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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5년 10월 7일 (음력 영조 41년 8월 23일) |
사망 | 1832년 5월 2일 (향년 66세) (음력 순조 32년 4월 3일) |
묘소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 |
봉호 |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
시호 | 충문(忠文)[1] |
본관 | 신 안동 김씨[2] |
이름 | 낙순(洛淳)[3] → 조순(祖淳) |
자 | 사원(士源)[4] |
호 | 풍고(楓皐) |
붕당 | 노론 (탕평당, 시파) |
부모 | 부친 - 김이중(金履中) 모친 - 평산 신씨 |
부인 |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 심씨(1766 ~ 1828)[5] |
자녀 | 슬하 3남 4녀 장남 - 김유근 차남 - 김원근(金元根, 1786 ~ 1832) 장녀 - 순원왕후 3남 - 김좌근 차녀 - 의령 남씨 남구순(南久淳)의 처 3녀 - 한산 이씨 이겸재(李謙在)의 처 4녀 - 연안 이씨 이긍우(李肯愚)의 처 |
노년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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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관, 정치가, 소설가이다. 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배향공신이 되었다. 순조의 국구로,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본인 집안인 안동 김씨의 세를 끌어올려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그의 고조부는 영의정까지 오른 김창집(노론 4대신 중 1명)이고, 그의 아버지 김이중은 김창집의 둘째 손자 김달행의 아들이다. 김창집의 아우들로는 낙학파의 종장이자 시문의 대가였던 김창협, 김창흡, 그리고 연행일기를 남긴 김창업과 훈고학과 강학으로 이름났던 김창즙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육창의 후손은 뻗쳐나가 후대의 낙학파의 산실인 석실서원을 이끌었던 재야의 김원행[6]을 포함하여, 정계의 최상위에 올랐던 문신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김창집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부친 김수항은 송시열의 정치적 파트너로 노론의 초대 영수이며, 김수항의 (양)조부는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로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7]이다.한마디로 엄청난 명문가 출신으로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집권 여당 집안의 자손으로, 직계 조상 중에 이름높은 국무총리 여럿, 김구 수준의 독립운동가,[8] 대학자들이 있다는 것.[9] 또 정조와는 사돈이기 전에 외가 쪽으로 6촌 형제간이다.[10]
1765년(영조 41년) 8월 23일에 태어나 1785년(정조 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대교를 지냈고 이조참의, 이조판서, 선혜청제조 등 순탄한 관직살이를 했다. 본인의 개인적인 능력도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인 노론 시파였기 때문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서인과 남인 양쪽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죽화도 잘 그렸다. 말년에 정조가 건강이 나빠지자 왕세자 책봉[11]을 하면서 동시에 간택을 추진했는데 이 때를 전후해서 정조가 직접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면서[12]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감으로 추천해 간택되게 하고[13] 이를 마음대로 바꾸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강요할 정도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결국 김조순의 딸이 간택되었고 그래서 그의 딸이 순조비가 되었으며 그는 국구가 되어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조순의 아내 청송 심씨 심건지(沈健之)의 딸[14]도 그와 동시에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에 봉해졌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정치적 역량이 떨어져 신하들에게 휘둘릴지도 모를 순조의 후원자로 김조순을 염두에 둔 듯한데 정작 정조 본인도 홍국영의 세도 정치로 골머리를 앓았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조의 계비로 순조가 즉위할 당시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에는 낮은 처신으로 좋은 평가를 벽파로부터 받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15] 한때 장용영의 대장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안 돼서 장용영 자체가 폐쇄되었다.[16]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사망한 후 벽파가 몰락하자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특이하게도 전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선점한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데 정작 본인은 판서급 자리 이상의 벼슬에 오른 적이 없었던 것.[17] 김조순이 순조의 친정 이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 한 일은 바로 신유박해를 저지른 노론 벽파에 대한 치죄였다. 심환지, 김종수 등을 정조의 유지를 거스른 역적으로 정하여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는 등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을 대거 정리했는데 김조순이 전면에 나섰다기보다는 측근들이 대신 수행하였다.
사실 일반적인 세도정치에 대한 서술을 생각하면 세도정치의 전반 30년을 담당한 김조순이 이렇게 명신에 가까운 평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해 보이며 이 때문에 "김조순 이후로 진짜 막장 세도정치가 열렸다"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안동 김씨는 척화파의 상징 김상헌,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수흥, 김수항, 김수항의 아들이자 역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두 동생 김창협, 김창흡 등 쟁쟁한 후손들로 인해 조선 후반기 최고 명문가였다. 김조순 개인이 어떤 인물이었든간에 안동 김씨 일문이 세도가가 되는 것은 결국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조순이 섭정이 된 이후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크게 확대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세도정치로서 조선 후반기 막장 상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세도 정치의 효시인 김조순은 그 개인이야 착하건 나쁘건 어쨌건 후대의 막장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비록 김조순이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과 노론 벽파를 정리했다지만 사실 공격한 것은 소론 시파인 이시수, 그의 일족이자 노론 시파인 김이영과 김희순 등이 벽파의 주축이자 경주 김씨인 김귀주와 김관주 등을 팔자흉언을 이용해 역적의 낙인을 찍어 숙청한 것이다. 한마디로 반대파 세력을 자신의 손으로 더럽히지 않고 차도살인을 한 것. 정작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운 인물들은 안동 김씨에 노론 시파들이었다. 정약용의 복귀는 없었다.[18]
실제로 김조순이 제수받거나 역임했던 관직들을 살펴보면 부제학(副提學), 행호군(行護軍), 병조판서, 이조판서,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훈련대장, 호위대장, 장용영 사령관 같은 하나같이 핵심 요직들로 문무관의 인사권, 국가 재정, 군 최고 통수권자, 최고위 언관 같은 실세 중에 실세 자리들이다.[19] 김조순이 역임했던 직책 중 흔히 주목하지 않는 것이 비변사 주교사 당상이다. 주교사 당상 직은 한강의 배다리(주교) 설치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배다리 설치를 위해 당대의 한성부 근교의 모든 배에 대해 징발 권한을 지니는 등 배의 현황을 파악하고 배의 이동과 한강 수운 등을 감독하는 자리였다. 주교사의 명목상 업무는 배다리의 건설이었으나 실상은 배를 통해 이루어졌던 당시 상업, 특히 한성 근교 대상인을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는 자리였고 이는 상권의 장악을 의미하였던 것이다.[20] 선혜청제조도 주목할만 한데 대동법으로 거두어들인 대동미의 출납을 담당하는 부서가 선혜청이다. 3대 세금인 전정, 공납, 군포 중 하나를 통째로 담당하는 부서니 호조 못지 않은 재정 부서다.
이렇게 김조순은 너무 튀어보이는 정승직을 맡지 않고도 알짜 요직을 챙겨 정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정치 기구는 의정부가 아니라 비변사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며 특히 김조순이 죽을 때까지 유지하던 직위가 바로 비변사 제조라는 점은 의미가 크다. 제조는 명목상 도제조에 이은 비변사의 2인자 자리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비변사의 최고위직인 도제조는 전현직 삼정승들이 겸직하는 자리였다. 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전직이니 사실상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전직이 되어 실권이 사라진다. 따라서 겸직인 도제조보다 명목상 2인자이기는 하지만 상시직인 제조가 실권은 더 강했던 경우도 있다.
따라서 '김조순이 어떤 벼슬에 입문하여 어떤 활약했다더라'는 식의 표면적 기록들은 큰 의미가 없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평가(졸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명목상 높은 벼슬은 하지 않았더라도 비변사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여 막후에서 정국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김조순이 죽고 나서 생긴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되었다. 신도비는 처음 묘가 생겼을 때에는 없었고 나중에 철종이 지어줬으며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3. 평가
김조순은 안동 김씨 김상헌의 후손이라는 명문가문의 후광과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순조와의 국혼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여, 1817년(순조17) 12월 반남 박씨 박종경[21]의 사망 이후 세도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였다. 김조순은 남공철·이상황·심상규 등 최측근 인사들에게 조정의 요직을 맡기고 실무행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으나, 주요 시국 현안에 대해서는 전면에 나서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민생의 실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현실감각과 개혁에 대한 필요성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근원적이고 실질적인 민생안정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김조순은 건강악화로 국정에 소극적인 편이던 순조를 대신하여, 왕의 장인으로서 왕권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였다. 반면 왕의 과도한 신임과 이에 따른 권력집중으로 정치기강의 문란, 관료사회의 부패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봉건왕조체제의 누적된 모순이 시대의 변화에 의해 증폭된 것으로, 특정 권력자 개개인보다는 지배체제 자체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왕비(明敬王妃)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
1832년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 기사
1832년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나 당시의 역사서에선 후한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상기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젊어서 과거 급제를 했고 외모나 능력도 출중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재간택을 받기 직전이 조금 순탄치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 국구가 된 시점부터 사위이자 왕인 순조뿐 아니라 조정과 재야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졸기는 기록한다. 한편으론 외적인 존경뿐 아니라 실제로 국가 중대사를 총찰해 모두 주물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권신 중의 권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격이 지나치게 좋다면서 인간관계가 얕고 넓었다는 기록은 그에게 줄을 대는 자가 많았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인품은 적을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외척으로서의 선을 지켰을 수도 있고[22] 애초에 성격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실록에도 언행에 조심하고 순상(循常)했으며 본인 공을 자주 내세우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종합적으로 정중동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평인데 같은 기사에서 순조는 스승과 같은 장인이라고 평했다. 즉, 왕실이나 조정에서도 신뢰가 높은 인물이었던 모양. 조정에서도 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어려운 민생 현안을 임금에게 알리는 것에 힘 썼다고 한다.
당장 오늘날 전공자들의 언급을 참고해도 '그의 혈족과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 정도의 언급만 나오고 본인이 간신이라는 묘사는 없다. 다만 본인이 의도했던 아니던 이후 본인 집안이 세도정치의 길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론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김조순을 옹호하는 측에선 본인 잘못은 아니며, 후손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다 보니 엄한 김조순까지 같이 욕을 먹은 측면도 있다고 말하고[23], 반대쪽에선 그것도 김조순이 방관한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
일단 김조순 본인은 언행에 조심스럽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했던 것은 맞다. 요직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24] 말년에는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는 당연직이었던 영돈녕부사(정1품)와 제조직 외에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25] 물론 비변사 제조 자체가 정권 운영의 핵심 요직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본인의 관직만이 아니라 정조의 건릉을 옮기는 것을 추진(김조순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몇 안되는 사례)하여 성공시켰을 때, 왕이 이를 치하하는 의미로 땅, 노비, 내구마를 하사하고 김조순의 일가 친척들을 등용시켰는데 이것도 사양했다.
개인적인 품성 면에서도 부정축재 등으로 지탄을 받은 기록이 없다. 사실 김조순 정도 인물이면 해쳐먹어도 무서워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권력자의 부정 축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에 남기 마련이다. 당장 김조순의 딸이자 2번이나 수렴청정을 하며 위세를 떨친 순원왕후가 부정축재 한 사례들도 잘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조순은 진짜 부정축재를 했다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 제대로 된 시장과 화폐 경제의 부재로 선물 문화가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대가성만 추가되면 뇌물이 되는) 조선시대에 거물급 고관이면서도 재물 관련 시비 기록이 거의 없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26] 즉, 최소한 그 시대 기준으로는 흠 잡힐 만큼 부정축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반남 박씨 박종경과 세도 정치를 했다는 비판을 받은 사실이 있어 이미 당대에도 권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냥 이름 높은 세도가들은 닥치고 거론된 감도 있는게 민란들이라 당장에 박종경은 뭘 제대로 한게 없다. 덧붙이자면 세도 정치기의 각종 문제는 정조 시기에도 그 단초가 예고됐다(대표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환곡 폐해와 탐학의 발생). 세도 정치의 기반 또한 규장각, 주교사 등 정조가 설치한 각종 기관들에서 나왔다. 소수 가문들에 의한 과거의 독점 또한 18세기 후반(영조 말)부터 이미 널리 확산된 경향이었으며 서울 양반과 지방 양반의 분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대외 교역이나 농경지의 확대 등도 정체 혹은 침체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쇠퇴를 단순히 세도정치나 김조순 개인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쇠퇴 경향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당시의 집권층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요약하자면 '명신'과 '간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한 인물이란 것이다. 개인사적으로는 뛰어난 능력, 인품을 갖추고 청렴했으며 국구의 자리를 악용하지 않으면서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정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세도정치가 득세, 결국 안동 김씨라는 혈연적 측면과 비변사를 통한 소수 인물들의 정권 독식이라는 정국 운영 방식 2가지 측면에서 세도정치를 낳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린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정조 사후 생기를 잃고 회색으로 점차 빛을 잃어가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인물. 어찌보면 당나라 현종 시기 권모술수의 달인이자 간신으로 이름 높던 이림보보다도 더 무서운 허허실실형 정권 장악력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딸 순원왕후를 순조한테 정비로 시집 보낸 것만 봐도 처세술 하난 대단했다는걸 알 수 있다.
4. 가족 관계
- 증조부 : 김제겸(金濟謙) - 김창집(金昌集)의 장남
- 아내 :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陽府夫人 靑松沈氏)[28]
- 장남 : 예조판서 문정공(文貞公) 김유근(金逌根)
- 양손자 : 이조판서 효문공(孝文公) 김병주(金炳㴤)[29]
- 차남 : 이조참판 김원근(金元根)[30]
- 친손자 : 형조판서 효정공(孝貞公) 김병지(金炳地)
- 장녀 : 순원왕후(純元王后)
- 3남 : 영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좌근(金左根)
- 양손자 : 이조판서 문헌공(文獻公) 김병기(金炳冀)[31]
- 차녀 :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 외손자 : 이조판서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
- 외손자 : 이조판서 문정공(文靖公) 남병길(南秉吉)
- 3녀 :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 외손자 : 형조판서 이승순(李承純)
- 4녀 :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5. 기타
- 평소 소설을 좋아하였으며, 본인이 직접 <오대검협전>이라는 일종의 고전 무협소설[32] 프로토타입격 작품을 쓴 적도 있던 소설가이기도 했다. 오대검협전의 집필 시점은 불확실한데 김조순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게 아니라 김려라는 문인이 본인 및 주위 문인들의 글을 모은 유고인 담정총서(藫庭叢書)에 수록된 김조순의 고향옥소사(古香屋小史) 중에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처럼 소설광이었던 탓에 실제로 젊은 시절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 후배와 연애소설을 나눠보다 하필이면 정조에게 걸렸고 정조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을 기가 막히게 잘 써서 정조가 극찬을 내렸다. 남들은 반성문을 쓰라 하면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만 써댄 것에 반해 김조순은 잘못한 것은 확실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고.
- 김조순은 평소 몸가짐이 단정했고 항상 정중하게 남을 대했는데 어느 야사에는 김조순의 정적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술 취한 이를 들여보내 행패를 부리라 사주했는데 그는 다 죽어가는 환자여서 매를 치면 죽는 몸이었다. 이에 김조순은 오히려 그를 거둬 잘 먹여 돌려보냈고 따로 사람을 시켜 뒤를 쫓아보니 과연 누군가 김조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
- 사극물에선 아직까진 순조~헌종 연간이 워낙 불모지대이다보니 주도적인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정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극에서도 비교적 젊을 때라 나오지 않거나 나와도 단역 수준 정도로 비중없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들 김좌근이 흥선대원군과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것과 대조된다.
-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주인공들을 후원해준다.
- 대체역사소설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서는 기득권이자 자기 가문의 번영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조선의 부패한 지도상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정치적 능력은 유능하게 나온다. 역사의 변화로 조선이 엉망이 되는 와중에도 무능한 왕들이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보고 왕이 굳이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사족으로 소설 작가란 것을 반영했는지 툭하면 소설 관련 서술이 나온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처음부터 김조순이 고도의 처세술을 꾸몄다고 보고 있다. 김조순 자신은 명신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실질적인 권력욕을 보이지 않는 척하면서 가문 전체의 세도 확대를 꾀했다는 것.
7. 관련 문서
[1] 족보에 왜 이렇게 시호를 정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걱정하느라 자기 집은 잊고 살았기 때문에 '충'이라 했고,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여 '문'이라 한 것이다."[2] 서윤공파(庶尹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3] 본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 족보에는 낙순으로 이름이 적혀 있으며, 조순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직접 하사했다고 한다.[4] 출처: 《안동김씨족보》 김조순편[5] 영조의 부마 심능건의 6촌[6] 김조순에게는 작은할아버지가 된다[7] 김창집의 증조부. 김상헌 - 김광찬(원래는 김상헌과 조카-숙부 관계이다) - 김수항 - 김창집 - 김제겸 - 김달행 - 김이중 - 김조순[8] 조선 시대에 김상헌의 이름값이 이 정도 위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김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니 재미있는 비유가 되겠다.[9] 실제로 순조 1년 벽파의 권유가 상소를 올리면서 '곡돌사신'이라는 표현을 넣으며 명문거족 중에서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 같은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가 "교목세가는 충신과 명신의 자손인데 권유가 말을 좀 심하게 했네요."라고 조사할 것을 청했다. 권유가 겨냥한 것이 그 때는 김조순일 거라고 추측만 했지만 후에 권유의 소를 가지고 시파에서 문제삼아 권유를 국문했다. 조사 결과 이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10] 가계를 거슬러보면 김조순의 할머니 한산 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이모이다. 즉 김조순은 혜경궁에게 5촌 조카가 되고, 정조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외외가 쪽으로 6촌이 되는 셈이다. 정조의 아들 순조와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8촌간에 혼인한 셈.[11] 이 때 책봉된 세자가 후일 순조가 된다.[12] 심지어 간택을 폐하고 중매를 통해 김조순의 딸과 혼인을 맺자고까지 했다.[13] 다만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중에서 삼간택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벽파에서는 이를 빌미삼아 김조순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정순왕후 김씨부터가 정조의 유지를 뒤집을 수 없다는 입장이라서 물 건너갔다.[14] 1766년에 태어나서 1828년 8월 11일에 죽었다. 그녀의 부친이자 김조순의 장인 심건지는 심환지의 6촌형이다.[15] 김조순은 시파다.[16] 이를 들어 장용영을 없앤 것은 시파의 힘을 빼기 위한 주장이 있는데 김조순을 장용영 대장에 앉힌건 벽파와 정순왕후였다.[17] 조선의 삼정승은 관료들 중 으뜸이라는 지위와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말년에 해먹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각 분야의 일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판서가 더 활동하기 좋은 관직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물론 조선에서 재상의 파워가 센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뒷간 취급도 아니었다. 삼정승이 판서 같은 요직에 심복들을 배치하고 당여의 수장이 정승이 되면 충분히 권력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였기 때문. 이후 아들 김좌근은 실제 영의정도 역임했다. 즉, 김조순 역시 국구의 지위에 있었으니 그럴 수 있음에도 절제한건 맞다.[18] 다만 정약용이 장기간 귀양을 가게 된 까닭은 당시 좌의정인 서용보 탓이었다. 정약용이 암행어사 시절 연천 현감인 서용보를 탐관오리로 지목하여 파면하였고 이후 정약용과 서용보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실제로 김조순과 정순왕후는 정약용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정약용의 귀양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였으나 서용보가 극렬히 반대하였고 정약용은 서용보가 은퇴하고 난 이후에야 귀양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때 주도적으로 정약용의 복권을 추진하였으나 서용보를 주축으로 한 신하의 반대로 결국 실패하였고 막상 정약용을 귀양에서 풀어준 사람도 김조순이었다. 서용보, 김조순, 정약용 모두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하들이다.[19] 지금 일반인들의 인식으로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은 별볼일 없는 자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군 통수권을 갖는 정권의 핵심 요직이다.[20] 국편 신편 한국사 32권, 조선정치사 1800~1863 등 참고[21] 누이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이다.[22] 정조 재위 기간 김귀주, 정후겸, 홍국영 등의 부류를 반면교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23] 사실 세도정치란 것도 본질적으론 당시 옆나라 일본에서 행해지던 막부정치와 크게 다를건 없었다.[24] 하지만 병권의 핵심 요직인 병조판서, 훈련대장, 호위대장 직은 받아들였다.[25] 다만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26] 기껏해야 정도전, 조영무, 김종서, 황보인, 구치관과 같은 몇몇 정도.[27] 이집(李潗)의 딸, 언니가 혜경궁 홍씨의 모친[28] 호조정랑 심건지(沈健之)의 딸, 예조판서 심풍지(沈豊之)의 조카[29] 김달행 - 김이경(김달행의 3남) - 김명순(본래 김달행의 장남인 김이기의 차남이었으나, 김달행의 3남인 김이경의 양자가 됨) - 김홍근(김명순의 장남) - 김병주(김홍근의 차남인데 김유근의 양자가 됨)[30]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31] 김성행(김달행의 큰형) - 김이장(김성행의 장남) - 김복순(김이장의 장남) - 김영근(김복순의 장남) - 김병기(김영근의 차남인데 김좌근의 양자가 됨)[32] 물론 오늘날 무협물과는 차이가 나기에 온전한 무협소설이라고 보긴 어렵다.[33] 고려 시대 문신으로 김조순과 비슷한 면이 있다. 고려시대 문종 대에 중임된 권신으로 문벌귀족의 시초격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막상 그도 후손들과는 달리 신하로서 문종을 잘 보필해 여러 정책에 참여했고 인품 역시 훌륭하였으나, 훗날 경원 이씨 후손인 문벌귀족들은 이자의나 이자겸처럼 국정을 농단하고 왕실을 위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