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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정현왕후 능침 | |||
출생 | 1462년 7월 30일(음력 6월 25일) | ||
조선 충청도 청주목 신창현 관아 (現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 |||
사망 | 1530년 9월 23일(음력 8월 22일) (향년 68세)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정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능묘 | 선릉(宣陵) | ||
재위기간 | 조선 숙의 | ||
1473년 7월 17일 ~ 1480년 12월 18일 | |||
조선 왕비 | |||
1480년 12월 18일 ~ 1495년 1월 30일 | |||
조선 왕대비 | |||
1495년 2월 3일 ~ 1530년 9월 2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파평 윤씨 | |
휘 | 창년(昌年)[1] | ||
부모 | 부친 영원부원군 윤호 (鈴原府院君 尹壕, 1424 ~ 1496) 모친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1421 ~ 1500) | ||
형제자매 | 2남 1녀 중 장녀 | ||
배우자 | 성종 | ||
자녀 | 1남 1녀 (1남 3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봉작 | 숙의(淑儀) → 왕비(王妃) →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 ||
전호 | 효경전(孝敬殿) | ||
존호 | 자순화혜(慈順和惠) | ||
휘호 | 소의흠숙(昭懿欽淑) | ||
시호 | 정현왕후(貞顯王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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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3번째 왕비이자 계비로서,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모후이며 인종과 명종의 친할머니이자, 순회세자와 선조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또한 조선의 역대 왕비 중 후궁 출신으로 중전에 올라[3] 왕대비가 된 단 두 사람 중 하나이다.[4] 왕권이 약했던 초반 중종을 지탱하고, 생모를 잃은 세자 시절 인종의 가장 큰 뒷 배경이 됐다. 생애 마지막 십여 년은 며느리 문정왕후와 파워게임을 벌이는 기염을 토했다.2. 생애
2.1. 숙의 시절
영원부원군 윤호와 부부인 전씨의 딸로 태어났다. 윤호는 좌명공신 윤곤의 손자로, 윤곤은 한명회에게 고모부가 되고, 정희왕후의 5촌 당숙이다.[5] 이러한 배경으로 간택후궁으로 뽑혀 입궁했다. 그러나 중전 윤씨가 폐서인된 후 1480년(성종 11년),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의 많은 후궁들 중에서 정현왕후만한 명문가 출신이 없었고, 당시엔 딸 하나를 낳아 생산능력도 입증했으며 중종은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6] 새 왕비 후보로 1순위나 다름없었다. 왕비로 책봉됐을 당시 정현왕후의 나이는 19살이었다.2.2. 왕비 시절
성종의 계비가 되어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을 친아들 보는 것처럼 친히 돌보았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왕이 된 후에야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임을 알았다고 한다.1488년(성종 19년), 진성대군을 낳았다.
2.3. 왕대비 시절
연산군이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당시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왕대비전 앞까지 쳐들어와 밖으로 나오라고 칼을 들고 소리를 질러댔다. 정현왕후는 두려워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정현왕후가 후궁인 숙의였을 당시 폐비 윤씨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시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임을 제외하면 자녀로는 딸 순숙공주밖에 없었고, 또한 폐비 윤씨가 폐출될 당시 18살, 왕비로 책봉될 당시 19살, 폐비가 사사될 당시 21살이었는데 영향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아니면 그냥 어머니의 자리를 대체한 사람에 대한 화풀이였을 수도 있다. 이때 말고는 연산군이 자순대비를 해하려 한 기록이 없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이날 연산군은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동이 오락가락한다. 예를 들어 이세좌와 그 친인척들에 관련해서도 유배를 명령했다가 갑자기 도로 불러들여 장을 쳐서 다시 유배보내게 하는 등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인다.
다행히 중전 신씨가 뒤쫓아 나와 간곡히 말려서 연산군이 물러났다.
사실 평소 연산군은 자순대비에게 잘해 주었다. 갑자사화 이전에도 자순대비의 부탁을 받아 한양내에 있는 봉은사에 전답을 시주하였고,[7] 자순대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했다.[8] 갑자사화 대비전에 많은 예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번 실려 있으며 '자순화혜왕대비'라는 존호도 올렸다.[9] 1505년(연산군 11년), 5월 5일 올린 잔칫상은 밀가루가 40여 석이나 들었고 채화를 꽂고 금은으로 꾸며서 정교함과 화려함을 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국가가 덕을 쌓은 지 백년에 깊고 두터운 은택이 민심을 흡족하게 하여, 만세토록 뽑히지 않을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크게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잃어 민심이 흩어진 것이 마치 도탄에 떨어진 듯하다.
대소 신료가 모두 종사(宗社)를 중히 여겨 폐립(廢立)의 일로 와서 아뢰기를, ‘진성 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은 일찍부터 인덕(仁德)이 있어 민심이 쏠리고 있으니, 모두 추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에 통용되는 의리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진성을 사저(私邸)에서 맞아다가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하고 전왕은 폐하여 교동(喬桐)에 안치하게 하노라.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지고, 종사가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평안하여지니, 국가의 경사스러움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랴?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중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교서
대소 신료가 모두 종사(宗社)를 중히 여겨 폐립(廢立)의 일로 와서 아뢰기를, ‘진성 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은 일찍부터 인덕(仁德)이 있어 민심이 쏠리고 있으니, 모두 추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에 통용되는 의리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진성을 사저(私邸)에서 맞아다가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하고 전왕은 폐하여 교동(喬桐)에 안치하게 하노라.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지고, 종사가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평안하여지니, 국가의 경사스러움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랴?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중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교서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아들 진성대군이 왕위에 옹립되자 "진성대군이 아직 어려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찌 나라를 이끌 수 있겠소"라며
새 임금이 왕위에 올랐지만 대왕대비로 승격되지 않고 왕대비였다. 정현왕후가 중종의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연산군의 비였던 신씨도 폐위되어 왕대비 자리에 새로 오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며느리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문정왕후는 명종의 모후임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로 승격되었다.
중종 시절에는 왕후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문정왕후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내명부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큰어른이었고, 연산군 시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연산군일기를 보면 생일마다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의 모습인데, 중종실록을 보면 승정원에서 알아서 정현왕후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고 정치적 조언을 듣는 상황이 자주 언급된다. 심지어 본인이 죽었을 때 아들 중종과 손자 인종은 기력이 약하니 무조건 유교식 FM대로 하지 말고 상황 봐서 적당히 조절하라고# 미리 조언을 주기도 했다.[11] 참고로 이건 별세하기 8년 전 이야기. 승하 10년 전부터 지병인 천식과 담질환(심장질환)으로 오랫동안 시달렸다.
1527년(중종 22년), 작서의 변 때는 경빈 박씨의 장녀 혜순옹주(惠順翁主)의 여종들을 조사해서 일부를 내쫓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저주한 범인으로 "경빈 박씨가 유력한 용의자이니 조사해야 한다"는 요지로 글을 써서 아들 중종에게 보낸 적이 있다.
1530년(중종 25년), 69세 나이에 천식과 노환으로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 사후 남편 성종이 묻혀 있는 선릉(宣陵)에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묻혔다. 그런데 지금 정현왕후의 시신은 선릉에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아들의 능인 정릉과 함께 도굴당했기 때문. 한양 수복 이후 파헤쳐진 선정릉을 수습했는데 선릉에서는 잿더미만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 선릉은 새로 지어올린 의복만 묻힌 허묘다.
- 정현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인 윤삼산(尹三山)은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6촌 관계이며, 성종과 정현왕후는 윤척(尹陟)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지간이다.
4. 가계
- 시가(전주 이씨)
- 배우자 / 슬하 자녀
5. 대중매체에서
정현왕후가 살아온 시대는 조선 왕실사의 격동기였다. 시어머니가 인수대비, 의붓아들이 연산군, 며느리가 문정왕후니 말 다했다. 그래서 주연으로는 안 나오더라도 조연으로는 꾸준히 나온다. 대체로 온화한 성품이라 폐비 윤씨나 인수대비, 문정왕후 같은 강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에 비해 병풍이 되기 쉬워 보이지만, 어린 연산군에게 생모가 폐비 윤씨인 걸 숨기고 정현왕후가 어머니인 거로 한다거나, 중종반정을 추인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조용하게라도 존재감은 드러낸다. 연산군과의 관계는 정현왕후의 성품을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연산군을 아끼는 모습으로 나온다.특이한 점은, 사극에서는 한번도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이 같이 나온 적이 없단 거다. 연산군대와 중종대가 분위기상 하도 따로 노는 시대라, 정현왕후의 삶은 항상 반토막으로 나온다. 성종~연산대 사극을 보다가 중종대 사극을 보면 "저 사람이 저 사람이야?"라고 생각될 정도. 앞서 말했듯이 젊은 시절에는 후궁이었고 노년 시절에는 왕대비였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가 더욱 어렵다. 실제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일기에서 기록된 정현왕후는 왕실에서 연산군의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에 가까운데, 중종반정 이후에는 중종도 갈팡질팡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 대신들이 조언을 받으러 대비전을 가끔 찾아오는 기록이 종종 있다.
왕대비 시절을 묘사하는 대중매체에서는 보통 정현왕후보다는 자순대비의 호칭으로 등장한다.
《설중매》의 정현왕후 | 《풍란》의 정현왕후 |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의 3탄 《설중매》와 4탄 《풍란》에서는 배우 최명길[16]이 연기했다. 《설중매》에서는 숙의 시절부터 인수대비의 사망(왕대비 시절)까지 나오는데 조용하고 현숙한 이미지로 묘사되었으며 연산군(임영규)이 갑자사화를 거쳐 흑화한 이후로는 연산군을 걱정하면서도 굉장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1985년 방영한 《풍란》에서는 중종반정 이후의 정현왕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왕실 최고 어른으로 이따금 중종(최상훈) 내외에게 문안을 받는 장면으로 간간히 등장하나 일찍 친어머니를 잃은 세자의 배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김안로(김길호)에게 작은 힘이나마 실어주는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비록 두 작품에 걸쳤지만 역사상 정현왕후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배우가 연기한 유일한 케이스. 그래서 앞서 말한 이미지 갭이 좀 떨어진다. 최명길이 20대 시절에 맡은 배역이다 보니, 《풍란》에 나오는 늙은 정현왕후를 기준으로 해도 최명길이 한참 후에 맡은 《용의 눈물》과 《대왕 세종》의 원경왕후 및 《명성황후》의 중년 명성황후 그리고 《근초고왕》의 해비 해소술에 비하면 나이들었다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조광조》의 정현왕후 |
《왕과 비》의 정현왕후 |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윤지숙이 연기했다. 숙의 시절부터 등장. 연산군(안재모)을 많이 위해주고 중종반정 후에도 연산군을 폐주가 아닌 선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산군이 자신의 친아들 진성대군을 화풀이 삼아 여러모로 내리갈굼을 많이 하자 불똥이 튀길까 두려워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여인천하》의 정현왕후 |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이보희가 연기했다. 기존 사극에서의 정현왕후는 착하고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였으나 자애롭고도 강단있는 인물로 나온다.[17] 천하의 문정왕후(전인화)도 극 초반부에는 시어머니 정현왕후에게 크게 혼이 나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문정왕후를 많이 도와준다. 극 초반에는 문정왕후와 대립하는 경빈 박씨(도지원)를 총애하나 경빈이 아들인 복성군(안홍진)에게 건네준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의 존재를 알게 되고[18] 과거 갑자사화에 트라우마가 있는 정현왕후는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 경빈의 적으로 돌변한다.[19] 경빈의 적이 됨은 정현왕후 역시 후궁 출신으로 내명부의 암투가 왕실과 조정에 얼마나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너무도 똑똑히 봤고 기억하기 때문. 이후 경빈이 사사당할 때 가장 앞장서서 중종(최종환)에게 경빈의 사사를 주장했으며 중종이 극구 거부하자[20] 그 충격으로 몸져 누워 얼마 안가 사망한다. 같은 시기 경빈도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어찌보면 동귀어진.
대비 (극 초반) | 대비 (극 후반) |
-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배우 엄유신[21]이 연기했다. 중종(임호)의 치세에만 나오기 때문에 《여인천하》와 마찬가지로 자순대비의 신분으로 나온다. 스토리상으로는 의도치 않게 악역을 도와주어 장금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인물. 본인은 올곧고 흠잡을데 없는 성품이나 가까이 두고 있는 대신이나 상궁들이 오겸호(조경환)나 최 상궁(견미리), 전 제조상궁 박 상궁(박정수) 같은 사람들인지라 은연 중에 장금(이영애)과 한 상궁(양미경)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금이 궁녀가 되기 위한 시험에서 진가루(밀가루)를 잃어버려[22] 숭(배추)으로 만두를 만드는데 상궁들은 장금이 정해진 재료로 만두를 만들지 않았다며 탈락시키지만 숭채만두를 본 정현왕후가 장금을 선발하라고 명한다. 이후 최고상궁 경합 1차전에서 장금이 꼼수를 쓴 탓에 한 상궁이 패배하자 한 상궁을 좋지 않게 보았지만 명나라 사신 접대 사건을 문정왕후(박정숙 분)에게서 전해듣자 제조상궁과 최 상궁을 꾸짖고 2차전은 한 상궁이 이겼다고 선포한다. 3차전에서는 중종의 뜻을 따라 엉겁결에 한 상궁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이후 최 상궁 등이 반발하자 후회하는 모습을 내비쳤고 결국 문정왕후에게 내명부 권한을 위임한다. 장금이 의녀가 되었을 무렵 이러저러한 일로 중종과 대립하면서[23] 치료를 거부하다가 장금이 나서서 수수께끼를 빙자한 설득으로 치료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앞서 치료를 거부한 탓에 몸이 허약해져서 탕약을 마실 수 없었고 그런 정현왕후에게 장금은 자순대비가 싫어하는 마늘로 만든 환을 올린다. 뒤에 열이(이세은)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윗전에 알렸으나 이미 환약으로 병세에 차도가 생겼던 시점이라 크게 화를 내지는 않고 장금에게 어떻게 마늘 맛을 감췄는지를 물은 뒤 편식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후 오겸호, 최 상궁 일파의 악행이 밝혀지면서 이들과 학을 떼지만 중종이 장금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자 당시 임신 중이었던 연생(박은혜)이 장금과 중종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이유로 꾸짖어서 조산 + 생명의 위기를 겪게 하였고 급기야는 석고대죄를 시전하여 결국 중종이 명령을 철회하게 한다. 그 이후로도 중종이 장금에게 종종 심리 상담을 받자 그 뜻을 오해한 자순대비는 "그럴 것이라면 장금을 후궁으로 삼으라"고 중종과 문정왕후를 압박한다.
《왕과 나》의 정현왕후 |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이진[24]이 연기했다. '윤숙현'이라는 가상의 이름[25]으로 숙의 시절부터 중종반정 전까지 나온다. 매우 선량하며 친아들이 아닌 연산군에게도 따뜻하게 대한다.[26] 숙의 시절부터 자신의 윗전인 폐비 윤씨를 누구보다도 공경하였으며 다른 후궁들이 폐비 윤씨의 폐위를 간청할 때 혼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폐비 윤씨를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성종의 후궁들 중 가장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불이익을 감수하는 태도를 보인 덕분에 결과적으로 윗전 대비들로부터 새 중전으로 낙점된다.
《역적》의 정현왕후 |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김경화[27]가 연기했다.
《7일의 왕비》의 정현왕후 |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도지원[28]이 연기했다. 주인공인 7일의 왕비 단경왕후를 며느리로 둔 역할이기 때문에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분량이 많다. 보통 연산군을 아끼고 사랑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부분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연산군(이동건)과 약간의 애증 관계라고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정현왕후를 그린 대부분의 대중매체에서도 정현왕후는 연산군과 그다지 적대관계가 아니고 중종 즉위에도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연산군과 적대관계인데다 중종 반정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듯한 역할로 나왔다. 그래서 역사왜곡 논란이 있었다.
6. 참고 문서
[1] 《중종실록》 -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新昌) 현감으로 있을 때인 1522년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2] 작호는 진성대군(晉城大君).[3] 조선의 역대 왕비 중 후궁 출신 왕비는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세자빈이 된 후에 사망해서 이후 왕비로 추존된 문종비 현덕왕후,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즉위 후 왕비가 된 예종비 안순왕후, 성종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 숙종비 희빈 장씨가 있다.[4] 나머지 1명은 예종의 세자 시절 후궁이었다가 왕비, 왕대비까지 오른 안순왕후 한씨. 다만 안순왕후는 부군 예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왕대비가 된 후 사망할 때까지 시어머니와 형님에게 서열이 밀렸고, 아들 제안대군은 어렸던 바람에 시조카 성종에게 왕위가 옮겨간 반면, 정현왕후는 성종의 왕비들 중 가장 마지막에 왕비가 되었지만 15년 동안 왕비 자리에 있었다. (공혜왕후는 4년, 폐비 윤씨는 3년간 왕비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으로 친아들이 왕이 되었을뿐더러 연산군 재위 후반~중종 시절까지 왕실의 가장 큰어른이었다.[5] 즉, 윤호는 정희왕후의 7촌 조카이다.[6] 중종을 빨리 낳았다면 서자가 적자로 바뀌는 상황이라 질서가 깨졌으므로 왕비가 못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숙종 때에는 후궁 시절 먼저 아들을 낳고 뒤에 왕비에 오른 희빈 장씨가 있지만 희빈 장씨 소생 왕자 외에는 아들이 없었고 이미 원자로 책봉되어 차기 왕위계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로 인해 경종이 적자냐 서자냐를 두고 정통성이 애매해져서 복잡해질 뻔 했으나, 희빈 장씨가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뒤 후궁 신분으로 죽으면서 추후 경종은 노론계 신하들에 의해 서자로 기록된다.[7] 연산 7년(1501) 3월 17일.[8] 연산 9년(1503) 7월 14일.[9] 연산 11년(1505) 8월 26일.[10] 여인천하에서 이 대사가 그대로 나왔다. 다만 여기서는 진심으로 연산군의 폐위를 슬퍼하였다.[11] 태종이 세종대왕보고 본인 상중에는 고기(육류)를 먹으라고 조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12] 을사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3]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14] 을사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5] 《성종대왕묘지문》에서 정현왕후의 소생으로는 아들 중종만 언급되는 걸 보면, 1494년(성종 25년) 12월 이전에는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6] 이 때 며느리 문정왕후는 배우 김혜자가 연기했는데 최명길(1962년생)이 김혜자(1941년생)의 딸뻘인데도 시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최명길과 김혜자 둘 다 원로배우이지만 당시에는 최명길이 김혜자와 달리 20대 젊은 여배우라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캐스팅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2020년대에 비해 중장년 이상 연령대 배우의 수가 적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7] 이미지가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이전 사극에서는 죄다 후궁~왕비 시절이었지만 <여인천하>에서는 왕대비 시절이기 때문. 그래서 여기서는 자순대비라는 칭호로만 나온다.[18] 경빈이 복성군에게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며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라고 준 것이었다. 문제는 갑자사화의 발단이 바로 성종 시절 폐비 윤씨의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인데다 당시의 피해자 중에 정현왕후도 있다는 것.[19] 실제로 작서의 변 때 아예 대놓고 용의자 1순위를 경빈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20] 해설에 따르면 실제 역사에서 무려 19차례나 경빈의 사사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21] 아들 중종역할 맡은 임호와 전원일기에서 남매로 출연했다. 단, 엄유신은 김회장의 큰 딸로 나왔지만, 임호는 김회장의 업둥이로 나왔다.[22] 명나라 사신에게 겁탈당한 노 상궁 수하의 나인이 낳은 어린 궁녀(그녀의 생모였던 나인은 결국 궁녀의 법도에 따라 노 상궁이 직접 자진하게끔 하였고 그 어린 궁녀는 노 상궁이 어미라고 생각하게 하고 궁에서 키우게 한 것)가 노 상궁이 연로하여 궁을 떠나게 되자 마지막으로 만둣국을 올리고 싶어서 장금의 진가루를 훔친 것. 장금은 이 사연을 알고 차마 진가루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23] 배후에는 중종의 정치 개혁에 반발하는 오겸호 일파의 농간이 있었다.[24] 이진은 이 드라마에서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 정태우와는 <논스톱3>에서 커플로 나왔다.[25] 폐비 윤씨는 '윤소화'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했다.[26] 그래서 연산군도 정현왕후에게 대들 때 "왜 나를 박대하느냐"라고 화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비록 아껴주기는 했지만 내가 잘못할 때 회초리를 때리고 꾸짖어 주었으면 했다."는 식으로 섭섭해한다.[27] MBC 아나운서 출신.[28]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현왕후의 며느리 경빈 박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