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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비

1990년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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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대하드라마
왕과 비 (1998~2000)
王과 妃 / The Emperor and the Empress
파일:external/pds19.egloos.com/e0013225_4bf3c8baea41a.jpg
<colbgcolor=#cc9966><colcolor=white> 시청 등급 파일:15세 이상 시청가 아이콘.svg 15세 이상 시청가
방송 시간 · / 21:45
방송 기간 1998년 6월 6일 ~ 2000년 3월 26일
방송 횟수 186부작
장르 대하사극
제작 KBS 자체제작
채널 KBS 1TV
제작진 <colbgcolor=#cc9966><colcolor=white> 연출 김종선[1], 김용수 → 윤용훈, 윤창범
극본 정하연
음악 김동성
출연 임동진, 채시라, 최종원, 한혜숙, 조경환, 안재모, 정태우, 김성령
해설 이강식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비판
2.1. 작가의 의도(변호)와 그에 대한 반박
3. 극중 인물 묘사의 특이점4. 등장인물5. 오프닝6. 여담7. KBS Drama Classic 연속 무료 스트리밍

[clearfix]

1. 개요

"용상은 하나 뿐입니다. 결코 둘이 될 수가 없지요."
1화 중 인수대비의 대사. 도원군부인이었던 시절에 도원군에게 한 말.

1998년 6월 6일부터 2000년 3월 26일까지 방영된 18번째 KBS 대하드라마.

문종 사후부터 세조를 지나 연산군의 사망까지를 다루었으며, 전작에서는 이성계이방원이라는 확실한 주인공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뚜렷한 주인공 없이 시대에 따라 얽히고 설키는 정치적 권모술수와 암투를 그려내고 있다. 신봉승 원작의 한명회장녹수의 내용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조선시대판 격동 50년이라 봐도 무방한 작품으로, 문종의 승하(1452년)에서 중종반정(1506년)까지 대략 50년의 기간이 작중에서 다루어졌다. 다만 단종 사후 9년, 공혜왕후 사후 3년, 폐비 윤씨 사사 후 12년, 무오사화 이후 6년 등, 중간중간에 건너뛰는 구간이 있어 실질적으로 다루어지는 기간은 30년 정도 된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주인공이 수시로 바뀌긴 하지만, 극 전체를 보면 인수대비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첫 회부터 종영을 3회 앞둔 183회까지 등장하며, 승하한 이후 남은 3회에도 연산군의 회상 등으로 계속 등장한다. 인수대비는 50년 동안 유력한 대군의 며느리, 왕세자빈, 왕대비, 대왕대비 등의 칭호를 가지고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며, 인수대비가 한 발 물러나 있던 기간은 작중에서도 거의 건너뛰기 때문에 항상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 용의 눈물 종방연 당시 드라마 소개에서도 세조 역을 맡은 임동진이 "<왕과 비>에서 비에 해당하는 사람은 인수대비"라고 했으니, 이러한 부분을 미리 밝혀두고 시작한 셈이며,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드라마 오프닝에서는 초반 주인공인 세조 역의 임동진 다음에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 중신들을 밀어내고 인수대비 역의 채시라가 나왔으며 세조 승하 이후에는 아예 가장 먼저 나오게 되었다.[2]

극작가인 정하연은 이전에도 장녹수 등의 인물을 주연으로 비슷한 시대를 그린 사극을 쓴 경험이 있으며, 따라서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이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2. 비판

대책 없는 수양대군 미화로 악명 높다. 조선왕조실록을 많이 참고하여 썼다고 하기는 하나,[3] 이는 신뢰성이 높지 않은 단종실록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방증하기도 하며, 덕분에 드라마에서 계유정난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방영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4] 김종서는 꽤나 음험한 인물로 나오며[5], 안평대군은 빼박 역모의 진주인공, 계유정난의 주인공 수양대군은 선역으로 나온다. 한편으로는 수양대군의 최측근들인 한명회홍윤성, 양녕대군은 악역에 가깝게 묘사되는 점이 아이러니할 수 있으나, 이는 수양대군이 저지른 악행들을 떠넘길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놀랄 것도 없다.[6] 애초에 수양대군이 그런 인물들을 가까이했다는 것 자체가 수양대군의 잘못이므로 본작의 그런 묘사 또한 엄연히 잘못된 묘사다. 바로 이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한명회와 대조되는 점이다. #

기본적으로 영웅적인 주인공에게도 결함이나 약점 같은 것이 있고, 그로 인해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 이래 오랫동안 내려온 줄거리이며, 작가 정하연은 현대 한국의 드라마 작가들 중에서 이러한 구도를 잘 답습하고 있다. 이 줄거리에 맞추어 보면 수양대군이라는 주인공은 즉위라는 영웅적인 성취를 이루지만, '자식처럼 아끼던 조카의 왕위를 탈취했다.'는 결함을 동시에 안게 된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권력의 비정함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데, 이러한 전개를 선택한 작가의 의도는 '권력의 무서움과 권력으로 인해 초래되는 인간성의 황폐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극 초반부에는 나약하게 묘사되지만, 강한 권력의지와 아들에게 그 권력을 대물림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문종수양대군과 구체적인 이유는 다르지만, 역시 권력으로 인해 황폐해진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보인다. 하다못해 이 드라마는 김종서를 너무 지나치게 폄하를 하였는데 문종의 국상 기간동안 자신의 부하들을 풀어 민가를 감시하게 하고 문종을 향해 곡을 하는 백성을 향해 신나게 두들겨 패기까지 한 말도 안 되는 내용까지 썼다. 그 이유라는 것이 "새 임금이 즉위하셨는데 이미 죽은 왕에게 곡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였는데, 실록에 없는 소리인데다 왕실 법도와도 전혀 맞지 않는다.

드라마 극초반부터 권력에 강한 관심을 드러냈고, 남편 의경세자의 사망과 함께 사저로 내쫓기자 절망했다가, 결국 아들 성종을 왕위에 올리며 권력을 향해 무한전진했던 주인공 인수대비 역시 손자 연산군에 의해 못 볼 꼴 다보고 허망하게 사망. 죽은 후에도 후궁의 예로 장사지내지는 등 푸대접을 받는데 이 역시 권력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세조와 더불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인수대비의 경우, 자신의 시아버지가 극 중에서 지나치게 미화된 것과 정반대로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묘사된다.[7] 극 중 인수대비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종친의 군부인 시절부터 왕비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며 시아버지의 측근들을 모아놓고 하루빨리 시아버지가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받아야 한다고 누구보다 강하게 어필하고, 자신의 권력유지에 있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설사 친가족이라도 거리낌없이 제거한다. 드라마 막판에 이 사람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수대비는 그야말로 이 드라마의 거의 최종 보스급 존재감을 과시하는 편.

요약하자면, 이 드라마는 역사적 기록을 취사선택하여 주제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상을 표현한 것이다. 즉, 수양대군 미화로 비판하기엔 정하연이 자신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실록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라 비판만 하긴 애매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개인사의 비극과 단종에 대한 죄책감에 처절히 몸부림치는 세조를 보자면 정하연은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실록에 묘사된 충성스럽고 자애로운 숙부를 취한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을 정도로 임동진이 연기한 세조 연기가 대단하기도 했다.

초반 시청률이 부진했던 원인은 크게 2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극의 내적 요소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증 차원이었다. 먼저 문종을 중심으로 한 조정대신들의 대사는 드라마가 아닌 연극 대사에 가까웠으며, 극의 분위기 또한 진중하다 못해 음침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화끈한 면모를 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던 주인공 수양대군은 너무 선하고 잔뜩 미화된 모습으로 그려진 데다가, 형 문종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아내 윤씨의 품에 안겨 울 정도로 정세를 살피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극초반부에 극의 한 축은 너무 음침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주인공으로 설정된 캐릭터는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까지 가만히 앉아서 눈물이나 찔찔 짜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다.

한편 상술했듯이 고증도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무엇보다 세조를 지나치게 미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조가 승하할 때 '세조가 세종대왕의 가장 뛰어난 아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까지 평하는 행각을 벌였으며, '경국대전 편찬', '호패법[8]', '중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 지향' 등 세조의 행적을 찬양하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악업이 더 커서 가려진다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내레이션을 아무리 들어 봐도 공정한 평가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이를 의식한 모양인지 1화부터 "세자(문종)의 인품과 능력이 어찌 수양대군만 못하겠습니까. 다만 병약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라고 양녕대군의 입을 빌려 문종의 능력이 세조보다 낮지 않음을 밝히긴 했으나 그 뒤의 전개와 묘사를 보면 다 부질없어 보일 정도로 세조 미화가 강하다.[9]

아이러니하게도 작중에서 미화된 세조의 모습이 아닌 실제 세조의 긍정적인 모습은 그다지 잘 다뤄지지도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 등 세조의 진짜 업적들을 제대로 다루었다면 모를까, 정작 그런 업적들은 내레이션으로만 나오고 계유정난 미화에 치중된 모습을 보여서 세조의 진짜 긍정적인 모습도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가족애를 제외하면 사실상 다루어지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 본작이 방영된 1998년~2000년이 세조가 계유정난과 별개로 왕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게 정설이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매우 역설적인 일이다.

사실 미화가 지나치다고 비판받은 것이지, 세조 역을 맡은 임동진의 열연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111회, 최후를 앞둔 장면에서는 꿈에서 단종이 "숙부님, 저와 같이 가요"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나오는 곳이 단종이 묻힌 곳. 그 앞에서 단종이 울면서 "추워요, 꺼내주세요"라고 하자, "홍위야! 내 조카가 이런 곳에 묻혀 있었단 말이냐! 내가 꺼내주마! 조금만 기다리거라!"하고 울부짖으면서 무덤을 파헤지는 장면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 그 밖에 단종 전문 배우 정태우는 아마도 생애 마지막으로 맡게 된 단종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이 드라마로 대상 수상의 영광을 누린 채시라의 열연 역시 뛰어났다.[10] 노회하면서도 능글맞은 한명회 역을 맡은 배우 최종원도 빼놓을 수 없으며, 왕실지상주의자 양녕대군을 맡은 신구의 연기나 근엄하면서도 왕실의 풍파에 회의를 느끼는 중견 배우 한혜숙의 모습도 괜찮은 편.

드라마의 평가 및 시청률이 상승한 것은 후반부에 이르러 인수대비로 주인공이 전환되고, 성종을 거쳐 연산군 대에 이르러 극중 긴장감이 올라가면서였다. 전개도 세조 대처럼 진득하게 끌지 않으면서 인물들 간 갈등구조가 더욱 첨예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 대신 이 때에는 연산군의 악행에 대해 지나치게 고어한 묘사로 인해 다른 의미에서 나쁜 평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서인지, 전작인 용의 눈물이 드라마가 끝나갈 때 즈음 거의 이견 없이 세간의 찬사를 불러모았던 것과 달리, <왕과 비>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가 대단원을 마친다' 식으로 보도되었다. 오늘날에도 <용의 눈물>[11]이 역대 최고의 사극 중 하나로 회자되는 것과 달리, <왕과 비>에 대해서는 '전작에 못 미치는 후속작' 정도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러한 기억이 이어진 것. 게다가 차기 작품인 후삼국시대를 다루면서 여러 네타를 남긴 태조 왕건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두 대작 사이에 끼어버린 작품이라는 미묘한 위치에 처해버렸다.

2.1. 작가의 의도(변호)와 그에 대한 반박

<신동아> 99년 3월호에 밝힌 정하연 작가의 의도(변호)는 흥미롭다. 작가는 세조를 지적인 악인, 즉 맥베스와 같은 인물로 상정한다. 또한 계유정난은 비교적 명분있는 정변, 그러나 왕위 찬탈은 권력에 대한 야욕의 발로로 후대에도 계속 댓가를 남기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관점에서 수양을 미화하는 듯한 대목은 사실은 수양의 위선을 부각하는 장치가 된다.
사실 수양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기 위해 드라마 초반기에 그의 주체적 움직임, 그리고 선한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이를테면 세인의 평처럼 세조(수양)를 미화한 것이죠. 그런데 드라마 초반기의 이런 장치가 세조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역사드라마들을 보면 수양대군에게는 변명거리가 있었죠.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한명회에 의해서 계유정난을 했고, 공신들이 밀어붙이니까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세조 자신은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주위에서 죽이라고 아우성치니까 동생인 금성대군이나 안평대군도 죽였고, 모두 이런 식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드라마는 수양이 주체입니다. 그가 교묘하게 공신들을 조정해서 왕위를 뺏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본다면 저는 수양대군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이 아니고 수양대군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고 봐야 정당합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수양은 선한 양의 탈을 쓰고 있다가 자기 본색을 드러낸 늑대인데, 단순히 수양대군을 미화했다고만 하니까 작가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고요

수양대군의 비극은 그가 지적(知的) 인간이란 점입니다. 사실 지적인 세조가 아니라면 보위를 찬탈한 뒤 사육신에게 그렇게까지 「아부」할 필요가 없었고, 종교를 찾아다니고, 자기가 왕위를 뺏은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냉정하게 얘기해 왕실에서 보면 단종이 혈통을 이어가든 수양대군이 혈통을 이어가든 모두 세종대왕의 혈통이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습니다.[12] 다만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생각하는 선비들 입장에서 볼 때 수양의 집권이 부도덕한 겁니다. 수양도 바로 그 점 때문에 고민했고 사육신을 회유하려 했지요.

수양대군이 멋있고 근사한 말을 많이 한 걸로 나오게 됐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 역시 수양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애쓰는 수양의 이면을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우리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수양대군이 나쁜 사람인데 좋은 사람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13] 그 사람들 나름대로 수양대군의 저런 점은 좋고 저런 점은 나쁘다라고 판단하고 보기 때문에 드라마가 가능합니다. 다만 혹시라도 그런 판단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드라마에서 빠진 부분을 지적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출처: KBS 「왕과 비」작가의 반론 - 王과 妃 그만둘 수 없는 세 가지 이유 #

그러나 한참 후에 집필한 인수대비에서는 세조 미화가 더더욱 심해진 걸 보면, 그냥 정하연 작가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집필한 탓인 걸 시청자들의 오해 탓으로 돌린 변명에 가깝다. 만약 실제 세조가 본작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선량한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계유정난 자체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설령 일어나더라도 최소한 세조가 일으킨 쿠데타는 아니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계유정난이 명분이 없는 정변이었다는 역사관이 주류가 되고 세조에 대해서도 명군이 아니라 업적이 있을 뿐인 암군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대다수가 된 2020년대 시점에서는 왕과 비 정도만 돼도 그냥 세조를 미화하는 역사 왜곡일 뿐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본 문단에 나온 정하연 작가의 의도(변호)는 그저 정하연 작가 자신의 세조 미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로 세조를 위선자로 묘사할 거였다면 세조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혼자 있을 때 추악한 본색을 드러내는 등 다른 사람들(정희왕후 등 세조가 진심으로 아꼈던 인물들 제외) 앞에서의 인간적인 모습 자체가 본색이 아닌 연기였다는 식의 묘사가 되어야 했으며, 그런 묘사 없이 세조를 본래 선한 인물이었으나 왕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카를 왕위에서 쫓아낸 비운의 인물로 일관성 있게 묘사한 본작은 그냥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일 뿐이다. 무엇보다 상술한 것처럼 세조가 승하할 때 '세조가 세종대왕의 가장 뛰어난 아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까지 평한 것만 봐도 세조를 지나치게 미화한 게 아니라는 정하연 작가의 주장은 말 그대로 정하연 작가 개인의 주장일 뿐 결코 대다수 시청자들의 입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만약 정말로 정하연 작가가 왕과 비에서 세조를 위선자로 묘사한 게 맞다면 왕과 비는 실제와 달리 세조의 긍정적인 면이 그다지 많이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세조를 위선자로 묘사했다는 평가가 대다수가 되었을 것이다.[14] 애초에 특정 인물을 미화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이 해당 인물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저 관점을 통해 다시 보면 기존에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복선 장면들이(비판자들의 입장에선 알리바이)가 철저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옹호론이 있다. 예를 들어 작중 세조는 즉위 후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감언을 늘어놓는데, 성삼문이 귀가해서는 아버지 성승과 함께 세조를 비판하며 귀를 씻는다는 것이다. 세조를 옹호하는 이가 보기엔 성삼문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고, 세조를 비판하는 이가 보기엔 본작의 미화와는 맞아 떨어지지 않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지적인 위선자'인 세조의 본질을 표현한 대표적 장면이고 이 장면 이외에도 그런 장면은 많다. 당대의 성리학은 '능력 있는 자가 통치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조가 설령 능력이 출중하고 학사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왕위를 찬탈할 자격이 생기지 않는다는 당대의 엄연한 도덕관을 부정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 관점에서는 세조가 실제 역사 속의 세조보다 관대하고 능력있는 인물일지라도 성리학의 근본을 깬 빌런이란 증거를 작중 계속 드러냈는데도, 집에 돌아가서라도 포악한 면모를 무조건 삽입해야 한다는 견해라면 직접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술한 문제점 탓에 세조를 미화한 게 아니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세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매우 나빠진 2020년대 시점에서는 바로 위의 평가조차도 관점에 따라서는 세조가 본인은 사육신을 온건하게 회유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육신을 숙청하게 된 것이라는 식의 미화[15]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세조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좋은 가장이었다는 건 세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부정하지 않지만, 세조가 단종에게까지 인간적인 인물이었다는 건 그저 본작의 역사 왜곡일 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세조를 지적인 위선자로 묘사할 거면 굳이 세조를 단종을 아끼던 착한 숙부로 미화할 필요도 없고 김종서와 혜빈 양씨를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릴 필요도 없으며 세조를 실제 역사 속의 세조보다 관대하고 능력있는 인물로 묘사할 필요도 없다. 설령 세조를 단종을 아끼던 착한 숙부로 묘사하더라도 그런 모습이 사실은 자신의 야망을 숨기기 위한 연기였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게 나았는데, 정작 본작은 그런 식의 묘사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세조가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묘사를 통해 세조가 진심으로 단종을 아꼈다는 식의 역사 왜곡을 범했으며 무엇보다 세조의 왕위 찬탈 자체를 조선 왕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므로 본작이 세조를 미화하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주장은 정하연 작가를 대변하는 말일 뿐 결코 시청자들의 입장을 고려한 말이 아니다. 본작을 시청했던 사람들 대다수의 본작에 대한 평가 중에서 세조를 지적인 위선자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찾아보기 힘든 건 괜히 그런 게 아닌 셈이다. 세조를 지적인 위선자로 묘사했다는 평가는 차라리 똑같이 계유정난을 소재로 했으면서 세조 미화 논란이 없었던 후대 사극들에 더 어울린다.

그리고 본작은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전혀 없어서 까인 게 아니다.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런 내용이 세조를 미화하는 내용을 가리지 못할 만큼 비중이 작으며, 반대로 세조를 미화하는 내용은 논란을 피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할 만큼 비중이 매우 커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이 후반부로 갈수록 원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 미화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무엇 때문이겠는가? 본작이 세조 미화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마찬가지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작은 전반부 기준으로 세조 미화와 세조 비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드라마가 된 셈이다. 세조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거라고 보기에는 세조 미화가 너무 심하고, 그렇다고 세조의 실제 긍정적인 면(경국대전 편찬 등의 여러 업적)을 제대로 다루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세조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세조를 옹호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다.

3. 극중 인물 묘사의 특이점

세조와 단종의 관계가 대단히 각별한 것으로 묘사된다. 36화에서는 종친부에서 숙직하며 책 읽다 자는 수양에게 단종이 웃으면서 호피를 덮어주는 모습이 나오고, 숙부가 깨기를 기다리다 잠든 단종에게 수양이 다시 호피를 덮어주는 모습과 함께 문종이 수양에게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약속하는 내용의 회상 신이 나온다. 그리고 수양이 단종을 업어서 대전으로 모시며, 그 와중에 단종이 깨는데 서로 나누는 대화가 숙부와 조카가 아니라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겹다. 이 작품만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지내고자 하는데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난리라 비극이 일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세조의 장자 도원군과 단종의 죽음의 순서가 뒤바뀌지 않고 제대로 나온 드라마이기도 하다.[16] 세자가 된 도원군이 사경을 헤매자 세조는 문종의 사당에 가서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비는데, 결국 도원군은 그대로 죽고 만다. 세조가 이에 빡쳐서 "형님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형님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결국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는 전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야사에 전해지는 현덕왕후와 세조의 관계를 어느 정도 담으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세조를 지나 성종 때의 인수대비 - 폐비 윤씨의 갈등이 심화되며 시청률이 올라가더니, 안재모연산군으로 열연한 마지막 부분은 시청률 톱 10에 들었고, 다른 부분들도 역덕후들이나 사극 매니아들에게는 정통 사극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수작. 결국 최고 시청률 44.3%를 찍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연산군이 폐위될 때 연산군이 웃으며 춤을 추는 등 미치광이처럼 묘사한 것도 볼 만 하며, 강화도로 유배를 간 뒤의 비참한 몰골과 최후를 비추면서 나레이션으로 "권력을 내려놓은 그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연산군이 사망하고 나서 그가 쓴 '용서'라는 글씨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드라마가 끝이 나는데, 마지막 나레이션에 문제가 있다.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고 운운한 것이 그것인데, 정작 작중에서는 연산군일기를 충실히 따라가며 일부 장면에서는 실록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끝맺음을 이리 한 것은 의아한 일. 더군다나 말 그대로 승자의 기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단종실록이나 세조실록의 내용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놓고 연산군일기만 승자 운운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작가가 수년 전에 썼던 <장녹수>에서는 "연산군은 폭군이 확실하나 그의 행적 중 일부는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정도로 평했었는데, 이때보다도 시각이 후퇴한 셈이다.[17]

물론 극중 연산군은 타 드라마에서 묘사된 연산군보다 훨씬 사이코스럽게 묘사되며, 그만큼 연산군이 놓는 깽판도 상당히 수위가 높게 묘사되는 것도 사실이다.[18] 그나마 드라마가 방영되었던 시기가 2000년이라서 망정이지, 요즘같은 2020년대에 지상파 드라마에서 저렇게 묘사되었다면 방통위에서 빼박 제동을 놓았을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가 한참 방영되었던 당시에도 "극중 묘사가 잔인하고 고어하다"고 비판이 꽤 나왔을 정도였으니...[19]

그러나 문제는 극 자체가 알게 모르게 이런 금수같은 연산군의 행동에 당위성을 실제 이상으로 부여해주려고 한다는 점이다. <왕과 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게 왕과 비 방영 당시 흔히 부정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사실은 이런 이유가 있었어’라는 식으로 재해석해서 대중의 관심과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게 유행이었고, 피 묻은 적삼 같은 스토리성 좋은 소재에 흑화 요소가 매력적인 것도 있어서 이 부분을 제대로 묘사하는 사극은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원래 손자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인수대비는 지나치게 냉혹하고 강포하게 묘사되어, 연산군을 어릴 적부터 기죽이고 즉위 후에도 사사건건 꼬장을 피우는 심술궂은 노인으로 나온다. 연산군이 나어린 시절부터 모친 폐비 윤씨의 죽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즉위 초기에 윤씨의 일로 밥을 한 끼 굶고 몇 년이 지나도록 별 일이 없었다는 묘사는 찾아볼 수가 없고, 적삼을 보고 급빡쳐서 타락하는 전개는 자극적이기에 거의 반드시 들어간다. 귀인 정씨귀인 엄씨가 폐비를 참소했다는 것이 연산군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는 점이나,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냈다가 쫓겨났다는 건 야사에 등장하는 설에 불과하고, 실제로 왕에 대한 온갖 막말과 히스테리가 심각하고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옹호 여론조차 커버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 등도 조명해 주지 않는다.

중전의 패악질에 질려 버려서 누구보다 폐비와 훗날의 사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다름아닌 성종 본인이었고 인수대비는 거기 결정적으로 관여하진 않았다는 면에서도 왜곡이다. 많은 면에서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게 유리한 쪽의 연출이 들어간 것이다. 이런 은근한 실드적 배경 묘사를 등에 업고 연산군은 온갖 잔인한 악행을 펼치면서도 툭하면 ‘이는 내 어머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뭘 하고 있었느냐’, ‘우리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어서 죽이기까지 했느냐’ 등 자기 행동을 당연하고 정당하다는 양 지껄여대기 일쑤. 때문에 현재까지도 <왕과 비>를 비롯한 연산군의 갑자사화 당시 폭정을 그린 사극 영상의 댓글에서는 "저럴만 했다", "나라도 저러겠다"는 이상한 감정론과 연산군 옹호, 동조가 많이 보이고 있다. 연산군의 잔혹함과 광기 등은 충실히 묘사됐지만 그럼에도 ‘총명했지만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 받고 타락해 버린 비운의 왕’ 같은 과분한 이미지를 뒤집어썼다는 점에선 세조에 버금가는 미화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의 용서 장면이나 승자의 기록 드립도 이같은 연출의 일환인 셈.

그러나 비록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점이 많다고 해도, 2010년대 이후에 제작되는 퓨전 사극들에 비하면 이 드라마는 고증이나 스토리는 대단히 뛰어난 편임은 부정할 수 없다.[20]

훈구파 내부의 갈등[21]도 이 작품에서 다루었다.

4. 등장인물

용의 눈물에 출연한 배우가 적지 않게 재등장했으며, 그 외에도 김갑수(권람), 신구(양녕대군), 최종원(한명회), 여운계(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 김성령(폐비 윤씨), 조경환(김종서), 한혜숙(정희왕후), 김형일(홍윤성) 등의 실력파 중견 배우들이 다수 투입되었다.

자세한 출연진은 왕과 비/등장인물 참고.

5. 오프닝


<왕과 비> 오프닝 곡. 전작인 용의 눈물과 같은 테마곡을 사용하였다.

6. 여담

조선의 국왕이 가장 많이 등장한 사극으로, 세종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8명[28]이 등장한다.

원래 제목은 <바람의 생애>였으나 일본 NHK 대하드라마꽃의 생애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왕조의 계단>으로 바뀌었다가 이것도 너무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지금의 것으로 낙착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시기다 보니 1분 촬영에 160만원을 들여서 비판받기도 했으며, 오프닝 테마곡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용의 눈물의 테마곡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29] 막판에 연산군이 깽판을 치며 피를 부르는 장면에선 망나니의 칼질과 함께 땅을 구르는 머리라든가 부관참시, 거열형 등 지상파에서 방영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들도 여과없이 방영되었는데, 연산군이 철퇴로 아버지의 후궁들을 직접 내려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모욕을 주자 아예 갈퀴 같은 것으로 얼굴을 쳐 살점이 너덜한 장면이 나온다.

당초 1999년 12월 말 끝낼 예정이었으나 후속작 태조 왕건의 담당 PD로 낙점된 김재형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인해 촬영에 차질을 빚게 되자[30] 2000년 3월에야 간신히 막을 내렸으며, 이 과정에서 <왕과 비>는 담당 PD 김종선이 <태조 왕건> 연출자로 발령되어 하차하는 대신 윤창범 연출로 변경됐다. 이 과정에서 성종의 즉위에서 막을 내리려던 계획도 틀어서 폐비 윤씨와 연산군이 등장하는 등 186회까지 연장되었지만 오히려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최고 시청률인 44.3%를 달성한 날도 바로 이 때였다. 보통 일부 인기 높은 드라마들이 무리하게 연장방송을 했다가 시청률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걸 고려하면 다소 특이한 사례. 막판에 높은 시청률로 히트를 친 만큼 드라마 종방 이후 종방연을 KBS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자사 드라마들 중 대중적으로 주목도나 시청률이 높았던 히트작 드라마들의 종방연의 경우 직접 사장까지 같이 참석하면서 KBS홀에서 열어주는 KBS의 관례를 생각하면 방송사 내에서도 나름 히트작으로 대우해준 듯 하다.[31]

중종반정으로 끝을 맺었는데, 이 드라마가 끝나고 11개월 후 옆옆동네에서는 중종반정이 첫 장면으로 나오는 여인천하가 방영을 시작했다. 만일 <여인천하>가 KBS에서 나왔더라면 KBS판 조선왕조 5백년이 완성되었을지 모를 일. 게다가 실제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채시라는 <여인천하>의 주인공 중 하나로 캐스팅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당시 임신 중이었던 탓에 고사했다. 종영 후 위성 채널 KBS KOREA와 케이블 채널 복지TV에서 재편성됐다.

2011년 12월, 종합편성채널로 개국한 JTBC가 개국특집으로 편성한 드라마 인수대비는 사실상 <왕과 비> 리메이크 버전이라는 평도 받는다. 채시라가 그대로 인수대비로 출연한 데다가 주요 장면의 구성이 본작과 매우 유사하고 극작가도 같기 때문.

용의 눈물처럼 아직 세트장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실제 서울의 고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서 주로 촬영되었는데, 경복궁만이 주로 나왔던 전작 때와 달리 창덕궁과 창경궁도 화면에 나온다는 건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에서 촬영할 당시 인정전 뜰에 LPG 가스통을 설치해놓고 야간 횃불 촬영을 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는데, 다행히 화재가 난 일은 없었지만 수많은 시민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고 국회 국정감사에서 질타를 받을 정도였다.[32] 결국 이 때를 기점으로 고궁에서 촬영하는 것은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점차 기피되기 시작했고, 문화재청에서도 촬영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기 시작했다. 이에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부터는 세트장이 적극 활용되기 시작하나, 워낙 수준이 떨어지는 촬영장이 많은지라 고궁에서 다시 사극이 촬영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BGM 중에서는 <한명회>나 <서궁>, <용의 눈물> 등에서 나왔던 것을 재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굳이 본작 뿐 아니라 <태조 왕건>이나 <명성황후> 등 이 당시 KBS 사극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던 특징이다.

7. KBS Drama Classic 연속 무료 스트리밍

186부나 되는 긴 호흡을 자랑하는 드라마이며, 용의 눈물과 태조 왕건 사이에 끼어있는 작품이다 보니 스트리밍에서 그렇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최고 시청자 수도 2,200명 정도에 불과하며 지금까지도 단 2회만 스트리밍 된 작품이다. 그 시작도 용의 눈물에 비해서 몇 달 늦은 2021년 5월이 되어서야 첫 스타트를 끊었다.

비슷한 시대를 다룬 용의 눈물에 비해서도 최고 시청자 수가 절반 정도에 불과한데 결정적인 이유는 궁중의 암투와 정치 싸움 등을 다루고 있는 작품적 특성도 있지만, 2020년대 대중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수양대군(세조)를 미화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방영 당시에도 세조 미화 논란의 지적은 있었지만 현재 들어와서는 그 비판 여론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 지금 기준에서 용납하기가 힘든 작품의 특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문종~연산군의 긴 시대를 186회나 되는 긴 호흡을 다루고 있는데 후삼국 시대의 긴 호흡을 200회로 다루고 있지만, 워낙 격동의 시대이기도 하고 전투신과 다양한 드립거리가 많아 어느 장면에서도 재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후속작 태조 왕건과 달리 재미를 끌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이 186회라는 긴 분량을 끌고 간 왕과 비는 이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가장 최후반부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광기 어린 연기가 있는 부분에서만 잠시 시청자 수의 상승 효과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시청자 수가 상승될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해당 스트리밍 채팅 중 흥했던 별명, 드립은 아래와 같다.


[1] 후속작 연출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중도 하차했다.[2] 드라마 마지막화 크레딧에서도 출연진 목록에 첫번째 임동진 다음으로 채시라가 적혀있다. 드라마에서 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알 수있는 부분. 덤으로 3번째는 연산군 역의 안재모.[3] 정작 김종서혜빈 양씨 등 극중 부정적 인물들을 표현할 때에는 실록에도 없는 악행들을 창작하여 깎아내린다.[4] 단종실록은 왕위 찬탈의 주역들이 쓴 것이라 세조를 미화하다 못해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내용까지 간간이 있을 정도라, 반드시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하며 읽어야 한다. 애초에 편찬될 때 노산군일기라는 제목으로 편찬된 실록인 만큼, 그 내용이 어떤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한마디로 정리되는 수준. 사실 단종실록이라는 제목도 훗날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켰을 때 겉표지만 바꾼 것이고, 내용을 여러 보면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 수양대군은 세조라고 되어 있다.[5] 단종을 옹위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언행도 주저없이 한다는 점이 크다. 다만 이런 행보는 단종에게 나름대로 충성을 바치기 위함이라는 점은 계속해서 강조되며, 살해당한 후 나오는 나레이션은 "김종서, 그는 만고의 충신이다."로 마무리된다. 다만 문종수양대군 앞에서는 김종서를 의심하고 김종서 앞에서는 수양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후에도 김종서의 캐릭터가 전형적인 '충신 명재상'과는 거리가 멀어 눈에 잘 안 보일 뿐. 완성된 살생부를 살피던 수양대군도 "김종서의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뉘앙스의 촌평을 남겼다.[6] 다만 한명회는 악역에 가까우면서도 어느 정도 간웅의 이미지를 보여줬고[79] 홍윤성은 다소 악역이면서도 어느 정도 인수대비를 편드는 등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7] 참고로 같은 정하연 작가의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인수대비의 성격이 본작보다 더 순화되었고 시어머니인 정희왕후는 반대로 본작보다 더 냉혹한 인물로 나온다.[8] 그러나 당시 백성들에게는 악법으로 취급되었다.[9] 결과적으로 FM스러운 3년상을 치르고 과로하다 건강을 헤쳐 단명하긴 했지만, 문종은 생전에 풍채도 당당하고 능력이나 인품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종 말년 7년간은 대리청정하며 사실상 왕노릇을 하였고, 그 기간동안 업적도 화려했다. 세자 시절 그는 3살 어린 동생 따위와 비교될 일이 전혀 없는 확고부동한 후계자였다. "수양대군만 못하겠는가"는 애초에 수양의 능력이 세자보다 최소한 못하진 않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얘기인데, 정통성이건 능력이건 비교도 되지 않는 세자를,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왕자 중 하나에 불과한 수양대군과 저렇게 비교를 했을 리가 없다.[10] 40대 이상의 경우 인수대비 하면 고두심반효정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30대부턴 채시라를 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채시라는 15년 후 JTBC에서 제작한 인수대비에서 또 다시 인수대비 역으로 좋은 연기를 선보인다.[11] 아이러니하게도 1996년 용의 눈물의 제작이 결정났을 때 원래 대본집필 작가로 낙점되었던 이가 이 정하연 작가였다. 하지만 이당시 정하연조광조의 대본을 한참 집필 중에 있었기때문에 동시에 두 드라마의 대본을 한꺼번에 집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도중에 하차하고 이환경이 대타로 들어가게 된 것.[12] 이 말 자체가 단종의 정통성을 과소평가하고 세조의 정통성을 과대평가하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13] 이 말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게, 애초에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집필 자체가 작가의 책임이다. 따라서 자신이 그런 식으로 집필했으면서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은 시청자들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식의 비판도 가능하다.[14] 그런 식의 평가를 받은 계유정난 관련 사극들은 공주의 남자, 관상 같이 세조를 미화 없이 악역으로 묘사했다는 평가가 절대다수인 사극들이다.[15] 애초에 본작이 세조를 미화한 사극이라는 증거는 상술한 것처럼 그야말로 차고 넘친다는 걸 감안하면, 세조의 감언을 들은 성삼문이 귀가 후 세조를 비판하며 귀를 씻는 묘사조차도 정하연 작가가 본작을 통해 세조를 비판하려고 했다기보다 그냥 사육신이 세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본작에서 반영한 것에 가깝다.[16] 본작 이외에 도원군이 먼저 승하한 것으로 묘사한 작품으로는 한명회가 있다. 작품성은 내려놓고 고증만 보면 이쪽이 본작보다 여러 모로 우수한 편. 공주의 남자 같은 경우 세조의 묘사는 이 작품들보다 훨씬 정확하나, 도원군보다 노산군이 먼저 승하한 것으로 그렸다.[17] 다만 작중에서는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일을 주도한 인수대비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기는 했지만 연산군의 폭정도 충분히 묘사했는데, 그래 놓고서 이런 나레이션을 띄우니 더욱 어색하다. 왜 '승자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 것도 아니고 그냥 '승자의 기록이다' 한 마디만 뱉으니 더더욱.[18] 연산군이 미쳐 날뛰며 칼을 휘두르면서 이미 죽은 인수대비의 환상을 보고 복부를 칼로 찌른다. (실제로는 내시가 대신 죽었는데, 극중에서 성인 연산군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를 모시는 인물로 바로 그 김자원이다.) 그리고 미친 듯 광소하며 "내가 할머니를 죽였습니다! 할머니를 죽인 천하의 불효자가 됐습니다!"라고 울부짖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물론 인수대비는 이미 고인이긴 했지만, 환상이나마 본인의 친할머니를 죽이려고 칼을 찌르고, 그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웃는 모습은 가감없는 사이코 그 자체다.[19] 가령 참수를 할 때 카메라에 피가 튀기는 듯한 연출을 하고 밀랍으로 만든 수급이 뒹구는 모습을 보여주며, 고문 도구로 사람의 뺨을 후려치고 나서 상처가 생긴 모습을 여과 없이 묘사한다.[20] 오히려 역대 한국 사극조선왕조실록의 반영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다만 당대에도 왜곡이 많다고 까인 단종실록세조실록의 내용을 필터링없이 그대로 반영해버린 바람에 결과적으로 역사 왜곡이 많다고 까이게 된 셈.[21] 세조 시기 정난공신계와 집현전계, 예종 시기 구공신과 신공신, 성종 시기 성종 친위 세력과 기존 공신 세력, 연산군 시기 부중파와 궁중파.[22] 1994년작 사극 한명회에서도 단종을 맡은 바 있다.[23]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젊었을 시절의 세종 역을 맡았다. 두 드라마 모두 막판의 주연을 맡았다는게 특징이다 안재모가 아래의 송재호가 되고 그 5대손인 연산군으로 환생한다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24]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민제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 성종대 인물 홍응도 맡아 1인 2역.[25]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안재모가 맡았다.[26]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황희 역을 맡았다.[27]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하륜 역을 맡았다.[28] 추존왕 덕종까지 포함하면 실직적으로는 9명.[29] 본작이 기획된 이유도 <용의 눈물>의 후속작으로 박정희 시대나 삼별초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제작하려고 했는데, 복장과 세트를 새로 제작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지라 이전에 썼던 세트와 복장을 재활용할 수 있는 조선 초기 사극이 채택된 것이었다. 만약 삼별초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제작이 성사되었다면 태조 왕건이 아니라 해당 사극이 최초로 고려시대(여말선초 제외)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30] 1996년 8월부터 1998년 5월까지 용의 눈물 촬영 당시 조연급 탤런트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 탓인지 1999년 8월 19일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결국 <태조 왕건> 연출 명단에서 손을 떼야 했으며, 1999년 11월 26일 서울지검으로부터 징역 2년, 추징금 1,612만원이 구형되었다. 김재형 PD는 그 이후 타 방송사로 처음 옮겨 연출했던 SBS 여인천하로 재기에 성공했다.[31] 전작 용의 눈물도 마찬가지로 종방연을 KBS에서 개최했고, 당시 국회 문광위 소속이었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도 <용의 눈물>의 종방연에 참석하기도 했다.[32] 이 당시 KBS는 지금보다 공영방송 성격이 훨씬 강했던 방송국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물론 공영방송이긴 하지만 최근 행보들을 보면 글쎄... 특히 수신료로 제작되던 대하드라마의 경우 국감에서 제작 과정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후속작 태조 왕건의 경우도 강신성일 당시 한나라당 의원으로부터 "제작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33] 만약 실제 역사의 세조가 왕과 비에서의 묘사처럼 매우 선량한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계유정난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설령 계유정난이 일어나더라도 세조 본인이 아닌 다른 왕족이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대체역사에서 세조는 실제 역사의 금성대군처럼 단종을 지키다가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을 수도 있다.[34] 실제로도 연산군은 말년에 타락하지만 않았으면 아버지인 성종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괜찮은 군주가 되었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다.[35] 스트리밍 종료 당시 기준[36] 본 작품에서 유독 눈물을 많이 흘리고 유약한 모습이 많이 비추는데, 그 모습이 전우에서 비슷한 성향을 보인 천성일과 유사하며, 이를 두고 천성일 전생편이라는 의견이 나왔다.[37] 한명회에서 김종서를 연기했다.[38] 워낙 미화가 심하게 된지라 작중 행적이 시청자들에게 쇼로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39]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등창에 걸린 견훤과 유사하여 생긴 별명[40] 단종이 수양을 부르는 호칭인 수양숙부의 몬데그린[41] 하차했으나 오프닝에 계속 등장[42] 수양대군 못지않게 쇼로 느껴지는 행위를 많이하여 생긴 별명. 특히 대비전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연산군을 안으로 들여 눈물쇼를 하다 슬쩍 고개돌려 연산군의 눈치를 살피는 장면에서 많은 시청자들이 뿜었다.[43] 수빈 한씨를 이름화시킨 별명[44] 138~139회 말미에 에코가 들어간 웃음장면이 나오자 공포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하며 생긴 별명[45] 안재모의 연산군과 왕과 비의 후속작인 태조 왕건궁예가 합체(??)해서 야인시대김두한이 탄생하였다(...)는 드립이 있다.[46] 드라마 초반부 문종 치세에도 이미 노년의 연령이였음에도 동생의 증손인 성종의 치세 때까지 등장할 정도로 장수하기 때문. 드라마에서 효령대군이 등장할 때마다 "아직도 살아있냐"는 반응이 많다[47] 실제 효령대군은 1486년 6월 (성종 17년)에 만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이성계, 큰아버지 이방과, 아버지 이방원, 동생 세종, 첫째 조카 문종, 종손 단종, 둘째 조카 세조, 종손 예종, 종증손 성종의 치세까지 살았다.[48] 즉위하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종현손 (자신의 동생의 손자의 손자) 연산군까지 봤다. 만약, 효령대군이 1년 10개월을 더 살았다면 또 다른 종현손 중종까지 볼 수도 있었다.[49] 모래시계에서의 역할[50] 공주의 남자에서 홍수현이 경혜공주 역을 연기함.[51] <공주의 남자>에서 이민우가 영양위 역을 연기함.[52] 불교신자인 정희왕후가 나무관세음보살 대사를 자주 쳐서 생긴 별명[53] 본래는 구성군으로 불리는 것이 맞다.[54] 용의 눈물에서 어린 양녕대군을 맡음.[55] ‘풀네임’은 스모프 양념통닭좌로 불리며 해당 배우가 광고에 출연했기 때문에 이 별명이 붙은 모양이다.[56] 이 역할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왕과 나에서 오만석이 이 역할을 맡음.[57] <신사의 품격>에서 맡았던 역할[58] 귀인 엄씨와 함께 젓갈듀오로 불림.[59] 귀인 정씨와 함께 젓갈듀오로 불림.[60] 매번 웃고 시작해서 그렇다. 오프닝에서도 웃는다.[61] 극 중에서 하도 웃어대니까 시간탐험대에 등장하는 램프의 바바와 비교되곤 한다. 램프의 바바도 시도 때도 없이 웃어댄다.[62] 배우가 2021년에 칭따오 맥주 광고에 출연했다.[63] 동네 건달에서 수양대군의 반정공신이 되어 예종때 영의정까지 올라간 홍윤성의 인생을 런닝맨에서 나온 용어인 깡패에서 대상까지를 인용하여 사용한 별명.[64] 실제 배우 채시라의 동생이다.[65] 이개의 자가 청보라서 붙은 별명.[66] 한명회에서 권람 역을 맡았다.[67] 공주의 남자에서 송종호가 신면 역을 연기함.[68] 본작 1~2회에서 세종대왕 역으로 특별출연한 적이 있다.[69] 연산군 재위 이후 인수대비가 장악한 정국을 뒤집기 위해 암약하는 유자광과 임사홍을 묶어서 혁명전사모임이라고 부른다.[70] 해당 배우가 1987년에 고향만두 광고 출연했었기 때문.[71] 연산군과 박원종의 조우에서 김두한과 정진영의 만남이라는 드립이 등장했다.[72] 중종 반정을 일으키고 반정에 성공하는 행보로 볼때 어쩌면 이 인물에 어울리는 별칭이기도 하다.[73] 작품 초반부에서 허후로 출연하였다.[74] 작품 초중반부에서 권자신으로 출연하였다.[75] 공주의 남자에서 정희왕후 역을 맡았다.[76] 장녹수가 받은 벼슬인 숙원을 붙인 장숙원의 몬데그린.[77] 김종서 역의 조경환은 삼국기에서 연개소문을, 전균 역의 김진태는 대조영에서 연개소문을 맡음.[78] 수양대군 역의 임동진은 한명회에서 김종서를 맡았다.

[79] 오랫동안 개성의 경덕궁지기로 가난하게 살다가 도원군부인이었던 인수대비가 쌀과 값비싼 재물들을 하사해줬는데 하사받은 쌀과 재물들을 자신의 수하들에게 죄다 나눠줘버려 이 때문에 집안 창고가 다시 텅텅 비게 되고 아내 민씨에게 잔소리까지 들었을 정도. 그만큼 권력을 가질 수 있다면 이깟 재물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명회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