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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03 10:13:35

류보발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류보발 묘지명

1. 개요

문화 류씨 12세손인 류보발(1304-1340)은 류승의 네째 아들인 온정공(溫靖公) 문화군(文化君) 류인기(柳仁琦 ; 1283년 생)의 아들이다.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高麗國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류보발의 아들, 사위 및 이들의 후손들(류보발의 증손자 항렬에 이르기까지)이 문화 류씨 가정보 려자장(麗字張)에서 수자장(水字張)에 걸쳐서 등재되어 있다.
문성부원군 우의정(文城府院君 右議政) 충경공(忠景公) 류량(柳亮 ; 1355-1416)이 류보발의 손자이다. 이곡(이색의 아버지)이 지은 류보발의 묘지명이 전한다.

2. 생애

류보발(柳甫發)은 음서로 흥왕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이 되었다. 1336년 소부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고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거쳐 1339년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 류인기(류승의 아들)
* 어머니 해양군부인 김씨(海陽郡夫人 金氏) ; 김련의 아들 첨의중찬 김지숙(1237-1310 ; 홍규의 처남)의 딸 // 김지숙의 아들 김인연의 아들이 공민왕 시기 김원명, 김속명 형제임

* 부인 성안군부인(成安郡夫人) 원씨(元氏) ; 원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 고려국(高麗國)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겸 판내부시사(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兼 判內府寺事) 원주 원씨 원선지(元善之 ; 1288-1337)의 딸 / 원선지는 언양 김씨 김취려의 손자인 김변(1248-1301 ; 류경의 문생(門生))의 사위이다. 김변은 첨의중찬 허공(許珙 ; 1233-1291 / 류경의 추천으로 정방원(政房員)이 됨)의 사위이다.

류공권 → 사위 윤위 → 윤위의 아들 윤극민 → 윤극민의 사위 허공 → 허공의 사위 김변 → 김변의 사위 원선지 → 원선지의 사위 류보발(류공권의 5대손)

4. 류보발 묘지명

고려국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高麗國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류군(柳君) 묘지명

유주 류씨(儒州 柳氏)로 (고려) 개국의 위업을 도운 이가 있는데 그 후 복록이 이어지고 덕이 펴져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나왔다. 명종(明宗) 때의 재상인 공권(公權)은 학문을 좋아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는데, 최종 관직이 참지정사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당시 최충헌(崔忠獻)이 나라의 적을 없앤 공을 내세우며 임금을 폐하고 세우기를 마음대로 하였으며, 자손들도 서로 이어가며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충헌왕(忠憲王, 高宗) 무오년(고종 45, 1258)에 이르러 문간공의 손자인 경(璥)은 뛰어난 재주와 덕망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 김준과 함께 의논하여 충헌의 증손 의(誼)를 죽이고 임금에게 정권을 되돌리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공(功)이 사직(社稷)에 있으며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관직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군에게는 증조가 된다.
문정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승(陞)을 낳으니,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정신이 문화군(文化君) 인기(仁奇, 仁琦)를 낳으니, 시호는 온정(溫靖)이다. (인기가) 첨의중찬(僉議中贊)이고 시호가 광절(光節)인 지숙(之淑)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해양군부인 김씨(海陽郡夫人 金氏)로, 군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군의 이름은 보발(甫發)이다. 16세에 문음(門蔭)으로 흥왕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제수되고, 두 차례 옮겨 낭장(郎將)이 되었다. 지원(至元, 後至元)5) 2년 병자년(충숙 복위 5, 1336)에 소부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다가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로 옮기고, 기묘년(충숙 복위 8, 1339) 봄에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에 올랐다.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의릉(毅陵, 忠肅王)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크게 쓰려고 하여 우선 납언(納言)의 임무로써 풍기(風紀)의 직책을 겸하게 하였다. 군은 능히 가업(家業)을 깊게 하고 욕됨이 없게 할 것을 마음에 두고, 바야흐로 당시에 공을 세워서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으며, 사람들 또한 이것을 바랐다. 그러나 의릉(毅陵)이 나라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자 당시의 사정이 크게 달라졌는데, 다음해 8월 을미일에 병으로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37세이다.

부인 원씨(元氏)는 작고한 검교평리(檢校評理) 선지(善之)6)의 딸로 좋은 가문(華閥)에서 덕을 길러 대가(大家)의 어진 배필이 되어 제사를 받들고 음식을 주관하였는데, 공순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자녀로 다섯 명을 낳으니, 장남 계고(繼高)는 지금 열 살이고, 차남 상좌(尙左)는 여덟 살이다. 장녀는 심양로 달로화적(瀋陽路 達魯花赤)인 홍천군 홀실첩목이(洪川君 忽失帖木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지유낭장(指諭郎將) 홍유구(洪有龜)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에게 시집갔다.

9월 경신일에 성의 동쪽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장례지내면서, 부인이 일찍이 군과 왕래하던 문사(文士) 중에서 나〈李穀〉와 같은 이가 없다고 하여 사람을 보내와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유씨(柳氏)의 흥성은 나라와 함께 하였으니
그 근원은 아득하고 복은 흘러 끊어지지 않도다.
문간공(文簡公)과 문정공(文正公)은 재능과 어짐이 있어
재상이 되어 우리 동방을 다스리며 다섯 대를 이었네.
오직 군도 이를 본받아 선대의 위업을 간절히 있고자 하였으나
하늘은 덕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어찌 오래 살도록 하지 않는가.
누가 수명의 길고 짧음을 주관하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으니
단지 무덤에 명을 새겨 후대에 전할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