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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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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된 이후
3. 사후4. 평가


Flavius Ricimer (? ~ 472년 8월 18일)[1]

1. 개요

서로마 제국게르만족 출신 장군이며 서로마 말기 최고의 권신이자 간신.

군사적으로는 나름 성과를 거두었던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그보다는 국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여러 명 갈아치운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서로마의 최충헌'으로 불릴만한 인물로, 장기간 서로마 제국을 좌지우지하면서 4명의 황제들을 직접 시해하거나 시해를 사주했으며, 황제 시해 외에도 각종 매국 행위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겨우 4년 만에 그가 직접 등용한 동게르만계 스키리족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명목상으로만 남아있었던 서로마 제국을 소멸시키면서 소위 막타를 치게 된다.

2. 생애

2.1. 초기

리키메르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불확실한데, 학자에 따라서는 430년대 초까지도 올라가지만 대체로 418년 근처의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가계도 역시 불확실한데, 학자들은 리키메르가 서게르만계 수에비족 출신의 부친과 동게르만계 서고트족 출신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리키메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였던 아에티우스의 휘하에서 용병대장으로 활약하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454년 아에티우스가 황제에 의해 암살당하고, 이듬해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까지 아에티우스의 잔당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되고, 서로마 제국에 권력의 공백이 생겼는데, 이 틈에 리키메르는 코르시카 섬의 반달족 함대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얻었고(코르시카 해전) 이 위세를 바탕으로 친구인 마요리아누스와 힘을 합쳐서 서로마 황제 아비투스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2] 456년 파죽지세로 라벤나로 진군한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는 아비투스를 쫓아버리고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3]이었던 레미스투스(Remistus)를 처형했다. 갈리아로 달아난 아비투스는 군대를 모아 반격을 시도했지만 피아첸차(Piacenza) 전투에서 리키메르-마요리아누스군에 대패하면서 폐위되었다.(리키메르의 제1차 황제 폐위) 그나마 리키메르는 아비투스를 바로 죽이지는 않고 전투가 벌어졌던 피아첸차의 주교로 임명했는데, 이후 아비투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1년 만에 사망했다(아비투스 항목 참조).

2.2.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된 이후

리키메르는 이렇게 정권을 찬탈했지만 기본적으로 게르만족 출신인데다가 이단인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다.[4] 그래서 그는 황제에 오르는 대신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도움으로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된 후 1년 가까이 황제를 임명하지 않고 제위를 방치했다. 하지만 군대와 원로원의 압박에 밀려서 결국 457년 서게르만계 알레만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동료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앉혔다.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명목상의 황제로 놓아두고 자신이 전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황제치고는 대단히 유능했던 인물로 리키메르 못지 않은 군사적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제위에 오른 후에도 계속 군사적으로 큰 성과를 내고 내치에서도 여러 개혁을 통해 뛰어난 행정력을 보여주면서 시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위상이 높아지자 황제와 리키메르 사이에는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서기 461년 마요리아누스는 용병을 모아서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치려고 했으나 가이세리크와 내통한 신하들의 배신으로 실패했다.[5]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마요리아누스는 일단 대 반달 원정을 단념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이때 마요리아누스가 자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소수의 호위 병력만 이끌고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리키메르는 토르토나 인근에서 기습적으로 마요리아누스를 사로잡은 후 그를 처형해 버렸다.(리키메르의 제2차 황제 폐위) 자세한 사항은 마요리아누스 항목 참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리키메르는 군사적인 성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마요리아누스를 따르던 무장들이 대거 리키메르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마요리아누스가 수복했던 영토의 대부분이 다시 서로마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즉 갈리아 주둔군을 담당하던 아에기디우스(Aegidius)나 달마티아에 있었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 등의 장군들이 모두 리키메르에 반기를 들고 사실상 독립 세력이 되었다.

마요리아누스가 처형된 후 변방에서는 이처럼 동요가 일어났지만 제국 내에서 리키메르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이후 임명된 황제들은 그의 꼭두각시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리키메르의 비위를 거슬리면 바로 쫓겨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한 후 몇 개월 동안 제위를 방치하다가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앉혔다. 출신이 모호한 이 신임 황제는 동로마 제국이나 주변의 게르만계 왕국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각지에 주둔하는 로마인 군벌들조차 세베루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465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붕어하는데 리키메르가 독살했을 가능성이 높다.(리키메르의 제3차 황제 폐위로 추정)

세베루스가 붕어한 후 리키메르는 동로마 황제의 재가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서로마 황제 자리를 비어 두었는데, 1년 반 동안의 공백 끝에 동로마 황제가 보낸 안테미우스가 제위에 올랐다. 안테미우스는 권신 리키메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기 딸을 리키메르에게 시집보내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나름 황제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던 안테미우스는 자신을 허수아비로 놓아두려는 리키메르와 충돌하게 되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동로마 황제에 의한 반달족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자(본 곶 해전)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리키메르에게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앉히라고 압박했는데, 이를 명분으로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로마에 있었던 안테미우스를 공격하여 죽여버렸다.(리키메르의 제4차 황제 폐위) 자세한 것은 안테미우스 항목 참조.

안테미우스를 죽인 후 40일 뒤에 리키메르도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피를 엄청나게 토하고 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3. 사후

전술한 바와 같이 리키메르가 유능한 황제였던 마요리아누스를 시해하자 그를 따르던 무장들이 대거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마요리아누스가 생전에 수복한 영토 대부분이 서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결국 리키메르가 죽은 직후 서로마의 세력권은 이탈리아 반도와 달마티아,[6] 그리고 혼란이 계속되는 갈리아 북부 지역만 남게 되었다.[7]

리키메르의 사후 실권을 잡은 그의 조카인 군도바트(군도바두스)는 신임 황제 올리브리우스를 살해하고 글리케리우스를 옹립했다. 하지만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군도바트는 자신의 부족인 부르군트족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1년만에 로마를 떠나버렸고[8] 글리케리우스는 제위 1년만에 동로마 황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율리우스 네포스의 공격을 받고 망명했다. 하지만 네포스는 1년 만에 로마인 오레스테스의 반란에 의해 쫓겨났고, 리키메르의 지위를 차지한 오레스테스는 군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1년만에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용병부대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했다.(라벤나 함락) 오도아케르는 오레스테스의 아들이었던 어린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후 더 이상 황제를 임명하지 않으면서 서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결국 리키메르가 죽은 지 4년 만에 서로마 제국은 그의 부하였던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4. 평가

리키메르는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서로마의 역량을 완전히 망가뜨렸으며 현재는 서로마 제국 소멸의 가장 큰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21세기 이후 서로마 말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계속 평가가 떨어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스틸리코아에티우스를 무너져 가는 서로마를 지탱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최후의 로마인으로 칭하는데 리키메르는 완전 반대의 의미로 최후의 로마인의 칭호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리키메르는 전임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의 집권을 참고했지만 그들과는 노선이 달랐는데,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가 모두 충성스럽게 황제를 섬기는 존왕양이를 고수하다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비참하게 몰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키메르는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기 보다는 황제는 명목상으로 놓아두고 자신이 실세 역할을 하려고 했다. 이렇게 황권을 제약하려고 했던 탓에 그가 실권을 잡은 동안 황제가 여러 번 바뀌게 되는데, 가뜩이나 약해지고 있었던 서로마 황제의 위상은 리키메르로 인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서 그의 치세에서 황제는 말 그대로 명예직이 되어 버렸다.

리키메르의 잦은 황제 교체는 서로마 제국의 모든 국력을 내치에 소모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불안하고 쇠락해가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신경썼을 뿐 제국의 영토나 세력권 확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서로마 제국의 지배 영역은 계속 축소되었으며 결국 본인이 죽은지 4년 후에 서로마제국은 사라지게 된다.



[1]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402년부터 43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다만 430년대 초반설을 따를 경우, 제국의 실권을 잡게 되는 나이가 너무 이르다는(10대 후반~20대 초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현재는 최소한 430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2]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의 옛 동료로, 아에티우스 밑에서 함께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3] 로마군 총사령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군 통수권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행정과 사법까지 장악했다. 오늘날로 치면 합참의장 + 국무총리 + 대법원장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문•무로 구분했을 때 거의 1:1로 대응되는 최상급 문관직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아니도 서로마 제국에 있었지만 난세였던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문민통제의 퇴조로 유명무실해졌다.[4] 리키메르의 모친이 서고트족의 공주였기 때문에 리키메르 가문은 나름 왕족이었는데, 서고트 왕이었던 그의 외할아버지가 사망한 후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서 로마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5] 리키메르가 이 배신의 배후라는 주장이 있다.[6] 정확하게 말하면 달마티아는 황제를 자처한 율리우스 네포스의 세력권에 있었다[7] 갈리아 지역의 경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로마인의 세력이 강했고, 여기에 대부분의 게르만계 부족들이 동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아 친로마 노선을 지향하는 상태였던 덕에 의외로 지배가 길게 이어졌다. 다만 서로마 본국의 통제권에 놓인 것은 아니었고 로마인들의 세력이 유지된 것 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당시 갈리아 총독이었던 시아그리우스(Syagrius)가 오늘날의 프랑스 수아송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 것으로 오늘날 프랑스 북부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아예 이 정권을 수아송 왕국(Kingdom of Soisson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왕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잠시 이어지다가, 10년 뒤인 486년에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족에게 멸망했다.[8] 그래서 군도바트는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보다는 부르군트족의 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즉위 후 꽤 오랜 기간 통치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부르군트 왕국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