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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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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文忠公)
민진원
閔鎭遠
출생 1665년 2월 5일
(음력 1664년, 현종 5년 12월 21일)
사망 1736년 12월 28일 (향년 71세)
(음력 영조 12년 11월 27일)
시호 문충(文忠)
본관 여흥 민씨
성유(聖猷)
단암(丹巖)
붕당 노론
부모 부친 -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 ~ 1687)
생모 -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은진 송씨(恩津 宋氏, 1637 ~ 1672)
계모 - 풍창부부인(豊昌府夫人) 풍양 조씨(豐壤 趙氏, 1659 ~ 1741)
형제자매 5남 7녀 중 차남
부인 파평 윤씨 윤지선(尹趾善)의 딸
자녀 장남 - 민창수(閔昌洙)
차남 - 민형수(閔亨洙)
3남 - 민통수(閔通洙)
장녀 - 덕수 이씨 이주진(李周鎭)의 처

1. 개요2. 생애3. 의외의 모습4. 여담5. 가계
5.1. 친가(여흥 민씨)5.2. 외가(은진 송씨)5.3. 배우자 / 자녀
6. 대중매체7.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관이자, 외척.

본관은 여흥 민씨로, 민유중의 차남이자 인현왕후 민씨의 작은 오빠이며, 숙종의 처남이다. 노론계의 영수였으며, 노론 내에서도 최고 강경파였다.

2. 생애

1665년[1] 2월 5일[2],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과 그의 두 번째 부인[3]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恩城府夫人 恩津 宋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의 부친, 즉 외조부는 효종 ~ 현종 대 서인 산당영수이자 민유중의 스승이었던 송준길로, 송시열과도 일가 친척이었다.

1691년(숙종 1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2년 전인 1689년에 발생한 기사환국과 여동생 인현왕후의 폐비 사건의 여파로 등용되지 못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 가문의 왕비였던 여동생이 폐위되고,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거물급 인사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면서 서인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하였다. 이에 분노한 민진원과 다른 서인들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서인이 위기에 처하자 서인 유생[4] 김인 등이 장희재(희빈 장씨의 오빠)가 숙빈 최씨의 숙모를 매수해 숙빈에게 독약을 먹이려 했다고 고변하였다. 숙종은 처음에는 남인의 편을 들었으나, 이후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던 남인 영수 민암 등을 유배 보내고,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숙청되었던 서인들을 정계에 복귀시켰다. 아울러 폐위되었던 폐비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민진원 본인이 직접 저술한 《단암만록》에 따르면, 숙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인경왕후 김씨(서인 가문의 왕비)의 조카 김춘택이 계책을 내어 서인과 가까웠던 숙종의 유모[5]를 통해 숙빈 최씨와 연락하였으며, 이들이 여동생의 복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정확히는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숙종의 처소를 찾아가 장희재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눈물로 호소하였고, 그 호소가 성공했다고 한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여동생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비로소 관직에 등용되었다.

이후 검열과 겸설서,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하였고, 사서·문학·부수찬·충청도 감진어사·사복시정·사헌부 집의 등을 지내며 서인 노론[6]으로 활동하면서 윤증, 박세채 등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어 부교리, 집의, 병조정랑, 지평, 부수찬, 필선, 편수관,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당상관(정3품 상(上)계)에 올라 전라도관찰사, 공조참의, 동부승지, 참찬관, 우부승지, 대사성을 거쳐 강화유수, 예조참판, 동지의금부사, 공조참판, 개성유수를 역임하며 노론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한성부좌윤에까지 올랐다.

1703년(숙종 29년),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서원이 난립하자 지방 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원인을 들어 이를 억제하였다. 이후 정2품 이상에 올라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공조판서, 예조판서, 내의원제조, 지돈녕부사, 이조판서, 호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20년(숙종 46년) 음력 5월 13일, 형 민진후가 사망하고[7] 같은 해 숙종이 승하하여 경종이 즉위하자, 민진원은 자신이 경종의 법적 외숙부임을 내세워 죽은 형이 가졌던 실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노론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숙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노론 4대신김창집, 조태채, 이이명, 이건명노론을 대표하여 국왕 경종에게 숙빈 최씨의 아들이자 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경종이 이를 주저하자, 조정 백관 앞에서 "경종은 효심과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니 서둘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고 정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하여 소론의 공분을 샀다. 1721년(경종 1년), 신임옥사노론이 실각하자 성주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후 예조판서, 공조판서와 지경연사, 빈객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경종실록》의 총재관을 맡았다.

민진원은 노론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였으며, 이는 노론의 영수가 된 이후에도, 죽기 직전에도 바뀌지 않았다. 한때 여동생이 폐위되고 가문이 일시적으로 몰락했던 경험 때문인지 남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었고, 그 남인을 두둔했던 소론에 대해서도 한이 맺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조 초반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며 소론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1725년(영조 1년), 소론의 영수인 좌의정 류봉휘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로 탄핵하여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8]을 상소하였다. 민진원은 연잉군 시절의 영조를 추대하려다 죽어간 노론 대신들의 공적을 인정할 것과 신임옥사 당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복권, 소론 5대신[9]에 대한 탄핵과 추탈, 부관참시 등을 요구하였다.

1727년(영조 3년), 당색이 강한 인물을 제거하여 탕평을 추진하려던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에 안치되었다. 1728년(영조 4년) 음력 3월, 소론 강경 세력이 지방에 은신 중이던 남인을 규합하여 삼남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사건 이후 소론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게 된 영조노론 강경파의 영수로 활동해 온 민진원을 성모(聖母, 인현왕후)의 혈족이라는 명분을 들어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다.

1729년(영조 5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진[10]하였으며, 역적 토벌을 청하여 숙적인 소론남인에게 이인좌 잔당이라는 죄목을 씌워 대거 숙청하였다. 그는 영조탕평책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는데, 어느 날은 영조가 민진원을 불러 소론 영수 이광좌와의 화해를 주선하며 두 사람에게 악수까지 시켰다. 당사자들은 매우 싫었겠지만, 악수를 시킨 영조 본인은 크게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후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733년 봉조하가 되었다가 1736년(영조 12년) 음력 11월 28일 향년 72세로 사망하였다. 노론 강경파이자 노론의 공동 수장이었던 정호[11]와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봉조하 민진원의 졸기
봉조하 민진원(閔鎭遠)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면서 하유하기를,

"민 봉조하는 휴척(休戚, 안락과 근심)을 함께 하는 신하로서, 고집하는 것은 막힌 점이 있으나 나라를 위하는 단심(丹心)은 변함이 없었으니, 내가 전후에 간격없이 대우했던 것은 그것 때문인 것이다. 몇 년 간 고심(苦心)하면서 조정하려 애썼던 두 봉조하의 뜻이 깊었었다. 아! 성후(聖后, 인현왕후)의 동기로는 오직 이 사람이 있었을 뿐인데, 작년에 부부인(府夫人)[12]이 입궐했을 적에 함께 자위(慈闈, 대왕대비 인원왕후)를 모셨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노쇠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인(家人, 가족)처럼 자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어찌 갑자기 졸서(卒逝)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녹봉(祿俸)은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고,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장(禮葬)하는 것을 모두 준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은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효장세자(孝章世子)가 훙서(薨逝)했을 적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입대(入對)하여 송 인종(宋仁宗) 때의 고사(故事)처럼 종신(宗臣)을 간택하여 양육할 것을 청하였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였다고 했었다."

이 삼가 살펴보건대, 민진원은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친척으로 시례(詩禮, 가정 교육)의 교훈을 받았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유독 풍재(風裁, 격에 맞는 멋)를 지켰으므로 명망이 일시에 무거웠었습니다. 신축년·임인년에 화환(禍患, 재앙)이 일어났을 적엔 멀리 귀양갔었는데, 을사년에 제일 먼저 정승에 임명되자, 수차(袖箚)를 올려 경종(景宗)에게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중외에 반시(頒示)하여 저사(儲嗣)를 세운 의리를 밝힐 것을 청하였다가, 한쪽 사람들에게 크게 공척(攻斥)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정미년 이후에는 마침내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동시에 치사(致仕)[13]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서(卒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신(史臣)이 집요한데다가 당에 대한 병통이 있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이광좌의 무리들(=소론)이 기필코 비난하여 헐뜯으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조실록》42권, 영조 12년 11월 28일 정사 1/1 기사

3. 의외의 모습

민진원은 말년의 비타협적인 모습 때문에 노론의 최고 강경파로 이미지가 박혀 있으나, 1705년 장희빈을 옹호하다 유배를 간 전 영의정 남구만의 형을 감해달라고 직접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14]

아울러 1703년 40세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서원 건립 경쟁으로 당파 싸움이 격렬해지는 것을 막으려, 서원 건립을 억제하자고 장계를 올린 적도 있었는데 의외로 당파의 대립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던 면도 있었다.

1706년 43세 때 강화부 유수로서 서울 해상 방위를 책임지던 당시에는 섬과 섬을 이어 간척 사업을 벌여 성공시키고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 강화부에 내성을 쌓고 남문과 서문을 신축하며 강화의 청년들을 모아 책을 읽혔다.[15] 실학자가 할만한 일을 노론의 정치가가 해낸 셈.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에도 밝았다.

아울러 1712년의 사은부사, 1718년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외교관이었다.

경종 즉위 후에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도록 경종을 직접 압박한다. 게다가 경종은 효심이 없으며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공공연하게 디스를 했다. 이 때문에 1722년 경북 성주로 유배를 떠난다.[16]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종이 인현왕후에게 효심이 매우 극진했다고 회고하였고 단암만록에 경종의 마음이 피폐해져 병에 걸린 이유는 숙종의 학대 때문이라며 숙종을 비판하였으며 경종의 우애가 매우 깊어 왕세제인 영조를 매우 사랑했다는 의외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영조가 즉위한 후 영조가 소론을 축출하고 노론 4대신을 복권시킬때 민진원도 다시 돌아와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지만 소론에 대한 지나친 보복을 고집하자 1727년 정미환국 때 다시 파직되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직후, 정계에 복귀하여 65세 때 난이 진압되고 나서는 난에 참여하지 않았던 남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극렬 반대하고 소론을 끝까지 배격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물론 당시 조선의 풍토로는 일종의 연좌제 때문에 난에 참여를 안 해도 이인좌나 김일경의 같은 당여로 보았기 때문이며[17], 이미 난을 일으킨 전례가 있어 잠정적 역적 취급을 했다는 것이다. 민진원의 이런 예측은 틀리지 않아 훗날 민진원이 죽고 소론 계열 잔당, 자제들이 주축이 돼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으로 남은 소론의 세력들이 싸그리 갈리고, 이미 죽은 조태구이광좌의 관작이 추탈되고 덩달아 역신 취급을 받게 된다.

4. 여담

5. 가계

5.1. 친가(여흥 민씨)

5.2. 외가(은진 송씨)

5.3. 배우자 / 자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세 아들인 민창수(閔昌洙), 민형수(閔亨洙), 민통수(閔通洙) 역시 아버지의 성향을 이어받아 탕평책에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광좌를 공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민형수가 삭출되어 함경관찰사로 좌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이후 민창수는 동생의 상소를 자신이 함께 작성했다고 자청하며 죄를 청하였고, 결국 그 역시 국문을 받은 뒤 유배되었다.[24] 한편 민통수는 관직에 진출하여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탕평에 적대적인 입장 때문에 판서 이상으로는 승진하지 못하였다.

6. 대중매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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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664년[2] 음력 12월 21일[3] 민유중의 첫 번째 부인은 해풍부부인 덕수 이씨(海豐府夫人 德水 李氏)이며, 선조의 6남 순화군의 외손녀이다. 향년 25세로,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4] :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5]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서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숙종의 유모도 서인에 가까웠을 것이다.[6] 경신환국 이후 서인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한 강경파.[7] 민진후의 졸기[8] :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9]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 류봉휘, 조태억[10] : 임금께 글을 지어 바침.[11] 숙종 시기 이미 윤증을 욕하는 글을 남긴 바 있는 열혈 노론이다.[12] 민진원의 계모 풍창부부인 풍양 조씨(豊昌府夫人 豐壤 趙氏)를 말한다. 당시 나이 78세였으며, 새어머니였기 때문에 민진원과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13]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14] 다만 남구만이 자기 외할아버지인 송준길의 제자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남구만도 인현왕후 친척이자 자기 숙부였던 민정중과 인척이었다는 것도 감안을 해야 한다.[15]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해야할 당연한 업무였다. 강화부는 고종시기에 2차례 양요가 일어났던 만큼 바다에서 한성으로 가는 길목이자 방책이였으며, 간척지 무상 분배는 자영농 육성으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한 것이였고, 교육은 모든 목민관들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 중 하나였다. 해상 방위는 지역의 위치 때문이니 제외하고, 간척지를 무상 분배했다는 것은 그가 비교적 청렴했던 인물임을 알려준다.<여동생이 그 유명한 인현왕후이고, 백부가 좌상 민정중으로 생전에 서인의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다.(숙종의 母后 명성왕후는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서인 한당>의 손녀였고, 숙종의 1번째 부인은 송시열의 스승 사계 김장생<서인 산당>의 현손녀였다. 참고로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쓴 김만중이 김장생의 증손자다> 인현왕후는 바로 김장생의 현손녀의 뒤를 이어서 숙종의 부인이 되었다.)[16] 실제로 훗날 홍인한과 정후겸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했다가 제거당했고 김하재 역시 정조에 대한 욕을 담은 쪽지를 예방 승지에게 건네서 역률로 다스려져 죽었고, 윤구종은 경종에게 신하 노릇하기 싫었다고 하자 역시 국문을 받던 중 죽었다. 민진원은 정말 운이 좋았던 셈이다.[17] 즉 노론 입장에서는 준론 소론이나 완론 소론이나 거기서 거기였다.[18] 남성이 사별 후 재취(재혼)하여 낳은 자녀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전처를 부르는 말이다. 부부인의 작호는 왕비의 생모는 물론 계모와 전모에게도 봉작되었다.[19] 순화군의 외손녀이다. 순화군 → 이계여 → 해풍부부인 이효아.[20] 노론에 속했으나 경종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21] 숭선군의 아내 영풍군부인(永豊郡夫人) 신씨의 질부(조카며느리) 사위이다.[22] 송시열의 친조모인 광주 이씨와 자매이다.[23] 인현왕후의 외조부인 송준길과는 외6촌 형제(친가로는 13촌) 관계로, 생전에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또한 송준길송시열은 모두 은진 송씨 출신의 거물 유학자였기 때문에 ‘양송(兩宋)’으로 불리기도 했다.[24] 다만, 2년 만에 아버지의 산소를 돌보라는 이유로 유배에서 풀려났다.[25] 민영휘의 아들과는 동명이인.[26]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의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