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히파티우스 (영어: Hypatius 그리스어: Ὑπάτι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532년 |
직위 | 집정관 |
반란 대상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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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이자 집정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기 니카의 반란을 일으킨 시민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가 진압당했다.2. 행적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들 중 한 명으로, 서기 500년에 집정관을 역임하였고, 사산 왕조와의 전쟁과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의 반란 진압에 활약했다. 하지만 별다른 세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삼촌이 사망한 뒤 후계자로 거론되지 못했다. 그래도 근위대장이었다가 제위에 오른 유스티누스 1세는 히파티우스와 폼페이우스, 프로부스 등 아나스타시우스의 세 조카들을 잘 대우했고,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마찬가지였다.그러던 532년 1월 10일, 원형 경기장에서 청색당과 녹색당이 원형 경기장에서 싸움을 벌이자 진압군이 투입되어 주동자 7명을 처형했다. 그런데 그중 2명이 칼을 맞았는데도 숨이 붙어 있었다. 수도자들은 이들을 구해 보스포루스 건너편에 있는 성 라우렌티우스 수도원의 성소로 옮겼다. 진압군이 이들을 잡으려 하자, 시민들은 두 사람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며 시위를 벌였다.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은 각각 청색당과 녹색당 소속이었다. 그 결과 두 당파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유스티니아누스에 항거했다.
1월 13일, 두 당파는 원형 경기장에 들어가서 경주를 관전하던 황제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고, 곧 경기장에서 나와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치안대 건물을 파괴하고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줬으며, 원로원 의사당, 에이레네 성당, 성 소피아 성당까지 모조리 불살랐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닷새간 도시 전역에 매캐한 연기가 깔렸다. 급기야 두 당파는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 프로부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프로부스가 수도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흥분한 군중은 프로부스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렇듯 상황이 심각해지자, 히파티우스와 폼페이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황궁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내부에서 폭도들과 내통할 것을 우려한 황제에 의해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황궁에서 추방당했다. 그 후 군중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 하자, 황위에 야심이 없던 히파티우스는 어떻게든 숨으려 했으나 얼마 안가 발각당하여 원형 경기장으로 억지로 끌려왔다. 군중은 금 목걸이를 그의 머리에 씌워 주고, 경기장의 황제 좌석에 앉혔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반란은 진압되었고, 히파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앞으로 끌려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평소 히파티우스와 원만한 관계였고, 그가 억지로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자비를 베푸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가 군중이 제관을 씌워준 사람이니 언제라도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으니 처단하라고 설득하였고, 결국 히파티우스는 동생 폼페이우스와 함께 즉결 처형되었고 시신은 바다에 던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