 백제부흥전쟁에서 덴지 천황과 그의 모후 사이메이 천황은 무리해가면서 백제를 지원했는데 이 시기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다 끝나고 난 이후에야 돌아왔을 뿐이다.[7] 이 와중에 카즈라기 황자 즉 나카노오오에는 사이메이 천황이 소가노 이루카의 귀신(?)으로 인해 죽은 뒤에도 즉위식을 늦춰가면서 병력을 파병하고 뒤에 즉위했다.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자 나당연합군이 야마토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며 서일본 각지에 성을 쌓아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백강 전투 이후 수 년 동안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야마토로 돌아가지 않고 오미(近江)에 수도를 건설해 무모한 천도 시도를 했다고 나온다. 방위상 야마토 분지는 서일본 최후의 요새로 가장 적합한 곳이라 북규슈를 굳힌[8] 그가 갈 곳은 야마토였다.

나라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방위상 야마토 분지는 견고해서 야마토 정권이 잘 떠나려고 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오미에 수도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도 백제 부흥군 지원에 반대했을 소가씨의 잔당[9]과 야마토의 기타 세력들 때문에 패전 이후 야마토로 못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동생인 오오아마 황자와의 대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10] 나카노오오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하고 몇 년 뒤에 즉위했으며, 자기 아들이 아닌 오오아마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거기다 오오아마 황자가 소가씨와 가까웠다는 것은 진신(임신)의 난에서 증명된다. 잇시(을사)의 변, 다이카 개신, 백강 전투에서도 오오아마 황자는 전혀 나오지 않다가 다 끝난 뒤에야 황태자로 책봉되며 중용되었다.

덴지 천황은 말년에 자기 아들인 오오토모 황자(고분 천황)를 즉위시키려고 했다. 죽기 직전 모반죄로 몰아붙이고자 오오아마 황자를 불러 양위 떡밥을 풀지만 오오아마 황자는 함정임을 눈치채고 거절한 뒤 출가해 요시노로 가 버렸다. 결국 덴지 천황 사후 진신의 난으로 오오아마 황자와 오오토모 황자는 격돌하게 되었고, 오오아마 황자가 승리해 덴무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덴무 천황 이후 황통은 직계 남자 천황으로만 따져도 덴무 천황(40대) - (구사카베 황자) - 몬무 천황(42대) - 쇼무 천황(45대) 이렇게 3대밖에 이어지지 않았고[11] 대부분은 덴무 천황의 황후 또는 공주가 정식 계승자인 황태자가 성장할 때까지의 '임시 계승' 개념으로 천황으로 즉위했다. 쇼무 천황의 딸로 즉위한 고켄 천황(46대/48대)의 사망에 이르러서 신료들은 덴무 천황의 후손이 아니라 덴지 천황의 후손을 추대했고, 이후 덴무 천황의 후손들이 일본의 황위를 잇는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12]현재 일본 황실의 직계 조상은 덴지 천황인 것이다.

5.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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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번 덴지 천황(天智天皇)
[ruby(秋, ruby=あき)]の[ruby(田, ruby=た)]の かりほの[ruby(庵, ruby=いほ)]の [ruby(苫, ruby=とま)]をあらみ [ruby(我, ruby=わ)]が[ruby(衣手, ruby=ころもで)]は [ruby(露, ruby=つゆ)]にぬれつつ
가을 들녘의 볏단 쌓은 초막의 성긴 지붕에 나의 소맷자락에는 이슬이 젖어드네

6. 창작물

삼국통일전쟁의 절정기에 백제와 일본이 군사동맹이었으므로 삼국시대 한국 사극에 종종 등장한다. <삼국기>에서는 이광기가 연기했다. <대왕의 꿈>에서 연기한 배우는 안홍진. '삼한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변이 일어났다'는 《일본서기》의 서술을 따 와서 김춘추(최수종)가 고교쿠 천황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김춘추가 《일본서기》 기록상 사신으로 간 건 647년으로 되어 있는데, 을사의 변은 645년에 일어난 일이라 고증오류이다.

[1] 재위기간이 겹치는 신라 제30대 문무왕과 동갑이다.[2] 선제인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붕어했는데 재위가 7년 뒤인 668년인 것은 백제부흥운동 지원이나 여러 문제로 인해 즉위식을 늦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국가 통치는 645년부터 이미 하고 있었다.[3] 가쓰라기라고도 읽는다.[4]
아메미코토히라카스와케노미코토
아마츠미코토사키와케노미코토
[5] 667년 3월에 즉위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6] 다른 기록에는 8월에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7] 그래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백제부흥운동의 수장이었던 부여풍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고구려로 망명했고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당나라에서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시기가 딱 맞기 때문.[8] 백강 전투 준비를 위해 사이메이 천황과 나카노오오에 황자가 후쿠오카로 가서 승전을 기원했다.[9] 소가씨가 집권한 뒤 백제 일변도 외교에서 외교 다변화를 꾀했고, 그로 인해 백제와 마찰을 빚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살아남은 소가씨들은 무모하리만치 백제만 지원하는 백강 전투에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10] 기록에는 친동생으로 나오지만, 오오아마 황자가 이부형인 아야 황자라는 설도 있다. 아야 황자는 타카라 황녀(고교쿠, 사이메이 천황)이 타무라(조메이 천황)과 혼인하기 전 소가씨로 추정되는 다카무쿠노 오키미(高向王)라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11] 덴무 천황의 손자인 47대 준닌 천황(덴무 천황 - 도네리 친왕- 준닌 천황)는 고켄 천황(46대)의 뒤를 이어 즉위하기는 했지만 생전에 고켄 천황(쇼토쿠 천황)에 의해 폐위되어 메이지 시대까지도 시호가 없이 그냥 '아와지 폐제'라고만 불렸다.[12] 덴무 천황의 후손으로 신적강하한 이들의 집안 가운데 몇몇이 무로마치 시대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헤이안 시대의 여류 가인 세이 쇼나곤은 도네리 친왕의 후손인 기요하라 씨(清原氏) 집안이고, 헤이안 시대 말기 도바 상황의 측근이자 고시라카와 천황의 유부(乳父, 유모의 남편)였던 신제이(信西), 무로마치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는 모두 덴무 천황의 손자이자 덴지 천황의 외손자인 나가야 왕의 후손인 다카시나 씨(高階氏) 집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