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36년 5월 17일
1. 개요
고려 시대의 무장. 태집성(太集成)이라고도 불렸다. 고려에 귀부한 옛 발해 왕족의 후손으로 협계 대씨의 시조다.[1]2. 생애
고려 고종 때 낭장(郞將)을 지내고 1218년에 차장군(借將軍), 1228년에 대장군(大將軍) 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지내기도 했다. 후에 정승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는 수사공(守司空)까지 올랐다고 한다.조상인 대조영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켜 발해를 세운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 다른 조상인 대도수는 제1차 여요전쟁 때 승전보를 울리며 서희의 외교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으며 제2차 여요전쟁 때는 패배하긴 했으나 고군분투하며 잘 싸웠다.
그러나 대집성은 무신정권 당시 아첨하고 무능한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게 되면 인맥을 믿고 날뛰다 자기 말 안 들으면 일단 없애고 보는 전형적인 간신배.
다만, <고려사>에선 최우가 그 막장성을 가볍게 뛰어넘은 탓에 대집성이 병풍 처리된 감이 있고 간신 열전에 실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최우를 미화시키는데 일조한 박훤[2]이 오히려 간신 열전에 오른 덕택에 대집성이 묻힌 것이다. 안북성 전투 때의 일이나 이후 일을 보면 사실 열전에 올리기엔 민망할 지경이긴 한데, 어쨌든 간신 열전과 폐행 열전에 올리지 않은 건 그래도 최우와 달리 나가서 몽골 군대와 싸웠다는 것이 덕택이고, 안북성 전투를 두고 대집성 능력 탓만 하기엔 몽골군이 원체 강하기도 했으며, 박훤이 최우를 미화하는데 신나게 열을 올린 것과 달리 대집성은 그래도 그런 짓까진 하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간신 축에도 낄 정도는 아니었던 셈.
음험성도 그닥이었고 아부를 시전하긴 했지만 눈치도 없었고, 최씨 정권에 갈굼만 당하고 이후 유배 크리까지 먹었으니 굳이 찾자면 폐행 정도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반대로 박훤, 송길유, 김준은 되려 최씨 정권을 연장시켰고, 김준도 붕괴시킴과 동시에 최씨 정권을 연장시켰기에 그들의 장기 집권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사실 이들도 대집성처럼 눈치도 없고 겁쟁이로 전락하는 순간 최씨 정권의 수명은 길어봐야 최우로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수사공(守司空)으로 있다가 1236년 5월 17일 사망했다.
3. 일화
- 1218년 4월, 최충헌이 무인들에게 인심을 사기 위해 벼슬을 뿌렸고 이 덕에 낭장이었던 대집성이 차장군(借將軍)에 임명되었다.[3] 기분이 한껏 좋아진 대집성이었지만 곧 자기 휘하에 이끌 수 있는 부대가 없다는 걸 알자 승려와 노비를 안 가리고 자기 부대로 무조건 모두 징발하는 바람에 노비가 없어진 개경에 나무를 자르거나 짐승 기르는 사람까지 없어져 개판이 되어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최충헌이 "이 자는 답이 없다"며 바로 칼같이 잘라버렸다.
- 1228년 8월, 중이 자혜원(慈惠院)을 지으려고 강음현[4]에서 나무를 베었는데 강음현 감무(監務) 박봉시(朴奉時)가 이를 금지하고 그 베어버린 나무를 관가에 바치게 했다. 그래서 화가 난 중이 대집성에게 아부를 하며 "박봉시가 나무를 빼앗아갔는데 돌려달라고 말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했고 기분이 한껏 좋아진 우리의 대집성은 박봉서에게 "그러지 말고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박봉시는 이를 개무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집성이 자신을 무시했다며 분노, 최우에게 서신을 요청하니 최우가 교정소(敎定所)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이도 무시하자 대집성이 최우에게 박봉시를 유배 보내야 한다고 말해 결국 박봉시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대집성을 맹비난했다.
- 1231년 제1차 자모산성 전투(자주성)에서 최춘명이 항복을 거부하자 최우에게 "최춘명을 죽여야 몽고가 우릴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나라를 지킨 충신을 죽일 뻔 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몽고 관리[7]가 "이 사람이 우리에게는 비록 명령을 어긴 사람이나 너희로 보아서는 충신이니 나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미 우리와 화친을 약속하였으니 성을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이 옳겠는가?"라며 끈질기게 뜯어말려서 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최춘명은 이후 전공을 논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었고, 이후 종3품 추밀원부사로 발탁되었다. 그의 아들 최념도 관직이 위위경에 이르렀다.
- 몽고의 2차 침입 당시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하려고 재상들을 자신의 집으로 소환했다. 모든 이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반대하지 않았는데 오직 야별초지휘(夜別抄指揮) 김세충(金世冲)만이 "개경은 태조대왕 이래로 200년 넘게 우리의 수도이며 성도 튼튼하고 식량도 많은데 왜 막을 생각 않느냐고 엎드리며 반대를 했다. 이에 최우가 "그럼 방어할 방법이 있느냐?"고 묻자, 김세충이 우물쭈물 했다. 이 모습을 본 대집성은 "국가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대책없이 말하는 저런 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죽여버립시다."라며 최우에게 아부를 떨었다. 옆에 있던 김현보(金鉉甫)도 대집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같은 발언을 했고 결국 김세충은 그 자리에서 끌려나와 처형당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8]
- 대집성 사후 대집성의 딸 대씨가 김약선의 아들 김미를 후계자로 밀면서 최항과 갈등을 빚는데 대집성이 죽고나서 그의 딸은 독살되고 대씨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오승적도 같이 죽었다. 여기까진 괜찮은데 오승적의 친척 중에 김약선의 동생이자 귀주성 전투와 나주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한 영웅인 김경손이 연루되어 덩달아 김경손도 살해당했다.
4. 대중매체
- 드라마 무신에도 노영국이 배역을 맡아 등장하는데, 최우에게 항상 갈굼을 처당하는 눈치없는 찌질이이자 개그 캐릭터로만 나온다.[9] 최우의 후처로 들어간 딸 대씨와 그녀의 전 남편에게서 얻었던 외손자인 오승적을 이용해 권력을 탐내다가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 최항 대에 쫓겨난 것으로 퇴장. 생각보단 꽤 비중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실제 역사와 달리 오래 남았던 것이 문제인 듯 하다.[10] 참고로 노영국은 제국의 아침에서 고려 혜종 역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다.
- 소설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에서는 대부분 실제 역사와 행적이 비슷하지만 자주성에서 최춘명에게 항복을 권할 때 명령을 무시당하자, 살리타이에게 "삼군의 진주라면서 휘하 장수에게도 명령이 먹히지 않다니, 그대가 과연 삼군의 진주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조롱을 받는다.
5. 관련 문서
[1] 족보에서는 대도수의 6대손이라고 한다.[2] 본관은 공주 박씨이며 초명은 박문수(朴文秀). 최우의 가신이 된 이후 사관(史官)이 되었던 그는 최우를 미화시킨 책을 편찬해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후 최항과 관련된 발언을 하다 미움을 사 흑산도로 유배를 갔고 이후 최우가 다시 올라오라 명하자 당시 박훤을 증오하고 보기만 해도 찢어죽이고 싶어하는 최항이 자객을 보내 그를 무참하게 죽였다.[3] 앞에 借(빌릴 차)가 붙는 건 지금으로 따지면 비정규직 자리다. 윗사람이 그냥 포상용(떡밥)으로 던져주는 상징적인 직책. 직책명부터가 "장군이라는 직책을 잠깐 빌려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기가 이끌수 있는 병력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우둔하고 눈치없는 이 멍청이는 그걸 몰랐던 거다.[4] 江陰縣, 현재의 황해북도 금천군[5] 성 밖에서 야전을 벌여야 한다고 했고 결국 고려군이 성 밖으로 나갔으나, 대패했다.[6] 갓 과부가 된 대집성의 딸이 예쁘다는 말을 들은 최우가 그 딸을 데려다가 후처로 삼았다. 당시 대집성은 후군(後軍)의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비록 전투에서 패배하는 일이 있더라도 최우(빽)를 믿고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 《고려사》 최이 열전.[7] 원나라로부터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8] 비록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서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지만, 원칙적으로 이 자리는 고려의 최고집정자인 최우가 정3품 이상의 고위직인 재상들을 불러다가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한 것이였다. 그런데 야별초지휘{혹은 夜別抄指諭}라는 직은 指諭라는 명칭에서 보다시피 가장 높아봐야 정5품 중랑장급 정도이고, 야별초라는 부대는 최우가 자신의 사적인 경비를 위해서 조직한 군사조직이었다.(물론 경찰업무도 담당하였다.) 특별한 대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이상 함부로 이야기해도 될 위치가 아니었다.[9] 제1차 여몽전쟁에서 대패한 뒤 최우에게 항상 무시당한다.[10] 실제 대집성은 위에 연도에도 나오지만, 최우보다 13년 전에 먼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