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1:23:14

간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대한민국의 영화에 대한 내용은 간신(영화)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간신은 정말 간신인가?3. 역사 속 간신들
3.1. 한국사
3.1.1. 간신
3.1.1.1. 고려 이전3.1.1.2. 고려 전기3.1.1.3. 무신 정권3.1.1.4. 고려 후기3.1.1.5. 조선 전기3.1.1.6. 왜란 이후3.1.1.7. 개항 이후
3.1.2. 권신
3.1.2.1. 고려 이전3.1.2.2. 고려 전기3.1.2.3. 무신정권3.1.2.4. 고려 후기3.1.2.5. 조선 전기3.1.2.6. 왜란 이후3.1.2.7. 개항 이후
3.1.3. 역신
3.1.3.1. 고려 이전3.1.3.2. 고려 전기3.1.3.3. 무신 정권3.1.3.4. 고려 후기3.1.3.5. 조선 전기3.1.3.6. 왜란 이후3.1.3.7. 개항 이후
3.1.4. 애매한 경우
3.2. 중국사
3.2.1. 간신
3.2.1.1. 하·상·주3.2.1.2. 춘추·전국 시대3.2.1.3. 진·한3.2.1.4. 삼국시대3.2.1.5. 남·북조 시대3.2.1.6. 수·당3.2.1.7. 오대·십국 시대3.2.1.8. 송·요·금3.2.1.9. 명3.2.1.10. 청3.2.1.11. 현대
3.2.2. 권신
3.2.2.1. 하·상·주3.2.2.2. 춘추·전국 시대3.2.2.3. 진·한3.2.2.4. 삼국시대3.2.2.5. 남·북조 시대3.2.2.6. 수·당3.2.2.7. 오대·십국 시대3.2.2.8. 송·요·금3.2.2.9. 명3.2.2.10. 청3.2.2.11. 현대
3.2.3. 역신
3.2.3.1. 하·상·주3.2.3.2. 춘추·전국 시대3.2.3.3. 진·한3.2.3.4. 삼국시대3.2.3.5. 남·북조 시대3.2.3.6. 수·당3.2.3.7. 오대·십국 시대3.2.3.8. 송·요·금3.2.3.9. 명3.2.3.10. 청3.2.3.11. 현대
3.3. 일본사3.4. 몽골사3.5. 기타 지역

1. 개요

신하의 평가에 따른 호칭 분류
간신
(악)
신하
(선)
충신


/

간신은 '육사신(六邪臣)'의 하나로 '간사한 신하'를 이른다. 육사신(六邪臣)은 나라에 해로운 여섯 유형의 신하로 구신(具臣)[1], 유신(諛臣),[2] 간신(奸臣), 참신(讒臣)[3], 적신(賊臣)[4], 망국신(亡國臣)[5]을 말한다.

군주의 권위를 인정하는 한편[6], '권위'가 아닌 '권력'은 최대한 뜯어먹기를 바라며, 그 과정에서 전통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신하의 덕목을 크게 결여하거나 무시하는 신하라고 한다.

이와 다르게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여 '아첨'을 부리게 되면 "영신"이 된다.[7]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반역자들도 간신에 들어간다.[8]

육사신에 간신만 있는 것은 아니나 간신이 제일 유명하여 다른 단어들은 묻혔다.

간신, 권신이 잘 구별되진 않는 편인데, 간신 → 권신 진화형들도 많지만 거꾸로 권신임에도 군주의 묵인하에서 살아남고, 군주의 묵인이 사라지는 순간 숙청되는 경우도 많기에... 결국 대개 확실한 "간신" 부류는 환관류 위주다.

게다가 권신 그 자체는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없다. 권신이 자기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후대의 평가가 정해지는 것이지 권력을 많이 가졌다고 다 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니 권신은 무조건 악하다는 편견은 틀린 것이다. 대표적인 권신이자 충신으로는 촉한 승상 제갈량이 있다. 승상 제갈량은 한열조 소열황제의 유언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자기 권력을 사리사욕에 쓰기는커녕 평생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하다 과로사한 권신이자 충신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일찍이 공자는 간신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명나라 충신 양계성은 당시 간신 엄숭의 죄악과 그 간행을 "십죄상"과 "오재상"으로 요약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나름의 가치관을 갖고 있긴 해도 무능력하면서, 높은 직위에 오른 자 역시 정치적 적대자에게 간신으로 취급된다. 이쪽은 간신이라기보다는 우신(愚臣)인 듯하지만 말이다.

이미지는 대부분 군주 앞에선 살살 웃으면서 아첨을 떨지만 뒤에선 역모를 꾸미고 있다든지 하는 나쁜 놈들. 현대사회에서도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다.

현대사회에서 간신의 특징에 부합하는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지간하면 사회 부적응으로 실패하거나 좌절할 일이 잘 없다. 왜냐하면 주변으로부터 간신배 소리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인간관계를 교묘히 조율하는 처세술과 자기 이득에 따라 남을 이용해 먹는 정치적 권모술수, 그리고 높으신 분들의 눈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정적들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기회잡아서 도태시키는 스킬 하나는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능력은 좋은데, 사회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사회 부적응을 겪기 쉽다.[9] 더군다나 조직생활에 있어서 높으신 분들은 능력은 좋은데 사회성 떨어지고 인간관계가 좋지 않는 사람과 능력은 그저 그렇지만 자신들의 비위를 잘 맞춰주고 언제나 고개숙여주고 맞장구 치며, 대인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사대부 관료들이 군주의 측근들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구호. 조선시대에 가면 군주에게 서로 상대방이 간신이라면서 쫓아내라는 일종의 병림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른바 "소인" 낙인 찍기가 대표적. 간신 목록에 권신, 척신, 역신, 우신들이 이름을 올리는 이유기도 하다. 또한 간신의 전단계인 폐행이 있는데 이쪽은 사직을 말아먹을 만큼 망칠 수준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극에선 왠지 마르고 이방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손을 비비면서 헤헤헤 웃는 그런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어찌 그런 옳은 판단을 하시나이까" 같은 대사도 필수.

간신 중에는 천출이나 노비 같은 신분으로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가 권력을 쥐니까 급격히 타락한 경우도 있는데, 김준, 신돈, 유자광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부류의 간신들은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기득권들을 대거 몰아내고, 권력을 쥔 이후 급격하게 흑화한다. 자신에게 밀려난 기득권 세력이 대대적 반격을 가하는 시점에서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도 세력을 키우고 심복을 숱하게 심어야하는데, 대체로 이 과정 속에서 선정을 펼치기보단 권력투쟁에만 신경쓰게 된다. 이전에 쌓인 열등감도 한몫을 한다. 미천하니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김준의 경우는 무신정권의 정점인 최씨 정권을 붕괴시켰고, 신돈은 권문세가에 큰 타격을 줬고, 유자광은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자이다. 대신 이들 역시 이들이 깨트린 집단과 한 때 타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사극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자들이 간신을 연기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예: 이덕화, 김응수, 박근형, 조경환, 이재용 등등). 하지만 사실 이들은 대개 권신.

2. 간신은 정말 간신인가?

임사홍 등이 대표적 사례. 그리고 왕안석, 한명회처럼 한쪽 면에서만 평가할 수 없는 존재도 있긴하다(사실 왕안석의 경우엔 성리학자들의 디스[10], 한명회의 경우엔 권신에 가깝다.[11]). 동양 국가 막장 테크의 주요 원인이던 외척, 환관들마저도 "생각보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란 재조명이 나오는 것이 현 상황이다. 또한 정쟁으로 죽은 사람을 후대에 복권시킬 때도 그게 군주의 뜻으로 죽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군주가 잘못해서 충신을 죽였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게 다 간신 아무개가 모함해서 그렇다."라고 총대만 멘 신하에게 뒤집어 씌워 간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남곤이나 정철이 있다.

간신이란 정의 자체가 역사를 선과 악으로 이분하려는 춘추사관적인 태도가 짙다는 분석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간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로 악랄했던 것이 아니라 무능이나 다른 이유로 반대파에게 '간신'이라 낙인 찍힌 경우도 종종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군주의 방패막이라는 설도 있다. 차마 군주를 깔 수는 없으니, "간신이 임금님을 망친다!"는 식으로 깐다는 것. 그리고 유교 문화권에선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된다" 라는[12] 말이 꽤나 지지받고 있었기에, 군주의 주변에 간신만 많다고 비판해도 간접적으로 군주를 비판하는 효과가 달성되기는 했다. 요즘 시점에서 보면 어지간히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간신을 키우는 군주 쪽이 잘못이다. 이른바 간군(奸君). 대표적인 사례로는 남송의 휘종, 흠종, 고종, 명나라가정제가 있다.

욕받이는 당연하지만 유교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평상시에도 군주의 외도를 남자다움의 덕목을 갖추어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군주가 혼외정사를 하는 것은 긍정적이었던 반면 그 대상이 되는 여자, 즉 군주의 정부는 항상 '요망한 창부'로서 욕받이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군주의 정부를 비난하는 건 국민 스포츠였고 이 비난은 왕후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선 뒤에는 신문의 발달로 한층 욕 수위가 업그레이드되고 추잡스러운 삽화까지 더해지면서 이런 음담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특히 루이 16세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위기간 동안 항상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그동안의 왕비와는 비교도 안되는 모진 경멸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의 무능과 선왕들의 사치로 빚어낸 국가 경제 파탄과 부정부패의 방종 등으로 인해 프랑스가 막장이 된 걸 백성들이 "이게 다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가 우리 현명하신 임금님을 망쳐놔서 그렇다"라고 비난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대 신문의 발흥기 때문에 온갖 성적인 루머에 시달리며, "호화로운 궁궐에서 국민의 혈세로 수십명과 줄지어 난교파티나 열고 있는 문란하고 멍청한 오스트리아 창녀"라고 만화 삽화까지 그려져 음해받기도 했다. 더구나 역대 프랑스 군주들과 달리 루이 16세는 여색에 관심이 없어서 정부도 들이지 않았는데, 국민들은 오히려 "이건 전부 바가지 긁는 왕비 탓"이라며 "왜 우리 임금님 기를 죽이고 그러냐!?"라고 비난했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대 프랑스 왕비 중에서 가장 검소했지만 남편 루이 16세에게 정부가 없던 탓에, 보통 군주가 가장 총애하던 애첩(총희)이 열던 사교계 파티를 주최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13]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사치가 심하고 주체적으로 혈세를 낭비하는 재주가 있다"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또한 잡다한 프랑스식 의전을 귀찮아하고 간신을 멀리하려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귀족들과도 불화가 많은 편이었다.

프랑스의 국민들은 이런 음해에 선동되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옹호할 귀족들마저 줄어들면서(왕비를 보호해주겠다는 라파예트 자작 같은 이는 소수였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마침내 1789년 10월에는 대포까지 끌고 베르사유 궁궐로 쳐들어갔다.

결국 루이 16세가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도 "우리 착한 임금님을 꼬셔서 약속을 어기게 할 거다"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나돌았고, 이에 분노한 아줌마들이 문을 때려부수고 경비병들은 궁의 방 문을 보이는대로 가구로 틀어막는 난리가 났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오는 아줌마들에게 겁을 잔뜩 먹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의 침실로 도망쳐서 소리를 지르고 문을 때리며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한참 동안 왕비의 목소리를 듣지못했던 루이 16세가 겨우 들여보내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경비병들을 잡아 참수해서 창끝에 효수해서 돌아다니며 잔뜩 살기가 오른 아줌마들은 6명의 대표를 꾸린 뒤, 루이 16세와 만나서 개인 아파트에서 담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증오할수록 임금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폭도들은 막상 루이 16세를 가까이서 대면하게 되자 프랑스의 군주라는 지위에 압도되어 1명은 기절해서 쓰러질 정도였고, 이후 궁의 베란다에서 루이 16세가 연설할 때는 "임금님 만세! (Vive le Roi!)라고 외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와중에도 군중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불러내라고 요구했고, 이에 황당해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베란다에 서자 그녀에게 머스켓을 조준할 정도였다.

3. 역사 속 간신들

※ 신하로서 무능했는지의 여부는 간신과는 무관하므로 무능했다는 이유로 적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부패했음에도 중앙 정치에 개입한 사례가 없다면 간신보다는 탐관오리로 분류하여 역시 제외한다.
※ 간신 중 군주에 영합하고 모조리 오케이하며 아첨하며 부정부패 등을 일삼았던 케이스는 간신, 군주를 무시하고 자기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른 케이스는 권신(권력이 컸더라도 군주를 존중하고 그 아래에서 부패했다면 간신으로 분류), 권신을 넘어 아예 군주권까지 탐했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케이스는 역신으로 분류한다. 카테고리에 동시에 포함될 시에는 역신>권신>간신의 순으로 넣는다. 반민족행위자들은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면 역신, 수용하는 쪽이었다면 간신으로 분류한다.
※ 반정공신의 경우에는 반정을 당한 쪽의 입장에서는 역신이지만, 충성을 바친 쪽이 반정군주라는 점을 감안하여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역신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사서 등에서 간신으로 취급받았으나 실제로 간신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인물은 애매한 경우로 분류하고 그렇게 분류한 이유를 같이 서술한다.
※ 권력을 잡으면서 권력남용을 부리고 횡포를 일삼는 권신들과 직분보다 사리사욕을 우선시하여 실정을 저지른 간신이라 평가받은 관리들만 기재한다.
※ 나라나 왕조에 엄청난 해를 끼치거나 중대한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볼드.

3.1. 한국사

3.1.1. 간신

3.1.1.1. 고려 이전
3.1.1.2. 고려 전기
3.1.1.3. 무신 정권
3.1.1.4. 고려 후기
3.1.1.5. 조선 전기

* 박원종 - 중종반정의 공신이지만, 사치스럽고 부패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다. 그와 함께 중종반정을 이끈 3명의 공신들 모두 평가가 좋은건 아니지만 박원종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 좋다.
* 유자광 - 남이 옥사, 무오사화의 핵심 인물이며 여러 군주들의 재위기간 동안 군주들을 대신해서 숙청을 도맡아 했다.[15] 그래도 중종반정에 가담했다는 것만 봐도 조선판 김준이라고 보면 된다.
* 임숭재 - 임사홍의 아들. 간신인지에 대해 심한 의문이 남는[16] 아버지 임사홍과는 달리 임숭재는 확실한 간신이다. 죽을 때도 '오직 임금께 미인을 바치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근데 그 임금님이 자기 부인과 간통을 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임숭재는 성종사위로 부인 휘숙옹주는 연산군과 남매지간이다.
* 정언각 -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사실상 윤원형의 수하였으며, 문정왕후와 권신 이기 등을 비난하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하고 이를 왕에게 바침으로써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몇년 뒤 그가 말을 타고 가던 중 낙마했다가 그대로 말에게 짓밟혀 죽자[17] 사람들은 그 말을 의로운 말(義馬)이라며 칭찬할 정도였다.
* 홍윤성
* 이산해 - 건저의 문제를 유발하였고 선조 시기에 당쟁을 더욱 심화한 주범. 북인의 수장으로서 서인에 강경한 입장을 취한 관계로 서인측이 쓴 기록에 폄하를 많이 당한 면도 있다지만, 무엇보다도 동문이자 훗날 남북인으로 갈라서는 유성룡이 왜란 시대에 동분서주하며 고생한 것에 비해 이 양반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현대에도 여기에 영향을 받은 문학가 박종화 등에 의해 간신으로 묘사를 당한다.
3.1.1.6. 왜란 이후
3.1.1.7. 개항 이후

3.1.2. 권신

3.1.2.1. 고려 이전
3.1.2.2. 고려 전기
3.1.2.3. 무신정권
3.1.2.4. 고려 후기
3.1.2.5. 조선 전기
3.1.2.6. 왜란 이후
3.1.2.7. 개항 이후

3.1.3. 역신

3.1.3.1. 고려 이전
3.1.3.2. 고려 전기
3.1.3.3. 무신 정권
3.1.3.4. 고려 후기
3.1.3.5. 조선 전기
3.1.3.6. 왜란 이후
3.1.3.7. 개항 이후

3.1.4. 애매한 경우

3.2. 중국사

3.2.1. 간신

3.2.1.1. 하·상·주
3.2.1.2. 춘추·전국 시대
3.2.1.3. 진·한
3.2.1.4. 삼국시대
3.2.1.5. 남·북조 시대
3.2.1.6. 수·당
3.2.1.7. 오대·십국 시대
3.2.1.8. 송·요·금
3.2.1.9.
3.2.1.10.
3.2.1.11. 현대

3.2.2. 권신

3.2.2.1. 하·상·주
3.2.2.2. 춘추·전국 시대
3.2.2.3. 진·한
3.2.2.4. 삼국시대
3.2.2.5. 남·북조 시대
3.2.2.6. 수·당
3.2.2.7. 오대·십국 시대
3.2.2.8. 송·요·금
3.2.2.9.
3.2.2.10.
3.2.2.11. 현대

3.2.3. 역신

3.2.3.1. 하·상·주
3.2.3.2. 춘추·전국 시대
3.2.3.3. 진·한
3.2.3.4. 삼국시대
3.2.3.5. 남·북조 시대
3.2.3.6. 수·당
3.2.3.7. 오대·십국 시대
3.2.3.8. 송·요·금
3.2.3.9.
3.2.3.10.
3.2.3.11. 현대

3.3. 일본사

3.4. 몽골사

3.5. 기타 지역


[1] 자리만 차지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하.[2] 아첨을 떨며 목숨을 부지하려 드는 신하.[3] 온갖 악한 술수를 부림에 거리낌이 없는 신하.[4] 왕에게 반기를 드는 신하.[5] 나라를 망하게 하는 신하. 그 매국노 이완용도 망국신이다.[6] '군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군주의 권위를 일부러 추켜세우는'이 적당한 말인지도 모르겠다.[7] 흔히 말하는 예스맨[8] 이는 멋들어진 앞서의 정의에도 어느 정도 허점이 있음을 보여준다.[9] 아스퍼거 증후군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눈치, 배신, 사기 등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꿰거나 기회만 되면 타인을 뒷통수 치는 스킬이 저조한 사람이 조직생활에서 절대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10] 필원잡기에 따르면, 어느날 집현전 학사들이 "왕안석을 어느 전기에 놓아야 하느냐"는 토론을 하니 대부분 사람들은 "간신전에 놓아야 한다"고 했으나 후에 사육신의 한 사람이 되는 유성원만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후에 송사(宋史)가 조선에 들어오니, 역시 왕안석이 간신전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11] 그런데 이게 또 애매한게, 한명회신숙주와 함께 소위 세조의 원상집단의 리더로 그들의 세력이 강해질수록 세조는 이들을 통해 관료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였고 세조도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물론 세조 치세 말기로 가면 세조도 이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지만... 또 한명회의 권력행사가 세조의 권력을 심하게 침해했다고 보기는 힘든 게, 이시애의 난 때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뻔히 헛소문인거 아는 내통 소문을 이유로 잡아 가두고도, 나중에 무죄로 밝혀져 풀어주면서 데꿀멍하기는 커녕 "니들이 알아서 조심했으면 이런 일 없었지!"라고 큰소리까지 쳐댔다. 물론 이건 한명회에게 권력이 없던 게 아니라 세조의 왕권이 개쩔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12] 일단 현대까지 널리 통용되고 있는 한자성어 중에서만 보자. 근묵자흑, 근주자적, 유유상종, 맹모삼천지교 등등.[13] 단 프랑스 대혁명 원인은 왕실과 귀족의 사치가 아니라 국가부도위기에도 국토40%나 차지한 귀족들이 면세특권을 고집하는 추태에 평민계급이 폭발한 것이다.[14] 광부고려에서 천민 계층에 속했다.[15] 다만 그 두 사건에는 군주의 의중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처형당한 주요 당사자들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일인 것도 맞고.[16] 갑자사화를 부추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임숭재가 미치지 않고서야 작정하고 사화를 의도했을 리는 없다. 임사홍의 정치적 적은 사림인데, 갑자사화의 명분인 "폐비 윤씨의 복수"는 기본적으로 폐비 당시의 세력들이자 임사홍의 동지들인 훈구세력을 겨누는 문제이기 때문. 훈구세력이 없어지면 오히려 사림의 힘이 더 커지고 임사홍의 입지는 오히려 줄어들 것이 뻔하다. 그 정도 계산도 못 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급제할 수도 없다. 연산군에게 자신의 충성을 과장하다가 그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것 뿐이다.[17] 한쪽 발이 등자에 걸린 상태로 낙마했다. 말에게 짓밟히면서 끌러다니는 바람에 사람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18] 어찌보면 기자헌은 정치적으로는 충신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도덕성 면에서는 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이이첨 같은 경우는 정치적으로는 간신이지만, 도덕성 면에서는 청렴했었다.[19] 결국 만주 청나라가 중국에게 먹혔으니 멀리보면 한중합병이다.[20] 이쪽도 만만치 않았으나, 조정을 휘어잡은 (신)안동 김씨에 비해 권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네임드급 관리도 많지 못한 편이다.[21] 관중 사망 후 습붕이 재상이 되었으나 곧 죽고 이후 포숙아가 재상에 올랐는데 포숙아는 올곧은 사람이라 이때까지는 삼흉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오히려 융통성이 있었던 관중 때보다 더했다고 한다. 물론 포숙아도 죽고 환공의 고삐를 죌 마지막 보루가 사라지자...[22] 영안왕 고준(高浚), 평양왕 고엄(高淹), 낭야왕 추존 초공애제 고엄(高儼), 곡률광 처형[23] 이때문에 그의 아들인 조군언에게까지 불똥이 튀는데 수나라 시절 뛰어난 문재에도 중용되지 못하고 홀대받다가 결국 이밀 수하에서 수나라 전복에 협력했다.[24] 숭정제는 의심이 많아 17년간 재상을 50명이나 갈아치웠다.[25] 이 경우는 당대부터 평가가 갈렸다. 민생을 안정시키고 황음무도한 군주를 폐위한 다음 명군을 세운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26] 손권의 장남이었던 손등의 아들이다.[27] 다만 제갈각은 자기가 자기 무덤 판 것도 있다.[28] 중국사에서는 평가가 엇갈린다.[29] 유비는 경제의 후손으로 후한에서는 황족 취급을 받지 못했으며, 후한에서는 광무제의 후손이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유씨는 없는 상황이었다.[30] 실제로 유비헌제로부터 조조 암살의 밀명을 받은 적도 있을 만큼, 황실로부터도 한나라 사직의 수호에 대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괜히 헌제가 남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촌수가 먼 그를 자신의 숙부로 공인한 것이 아니다.[31] 실제로 유비가 건국한 촉한은 존속 기간 내내 중원의 수복을 목표로 위나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했다. 제위에 오르고자하는 야심이 있던 것과는 별개로, 본인의 손으로 황실을 복원하고자하는 생각은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32] 또한 관중의 명가 화음홍농 양씨를 효장제의 거사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몰살시켰는데 여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도망친 양준언은 고환에게 의탁하여 이주씨 토멸에 앞장섰고 이후 북제의 명재상이 된다.[33] 아브넬은 이전 요압의 동생이자 다윗의 조카 겸 용사대의 일원인 준족의 소유자 '노루발' 아사헬을 죽인 악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