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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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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의 장인 | 명성왕후의 부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충익공(忠翼公)
김우명
金佑明
<nopad>파일:김우명 초상화.jpg
출생 1619년 3월 24일
(음력 광해군 11년 2월 9일)
사망 1675년 8월 9일 (향년 56세)
(음력 숙종 1년 6월 18일)
묘소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봉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시호 충익(忠翼)
본관 청풍 김씨
이정(以定)
붕당 노론 (한당)
가족 아버지 김육 / 어머니 파평 윤씨
아내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자녀 9남 4녀[1]
형제자매 형 - 청릉부원군 김좌명

1. 개요2. 생애
2.1. 산당과의 갈등2.2. 숙종 즉위 후
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의 관료로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현종 말기부터 숙종 초기까지 한당을 이끈 관리이다.

2. 생애

1619년 경기 가평군 잠곡 출생으로 아버지는 김육이다.

인조 20년인 1642년, 진사가 되었으며 7년 뒤엔 강릉 참봉과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로 관직을 시작했다. 1651년에 딸인 명성왕후가 당시 세자였던 현종의 빈으로 간택이 됐고, 그 뒤 부솔, 공조좌랑를 지내다 우부승지, 가주서로 승진했다. 평시서령(平市署令), 공조좌랑, 공조정랑, 장악원 첨정(僉正), 부평부사(富平府使),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예빈시정(禮賓寺正)과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김육이 죽자 삼년상을 마친 뒤, 한당의 영수가 되었다.

2.1. 산당과의 갈등

현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책봉과 동시에 당연 겸직인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제수되었다. 의원(尙衣院), 사도시(司導寺), 장악원(掌樂院), 빙고(氷庫)의 도제조직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호위대장(扈衛大將)도 겸임했다.

산당한당의 관계만큼 영수였던 송시열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1674년에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2]가 부상하고 남인서인의 대립 때 허적의 의견에 동조해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을 불러왔다.

사실,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은 자신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키워드인 대동법을 반대해 김육과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김육의 장례식 때 국왕만 쓸 수 있는 수도(隧道) 사용에 대해 지적하자, 민유중이 탄핵을 했다. 이 사건들을 거치며 김우명의 반송시열, 반산림 이념은 강해졌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다시 제수됐고, 예송논쟁남인 측을 지지하며 탁남허적과 협력하여 송시열과 산당을 공격했다.[3]

2.2. 숙종 즉위 후

숙종 즉위 후, 숙종은 아버지 현종과 비슷한 산당에 대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어 외척이자 외조부인 김우명을 포함한 청풍 김씨는 신뢰를 받았다.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복선군, 복평군(이른바 삼복)은 그와 그의 가문만큼이나 신뢰를 받았으나, 그의 딸이자 대비인 명성왕후는 역시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아버지인 그에게[4] 부탁을 한다. 그해 2월 삼복 중 복창군과 복평군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으나, 관련자들이 모두 부인해 어영부영 넘어갔다. 이를 홍수의 변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허적윤휴와 갈등이 생긴다.

결국 김우명은 종친들을 무고한 사람이 되어 남인으로부터 지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모든 관직을 사임한 뒤 홧김에 술만 마시다 2개월 뒤 사망했다. 무덤은 당시 춘성군, 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산25-1에 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 충익이 추서되었다. 숙종이 내린 시호 증시 교지는 후일 청풍부원군김우명상여(중요민속자료 120호)와 김우명영정과 함께 그의 12세손 김성구가 국립춘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의 후손 중에서는 명성왕후 외에도 정조효의왕후가 또 한번 배출되었는데, 효의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시묵은 그의 아들 김석연의 4대손이었다. 그의 또다른 후손들 중 일부는 몰락하여 강원도 춘성에 정착했는데 후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3. 가족 관계


* 정부인 :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 송국태(宋國澤)의 딸
[1] 적자녀 4남 2녀+서자녀 5남 2녀[2] 아버지가 실성했을 때 그 아들이 상주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지금와선 예송논쟁과 비슷하게 보여 굉장히 쓸데없게 보이지만, 그땐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었기에 유자들은 이런 것에 목숨을 걸었다.[3] 여기선 숨겨진 사정이 있다. 송시열은 한당 계열이면서 능력 있고, 왕의 신임도 받는 그의 형 김좌명과 손잡으려 했으나, 때맞춰 그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했다.[4] 그 역시 송시열을 밀어내는데 앞장섰지만, 종친들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5] 허견의 처[6] 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 이합(寶城君 李㝓)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