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문화 류씨 12세손인 류보발(1304-1340)은 류승의 네째 아들인 온정공(溫靖公) 문화군(文化君) 류인기(柳仁琦 ; 1283년 생)의 아들이다.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高麗國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류보발의 아들, 사위 및 이들의 후손들(류보발의 증손자 항렬에 이르기까지)이 문화 류씨 가정보 려자장(麗字張)에서 수자장(水字張)에 걸쳐서 등재되어 있다.문성부원군 우의정(文城府院君 右議政) 충경공(忠景公) 류량(柳亮 ; 1355-1416)이 류보발의 손자이다. 이곡(이색의 아버지)이 지은 류보발의 묘지명이 전한다.
2. 생애
류보발(柳甫發)은 음서로 흥왕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이 되었다. 1336년 소부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고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거쳐 1339년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에 올랐다.3. 가족 관계
* 아버지 ; 류인기(류승의 아들)* 어머니 해양군부인 김씨(海陽郡夫人 金氏) ; 김련의 아들 첨의중찬 김지숙(1237-1310 ; 홍규의 처남)의 딸 // 김지숙의 아들 김인연의 아들이 공민왕 시기 김원명, 김속명 형제임
* 부인 성안군부인(成安郡夫人) 원씨(元氏) ; 원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 고려국(高麗國)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겸 판내부시사(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兼 判內府寺事) 원주 원씨 원선지(元善之 ; 1288-1337)의 딸 / 원선지는 언양 김씨 김취려의 손자인 김변(1248-1301 ; 류경의 문생(門生))의 사위이다. 김변은 첨의중찬 허공(許珙 ; 1233-1291 / 류경의 추천으로 정방원(政房員)이 됨)의 사위이다.
류공권 → 사위 윤위 → 윤위의 아들 윤극민 → 윤극민의 사위 허공 → 허공의 사위 김변 → 김변의 사위 원선지 → 원선지의 사위 류보발(류공권의 5대손)
- 사위 ; 심양로 달로화적(瀋陽路 達魯花赤) 홍천(洪川君) 홀실첩목이(忽失帖木耳)
- 사위 ; 지유낭장(指諭郎將) 홍유구(洪有龜 ; 홍자번의 증손자)
- 사위 ;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 ; 노책의 아들,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고려)의 장인)
- 아들 류계고(柳繼高 ; 1331년 생) ; 1340년에 작성된 류보발 묘지명에, 당시 10세라는 기록이 있음
- 며느리 안산 김씨 ; 김주경(金珠慶)의 딸 / 김주경은 판삼사사 김원상(金元祥 ; ?-1339)의 둘째 아들이며 안유충(安惟忠 ; 권부의 사위 / 류경의 문생(門生)인 安戩(안전)의 아들)의 사위이다. 좌명사등공신(佐命四等功臣)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 ; 1345-1419)이,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성경(金星慶 ; 김주경의 형)의 아들이다.
- 손자 류자(柳滋) ; 류자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수사공파(水使公派)로 이어짐
- 아들 류계조(柳繼祖 ; 1333-1374) ; 류보발 묘지명에 차남 상좌(尙左)가 8세라는 기록이 있음 / 류계조는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자 좌승(左丞)으로 박천(博川)에서 적을 물리치고, 이듬해 홍건적이 다시 침략하자 공주도병마사(公州道兵馬使)로서 공격하여 승리했다.
이 공적(功績)으로 기해격주홍적일등공신(己亥擊走紅賊一等功臣), 안사일등도형벽상공신(安社一等圖形壁上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또한 1363년 김용이 주도한 흥왕사의 변 당시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적(賊)을 평정한 공으로 흥왕토적일등공신(興王討賊一等功臣)에 서훈(敍勳)되었다. 또한 좌대언(左代言),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올랐다. 류계조는 조선 건국 이후 공신, 재상의 부모를 추증, 봉작하는 제도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화군(文化君)에 봉해졌다. - 며느리 혜순택주(惠順宅主) 구씨(?-1416) ; 능성 구씨 전리판서 면천군(典理判書 沔川君) 구영검(具榮儉 ; ?-1356 ; 인헌왕후의 직계 조상)의 딸
- 손녀 사위 ; 현성군(玄城君) 권정주(權定住 ; ?-1376) / 권정주의 아우 권진(權瑨)이 1374년 공민왕 시해에 가담한 죄로 처형되자 권진의 아버지 권용(權鏞 ; 선수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授 宣武將軍 合浦鎭邊萬戶府萬戶 重大匡 玄城君))과 권진의 형 권정주도 이에 연좌되어 처형되었다(고려사 홍륜 열전의 기록)
안동 권씨 권정주의 선대는 권부(류보발의 고모부 ; 류보발의 할아버지 류승의 사위) → 권준 → 중대광 현복군(重大匡 玄福君) 권렴(權廉 ; 1302-1340 / 이색이 지은 묘지명이 전함) → 권용 → 권정주로 이어진다. 권희달(權希達 ; 1367-1434)이 권정주의 아들이다.
- 손자 류신(柳信) ; 류신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부윤공파(府尹公派)로 이어짐
- 손자 류량(柳亮) ; 류량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충경공파(忠景公派)로 이어짐
- 손자 며느리 평양 조씨 ;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덕유(趙德裕 ; 1314-1352))의 딸 / 조인규 →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조련(趙璉 ; ?-1322 / 권렴의 장인) → 조덕유 // 조준이 조덕유의 아들로 류량의 처남임
- 증손자 ; 류좌(柳佐 ; ?-1416), 류근(柳謹)
- 7대손 ; 류관 / 류좌(柳佐) → 류상영(柳尙榮) → 류주(柳霔 ; 1427-1463) →류정수(柳廷秀 ; 1451-1501) → 류관(柳灌 ; 1484-1545)
- 손자 며느리 연안 이씨(?-1434) ; 공조전서(典工判書) 이원발(李元發)의 딸 / 이원발의 아들은 좌의정(左議政) 이귀령(李貴齡 ; 1346-1439 / 開國原從功臣)과 호조판서(戶曹判書) 이귀산(李貴山 ; ?-1424)이다.
- 증손자 ; 류경생(柳京生), 류강생(柳江生), 류한생(柳漢生 ; 1402-1449)
- 손자 류순(柳恂)
- 사위 ; 박가라(朴加羅)
- 사위 김진(金縝) ;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事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 김방경 →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김순(金恂 ; 1258-1321) →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推忠秉義翊贊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 ; 1285~1348) → 김진 / 구 안동 김씨
김진의 할아버지인 김순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 ; 류공권의 외손자 윤극민의 사위)의 사위이다.
4. 류보발 묘지명
고려국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高麗國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류군(柳君) 묘지명유주 류씨(儒州 柳氏)로 (고려) 개국의 위업을 도운 이가 있는데 그 후 복록이 이어지고 덕이 펴져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나왔다. 명종(明宗) 때의 재상인 공권(公權)은 학문을 좋아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는데, 최종 관직이 참지정사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당시 최충헌(崔忠獻)이 나라의 적을 없앤 공을 내세우며 임금을 폐하고 세우기를 마음대로 하였으며, 자손들도 서로 이어가며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충헌왕(忠憲王, 高宗) 무오년(고종 45, 1258)에 이르러 문간공의 손자인 경(璥)은 뛰어난 재주와 덕망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 김준과 함께 의논하여 충헌의 증손 의(誼)를 죽이고 임금에게 정권을 되돌리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공(功)이 사직(社稷)에 있으며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관직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군에게는 증조가 된다.
문정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승(陞)을 낳으니,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정신이 문화군(文化君) 인기(仁奇, 仁琦)를 낳으니, 시호는 온정(溫靖)이다. (인기가) 첨의중찬(僉議中贊)이고 시호가 광절(光節)인 지숙(之淑)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해양군부인 김씨(海陽郡夫人 金氏)로, 군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군의 이름은 보발(甫發)이다. 16세에 문음(門蔭)으로 흥왕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제수되고, 두 차례 옮겨 낭장(郎將)이 되었다. 지원(至元, 後至元)5) 2년 병자년(충숙 복위 5, 1336)에 소부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다가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로 옮기고, 기묘년(충숙 복위 8, 1339) 봄에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에 올랐다.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의릉(毅陵, 忠肅王)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크게 쓰려고 하여 우선 납언(納言)의 임무로써 풍기(風紀)의 직책을 겸하게 하였다. 군은 능히 가업(家業)을 깊게 하고 욕됨이 없게 할 것을 마음에 두고, 바야흐로 당시에 공을 세워서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으며, 사람들 또한 이것을 바랐다. 그러나 의릉(毅陵)이 나라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자 당시의 사정이 크게 달라졌는데, 다음해 8월 을미일에 병으로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37세이다.
부인 원씨(元氏)는 작고한 검교평리(檢校評理) 선지(善之)6)의 딸로 좋은 가문(華閥)에서 덕을 길러 대가(大家)의 어진 배필이 되어 제사를 받들고 음식을 주관하였는데, 공순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자녀로 다섯 명을 낳으니, 장남 계고(繼高)는 지금 열 살이고, 차남 상좌(尙左)는 여덟 살이다. 장녀는 심양로 달로화적(瀋陽路 達魯花赤)인 홍천군 홀실첩목이(洪川君 忽失帖木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지유낭장(指諭郎將) 홍유구(洪有龜)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에게 시집갔다.
9월 경신일에 성의 동쪽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장례지내면서, 부인이 일찍이 군과 왕래하던 문사(文士) 중에서 나〈李穀〉와 같은 이가 없다고 하여 사람을 보내와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유씨(柳氏)의 흥성은 나라와 함께 하였으니
그 근원은 아득하고 복은 흘러 끊어지지 않도다.
문간공(文簡公)과 문정공(文正公)은 재능과 어짐이 있어
재상이 되어 우리 동방을 다스리며 다섯 대를 이었네.
오직 군도 이를 본받아 선대의 위업을 간절히 있고자 하였으나
하늘은 덕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어찌 오래 살도록 하지 않는가.
누가 수명의 길고 짧음을 주관하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으니
단지 무덤에 명을 새겨 후대에 전할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