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문화 류씨 14세손으로 자는 명중(明仲), 시호는 충경(忠景)으로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문숙공(文肅公) 류사눌(柳思訥 ; 1375-1440 / 류관(하정공)의 조카)과 같은 항렬로 서로 14촌 간이다. 류량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충경공파(忠景公派)로 이어진다.류량의 선대는 류경 → 류승 → 류인기 → 류보발 → 류계조 → 류량으로 이어지며, 류량은 문화 류씨 가정보 수자장(水字張)에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류량의 아들들과 이들의 후손들(류량의 5대손 항렬에 이르기까지)이 아자장(阿字張)에서 숙자장(孰字張)에 걸쳐서 등재되어 있다.
2. 생애
1355년 12월 22일 태어남1372년 생원시 합격
1379년 산원
1381 흥위위 호군
1382년 5월 순흥군(順興君) 안종원(安宗源 ; 1325-1394 ; 안축(安軸)의 아들)과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윤진(尹珍 ; 해평군 윤지표(海平君 尹之彪)의 아들, 윤석(尹碩)의 손자)이 주관한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 //
유량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동방(同榜)은 전농시승 장자숭(典農寺丞 張子崇), 영의정 한상경(1360-1423 ; 한명회의 할아버지인 한상질의 아우), 사간 이회(司諫 李薈), 예안군(禮安君) 우홍부(禹洪富 ; ?-1414 ; 우현보의 아들), 이승상(李升商 ; ?-1413 ; 이달충의 손자), 이지강(李之剛 ; 1363-1427 ; 이집(李集)의 아들), 최관(崔關 ; ?-1424 ; 최충의 11대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 ; 1363-1423 ; 조선개국일등공신(朝鮮開國一等功臣), 정해(鄭瑎)의 현손(玄孫)), 정전(鄭悛 ; 우산기상시 정습인(右散騎常侍 鄭習仁)의 아들 ; 1356-1435), 김명선(金明善 ; 김방경의 오대손), 조선개국일등공신 조박(趙璞 ; 1356-1408 ; 조인규의 현손(玄孫)), 권홍(權弘 ; 1360-1446 ; 권부의 현손), 홍상빈(洪尙賓 ; 홍규의 현손), 강회중(姜淮仲 ; 공양왕과 사돈간인 청성군 강시(菁城君 姜蓍)의 아들), 이당(李堂 ; 이제현의 숙부인 이세기(李世基)의 증손자), 권완(權緩 ; ?-1417 ; 권한공(權漢功)의 증손자), 변현(邊顯 ; 변안열의 아들), 이종선(李種善 ; 1368-1438 ; 이색의 아들), 허해(許晐 ; 허공(許珙)의 증손자 / 이숭인의 사위), 곽종(郭悰) 등이다.
정탁의 형인 예문 춘추관 태학사 정총(鄭摠 ; 1358-1397)은 이숙번 및 류좌(柳佐 ; ?-1416 / 류량의 맏아들)의 장인이다.
전의부령ㆍ판도(版圖)ㆍ전리총랑(典理摠郞)ㆍ사복시 정(司僕寺正)ㆍ전교령(典校令)ㆍ천우위 대호군(千牛衛大護軍)ㆍ삼사 우윤(三司右尹)ㆍ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ㆍ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ㆍ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ㆍ판전교사(判典校事)ㆍ호조 판서(戶曹判書)ㆍ형조 판서(刑曹判書)ㆍ공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 ;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함 /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전서(吏曹典書)
1388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
1390 형조판서
1392 이조전서로 조선 개국을 맞음
1393년 가정 대부(嘉靖大夫) 중추부사(中樞副使)ㆍ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ㆍ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겸 형조 전서(刑曹典書)
1395년 조선 개국 원종 공신의 반열에 듬 / 상의중추원사 세자빈객(世子賓客) 참지 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
1396 계림부윤(鷄林府尹)
1398 강릉대도호부사
1400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
1401 추충익대 좌명사등공신 자헌대부 문성군 / 예문관 대제학ㆍ참판 사평(參判司平) 겸 사헌부 대사헌
1404 판사평부사 겸 대사헌 형조판서 판한성부사 병조 및 이조판서 참찬의정부사 겸 대사헌 역임 . 정헌대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ㆍ판한성(判漢城)ㆍ형조 판서ㆍ참찬의정(參贊議政)ㆍ예문관 대제학ㆍ병조 판서 겸 참찬의정ㆍ이조 판서 겸 대사헌이 되었고,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여 판순금사사(判巡禁司事) 겸임
문종실록 12권 1452년(문종 2년 / 명나라 경태(景泰) 3년) 2월 8일(임신) 영의정부사 황희(조선)의 졸기 중에서 다음 내용 기사가 있다.
'이때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등이 권세(權勢)가 크게 성하여 종지(宗支) 를 모해(謀害)하니, 황희(조선)는 이숙번(李叔蕃), 이응(李膺), 조영무(趙英茂), 류량(柳亮) 등과 더불어 밀지(密旨)를 받아 이들을 도모하였는데, 태종(조선)이 일찍이 이르기를, '만약 신중히 하여 빈틈이 없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더니 여러 민씨(閔氏)들이 마침내 실패하였다'
(時閔無咎, 無疾等, 權勢大熾, 謀害宗支, 喜與李叔蕃-李膺-趙英茂-柳亮 等, 承密旨圖之, 太宗嘗謂曰 "若不愼密, 噬臍無及" 諸閔竟敗)
종지 : 종중(宗中 ; 성(姓)이 같고 본(本)이 같은 한 겨레붙이의 문중)에서 종파와 지파 를 의미함
종파(宗派) ; 족보로 보아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 집의 계통
지파 : 종파에서 갈라져 나간 파. 맏이가 아닌 자손에서 갈라져 나간 파의 계통
1408 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직제학(直提學) 어변갑(魚變甲) 등 33인을 선발
1412 보국숭록대부 문성군
1413 의정부 찬성으로 문성부원군에 진봉 / 판순금사사 겸임
1415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 병으로 사직함 / 동덕공신
1416년 4월 2일(갑자) 세상을 떠남 / 시호(諡號) : 충경(忠景) // 이해 9월 18일(병오)에 국장(國葬)으로 양주(楊州)의 동촌(東村) 시배동(時背洞)에 장사지냄
3. 가족 관계
* 할아버지 류보발(1304-1340) ;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高麗國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할머니 성안군부인(成安郡夫人) 원씨(元氏) ; 원주 원씨 원선지(元善之 ; 1288-1337)의 딸 / 원선지는 언양 김씨 김취려의 손자인 김변(1248-1301 ; 류경의 문생(門生))의 사위이다. 김변은 첨의중찬 허공(許珙 ; 1233-1291 / 류경의 추천으로 정방원(政房員)이 됨)의 사위이다.
류공권 → 류공권의 사위 윤위 → 윤위의 아들 윤극민 → 윤극민의 사위 허공 → 허공의 사위 김변 → 김변의 사위 원선지 → 원선지의 사위 류보발(류공권의 5대손)
* 외할아버지 ; 전리판서 면천군(典理判書 沔川君) 구영검(具榮儉 ; ?-1356 ; 인헌왕후의 직계 조상)의 딸
- 아버지 류계조(柳繼祖 ; 1333-1374) ; 기해격주홍적일등공신(己亥擊走紅賊一等功臣), 안사일등도형벽상공신(安社一等圖形壁上功臣), 흥왕토적일등공신(興王討賊一等功臣)에 서훈(敍勳)됨
- 어머니 혜순택주(惠順宅主) 능성 구씨(?-1416) ; 구영검의 딸
- 두번째 부인 연안 이씨(?-1434) ; 공조전서(典工判書) 이원발(李元發)의 딸 / 좌의정(左議政) 이귀령(李貴齡 ; 1346-1439 / 開國原從功臣)과 호조판서(戶曹判書) 이귀산(李貴山 ; ?-1424)이 이원발의 아들임
- 아들 ; 류경생(柳京生)
- 며느리 진주 하씨 ; 하연(조선)의 딸
- 아들 ; 류강생(柳江生 ; 1399-1451)
- 며느리 고성 이씨 ; 이운로(李云老 ; 이림의 손자)의 딸 / 이운로는 1383년에 태종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함
- 아들 ; 류한생(柳漢生 ; 1402-1449)
- 며느리 전주 최씨 ; 대호군 최우의 딸
예부시량(禮部侍郞) 최균(崔均 ; ?-1174) →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 최보순(崔甫淳 ; 1162-1229) → 봉어(奉御) 최윤칭(崔允偁) → 학사(學士) 최소(崔佋)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최비일(崔毗一 ; ?-1319) → 추성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推誠亮節功臣 重大匡 光陽君) 최성지(崔誠之 ; 1265-1330) → 첨의참리(僉議參理) 최문도(崔文度 ; 1292-1345) → 최사검(崔思儉) → 동지밀직(同知密直) 최을의(崔乙義 ; 1335-1392) → 대호군(大護軍) 최우(崔宇)
4. 류량 졸기(卒記)
『태종실록(太宗實錄)』권(卷) 31, 태종(太宗) 16年 4월 2일 갑자(甲子). 문성부원군 류량 졸기(文城府院君 柳亮 卒記)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 류량(柳亮)이 졸(卒)하였다. 류량의 자(字)는 명중(明仲)이요, 문화(文化) 사람이다. 밀직사(密直使) 류계조(柳繼祖)의 아들로서 그 선대에 류차달(柳車達)이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호(號)를 '삼한 공신(三韓功臣)' 이라 내렸다. 자손이 대대로 달관(達官)이 되었고, 류량도 젊어서부터 탁락(卓犖)하여 뭇사람과 달랐으므로 제배(儕輩)들이 꺼리었다.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에 나이 28세로서 호군(護軍)을 사직하고, 부시(赴試)하여 제1등으로 급제하고, 여러 번 옮겨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겨울에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을 따라서 연경(燕京)으로 갔다가 때마침 참소하는 사람이 말을 만들어 명나라에 무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류량이 일에 따라서 변명하여 밝혔었다. 국초에는 상의 중추(商議中樞)로 승진하였으니, 태조(太祖)가 류량을 오랫동안 잠저(潛邸)에 모셨다고 하여 원종 공신(元從功臣)에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병자년(丙子年)에 나가서 계림(鷄林)의 윤(尹)이 되고, 정축년(丁丑年)에 왜구(倭寇)가 크게 떨치니, 태조(太祖)가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보내어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왜구(倭寇)가 마침 이르매 류량이 변장(邊將)과 함께 공격하니, 왜적의 형세가 궁해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변장(邊將)이 허락하였으나 적은 아직 허실(虛實)을 엿보고 우물쭈물하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류양이 궁시(弓矢)를 풀어 놓고 적의 진중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 다른 뜻이 없음을 보이니, 적이 이를 믿고 악수(握手)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좋은 칼을 주었다. 류량이 즉시 항복한 왜인의 사자(使者) 10인을 데리고 김사형(金士衡)의 막사(幕舍)로 가니, 김사형이 왜선(倭船)을 울산포(蔚山浦)에 머물러 두고, 바로 왜사(倭使)를 조정에 보내었다. 명하여 양미(糧米)를 후하게 주어 그들을 위로하여 회유하게 하고, 비밀히 변장(邊將)을 시켜 그들을 섬멸하게 하였는데, 병선(兵船)을 징발하여 아직 모으지도 아니하여, 적이 비어(飛語)를 듣고 마침내 울산 군사(蔚山郡事) 이은(李殷)과 아전(使) 1명, 기생 1명을 붙잡아서 갔다.
정권을 잡은 자가 류량이 사주한 것이라고 하여 헌사(憲司)로 하여금 핵문(劾問)하게 하니, 태조가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명하여 합산(合山)으로 귀양가는 데 그쳤다. 정권을 잡은 자가 분을 풀 길이 없어 다시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여, 옥(獄)에 갇힌 지 여러 달 동안에 고문이 갖추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그가 굴복당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틈을 타서 태조에게 극언(極言)하니, 감오(感悟)하여 놓아 주고 나주(羅州)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무인년(戊寅年)에 기용하여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삼았는데, 백성이 모두 그를 생각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임금이 즉위하자,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를 제수하고, 신사년(辛巳年)에 추충익대 좌명공신(推忠翼戴佐命功臣)이라 호를 내렸다. 이로부터 두루 요질(要秩)을 거쳐, 을미년(乙未年)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고, 얼마 아니 되어 병으로 사직하니,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공신(功臣)의 호(號)에다 동덕(同德)이란 두 글자를 더하고 집으로 물러나갔다. 이 때에 이르러 등창(疽)을 앓다가 졸(卒)하니, 나이 62세였다. 부고가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대언(代言) 이종선(李種善)을 보내어 집에 제사를 내리고, 치부(致賻)하기를 더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돌보았다.
류량의 천성은 고항(高亢)하고 강조(剛躁)하여, 정사를 보는 데 대체(大體)에 힘써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에 궤변(詭辯)을 쓰거나 남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했다. 아들은 5명인데, 유좌(柳佐), 유근(柳謹), 유경생(柳京生), 유강생(柳江生), 유한생(柳漢生)이다.
5. 류량 묘지명(墓誌銘)
하연(河演)이 지은 『경재집(敬齋集)』 권(卷)之2, 묘지명(墓誌銘) 및 국조인물고 권1 상신(相臣) 편에 문성부원군 류공 묘지명(文城府院君柳公墓誌銘) - 류량의 묘지명이 전한다. 하연은 류량과 사돈간으로, 류량의 둘째 부인 연안 이씨의 맏아들 류경생의 장인이다.공(公)의 휘(諱)는 양(亮)이요, 자(字)는 명중(明仲)이니, 문화(文化) 사람이다. 아버지는 문화군(文化君)에 추증된 휘 계조(繼祖)이고, 어머니 혜순 택주(惠順宅主) 능성 구씨(具氏)는 면성군(沔城君) 구영검(具榮儉)의 딸이다.
공은 지정(至正) 15년인 을미년(乙未年, 1355년 공민왕 4년) 12월 22일(癸酉)에 탄생하여 홍무(洪武) 4년인 신해년(辛亥年, 1372년 공민왕 20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기미년(己未年, 1379년 우왕 5년)에 산원(散員)이 되고 신유년(辛酉年, 1381년 우왕 7년)에 흥위위 호군(興威衛護軍)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술년(壬戌年, 1382년 우왕 8년) 봄에 사직하고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을과(乙科)에 1등으로 뽑혀 그해 겨울에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에 판도(版圖)ㆍ전리총랑(典理摠郞)ㆍ사복시 정(司僕寺正)ㆍ전교령(典校令)ㆍ천우위 대호군(千牛衛大護軍)ㆍ삼사 우윤(三司右尹)ㆍ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ㆍ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ㆍ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ㆍ판전교사(判典校事)ㆍ호조 판서(戶曹判書)ㆍ형조 판서(刑曹判書)ㆍ공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대하였고,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전서(吏曹典書)에 승진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393년 태조 2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중추부사(中樞副使)ㆍ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ㆍ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겸 형조 전서(刑曹典書)에 임명되었으며, 을해년(乙亥年, 1395년 태조 4년) 봄에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천운에 순응하여 나라를 새로 열면서 공이 오래도록 잠저(潛邸)에서 모셨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게 하고 전민(田民)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상의중추원사 세자빈객(世子賓客) 참지 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401년 태종 원년) 봄에 태종 성덕 신공 공정대왕(太宗聖德神功恭定大王)이 익대(翊戴)공을 논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삼고 전민(田民)과 금백(金帛)과 구마(廐馬)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켜 문성군(文城君)으로 봉하고 예문관 대제학ㆍ참판 사평(參判司平)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으며, 갑신년(甲申年, 1404년 태종 4년) 겨울에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승진하고 군(君)에 봉해져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 당시 육조(六曹)를 고쳐 정2품 직사(職事)로 만들고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ㆍ판한성(判漢城)ㆍ형조 판서ㆍ참찬의정(參贊議政)ㆍ예문관 대제학ㆍ병조 판서 겸 참찬의정ㆍ이조 판서 겸 대사헌이 되었고,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여 판순금사사(判巡禁司事)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임진년(壬辰年, 1412년 태종 12년)에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문성군(文城君)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인 1413년 계사년(癸巳年)에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순금사사를 겸임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415년 태종 15년)에 대광 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가을에 병으로 사직(辭職)하였고, 겨울에 동덕공신(同德功臣)의 호(號)가 더해졌다.
그리고 두 도(道)에 사명(使命)을 받들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ㆍ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으며, 계림 부윤(鷄林府尹)과 영강릉 부사(領江陵府事)를 역임하였다. 앞서 무자년(戊子年, 1408년 태종 8년) 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금의 직제학(直提學) 어변갑(魚變甲)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영락(永樂) 14년 병신년(丙申年, 1416년 태종 16년) 4월 초2일(갑자)에 세상을 떠났으며 충경(忠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이해 9월 18일(병오)에 국장(國葬)으로 양주(楊州)의 동촌(東村) 시배동(時背洞)에 장사지냈다.
공이 처음에 시중(侍中)에 추증된 평양(平壤) 조덕유(趙德裕)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니 맏이는 유좌(柳佐)로 전사령(典祀令)인데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유상영(柳尙榮)을 낳았는데 사직(司直)이며 그가 생원(生員) 김괄(金)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다음 유근(柳謹)은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성산(星山) 이직(李稷)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이 먼저 죽었다.
(공이) 뒤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된 연안(延安) 이원발(李元發)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으니 맏이 류경생(柳京生)은 의흥사 호군(義興司護軍)으로 대사헌(大司憲) 하연(河演)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 류찬(柳纘)은 박소(朴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다음 류강생(柳江生)은 남부령(南部令)이며 판서(判書) 이운로(李云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며, 다음 류한생(柳漢生)은 내자시 판관(內資寺判官)으로 대호군(大護軍) 최우(崔宇)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사위 류경생이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원하였다. 내가 공과는 혼인을 맺은 친분으로 공의 행적(行蹟)을 확실하게 아는데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는 것으로 그 청원을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높으신 우리 공은 하늘이 내신 뛰어나게 어진 분이도다. 높은 덕과 넓은 사업은 산과 강처럼 오래 전해질 터이며, 청신한 기개와 온화하고 순수함은 가을달과 봄볕 같도다. 중앙과 지방에서 차례로 드날린 명망과 업적 빛이 나며, 돕고 떠받던 충성스러운 공훈 백세토록 그 향기 전해지리니, 아!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 자손 창성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