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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1577)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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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름은 이경직(李景稷), 는 상고(尙古), 는 석문(石門),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6대손[1]이다.

2. 생애

1577년(선조 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항복의 밑에서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는 김장생의 문인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년)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생원 및 진사가 되었고, 4년 뒤에는 생년시와 증광별시에 합격했다. 이후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거쳐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승정원 주서[2], 시강원설서, 홍문관 정자, 병조 정랑 등을 역임했다. 1614년(광해군 6년)에는 황해도사를 지냈고# 1617년(광해군 9년)에는 국서를 보낸 일본에 회답하는 사절로 정해진 오윤겸의 종사관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년 뒤인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왕대비였던 소성대비(인목왕후)를 폐모하자는 논의가 일자, 정청에 불참했는데 이 일로 탄핵을 받아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철산부사 직을 지냈다.

1623년(인조 원년)에 능양군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즉위하자, 의주부윤을 거쳐 전라병사로 임명받았다.## 이괄의 난 당시에는 피난간 인조를 옆에서 모셨고, 인조에게 반란군과 싸우겠다고 했으나 인조가 "님은 책만 읽은 선비잖음? 여기서 기다리셈" 하면서 말렸다.(...)# 한때 반란군의 기세가 강해지자 조정에서는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던 그를 청왜사로 삼고, 동래에 머물던 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했으나, 자칫 잘못하다가 임진왜란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무산되었다.# 이후 수원부사와 개성유수 직을 맡았고, 한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장례원 판결사, 병조 참판, 비변사 제조를 맡아 봉무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강화도로 갔다. 이때 후금(후일 청나라)에서 인조에게 직접 강화를 맺고 충성맹약을 할 것을 강요하자, 이경직은 "강화를 하되 맹약은 대신이 대신하게 하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현실적으로 강화를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인조의 권위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A] 그러나 이를 두고 국가적 치욕을 끼쳤다는 이유로, 이경직을 삭탈관직하라는 청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호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고## 경기감사를 거쳐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 급인 도승지로 임명받았다.##

호군과 비변사 당상을 겸하던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때 이경직은 다른 신료들과 함께 청나라 군진에 가서 장수들을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이들이 작정하고 쳐들어왔음을 확인하고 곧장 인조가 피난가있던 남한산성으로 갔다. 직후 도승지로 다시 임명받아 인조가 항복하기 직전까지 청나라와의 교섭에 힘썼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태종이 청나라로 돌아갈 때 인조가 배웅하러 나가자 유일하게 그만 따라갔으며, 조정환도 후인 1637년(인조 15년) 2월에 호조판서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종각을 만들 때 스님을 불러 권선문에 인신을 찍어주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우의정 최명길의 건의로 파직당했다.# 얼마 뒤에 도승지로 다시 제수받았다.#

1640년(인조 18년) 2월에는 강화유수 직을 맡아 봉무하다가# 과로로 종기를 앓더니 그해 7월 19일에 부임지인 강화도에서 사망했다.#[A] 향년 64세였다.[5] 사후 23년 뒤인 1663년(현종 4년)에 시호 '효민(孝敏)'과 우의정 직을 추증받았다.#

3. 가족 관계


이경직의 자손들 중에는 후일 '육진팔광(六眞八匡)'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으며[11]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도 더러 있었다. 육진은 이경직의 증손자 대의 '진(眞)O'자 돌림을 쓰는 사람 6명이며, 팔광은 현손자 대의 '광(匡)O'자 돌림을 쓰는 사람 8명이다.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고고인류학과 이성주 교수는 이경직의 손자 이덕성의 10대손이다.

4. 묘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104호 105호 106호
정정공 강사상 묘역 효민공 이경직 묘역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5호
효민공 이경직 묘역
孝敏公 李景稷 墓域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산 57
시대 조선 시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 면적 분묘 2基, 석물 8基, 토지 302㎡
지정연도 1997년 12월 31일
관리자
(관리단체)
전주 이씨 덕천군파 우곡공 종중
파일:이경직신도비.jpg
<colbgcolor=#C00D45> 이경직 묘역에 있는 신도비[12]
[clearfix]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에 이경직의 묘가 있다. 아버지 이유간의 묘는 윗쪽에, 장남 이장영의 묘는 아랫쪽에 있다.

묘의 동쪽에는 이경직의 일생과 업적이 적힌 신도비가 세워져있다. 1668년(현종 9년)에 세웠으며 친구였던 김류가 글을 짓고, 3남 이정영이 글을 썼다. 비는 사각 받침돌 위에 비신이 있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도 세웠다.


[1] 덕천군 → 신종군 이효백 → 완성군 → 함풍도정 이계수 → 이수광 → 이유간 → 이경직[2] 승정원일기문서에 이 양반 깡을 증명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A] 출처: 이남옥 著, 《전주이씨 덕천군파 이경직 가문의 내력과 지역적 전개》, 한국양명학회, 2020, p.157.[A] [5]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를 적용한 기준이다. 만으로는 63세이다.[6] 필명 이문정, 숙빈 최씨의 영웅소설 《농수 수문록》의 저자[7] 숙안공주의 아들[8] 윤지완의 아우, 민진원의 처숙부[9] 정명공주의 외손자[10] 숙명공주의 아들[11] 출처: 이남옥 著, 《전주이씨 덕천군파 이경직 가문의 내력과 지역적 전개》, 한국양명학회, 2020, p.155.[1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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