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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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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9월 5일 세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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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문 조효문 최유 한계미
한종손 황수신 황효원 홍윤성10
김질11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58년 6월 29일 세조에 의해 책록
3 1466년 연회에서 세조에게 양위를 종용한 혐의로 인한 제명
4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3등에서 2등으로 책록
5 1455년 10월 22일 세조에 의해 책록
6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한 제명
7 1699년 숙종 때 복권
8 1691년 숙종 때 복권
9 1504년 아들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0 1455년 11월 12일 세조에 의해 책록
11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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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익대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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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 10월 28일 예종에 의해 책록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
신숙주 신운 류자광 한계순
한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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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기 이승소 이철견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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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82년 성종의 인신을 위조해 남의 재산을 탈취한 혐의로 인한 제명
3 1504년 조카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511년 중종 때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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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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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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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명종 심연원,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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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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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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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동무종향)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서무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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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조선 영의정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충정공(忠貞公)
정창손
鄭昌孫
<nopad> 파일:정창손.jpg상상화
출생 1402년 4월 22일[1]
(음력 태종 2년 3월 11일)
한성부
사망 1487년 3월 1일[2] (향년 84세)
(음력 성종 18년 1월 27일)
한성부
재임기간 제25대 영의정부사
1459년 1월 20일[3] ~ 1월 31일[4]
(음력 1458년, 세조 4년 12월 7일 ~ 12월 18일)
제27대 영의정부사
1461년 6월 16일[5] ~ 1462년 6월 16일[6]
(음력 세조 7년 4월 29일 ~ 세조 8년 5월 10일)
제41대 영의정
1475년 8월 11일[7] ~ 1485년 4월 20일[8]
(음력 성종 6년 7월 1일 ~ 성종 16년 3월 27일)
봉호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시호 충정(忠貞)
본관 동래 정씨
효중(孝仲)
동산(東山)
부모 부친 - 정흠지(鄭欽之)
모친 - 최병례(崔丙禮)의 딸
부인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 청풍 정씨(淸風鄭氏)
자녀 장남 - 정개(鄭价)
차남 - 정칭(鄭偁)
3남 - 정괄(鄭佸, 1435 ~ 1495)
장녀
차녀 - 구 안동 김씨 김질[9]의 처
3녀 - 조윤벽(趙允壁)의 처
4녀 - 최직(崔直)의 처
서명
파일:정창손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세종~성종 시기에 활동한 관료.

2. 생애

1402년(태종 2) 중추원사 정흠지와 최씨 사이에서 형 정갑손에 이어 차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성부윤[10] 정정부다. 1423년 사마시와 1423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1441년 사섬서령, 1443년 집현전 응교가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려고 하자 이에 대해 최만리, 하위지 등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세종은 상소를 올린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 동안 투옥시켰는데 그에게 만큼은 파직이라는 아주 강도 높은 징계를 가했다.[11]

보통 토론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신하들을 제압하는 세종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이 때는 이례적으로 왕권을 발동시켜 반대파를 강압적으로 진압했는데 이는 논쟁 과정에서 정창손이 한 치명적인 실언 때문이었다. 훈민정음 반대파의 대표인 최만리는 사대주의라는 정치적 리스크를 근거로 반대 주장을 펼쳤기에[12] 세종도 명분상 함부로 반박하기 어려웠으나, 정창손은 선비라는 작자가 유교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리를 내세우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로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중략)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 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켰다.
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 원문

"삼강행실도[13]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봐야(=백성들에게 읽히고 가르쳐 봐야) 태생이 천하고 멍청한 백성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발언을 유교 국가의 왕, 그서도 세종 앞에서 한 것이다.

이 발언은 민중은 개돼지라는 실언과 동급인 수준의 망언으로,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망언이었다. 백성들이 개무시하다는 것은 둘째치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누구나 수양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평생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중심인 학문이다.[14] 성리학의 근간이 된 유교를 창시한 공자"가르침이 있을 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고 하여 누구나 바른 가르침에 의해 수양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증명하듯 빈민 출신 안회와 양아치 출신 자로제자로 육성해 보였고 맹자도 사람이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한 바 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공맹으로부터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심각한 실언이었다. 유교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그에 따라 치르는 과거 시험으로 등용된 나라공직자라는 사람이 이 따위 헛소리를, 그것도 유교의 정신에 따라 백성에게 새로운 글자를 가르치려 하는 안건을 반대하며 당당하게 왕 면전에 대고 지껄이는데 왕이 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이 만들어진 원인이 된 고려 시절 권문세족들의 입에서도 나오기 힘든 소리다.[15]

첨언하자면 조선의 국왕은 국가의 최고 존엄이며,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왕권신수설 같은 이론이 아니라 먼저 깨우친 군자(君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리학 이론을 공부하기 힘든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어진(仁義를 깨우친) 자로 만들기 위해 국가를 운영하고 본인 역시 끊임없이 수양한다.[16] 동아시아의 군주, 특히 조선 국왕의 업무가 비합리적으로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의 존재 의념 자체가 이렇고 특히 공자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지언정 사람만은 버리면 안 된다며 사람을 중시했는데, 그런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이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그것도 그 국가의 을 먹고 사는 공무원이 이런다는 것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후술하듯, 이때 세종의 분노는 형언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정창손의 실언을 듣고 극대노하여 "훈민정음을 통해 오히려 백성들이 효·충을 깨우치기 쉬울 것이다"라고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세종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이고 강도 높은 '용속한 선비'라는 발언을 남겼다. 저 표현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긴 해야하는데, 욕설을 대놓고 적을 수는 없으니까 순화된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입에 담기 힘들 수준의 엄청난 쌍욕을 먹었을 것이다. '용속한 선비'라는 말도 요즘말로 바꾸면 씹선비 정도의 어감인데, 이를 공식 기록으로 적을 걸 보면 이때 세종이 엄청난 욕설을 날린 건 기정 사실인 듯하다. 놀라운 점은 욕먹은 당사자인 정창손 본인이 《세종실록》 편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 부분의 감수도 본인이 직접 맞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 정도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어지간이도 크게 욕 먹은 모양이다.

그나마 조선의 공직에 재능을 헌신한 그의 공이 인정된 데다 사람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세종의 성향 덕분에 얌전히 파직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처럼 왕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자는 반드시 숙청해 버리는 경계심 많은 왕이었거나 연산군처럼 자기 기분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죽여 대는 왕이었다면 강상죄 + 반역죄로 꼬투리 잡혀 모가지 날라가는 것은 당연하고 삼족이 멸해질 수도 있었던 엄청난 실언이었으니 목숨 건진 것만 해도 용한 일이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최우선시 되는 일이고 군주가 그것을 전두지휘 해야 한다. 백성의 능멸은 곧 군주의 능멸이고 이때가 아직 조선 초라 신하들의 파벌도 없고 세종의 카리스마 아래에서 이상적인 정치 체제가 유지돼서 그렇지 사화나 환국이 있었을 시기에 이런 말이 나왔으면 어찌됐을지 모른다.

1444년 집현전 응교로 복직되었다가 1445년 집현전 집의가 되었는데 1446년 세종이 불경 간행을 추진하자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아니 된다"라며 또다시 세종에게 강경하게 맞서다 좌천되었는데 성리학을 부정한 양반이 성리학을 명분으로 불교를 배척했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다. 그러나 운 하나는 정말 억세게 좋아서 1447년 세종에게 용서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됐으며 그 해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불교 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문을 꾸준히 올리며 대립하기도 했으나, 능력은 출중해 1449년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 등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 사후 문종의 치하에서는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학, 대제학, 병조판서를 거치며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재위 원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사헌부로부터 "정창손은 홍원용과 친척지간인데 친척끼리 업무가 연관된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일단 논란이 있으니 해결될 때까지 관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자[17]"라는 구설수가 있었으나 단종이 나서서 피혐은 되지 않았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후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되어 봉원군에 봉해졌는데 1455년 사위였던 김질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꾸미다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장인이었던 자신에게 이를 고하자 세조에게 직접 고변했다.[18] 이에 대해 세조는 그를 좌익공신 3등에서 2등이었던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으로 올려주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해졌으며 봉원군에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생육신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시습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으나 1457년 좌의정까지 올랐다. 1458년 모친인 최병례가 사망하며 3년상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세조는 직접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19]시켜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그는 자신은 부담스럽다며 여러 번 사양했지만 세조는 일축하고 영의정 임명을 관철시켰다.

3년상을 치르고 정계에 복귀한 그는 죽은 세조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이장에게 의경(懿敬)[20]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세조의 신임을 얻었으나 1462년 양위와 관련된 발언을 해 삭탈관직되었다가 곧 정계에 복귀해 1468년 예종 즉위 후에는 남이강순의 국문을 직접 맡아 그 공을 인정받고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1469년 성종 즉위 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살이 되어 정계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성종이 허락치 않았다. 남효온(南孝溫)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1476년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 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84세라는 고령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0년 만에 사직하였다.
특진관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請以火炮禳之.)"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죽기 1년 전인 1486년에는 유령이 나타났다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만 본인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 듯하다.[21] 예조 판서 유지가 "화포로 물리치자"고 한 것은 '양진'(禳鎭)이라고 불렀는데 '방술(화약)을 써서 재앙을 막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귀신이 나온다니까 대포로 잡아 보자"고 상신했다가 성종이 반려했다는 이야기다.[22] 이는 음기(陰氣)가 강한 귀신을 양기(陽氣)인 불(=화포)로 물리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23]

1487년 86세로 죽자 성종은 청빈 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그 뒤 1504년 연산군이 주도한 갑자사화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대중매체

관료로서의 능력만 보면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검소한 청백리로도 이름 높았던 인물이지만 상술된 "백성이 유교를 배워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망언과 함께 훗날 수양대군에게 붙어 사육신을 밀고하는 짓까지 저지른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전형을 보였다.

이렇듯 현대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타인의 귀감이 된다고는 볼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대중매체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나마 눈에 띄게 부정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매체에서는 반대로 비중이 전무하다. 일반적으로는 선민의식에 빠진 찌질한 인간 쓰레기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실제 인물도 별반 다른 모습은 아니기에 늘상 그렇게 그려진다. 세종 집권 시대를 주로 다루는 사극에서는 계유정난에 가담한 인물들인 수양대군, 정인지, 신숙주조차도 이 때만큼은 세종의 조력자로서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그는 정말 일관성 있게(...) 인간 말종으로 그려지는 것이 특징이다.[24]

[1] 율리우스력 4월 13일[2] 율리우스력 2월 20일[3] 율리우스력 1월 11일[4] 율리우스력 1월 22일[5] 율리우스력 6월 7일[6] 율리우스력 6월 7일[7] 율리우스력 8월 2일[8] 율리우스력 4월 11일[9] 김구의 종21대조.[10] 현대로 치면 서울특별시장 급인 직위다.[11] 정창손 외에도 투옥 이상의 징계를 받은 이가 있었는데 훈민정음 찬성파에서 반대파로 돌아섰던 '김문'이라는 자다. 세종이 친히 "김문이 임금 앞에서 말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를 국문을 통해 알아내라"며 추국 명령을 내렸다.[12] 기존 문자인 중국 한문과의 괴리, 송사에서 억울한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의 허점, 세자가 훈민정음 창제에 시간을 과하게 투자 등 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웠으며, 특히 중국표의문자와 그 주변 오랑캐표음문자를 예시로 들어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13] 유교의 미덕인 효(孝)·충(忠)의 사례를 그림과 함께 기록한 으로, 당시 한자에 익숙하지 않던 백성에게도 충효를 가르치고 실천케 하기 위한 일종의 도덕 교과서인 셈이다.[14] 실제로 통념과는 달리 조선 시대, 특히 초기에는 양반보다 낮은 신분에서도 관리들이 꽤 많이 뽑혔는데, 심지어 서얼이나 천민 출신 관리도 있었을 정도다. 일례로 세종의 조부인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사가에서 음식을 해 주던 이인수라는 농부에게도 "음식 솜씨가 최고에 달했다"며 벼슬을 내렸다. 이후에도 신분이 미천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 벼슬길에 오른 장영실이나 허준 등이 발탁되었으며 심지어 임윤지당이라는 여성 성리학자도 있었고 성리학 교조주의의 원흉이라고 까이는 송시열조차도 여자도 남자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딸이나 며느리에게 한글로 교육을 시켰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정작 신분제가 존재하는 것이 모순 아닌가 싶겠지만, 오래된 국가적 제도는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890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인 신분제는 사라졌으나 천 년이 넘게 뿌리내려 온 계급의식은 당연히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계급의식은 한반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킨 6.25 전쟁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실질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여전히 양반 후손과 나머지를 구분하는 인식이 남아 있다가 산업화에 이은 이촌향도 현상으로 기성 향촌 사회가 파괴되었을 무렵에야 완전히 사라진다.[15] 불교가 국교라는 이미지인 고려도 전기 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광종시기 과거제 도입후 점점 비중이 늘어나 불교조차 점점 밀리고 있었다. 특히 원간섭기 이후에는 불교의 폐단에 비해 유학은 중국으로 간 선비들에 의해 이전보다 더 심화되어 있어서 저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권문세족이라도 힘들다. 즉, 정창손의 말은 당대나 전조시점에서도 하기 힘든 망언중 망언인셈이다. 그리고 권문세족이 음서로 세습됐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사실 음서 비중이 조선보다 높던 고려에서도 음서로 진출해봤자 말단에다가 사람 구실 못 하고 조상 덕이나 본다고 욕먹었고 일단 음서는 기본으로 깔고 과거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16] 이는 동아시아와 유럽의 사상과 체제가 구분되는 특징이다. 동아시아의 근세에 대응되는 서양의 시기가 초기 근대인데, 이 시기는 두 지역 모두 중앙집권화, 관료제, 왕권 강화가 특징이다. 그런데 유럽은 이를 왕권신수설을 통하여 왕권이 신에게서 하사 받은 절대적인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았고 때문에 홉스 같은 계몽주의 학자들 역시 왕권신수설을 옹호했다. 반대로 동아시아는 고대부터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와 군주를 동일시 했고 군주는 먼저 깨달은 자로서 백성을 가르치고 교육시킬 의무가 있던 존재였다.[17] 이를 피혐(避嫌)이라고 한다.[18] 정창손은 음모를 고변해야 할 입장이기는 했지만 사위 김질로부터 밀고를 들었을 때 사위가 자기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비겁함에 기가 막혀 "이 더러운 놈…"이라고 을 퍼부었다고 한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정창손이 김질을 바라보는 얼굴이 마치 오물을 보는거 같이 그렸다. 여기서의 대사는 "더럽고... 치사한 놈..."이다. 선왕의 신하였던 주제에 선왕의 적장손을 내치는 쪽에 가담한 양반이 할 말인가?[19] 起復: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20] 덕종 묘호는 성종 이후에 올라갔다. 왕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먼저 죽은 아들에게 왕의 묘호를 올리는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21] 집의 기물들이 여기저기 옮겨졌다고 한 것을 보면 폴터가이스트를 겪은 것 같다.[22] 이 이야기는 미즈키 시게루가 그려서 일본에도 소개되었다. 미즈키 시게루 본인이 요괴 연구가로서 세계 각지의 민담과 신화를 찾아 직접 방문 취재를 했다고 한다.[23] 훗날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이 진짜로 종묘에 포를 쏘아 귀신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1505년) 6월 18일 신미 5번째 기사: 명 홍치(弘治) 18년 종묘(宗廟)에서 화포(火炮)를 쏘아 양진(禳鎭)하게 하였다.[24] 그래도 예전에는 속물적인 기회주의자 정도로 묘사되었을지언정 완전히 구제불능인 인간 말종 수준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편이었으나 2000년대 이후 사극에서는 수양대군과 훈구파에 대한 비판적인 역사인식이 증가함과 더불어 한글 창제를 반대한 행적까지 조명받아 인수대비 정도를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으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25] 이때 세종의 일갈이 "감히 어디서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고 나와?! 백성의 성품이 교화될수 없다면 니놈이 정치는 왜 해? 단지 백성위에 군림하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이다. 웹상엔 어째 세종이 실제로 한 말로 돌아다니는데 실제로는 이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다.[26] 자신을 도와줄거라 생각한 사신은 명나라에서 요구한 물품보다 더 요구한게 밝혀지고 역모와 엮이면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얌전히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전까지 무례한 태도와 달리 존댓말까지 하며 돌아간 건 덤.[27] 이때 정남손을 비롯한 친명파 신하들을 심문할 때 세종은 부왕 태종이 숙청극을 벌일 때 입었다는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역시 킬방원의 아들[28] 이 작품에서는 다른 창작물들과 다르게 황희를 임금을 능멸하는 권신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