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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長室王나라 시대 일본의 황족. 덴무 덴노의 아들 다케치 황자(高市皇子)와 덴지 덴노의 딸인 미나베 내친왕(御名部内親王)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부계와 모계 모두 당대 조정을 차지했던 덴지와 덴무의 피를 이었다.
2. 생애
2.1. 출세가도를 달리다
황족으로서 고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704년 정4위라는 파격적인 관위를 받으며 조정에 진출하였다. 709년 종3위(従三位) 궁내경(宮内卿)을 거쳐 이듬해에는 식부경(式部卿)이 되었고, 716년 정3위(正三位)가 되었다. 헤이조쿄(平城京) 천도 후에는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 후히토나 황친(皇親) 도네리 친왕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였다.나가야 왕은 황친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고, 율령에 정통한 사람이었으며, 716년 당시 나가야 왕의 첫번째 아내인 키비 내친왕(吉備內親王, 몬무 덴노와 겐쇼 덴노의 여동생) 소생의 자녀들은 황손의 대우를 받았다. 현존하는 목간에서 일반적으로 천황의 명을 가리킬 때나 사용하는 대명(大命) 등의 경어를 쓰는 등 나가야 왕 같은 황친에 대한 경어는 거의 천황에 대한 예우와 같은 수준이었다고 보인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나가야 왕의 저택이 있던 헤이조쿄 궁 가까운 좌경 3조 2방 지역의 저택 발굴 당시 연못 부지에서 발굴된 35,000점의 목간(木簡) 가운데 공진물하찰목간(貢進物荷札木簡)에서 '나가야 친왕궁(長屋親王宮)'이라고 적힌 것도 발굴되었는데 이것이 단순히 참칭인지 아니면 나가야 왕 저택 안에서만 쓰던 통칭인지, '미코노미야'(황태자)라는 단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 뿐인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나가야 왕이 당시 황위 계승권을 지닌 유력 종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인지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과 가메노히메의 딸이자 쇼무 덴노의 어머니였던 후지와라노 미야코의 친동생인 후지와라노 나가코를 나가야 왕과 혼인시킬 정도로 기대를 보였다. 실제로 나가야 왕이 후지와라 씨족에 반발한 것이 후히토의 사후였던 것을 볼 때 그의 생전에는 그런대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717년 좌대신(左大臣) 이소노카미노 마로(石上麻呂)가 죽자, 이듬해에 나가야 왕은 일거에 대납언(大納言)이 되어 태정관(太政官)에서 우대신 후지와라노 후히토 다음 가는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신라에서 온 사신을 왕 자신의 저택에 초청해 성대하게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 연회에서 나가야 왕이 지은 한시 3수가 동석한 문인들이 지은 한시와 함께 《회풍조》(懐風藻)에 수록되어 전한다. 《회풍조》에 수록된 시를 보면 연못이 있는 정원에 매화나무,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고,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향기로운 술이 대접되었다고 당시의 연회 모습을 그리고 있다.
720년 장인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사망했을 때 그는 우대신(右大臣)으로서 조정의 최고위 대신이었다. 이때는 태정대신이나 관백의 자리가 없어서 좌대신(左大臣)이 최고 자리였는데, 그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사위이자 그 바로 다음가는 지위였기에 후히토가 죽으면서 좌대신이 되었다. 나가야 왕이 정권을 쥐고 있던 723년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 발표되었고, 이후 종2위 우대신을 거쳐 724년 쇼무 덴노가 즉위하던 날, 나가야 왕은 정2위 좌대신이 되었다.
2.2. 후지와라와의 대립
그는 후지와라노 후히토 생전까지는 분명 후지와라씨와 인척관계를 맺는 등 상호 협조관계였다. 하지만 황실 종친의 대표였던 나가야 왕이 조정의 최고 실력자인 좌대신이 되고, 후지와라노 후히토 사후 후지와라 4형제가 최고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났다.이미 쇼무 덴노가 즉위하기 전부터 기미가 있었다. 후히토의 차남이자 북가(北家)의 시조였던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가 722년 좌대신보다 위의 관직을 만들어 자신이 취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나가야 왕의 입장에서 분노를 사기 충분한 것이었다. 후사사키는 우치쓰오미(內臣)라고 해서 당시의 겐쇼 덴노를 움직여 '천황 권력과 동등한 힘을 가지는 관직'임을 인정받았고, 율령 외의 관직으로서 자신의 요술 방망이마냥 악용해 권세만을 위해 휘둘렀다. 율령으로도 벌을 내릴 수 없다며 전횡하는 게 나가야 왕 입장에서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건은 쇼무 덴노가 자신의 생모인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를 대부인(大夫人)으로 칭한다는 조칙을 발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후지와라 씨족의 황후를 만들기 위한 묘책이었다. 당시 후지와라 씨족은 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를 황후 자리로 올리려고 했다. 나가야 왕은 율령에 명시된 황태부인(皇太夫人)과 달리, 없는 조항이라며 반발했다. 나가야 왕 일파는 '천황의 명령과 율령의 규정에 모순이 있다면 우리들은 어디를 따라야 합니까?'라고 했다.
당시 황후는 황족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지만, 후지와라씨는 불문율이라는 점을 이용해 예외를 만드는 것으로 자기 가문 출신의 황후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반발한 나가야 왕은 기어코 해당 조칙을 물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후지와라 씨족과 대놓고 적대하게 되었다.
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는 모토이 왕을 낳았지만, 728년 태어난지 일 년도 안 되어 사망했고, 장녀 이노에 내친왕(井上内親王)과 3녀 후와 내친왕(不破内親王)을 낳은[1]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히로토지(懸犬養廣刀自)가 아사카 친왕(安積親王)을 낳았다. 당시 쇼무 덴노의 살아남은 아들은 아사카 친왕뿐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게 시선이 쏠리게 되었다. 쇼무 덴노는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武智麻呂, 남가)와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 북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지만 이들은 자녀를 가지지 못했다.
만일 아사카 친왕이 죽게 되면, 쇼무 덴노의 고모이자 나가야 왕의 아내인 키비 내친왕(吉備內親王)의 아들인 가시와데 왕(膳夫王) 등의 왕자들이 덴무계 황족으로서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권자였다. 이에 후지와라 씨족은 나가야 왕을 없애기로 결심한다.
2.3. 최후
729년 2월, 누리베노 기미타리(漆部君足)와 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中臣宮處東人)가, 나가야 왕이 몰래 사도(私道)를 배워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밀고했고,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宇合, 식가) 등이 거느린 병사들이 나가야 왕의 저택을 포위하였다. 도네리 친왕의 심문을 받고 이틀 뒤 나가야 왕은 자결하였다. 향년 46세(또는 54세).같은 날 나가야 왕의 아내인 키비 내친왕과 그 소생의 왕자 네 명도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정작 그 동생이나 자매, 자손, 첩 등 연좌되었던 사람들이나 나가야 왕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들은 모두 사면되었다.
나가야 왕이 자결한 해 8월, 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코묘 황후)가 쇼무 덴노의 황후가 되었고, 4형제는 모두 의정관과 요직을 두루 차지하였다.
3. 저주
정사에서는 나가야 왕의 저주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헤이안 시대 초기의 불교 설화집 <일본영이기>에 이런 기사가 남아 있다. 나가야 왕 일족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뼈는 부서진 채 헤이조쿄 바깥에 버려졌다. 그런데 나가야 왕의 뼈만은 토사(土佐)로 가져갔다. 그런데 토사에서 역병이 유행하자 모두들 나가야 왕의 저주라고 수군거렸다. 따라서 뼈를 긴키에 있는 기노쿠니(紀國)의 작은 섬으로 다시 옮겼다. 이는 사람들이 나가야 왕이 귀신이 되어 저주를 내렸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나가야 왕이 저주를 내렸다는 인식을 다름아닌 후지와라 씨족이 가장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후지와라 4형제는 권력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나가야 왕이 죽은 뒤 8년 뒤인 737년, 북규슈에 유행하던 천연두가 도읍인 헤이조쿄를 덮치면서 후지와라 4형제들이 죄다 몰살당하게 된다. 이에 헤이조쿄 사람들은 모두 나가야 왕의 저주라고 수군거렸고,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코묘 황후는 멸죄를 위한 온갖 사찰들과 구호소를 만들어 일족의 죄를 씻어내고, 남편을 지켜내고자 했다. 이 사건에 후지와라 씨족이 품은 두려움을 알 수 있다.
738년 7월 10일에는 좌병고(左兵庫)의 오토모노 고무시(大伴子蟲)가 우병고(右兵庫)의 수장이 된 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와 바둑을 두다 나가야 왕을 논하던 가운데 알력이 생겨 그만 그를 참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즈마히토는 일찍이 나가야 왕을 밀고한 공으로 외종 5위 下 관위를 받은 자였다. 해당 사건을 기록한 《속일본기》에서 나가야 왕을 고발한 아즈마히토의 행동을 「무고」(誣告)라는 단어로 적고 있는 것에서 《속일본기》 편찬 당시인 헤이안 시대 초기 일본의 조정은 나가야 왕이 죄없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후지와라 씨족은 자기들에게 난국이 찾아오면 반드시 호류지에 제사를 후하게 올렸다. 거기다 호류지 안에는 무언가를 막으려는 듯이 대문 앞에 기둥을 세워두었고, 대문을 열면 천재지변이 생긴다고 승려들이 두려워했으며, 대문을 열어보자 불상의 광배에 저주를 상징하는 대못이 박혀 있었다는 게 메이지 시대에 가서 밝혀진다.
나가야 왕은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후지와라 씨족과 대립했고, 덴무는 임신의 난에서 소가씨가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데서 알 수 있듯 소가씨와 가까운 사이였다. 후지와라 씨족은 당대에 저주 소문으로 유명했던 소가노 이루카를 비롯해 소가라고 이름 붙은 자들과 소가씨의 피를 이은 왕가들을 모두 하나로 모아 호류지에서 저주를 봉인하고 제사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4. 가계
- 할아버지 : 덴무 덴노
- 할머니 : 아마코노이라츠메(尼子娘) - 무나카타노 도쿠젠(胸形徳善)의 딸
- 외할아버지 : 덴지 덴노
- 외할머니 : 소가노 메이노이라츠메(蘇我姪娘) - 소가노 쿠라야마다노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딸
- 아버지 : 타케치 황자高市皇子
- 어머니 : 미나베 내친왕御名部内親王
나가야 왕은 증조부 대로 거슬러가면 소가씨로까지 이어지는 인물로, 보다시피 매우 화려한 인척관계를 자랑한다. 아버지 다케치 황자는 임신의 난 때 오미(近江) 오쓰노쿄(大津京)에 있었으나 탈출하여 아버지에게 합류, 젊은 나이에 미노 국(美濃国) 후와(不破)에서 군사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679년에 덴무 덴노와 함께 요시노(吉野) 맹약에 참가, 형제들과 협력할 것을 맹세하였다. 686년에 지토 덴노가 즉위하자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고, 이후 천황과 황태자를 제외한 황족과 신하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케치 왕은 장자였지만 어머니가 무나카타(胸形)씨 출신이라서 덴노 자리를 이어받지 못했다고 한다.
첫번째 아내인 키비 내친왕은 겐쇼 덴노와 몬무 덴노의 동생이며, 두번째 아내인 후지와라노 나가코는 몬무 덴노의 후궁이자 쇼무 덴노의 어머니인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의 여동생이다.
5. 후손
나가야 왕의 후예 씨족인 다카시나 씨(高階氏)는 백부 도네리 친왕의 후예 씨족인 기요하라 씨(清原氏)와 함께 오랫동안 그 혈통을 유지하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첫번째 처 다카시나 아키코, 고시라카와 덴노의 총비(寵妃)였던 단고노 쓰보네(丹後局) 에이코(栄子)도 다카시나 씨 사람이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를 도와 무로마치 막부 개창에 공을 세운 고 모로나오(高師直)와 그 동생 모로야스(師泰) 역시 다카시나 씨로 나가야 왕의 후손에 해당한다.6. 일화
나가야 왕이 왕의 부모와 쇼무 덴노 이전 역대 덴노를 위해 발원하고 와도 5년(712년)과 진키 5년(728년) 5월 두 번에 걸쳐 사경한 《대반야경》(大般若經) 1부(6백 권)는 《나가야 왕 원경》(《진키경》)의 일부로써 남아 전한다.779년 완성된 《도다이와조토세이덴》(唐大和尙東征傳)에는, 당의 승려 감진(鑑眞)이 일본의 유학승 에이에이(英叡), 후쇼(普照)에게 "일찍이 일본국의 나가야 왕께서 불법을 숭상하시어, 당의 승려를 위해 1천 장의 가사를 기증하셨다"고 말했다는 기술이 있다. 그 가사 가운데 한 벌에는 가장자리에 "산천과 지역이 달라도 풍월천은 같고, 여러 불자를 맞아 함께 내연을 맺는다"는 글귀를 수놓았다고 한다.
반면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중권1에는, 쇼무 덴노가 대법회를 열었을 때 태정대신 정2위 나가야 왕이 신분 천한 사미승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민중에게 전파된 불교 설화에서 나가야 왕의 불교를 귀족 불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빗댄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