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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0 15:26:11

시아그리우스

시아그리우스
라틴어: Syagrius
생몰년도 430년경 ~ 486년
출생지 서로마 제국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루그두눔[1]
사망지 프랑크 왕국
지위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국가 서로마 제국수아송 왕국
가족 아에기디우스(아버지)
참전 갈리아 패권 전쟁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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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수아송 왕국의 군인, 정치인.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군 사령관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에기디우스의 아들로, 부친 사후에 직위와 군대를 물려받아 루아르에서 솜 사이의 갈리아 북부를 다스렸다. 486년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군에게 패배한 뒤 서고트 왕국으로 망명했다가 프랑크 왕국으로 압송되어 목숨을 잃었다.

시아그리우스의 군대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세력이었으며 그의 사망을 기점으로 서로마 제국 소속을 자처하는 정치적 / 군사적 세력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2. 생애

마요리아누스의 핵심 장성으로서 서로마 제국의 회복을 위한 전쟁에서 활약하다가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한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 대항해 갈리아 북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킨 마기스테르 밀리툼 아에기디우스의 아들이다. 464년 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직위와 군대를 물려받았다. 그는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자 둑스(DUX)로서 통치했지만, 프랑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서고트 왕국 등 주변 이민족 국가들은 그를 렉스(REX)라고 칭했고, 후대 학자들은 그를 수아송 왕국의 군주로 기록했다.

그는 아버지가 취한 정책에 따라 힐데리히 1세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서고트 왕국부르군트 왕국에 대항했다. 서로마 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와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영토를 20 여년간 사수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이탈리아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동로마 제국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제국 서부를 통치할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제노 황제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자 역시 교류를 끊었다.

481년 그동안 시아그리우스에게 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킬데리크 1세가 사망하고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그는 5년간 주변의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장악하며 힘을 키웠다. 이윽고 486년, 클로비스 1세는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시아그리우스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수아송 전투에서 참패하여 모든 세력을 잃고 서고트 왕국에 망명했다. 클로비스 1세가 시아그리우스를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서고트 왕국을 위협하자 서고트 왕 알라리크 2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시아그리우스를 프랑크 왕국에 넘겨줬고 시아그리우스는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갈리아에서 버티고 있던 서로마의 잔존 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3. 기타

보통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을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476년으로 보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달마티아 지역에서 로마 황제를 자칭했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이나[2] 시아그리우스의 수아송 왕국이 멸망한 486년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보통 무너져 가는 서로마를 마지막으로 중흥시켰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최후의 로마인으로 일컫는데, 업적을 떠나 시간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시아그리우스를 진정한 의미최후의 로마인으로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군대가 서로마 제국 소속을 자처한 마지막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능력이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으로 군 통수권자가 되었고 아버지와 같은 군사적/외교적 성과도 없었으며 말년에 도망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은 그에게 과연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수아송 왕국 항목을 참조.
[1] 오늘날 프랑스 리옹[2] 네포스의 경우 '동로마 황제가 정식으로 인정한 서로마 황제'라는 명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