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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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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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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우대신
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권력 당시의 초상화[1]
출생 1593년 8월 29일
셋쓰국 히가시나리군 오사카 오사카성
(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성)
사망 1615년 6월 4일 (향년 21세)
셋쓰국 히가시나리군 오사카 오사카성
(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성)
재임기간 제2대 하시바 당주
1598년 9월 18일 ~ 1615년 6월 4일
제2대 도요토미 당주
1598년 9월 18일 ~ 1615년 6월 4일
우대신
1605년 4월 13일 ~ 1607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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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히로이마루(拾丸)
→ 도요토미 히데요리
신호 귀적산고양사전수산대거사
(帰寂山高陽寺殿秀山大居士)
신체 197cm | 161kg
부모 아버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 ~ 1598)
어머니 요도도노(淀殿, 1567 ~ 1615)
배우자 정실 센히메(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자녀 도요토미 구니마쓰덴슈니, 토키쿠니 토키히로?(時国時広?), 구엔(求厭)[2]
관위 종3위 사콘에노곤노주조(従三位左近衛権中将)
종2위 곤노주나곤(従二位権中納言)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정2위(正二位)
나다이진(内大臣)
우다이진(右大臣)
}}}}}}}}}
파일:external/sans-culotte.up.n.seesaa.net/toyotomi_hideyori.jpg
현대에 발견된 스무 살 무렵 히데요리의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아버지의 죽음2.2. 세키가하라 전투2.3. 오사카 전투
2.3.1. 오사카 겨울의 진2.3.2. 오사카 여름의 진
3. 후손4. 기타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측실 요도도노 사이에서 태어난 삼남.

아명은 히로이마루(拾丸)인데 '주워온 아이'라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업둥이'이며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히데요시가 지은 이름이다.[3] 아예 태어난 후 길거리에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는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했는데 되려 엄청 일찍 죽었다.

히데요시는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3살 때 병으로 요절하자 크게 상심했고, 어렵게 얻은 자식이었기에 다시는 자식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자를 거의 포기한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57세라는 더 늦은 나이에 츠루마츠를 이어 간신히 얻은 히데요리가 얼마나 귀하디귀한 아들이었고 오래 살기를 바랐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후계자가 되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자 23살의 젊은 나이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참고로 히데요리를 쇼군으로 표기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히데요리는 쇼군 직위를 받은 적이 없다. 아버지인 히데요시는 관백이었으며 본인의 최종 직위 또한 우대신이었다.

2. 생애

2.1. 출생과 아버지의 죽음

1593년 부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나이 57세 때 오사카 성에서 탄생하였다. 어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로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였고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이치의 장녀 차차이다. 유모는 구나이쿄노 쓰보네(宮内卿局,? ~ 1615), 우쿄다이부노 쓰보네(右京大夫局, ? ~ 1615)이다.

늘그막에 겨우 얻은 큰아들인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 후 히데요시는 더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여겼는지 누나 닛슈의 아들인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작은아들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히데츠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태어났을 당시 이미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간파쿠 자리를 이어받고 있었으므로 논란이 제기되었다. 히데요리의 생후 2개월째인 1593년 10월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딸과 아들 히데요리의 약혼을 주선하는 등 히데츠구를 회유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1595년 7월 히데츠구로부터 간파쿠 직책을 박탈해 할복시킨 뒤 그의 일가족 또한 숙청하였으며 다수의 다이묘들로부터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혈판 서약서를 쓸 것을 강요하여 히데요리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시켰다.[4]

이후 후시미 성[5]이 완공되어 부자가 함께 거처를 옮겼으며 양자였던 처남의 아들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의 양자가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유키 히데야스도 히데요시의 양자였다가 유키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예외적으로 우키타 히데이에는 여전히 도요토미 성씨를 유지했다.

1596년 9월 성인식을 치른 뒤 히데요리(秀頼)로 개명하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그 때까지 독재에 가까웠던 자신의 정권 체제를 수정해 고다이로(五大老), 고부교(五奉行) 제도를 도입하여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千姫)와 약혼시키는데 센히메와 히데요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서 그런지 부부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히데요리가 겨우 5살이었던 1598년 9월에 히데요시가 사망하게 된다.

히데요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거처 또한 오사카 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고다이로의 일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신 합의제의 원칙을 자주 어기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후 또다른 고다이로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고 고부교이자 친 도요토미파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도요토미 정권은 흔들리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린 히데요리를 제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2.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를 필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 때 히데요리는 고다이로의 일원이자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된 모리 데루모토의 비호 하에 있었으며 히데요리의 친위대인 나나테구미(七手組)의 일부 또한 서군에 참가하여 사실상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 편에 속하였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명분상 서군과 동군이 모두 히데요리 공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음을 천명하였으므로[6]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로 치하하며 위로하였다.

결국 천하는 도쿠가와로 기우는데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유신들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에 있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셋쓰(摂津)[7], 카와치(河內国), 이즈미(和泉国)의 직할령을 제외하고 각 다이묘들과 가신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도요토미 종가의 영지인 다이코 쿠라이리치(太閤蔵入地)를 제한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는 오사카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한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정이대장군의 지위를 획득하고 에도 성 보수에 여러 다이묘들을 동원하는 등 독자적인 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천하인(天下人)의 자리에서 밀려났으나 이후에도 여전히 셋칸케(摂関家)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순조롭게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으며 가신들에 대해 독자적인 관직 서임권을 행사하였고 매해 신년마다 조정의 공가(公家)들에게 거성인 오사카 성에서 참배를 받는 등 히데요시 생전과 다름없는 높은 예우를 받았다. 무가 사회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은 배신(陪臣)이 아닌 도쿠가와의 직통 가신과 동등하게 인정받는 등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일정하게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여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두 개의 정권이 공존하는 「이중 공의 체제(二重公儀体制)」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603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로 부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전에 약혼했었던 센히메와 혼인하였다.

1611년 교토니조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나는데 이 때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 위험을 느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멸망을 결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너구리같은 성격과 본래 정권이라는 것이 이전 정권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차피 죽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장성할 때까지 놔둔게 기적이라 봐야 할 판이다.[8]

이 때 교토의 백성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막부 정권이 아닌 섭관 정치를 행했으며 일본 황실의 권위를 겉으로는 존중했던 인물인 것도 있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어머니 요도도노가 제대로 가르쳐서 교양과 학식을 갖추었음을 확인하고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2.3. 오사카 전투

2.3.1. 오사카 겨울의 진

1614년, 호코지(方廣寺) 종명(鐘銘) 사건을 계기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결별하면서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때 히데요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라 등 도요토미 가문의 휘하에서 싸우며 은혜를 입은 전적이 있는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격문을 날렸으나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는 현역 다이묘는 거의 없었다. 반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가이에키을 당하여 다이묘의 지위를 상실한 다이묘들이나 그들의 가신들이나 친족이었던 사나다 노부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카츠나가, 아카시 타케노리 등과 그 외에도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고토 모토츠구, 반 나오유키 등의 낭인들이 도요토미의 격문에 반응하여 곧장 오사카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낭인들은 사기가 매우 높았던 데 반해 오합지졸로 통제가 어려웠고, 낭인 무리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1569 ~ 1615) 및 요도도노 측이 전투의 마지막까지 서로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전술에 있어서도 사나다 노부시게 등은 교토로 진격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하루나가 등의 반대로 결국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전쟁 초반, 기쓰가와구치[9] 전투(木津川口の戦い), 바쿠로부치[10] 전투(博労淵の戦い) 등에서 도쿠가와군에게 연패한 도요토미군은 노다・후쿠시마[11] 수상전투(野田・福島の戦い) 및 이마후쿠[12] 전투(今福の戦い), 시기노[13] 전투(鴫野の戦い) 등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남은 주변 성채를 모두 버리고 오사카 본성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오사카 성에서의 전투에서는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 측 낭인들의 활약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격퇴당하면서 성내 진입이 좌절되었고, 특히 사나다마루 전투에는 도쿠가와 측이 큰 손해를 입었다. 이에 도쿠가와군은 전술을 바꾸어 심리적인 압박감을 줄 의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 성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윽고 도요토미 측과 도쿠가와 측 양쪽이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화친을 제의하였다. 당초 히데요리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요도도노 등의 설득으로 결국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운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받아들였다.

2.3.2. 오사카 여름의 진

화의는 맺어졌으나 도쿠가와 측은 도요토미 측이 스스로 요건을 이행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해자를 메웠으며 성곽의 일부도 파괴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측이 크게 항의하였으나 도쿠가와 측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낭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영지의 일부를 교환할 것을 도요토미 측에 요구하였다. 결국 이듬해인 게이초 20년(1615년)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의 요구를 모두 거부하고 해자를 도로 파내면서 이에야스는 전쟁의 재개를 선포, 오사카 여름 전투가 발발하였다.

도요토미 측 장수인 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 ? ~ 1615)가 야마토 코리야마 성(大和郡山城)[14]으로 출격하여 제압, 약탈을 벌이고 되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측은 한난(阪南, 오사카 남서부)으로부터 오사카 쪽으로 북상하고 있던 도쿠가와의 대군을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대로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좁은 지역인 야오(八尾)로 진군하였다.

결국 야오와 와카에(若江)[15], 도묘지(道明寺)[16]에서의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 휘하의 도요토미군은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도쿠가와군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요 장수인 키무라 시게나리, 고토 모토츠구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도요토미군 또한 타격을 입었다. 또한 오노 하루후사 등이 출정한 기슈(紀州)에서의 가시이 전투(樫井の戦い)에서 선봉인 반 나오유키(塙直之)의 도요토미군이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 1586 ~ 1632)의 도쿠가와군에게 패퇴하고 나오유키 또한 전사하면서 도요토미군은 후퇴하여 오사카 성으로 물러났다.

잇따른 패전으로 전력을 잃고 피폐해진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의 수장인 이에야스, 히데타다가 오사카에 포진한 때를 노려 최종 결전을 다짐하였다. 이 때 사나다 노부시게가 도요토미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총대장인 히데요리가 직접 전선에 나와 군사들을 독려할 것을 히데요리에게 촉구하였으나, 전장이 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한 요도도노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요도도노 본인은 자주 전선을 방문하였다.

같은 해 5월 7일 도요토미 측의 모리 가츠나가 부대가 도쿠가와 측의 혼다 타다노부 부대를 사격한 것을 시작으로 오사카 전투의 마지막 전투인 덴노지[17]·오카야마[18] 전투(天王寺・岡山の戦い)가 발발하였다. 순식간에 전투가 모든 전선에 파급되어 전장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오노 하루후사의 도요토미군이 오카야마구치(岡山口)의 히데타다 본진으로 돌진하였으나 이는 저지되었다. 반면 덴노지 방면에 포진한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가쓰나가의 군은 차례 차례 도쿠가와 측을 무너뜨려 한 때 이에야스가 자결을 각오할 정도로 도쿠가와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는 적과 아군 양 쪽에서 '일본 제일의 용사(日本一の兵)'로 칭송받았을 만큼 여러 차례 장렬한 돌진을 감행하며 분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에야스에게 미치지 못한 노부시게는 퇴각 중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다른 도요토미군도 서서히 괴멸되었다. 결국 히데요리는 요도도노와 할복했다. 1980년에 오사카 성의 산노마루(三ノ丸) 철거지에서 히데요리로 추측되는 유골이 교토 세이료지(清凉寺)[19]에 안치되었으나 실제 히데요리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3. 후손

정실인 센히메와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측실 와기노카타(和期の方, 1590 ~ 1615)[20]와의 사이에서 아들 쿠니마츠(8살)가 있었으나 오사카 전투 이후 교토에 숨어있는 곳이 발각되어 참수당했다. 일설에는 이때 처형된 것은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아들이고 쿠니마츠는 사츠마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 다른 측실 오이와노카타(小石の方, 나리타 씨, ? ~ 1615)가 낳은 딸 나아히메는 센히메가 양녀로 삼아 조부 히데요시의 측실인 카이히메가 키웠으며 결국 토우케이지에 출가한다. 에도 시대에는 엔키리데라(縁切寺)[21]라 하여 이혼을 원하는 아내가 절로 도망쳐 비구니가 되면 이혼이 성립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녀의 출가로 이 제도가 정립되었다고 한다. 출가 후 법호는 텐슈(天秀), 법휘는 호우타이(法泰), 원호는 수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텐슈니라고 불린다.

그 외에도 히데요리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전해지는, 구엔(求厭, ? ~ 1688)이라는 승려가 있는데, 그는 오사카 여름의 진 당시 에도로 몸을 숨겨,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며,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688년 임종 당시 향년 80세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160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임종 직전에 이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출처:일본어 위키백과 도요토미 히데요리 항목과 구엔 항목.)

이 외에도 히데요리의 또 다른 숨겨진 자식들의 기록이 있는 모양이지만, 공식적인 자식은 어디까지나 쿠니마츠와 나아히메다. 설령 히데요리의 숨겨진 자식들의 후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도 정통성 측면에서 도요토미 정권의 계보가 단절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들 다이스케의 도움으로 사츠마규슈 언저리의 지방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다는 음모론이 오사카 전투 직후부터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가장 유력한 것 중 하나가 히지 번의 키노시타 씨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히데요리와 그 아들 쿠니마츠는 규슈로 도망해 히데요시의 혈연인 키노시타씨의 보호를 받고, 히데요리는 '소렌'이라는 이름을 대어 은거하고 아들 쿠니마츠는 아예 '키노시타 노부요시'라는 이름을 써서 번주인 키노시타 노부토시의 아들 노릇을 했다고 한다. 노부토시는 유언으로 노부요시(쿠니마츠)에게 무리하게 큰 봉토를 따로 떼어 주어 '타테이시 번'으로 독립시키고, 노부요시의 성(묘지)을 히데요시가 사용했던 '하시바'로 바꾸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위패에는 대놓고 도요토미 성이 적혀 있다.[22] 이 때 영문도 모르고 히지 번의 영토를 크게 떼어주는 것을 막은 가로 하나가 나중에 노부요시의 정체를 알고 미안한 마음에 자결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속사정은 타테이시 번주 가문의 당주에게만 극비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몇 가지 허술한 점이 있어서 반박은 가능하다. 도요토미 성이 절대적 금기는 아니어서, 히지 번 키노시타씨는 에도 막부 시기에도 후일 슬그머니 도요토미 성을 다시 공식 문서에서까지 사용한 적이 있고 막부 역시 소규모 번에 불과한 히지 번이 이런 문제적 호칭을 쓰는 걸 잠자코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23]

이경직은 1617년 통신사로 파견되어 당시 일본의 정세와 풍물에 대해 꽤 폭넓고 정확도가 높은 정보를 수집했는데, 직접적으로 질문했을 때 10명 중 1명 정도는 히데요리가 생존해 있다고 답했고 시중에는 꽤 넓게 그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하며, 히데요리가 자결했다는 장소에서 그가 평소 쓰던 귀한 갑주와 검을 착용한 주검을 발견했는데 허리 위로는 모두 불타 있어 확증은 불가능했다는 현지의 정보를 기록했다. 또한 그가 도피해 갔다는 음모론이 있는 사츠마인들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속이 있어서 윗사람을 배반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피신한 히데요리를 모셔왔다면 저렇게 막부에 순종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 사츠마 도피설은 아무래도 헛소리 같다는 자신의 판단도 곁들였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은 음모론에 불과하지만, 오사카 전투 직후부터 일본 사회 전반에 널리 유포된 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사자인 히지 번 키노시타 가문의 현재 입장은 생존설 쪽.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5.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파일:豊臣秀頼.jpg 파일:豊臣秀頼 1.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external/vignette1.wikia.nocookie.net/Hideyori-nobuambitsouzousr.jpg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D급 무장이며 천하창세~창조 PK까지 같은 초상화를 쓰다가 전국입지전에서 새 초상화를 받았다. 히데요리가 군주인 세키가하라 시나리오에서는 천상기 PK를 제외하면 도요토미 직속 세력은 약하고 창조 기준으로 동맹 세력은 많다.

5.2. 전국무쌍 시리즈

파일:external/www.tv-tokyo.co.jp/hideyori.png
파일:sengoku-musou-ep-7-2.jpg
도요토미의 업은 난세의 업

모두...내가 짊어지고 가겠어.

난세의 업, 모두 이 불꽃이 태우리라!

클론 무장으로만 나오다가 전국무쌍 애니메이션에서 최초로 등장했으며 성우는 오노 켄쇼. 상당한 꽃미남이자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지닌 것으로 그려지는데 성격도 외유내강형이고 상황을 읽는 안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물리친 일로 오사카 성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카이히메가 그를 방문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도 도요토미의 가신이라면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이히메를 안심시키지만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오르자 "제법이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이후 교토 니조 성에서의 회담을 제의하러 온 사나다 노부유키를 주변 가신들이 흥분하는데도 그대로 돌려보내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이에야스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듯. 그러나 사나다 유키무라마에다 케이지가 등장한 이후에는 사실상 도쿠가와 측과 전쟁하기로 결심을 굳힌 채 니조 성으로 찾아간다.

세키가하라 때는 이에야스에게 붙어 있던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돌아와 히데요리를 수행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에도 성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고 히데요리는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올 것을 역제안한다. 이 때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유키무라의 행방을 묻지만 히데요리는 "유키무라를 자칭하는 낭인들이 수없이 많이 오사카 성 내로 몰려들고 있다"고 일축한다. 이에야스는 그의 얼굴에서 히데요시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인정한 후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에 집결한다.

유키무라가 오사카 성을 위해 축조한 사나다마루 주둔군에 사나다 군의 붉은 갑옷과 육문전 깃발을 준 것은 히데요리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우에다 성에서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에 대항해 싸운 사나다 병사의 의기를 보여달라는 의미라고 독백한다.

오사카가 도도 다카토라의 포격을 받을 때도 천수를 끝까지 지키지만 침투해온 노부유키가 화의를 제의하자 성 내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이를 수용한다. 결국 제11화에서 도쿠가와는 제1성벽과 제2성벽을 무너트리고 해자까지 메워 오사카 성의 방어선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후 재차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 히데요리가 이를 거부하자 도쿠가와 군은 다시 공격해 오는데 남은 장수들이 분전하지만 패색이 짙자 히데요리는 천수에 불을 붙여 자살한다.

전국무쌍 4-Ⅱ에서는 투구를 써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조형으로 나왔다. 오사카 전투에서 결국 성이 넘어갈 상황이 되자 도요토미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맞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언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등 애니와 마찬가지로 개념인으로 등장.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서는 차차의 묘사 때문인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대사 등으로만 언급되어서 존재는 하는거 같은데 게임 중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다. 게임에 대해 호평해도 이 부분을 아쉬워하는 플레이어들이 상당히 많다.

100만인의 전국무쌍에서는 떡보에 바보로 나와 전국무쌍 애니와는 갭이 상당히 심하다.

5.3. 효게모노

거인 수준의 체구를 충실히 재현했다. 히데요시가 생전에 꾼 예지몽에서는 평범한 체구로 등장했는데, 후일 정식으로 등장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잔인하고 냉혹한 아버지, 격렬한 성품의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은 온후하고 도련님스러운 성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이 거구 때문에 회견하러 온 도쿠가와측 인사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여기서는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요도도노가 불륜을 한 것은 맞는데, 씨를 받은 시점이 비슷해서 확실히 누구 자식인지는 모르겠다고. 상대 남자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5.4. 태합입지전

능력치가 나쁘며 마지막 시나리오인 태평의 장(1599년)에서 6살로 등장한다. 초반 세력 자체는 충분히 강대하나, 1년도 못가서 마에다 도시이에 사망후 세키가하라 합전이 일어나고 히데요리 시점에서 세키가하라 이벤트를 보면 무조건 서군이 진다. 오사카 겨울의 진 싸움은 4-5턴 정도 지나면 자동으로 이벤트가 진행되며[25] 이후 오사카 여름의 진 이벤트로 이어지는데, 선택지 2개중 오사카 성을 이에야스에게 넘겨줄 경우 이에야스와 동맹상태가 되고 거성을 옮기며, 항전할 경우 야전에서 지면 게임오버된다.

하지만 다테 마사무네, 이에야스와의 연전에서 승리하면 이에야스가 사망하고 절반가량의 다이묘가 지배하로 들어오면서 역전할 기회가 생기니 시간제한인 1620년이 오기 전에 일본을 통일하면 된다.

5.5. Fate 시리즈

Fate/Grand Order의 등장 서번트인 차차(요도도노)의 인연레벨 2 대사에서 진지한 어조로 '말해두겠는데 히로이 이야기만큼은 하지 마. 나는 그것만큼은 못 참아. 설령 상대가 마스터인 그대일지라도.'라고 경고한다. 차차는 아들 히데요리를 죽인 도쿠가와에 대한 증오로 인한 어벤저 적성이 있기 때문이다. 료마 위기일발 이벤트에서 검은 기운에게 세뇌돼서 어벤저가 되었을 때도 히로이를 돌려 달라고 절규했을 정도다.

그리고 구다구다 신 야마타이국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진정한 목적이 히데요리를 도요토미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는 것이라는 걸 센노 리큐의 통신으로 들은 차차는 경악한 뒤 히데요리가 살아있다면 내가 지금 당장 만나러 가야된다며 레이시프트든 뭐든 당장 신 야마타이국으로 자신을 보내고 방해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며 영기가 변질될 정도로 폭주해, 마슈와 다빈치, 구다구다즈는 물론 귀신부장인 히지카타마저 막을 수 없어 주저하다, 모리 나가요시가 거의 죽이고서야[26] 겨우 멈췄다. 심지어 미츠나리가 히데요리를 부활시키려고 제물로 쓰려고한 아이는 히데요리가 태어나기 전 죽은 형인 츠루마츠였다.

나중에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니라이카나이에서 어머니인 차차에게 스테(츠루마츠)가 부모님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도록 동생인 히로이(히데요리)가 스테를 부르면서 히로이와 같이 성불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아들 스테의 대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인 차차는 아들인 스테를 안아준다.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시대와 싸워온 어머님에게 감사를 표하며 어머니에게 자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어머님과 아버님의 아이로 태어나 행복했다고 말하면서 성불한다.

5.6.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역사편에서 등장하며, 비만이 아닌 평범한 외모로 나온다. 오사카 전투를 다룰 때 속아서 해자를 메웠다가 성이 함락되자 "내가 바보였다. 이에야스를 믿다니..."라며 후회하고 자살하는데, 그 다음 컷에서 이에야스는 "바보고 말고! 전쟁에서 적을 믿는 바보가 있다니..."라며 비웃는다.

[1] 외모로 보면 히데요시보다는 외할아버지인 아자이 나가마사의 분위기와 더 비슷하다.[2] 승려로, 죽기 직전 자신이 실은 히데요리의 자식이라고 고백했다.[3] 몸이 약해 요절한 히데요리의 형 도요토미 츠루마츠의 아명도 스테(棄), ‘버려진 아이’ 라는 뜻의 이름이였다.[4] 문제는 말했듯 히데츠구를 죽일 때 일가족까지 죽였는데 히데츠구의 일가족이 히데요시를 지지하는 다이묘들의 친족인지라 그들의 분노를 유발해버리고 만다.[5]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 있는 성[6] 그래도 아버지가 쌓아올린 것들은 있어서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동서 양군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명분을 기치로 삼았다.[7] 현재의 오사카부의 북부와 고베시 일부를 포함한 효고현 남동부[8] 그보다는 죽이고 싶어도 명분이 없어서 이때까지 놔뒀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었을 듯하다. 히데요시야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확보하고 옹립하면서 다른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그런 책략을 쓸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게 호코지 종명 사건.[9] 일본 교토부와 미에현을 가로지르는 강이며 요도가와 강의 지류[10] 현재의 오사카시 니시나가 보리역 의 북측[11] 오사카시 후쿠시마구의 서부와 고노하나구의 일부[12] 야마토강 북쪽[13] 현재의 시가노촌[14]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에 있는 윤곽식 평산성[15]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의 구[16] 오사카후 후지이데라시 미치아키에 있는 진언종 사찰[17] 사천왕사[18] 오사카성 남쪽 방면[19] 교토시 우쿄구 사가석가도 후지노기마치에 있는 정토종의 사원[20] 이름은 이차(伊茶). 와타나베씨(渡氏)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阿古御局(오코고노츠보네, おこごのつぼね)이다.[21] 해석하면 연을 끊는 절. 앞서 언급한 토우케이지도 엔키리데라로 유명하다.[22] 키노시타씨는 히데요시의 처남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후손이다. 키노시타씨는 히데요시가 쓰던 하시바라는 이름(묘지), 도요토미 성을 받은 적이 있지만 후일 생존을 위해 도요토미 세력을 손절하면서 이 하시바 성을 모두 강제로 키노시타씨로 도로 개명당했다. 막부가 성씨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도요토미와 관계가 있는 세력들을 마구잡이로 숙청하는 살벌한 무단정치 시국에 대놓고 쓰지 말라는 성씨를 갖다 쓰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23] 초대 번주인 노부토시 본인의 경우 무단통치를 펼치던 막부의 눈치를 보고 싶었는지 발음은 같지만 다른 한자를 써서 豊臣이 아니라 豊富라고 표기한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24] 척관법 BMI 공식은 4083.75 × (관) / (촌)^2 이다. 미터법에 의거해서 환산한 공식이기에 정확도 100%이다.[25] 여기서 히데요리 능력치를 최고로 하고 시작하고, 풍림화산을 마사유키에게 배워두었다면 점사로 이에야스를 조져서 이벤트 일어나기 전에 승리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딱히 이점이 없어서 그냥 이벤트를 진행시키는 편이 낫다.[26] 서번트라 죽지는 않지만, 그 정도의 공격을 가하지 않고선 멈출수 없는 레벨이었고, 모리 자신도 차차가 죽으면 할복할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