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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6:21:17

민승호

민승호
閔升鎬
파일:민승호 묘.png
<colbgcolor=#292929><colcolor=#FFF> 이름 <colbgcolor=#FFF> 민승호 (閔升鎬)
본관 여흥 민씨 (驪興)
복경 (復卿)
시호 충정 (忠正)
출생 1830년
사망 1875년 1월 5일 (향년 45세)[1]
한성부
직업 정치가, 관료
종교 유교 (성리학)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주요 경력 홍문관 교리
규장각 직각
가례도감 부제조
이조참의
호조참판
형조판서
수원유수
병조판서
가족관계 친부: 민치구
친모: 전주 이씨
누나: 여흥부대부인
동생: 민겸호
양부: 민치록
양모: 한산 이씨
여동생: 명성황후
부인: 광산 김씨, 연안 김씨,덕수 이씨
양자: 민영익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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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척신(戚臣)으로 본관은 여흥 민씨. 민치구의 둘째아들로 흥선대원군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으로 고종의 외숙부인 동시에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된다. 민승호 암살 사건으로 사망한다.

2. 생애

1830년(순조 30년) 판돈형부사를 지낸 민치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와 형이 있었는데 누나는 흥선대원군의 아내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며 형은 민태호(閔泰鎬)이다. 아래로는 남동생 민겸호와 여동생이 있었다. 이후 1861년(철종 12년)에 11촌 아저씨이자 명성황후의 생부인 민치록양자입양되었다. 이에 따라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었다. 1864년(고종 1년) 중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이 된 고종의 휘하 관료로 입문하게 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 양누이인 명성황후가 고종의 왕비가 되면서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때 고종의 입장에선 외삼촌이 처남이 된 셈이다. 이후 호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 국면에서는 친동생인 민겸호, 친척동생인 민태호[2] 등과 함께 명성황후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되었을 때는 명성황후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운현궁…"
― 민승호의 유언[3]

그러나 1875년 1월 5일, 자택에 있던 중 한 수령이 보낸 선물을 받게 되면서 선물을 개봉하려는 중 폭탄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숨졌다. 동시에 일가족도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때 그의 양어머니 이씨와 아들도 함께 사망했는데 만약 이 폭살의 배후 조종자가 흥선대원군이 맞다면 흥선대원군은 자기 처남과 사부인을 죽인 셈이 된다. 폭사 이후 고종으로부터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4]

3. 대중매체



[1] 음력 1874년 11월 28일. 민승호 암살 사건 문서 참조.[2] 민승호의 형인 민태호(閔泰鎬)가 아니라 민치삼의 아들이자 동명이인인 민태호(閔台鎬)이다. 이 사람의 아들인 민영익이 이후 명성황후 친정의 대를 이을 민승호의 양자로 갔으며 딸은 명성황후의 며느리가 되니 바로 순명효황후이다. 여러모로 민승호 및 명성황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3] 운현궁은 당시 흥선대원군이 살던 장소이다.[4] 민승호의 조카 민영환의 시호도 민승호와 같은 '충정공'이다.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고 지칭하면 주로 민영환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