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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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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정종 태종 세종
신덕왕후 정안왕후 원경왕후 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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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정순왕후, ruby=定順王后)] 정희왕후 안순왕후 공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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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철종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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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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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석 (의안대군) 이방과 (정종)
현빈 유씨
현빈 심씨
덕빈 김씨
(정안왕후)
이방원 (태종) 이제 (양녕대군) 이도 (세종)
정빈 민씨
(원경왕후)
숙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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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궁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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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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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궁 박씨
민회빈 강씨 빈궁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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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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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이척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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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효황후)
비궁 윤씨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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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조 세종조 세조조 예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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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신의왕태후 원경왕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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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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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 明聖王后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조선 숙종조 왕대비
현열왕대비 | 顯烈王大妃
}}}}}}}}} ||
파일:현종 숭릉.jpg
숭릉 전경
출생 1642년 6월 3일(음력 5월 17일)
조선 한성부 장통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1가 혹은 남대문로 1가 일부)
사망 1684년 1월 11일
(음력 1683년 12월 5일) (향년 42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저승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숭릉(崇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651년 12월 23일 ~ 1659년 6월 28일
조선 왕비
1659년 6월 28일 ~ 1674년 9월 17일
조선 왕대비
1674년 9월 18일 ~ 1684년 1월 11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청풍 김씨
부모 부친 청풍부원군 김우명
(淸風府院君 金佑明, 1619 ~ 1675)
모친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1621 ~ 1660)
형제자매 4남 2녀 중 장녀
배우자 현종
자녀
슬하 1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왕녀(1658 ~ 1658)
차녀 - 명선공주(明善公主, 1659 ~ 1673)
장남 - 숙종(肅宗, 1661 ~ 1720)
3녀 - 명혜공주(明惠公主, 1662 ~ 1673)
4녀 - 명안공주(明安公主, 1665 ~ 1687)
봉작 왕세자빈(王世子嬪) → 왕비(王妃)
→ 현열왕대비(顯烈王大妃)
전호 영모전(永慕殿)
존호 현열희인(顯烈禧仁)
휘호 정헌문덕(貞獻文德)
시호 명성왕후(明聖王后) }}}}}}}}}
1. 개요2. 생애
2.1. 왕비 시절2.2. 대비 시절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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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8대 왕 현종의 유일한 왕비.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의 어머니이자, 효종인선왕후의 외며느리이다. 성은 김씨로 김육의 차남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의 딸이다.

참고로 고종황제의 정실인 명성황후 민씨보다 200년 전의 인물이니 이름 가지고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따라서 보통은 '명성왕후 김씨'[1], 혹은 명성대비로 더 많이 불린다.

다만 이 중 명성대비란 호칭은 원칙적으로는 옳지 않다. 그녀가 생전에 실제로 받은 존호는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였고, 시호인 '명성'은 역시 사후에 올려지는 호칭인 '왕후'와 함께 붙여 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 문제는... 아들인 숙종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 직접 확인했을 행록에 명성대비(明聖大妃)라는 표현이 버젓이 있다. 출처는 숙종실록 35권, 27년(1701 신사 / 강희(康熙) 40년) 11월 23일(병오) 2번째 기사.[2] 사실 이렇게 사관인지 중신인지 임금인지 모를 누군가가 시호와 존호를 혼동하여 잘못 기록된 경우는 한국사 뿐만 아니라 중국사에도 좀 있었다. 더 골때리는 건 저 행록 안에서도 명성왕후와 명성대비라는 표현을 섞어서 썼다.

2. 생애

2.1. 왕비 시절

중전 시절에는 병치레 한 기사가 눈에 띈다. 수시로 궁중에 김우명, 부부인 송씨, 김석주 등이 들어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기사가 많고 대왕대비도 덩달아 와병하면서 창덕궁, 경덕궁 등을 오가거나 현종과 온양행궁에 요양을 간 기록도 남아있고, 이는 아버지 김우명이 죽은 숙종 연간에도 지속된다.[3]
중전의 가슴 답답한 증세가 갑자기 심해지자, 부사직 정유악을 빨리 불러오라고 명하였다. 정유악이 별소 도청으로 물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방 제조가 응교 김석주로 하여금 들어가 진찰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을사년의 예에 따라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현종 15년 4월 19일

2.2. 대비 시절

아들인 숙종(肅宗)이 즉위한 뒤 왕대비에 오르면서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4] 남인들의 비난을 샀으며[5]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이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675년에 일어난 '홍수(紅袖)[6]의 변'이다.

이 때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大殿)까지 와 통곡을 해대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7]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허나 신하들 역시 이런 명성왕후의 행보에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8]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친다. 결국 무고죄로 몰린 아버지 김우명은 화병으로 사망하고 만다.[9][10]

그 뒤에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희빈 장씨를, "성품이 극악(劇惡)하며 숙종이 꾀임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궁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11] 그런데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내쫓은 내면에는, 그녀의 친정 일족인 김석주가 장희빈의 당숙 장현의 일가를 유배로 몰았던 탓도 있었다.[12] 실제로 장희빈은 이후 명성왕후의 당파인 서인과 대립하는 남인과 손을 잡았다. 반대로 시조모인 자의대비는 장희빈의 편을 들었다고. 이는 어떻게 보면 실권에서 자의대비가 명성왕후에게 한참 밀린다는 걸 나타내준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해도, 명색이 시조모가 아끼는 아랫사람을 손주며느리가 마음대로 내쫓는다는 건 현대에도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예법이 엄격한 당대 왕실에선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성왕후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섰다는 건, 그만큼 자의대비의 실권이 약했다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명성왕후의 최후는 현대 시점에서 봐도 어찌보면 애틋하고 어찌보면 매우 황당하다. 숙종이 병(두창, 천연두)에 걸려 시름시름 사경을 헤매게 되자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명성대비는 숙종의 무사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는데, 문제는 무당이 왕의 쾌유를 위해서는 "왕의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고 계시를 내린 것. 이에 명성왕후는 아들이 아프니 눈에 뵈는게 없는지 무당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고뿔)을 얻어 1683년 음력 12월에 사망하고 만다. 조정에서도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신하들이 숙종에게 문제의 무당을 처형해야 한다고 했으나, 숙종은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숙종은 우연찮게도 그 무당의 말대로 무사히 살아나서 1720년에 재위 46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부모보다도 장수한데다 조선왕조에서도 손꼽히게 장수하고 오래 재위했다.

사족으로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 바람에, 장희빈은 명성왕후의 3년상이 끝난 1686년자의대비숙종에 의해 재입궁할 수 있었으며 곧 숙원으로 책봉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현종과 합장되어 있는 숭릉(崇陵)이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대중에게는 명성황후 민씨에 밀려서 인지도는 약간 떨어지지만 숙종시대의 사극에 '명성대비'로 꽤 등장한다. 장희빈 관련 사극에 무조건 등장하므로 역덕후, 특히 사극빠들은 명성대비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한문으로 써도 차이가 별로 안나기 때문이며, 사극이나 역사 관련 글에 명성황후 민씨와 명성왕후 김씨를 친절하게 구분해 주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 사실 한국사에서도 동일인물인 자순대비정현왕후의 경우 중종반정을 기점으로 행적이 크게 변한 사례도 있으므로 대중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호칭을 분리해 주는 경향이 있다.[25]

[1] 명성황후가 더 유명인이기 때문에, 혼동하지 않도록 명성왕후를 '명성왕후 김씨'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명성왕후의 '명성'은 明, 명성황후의 '명성'은 明으로 '성'의 한자가 다른데,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고 우리말로는 한국어 발음이나 한글 표기나 둘 다 똑같은데다 왕후와 황후도 헷갈리기 쉬운 발음이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지칭해야 할 때는 성을 붙여 확실하게 해주기도 한다.[2] 이외에도 9건 더해서 총 10건이 검색되는데, 숙종실록 3건, 영조실록 2건, 정조실록 2건, 순조실록 3건이다.[3] 후대의 치료 과정에서 드러난 기록을 보면 협심증으로 추정되는데 성격적인 원인도 있는 질환이다.[4] 참고로 명성왕후는 수렴청정을 한 적이 없다.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할 당시 왕실 최고 어른(당시 최고 어른은 자의대비)도 아니었고, 숙종도 모후를 닮았는지 한가닥 하는 성격이라서 즉위했을 때부터 친정을 원했기 때문.[5]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우명은 서인이었다.[6] 붉은 소매라는 뜻. 궁녀의 소매 끝동이 붉은색이었기 때문에 궁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였다.[7] 대소신료들이 등청을 하고 보니 대전에서 통곡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여기서 "내가 죽어야지" + "주상이 어려서 뭘 모른다"는 식의 읍소를 시전했다고 한다. 때문에 3일 후 윤휴가 "대신과 삼사가 당황해했다"고 문제삼으며 왕이 조관(調寬)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고 에둘러 깐다.[8] 실제로 이런 발언이 나왔었다. 이걸 보면 당시 조선 중기 사회에서 문정왕후란 이름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명성왕후는 얼마나 강한 성격이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9] 아이러니하게도 삼복(복평군 형제들)은 경신환국 때 결국 역모죄로 숙청된다. 삼복에게는 형인 복녕군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형제들의 숙청에는 휩쓸리지 않았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실제 혈통은 복녕군의 후손이다.[10] 삼복의 형인 복녕군의 딸은 명성왕후의 올케였다. 명성왕후의 남동생 김석달의 처가 복녕군의 딸. 그리고, 명성왕후의 고종사촌 언니(창원군부인 황씨)는 복창군의 처였다. 명성왕후의 고모가 황도명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11]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복귀를 청했던 인현왕후에게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12] 경신환국 당시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복선군 이남과 친밀히 지내왔다는 구실로 김석주가 장현뿐만 아니라 그의 조카와 아버지까지 유배를 보냈다.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했던 그녀에겐 장희빈의 등에 업혀 남인이 복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13] 명성왕후와 맞먹는 다혈질 왕비로는 태종의 정실 원경왕후 등이 거론되는 편이다. 그 외 여걸로 유명한 문정왕후 윤씨나 정순왕후 김씨는 개인 성품 자체는 신중하고 침착한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폐비 윤씨 또한 다혈질이지만, 이쪽은 산후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와도 같은 후천적인 정신질환 발현으로 인한 성격변화로 보는 시각도 있고 원래는 검소하며 예의바른 성격이었다.[14] 만일 후자라면 서양의 루이 16세와 비슷한 사례인데 루이 16세도 정부를 안 둬서 루이 16세가 사실 성불구자였다느니, 루이 16세의 자식은 남의 집 자식이라느니 하는 말이 많았다.[15] 다만, 단종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의 압박에 의한 것이 컸다.[16] 현종은 후궁을 두고 싶어했고 후궁 간택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용납 못한 명성왕후의 지시를 받은 한 신하의 반대로 실패했고 '현종이 그 신하를 한참 동안 째려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종 이후 간택 후궁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그 이유가 양반 가문에서 딸을 간택 후궁으로 보내는걸 꺼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7] 실제 이런 명성왕후의 행동이 나비 효과가 되었는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효종의 직계 왕손은 귀해지게 되고 19세기 중반에는 기어코 대가 끊기면서 헌종 이후에는 방계 계승이 이뤄지게 된다. 다만, 이건 꼭 명성왕후의 탓만은 아닌데 중간에 사도세자가 무려 5남이나 두었기에 만일 이들이 무사히 대를 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조선 후기에 툭하면 터지는 역모 사건에 엮여 줄줄이 죽어나가 끊기고 그나마 적자인 의소세손은 어릴 때 죽고 정조는 정조 아래로 순조-문조(효명세자)-헌종까지 외아들로만 이어지다 헌종 대에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헌종 다음으로 즉위한 철종 다음으로 왕이 된 이가 사도세자의 4남인 은신군의 증손자이자 후에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어가며 흥선대원군이 친부인 고종인데 고종의 가계도 혈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효종이 아니라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이 나온다. 이유는 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이 역시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왕 중에서는 효종의 피는 철종에서 끊긴 셈이 되지만 아들 숙종 포함해서 7대가 이어지기는 했다.[18] 하지만 거꾸로 보면 척신 및 붕당의 발호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조부 김육, 부친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청풍 김씨는 대동법 이후 국정 전반을 휘어잡던 당대의 권신 가문으로 현종의 부왕 효종이 직접 사돈으로 정한 친위 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인 중 중앙 조정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큰 흐름이었음은 틀림없다. 이런 배경을 가진 며느리를 시집살이시키는 것은 시부모인 효종과 인선왕후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19] 다만, 폐비 윤씨의 경우 도를 넘은 경우인데 폐비 윤씨와 비교해보면 명성왕후는 온후해보일 지경.[20]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인 면모로는 폐비 윤씨보단 온후했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데도 정치적으로 윗어른인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무시하고 패륜에 가까운 월권을 행사할정도로 지나치게 정사에 간섭하긴했다. 이러한 면모를 시어머니 인선왕후와 남편 현종 살아생전부터 보였다면 제재를 당하든지 했겠지만 다혈질인 성격과 달리 참을성은 있었는지 인선왕후와 현종이 모두 죽기전까지는 후궁만 못 들이게 내명부에서만 은근하게 압박만 하다가 두 사람이 연이어 모두 사망하고, 아들 숙종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면서 정사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21] 사후 추증된 것이 아닌 생전에 세자빈, 왕비, 대비를 모두 거친 여인은 정종비 정안왕후(定安王后),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 인종비 인성왕후(仁成王后),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경종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정조비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순종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총 8명이다. 하지만 이 중 정안왕후·원경왕후·인선왕후는 남편이 세자가 되기 전에 결혼했다가 나중에 세자빈이 된 경우이며 인성왕후·선의왕후·효의왕후·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해서 대비가 된 것이 아니다.[22] 경종, 영조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숙빈 최씨는 각각 궁녀와 무수리 출신이라 숙종 즉위 당시에는 혼인상태가 아니었으며 모두 친아들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아들 즉위는 봤지만 남편세자였을때 죽었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는 아들의 즉위를 봤지만 정조 재위 중에 후궁으로 간택된 것이며, 헌종의 모후 신정왕후남편이 세자 신분으로 죽었다. 철종, 고종은 애초에 방계이며 철종의 친어머니인 용성부대부인은 아들 즉위 전에 죽었다. 순종의 모후 명성황후도 고종 즉위 후에 간택됐고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못보고 죽었다. 대한민국 시대로 넘어와도 육영수박근혜 취임 전에 사망했다.[23] 다만 이건 아픈 사정이 있는 것이 3명의 딸 중 2명이 같은 해에 요절하고 말았기 때문. 참고로 막내딸 명안공주도 어머니 사후 3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나마 숙종만이 60세까지 살며 장수하긴 했다.[24] 기껏해야 정비이자 조강지처 인경왕후의 3년상도 제대로 못 치르게하고 계비를 반강제적으로 맞이하게 한 정도인데 이것도 당시 숙종에게 자식이 없었고, 몸도 약했던 편이라 납득은 가능했다. 최고어른이자 윗서열인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윤허조차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월권으로 한 게 문제일 뿐이다.[25] 다만 자순대비는 생전에 의붓아들인 연산군이 올린 존호라 틀린 호칭은 아니다.[26]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인현왕후가 폐서인되기 한참 전에 사망했으므로 고증오류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명성왕후가 살아있었으면 인현왕후 폐출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27] 참고로 며느리인 인선왕후가 시어머니 장렬왕후보다 나이가 6살 더 많다. 장렬왕후 조씨는 15살 때 44살인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인조의 자녀들보다도 어렸기 때문. 역시 어린 나이에 늙은 왕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 정순왕후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