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Lucius Aelius Sejanus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티베리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최고급 행정관료이자 권신, 간신.
티베리우스 황제의 부하. 프라이토리아니의 대장(근위대장)으로 오늘날까지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로마사 전체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음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외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했다고 하며, 율리우스 가문의 대다수 남자 황족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제3대 황제가 되는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이자 칼리굴라의 사촌동생이었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씨를 말려버린 사람으로 악명높다.
세야누스는 에퀴테스 계급 출신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이후 근위대장이 근위대를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칼리굴라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킨 이후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미다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에게 고발당한 뒤, 즉시 체포돼 반역죄로 사형 선고 후 교살됐다.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그 일가와 가문 전체가 멸족됐다.
2. 생애
2.1. 출신과 어린시절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지만, 고향이나 출신계급, 가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인 세야누스는 에트루리아 사람으로, 오늘날의 중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이 고향이다.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으로 임명되는 등 총애를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동맹자이자 친구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아내 테렌티아와 결혼한 에퀴테스였고, 이를 계기로 원로원 유력 인사들과 연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는 세야누스의 아버지 세야누스 스트라보 역시 비슷했다. 아버지 스트라보는 에트루리아 지방 동향이기도 한 마이케나스의 총애를 받아 기사계급 출신이 원로원에 입성하지 않고도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프라이토리아니 장교가 됐다. 이후 기원전 2년에는 마이케나스의 후원으로 아우구스투스를 보필하는 근위대장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여러 번 결혼해 형성한 인척 관계와 살아생전 마이케나스가 꾸준히 도움을 준 덕분에, 세야누스 역시 일찍이 이집트 장관을 지낸 아일리우스 갈루스 형제의 아일리우스 가문에 입양돼,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에트루리아 출신들을 후원한 마이케나스, 세야누스의 입양 가문과 친아버지 스트라보의 도움을 배경 삼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다양한 원로원 유력자들 밑에서 기회를 얻었고, 당대 최고의 미식가 아피키우스와도 연인 관계를 맺어 출세를 지향했다.[1]
훗날 행보를 보았을 때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눈치가 대단했고 조부 대부터 쌓아 놓은 인맥 등을 활용할 줄 아는 것도 탁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세야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에 들어온 뒤 승승장구했다. 따라서 기원전 1년 당시 제위 계승 후보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방 순행에 동행했고,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근위대장이 된 이후에는 차기 관료로서 친분과 경력을 쌓았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야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제위계승자 티베리우스와도 접촉할 수 있게 됐는데,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티베리우스에게 그 능력과 충성심을 서서히 인정받았다고 한다.
2.2. 근위대장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근위대장이었던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공동 근위대장이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을 유일한 근위대장에 임명해줄 것을 주장해 1~2년 뒤에 단독으로 근위대장이 되었다. 단독 근위대장이 된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쌓으면서, 이전까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해온 9개의 보병대가 로마시 동쪽 교외의 근위대 막사에 함께 주둔하는 것을 이용해 서서히 권력을 키워나갔다. 14년에 판노니아의 로마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小) 드루수스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유능한 모습을 보여 티베리우스에게 중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야심도 드러냈다.20년에 자신의 딸을 황족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2]와 약혼시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자 했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3]로 황태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며, 소 드루수스의 처남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4]의 아들로 세야누스에겐 좋은 사윗감이었다. 왜냐하면 이 소년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 모두의 손자로 그 혈통이 카이사르 가문의 적통이면서도, 소년의 아버지가 일찌감치 제위 계승 서열에 밀려 기사계급인 세야누스에겐 최고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약혼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질식사로 급사해 결국 무산되었다. 그는 모친 플라우티아 우르굴리닐라의 남성편력과 방치 속에서, 배를 공중에 던지고 입으로 받아먹는 놀이를 하다가 과일이 기도에 박혀 질식사했다. 이는 세야누스가 몰락한 이후, 세야누스가 그를 살해했다고 하는 말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당시 소아마비로 아우구스투스 생전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린 클라우디우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이 없었던 점을 들어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주장은 현실성없는 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
세야누스가 야심을 보인 모습은,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많고 사람이 진실되지 않아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세야누스는 뛰어난 처세술과 쇼맨쉽을 앞세워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의심을 사지 않았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5]는 세야누스의 본심을 눈치채, 그를 경계했다. 이는 소(小) 드루수스가 서기 1년 전부터 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정치술, 용인술, 심리분석 등 통치에 필요한 제왕학을 직접 배운 결과였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를 두려워하면서 대립했고, 이는 그가 소 드루수스와 끝없이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됐다. 이는 어릴 때부터 세야누스와 그 친부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친분을 맺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역시 비슷했다. 같은 기사계급 출신인 테렌티우스는 세야누스의 본심을 꿰뚫어 봐서 그를 경계했다가, 세야누스가 권력과 가까워지고 악행을 저지르자 이를 규탄했다. 그 결과, 둘은 원수이자 정적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22년, 폼페이우스 극장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때 세야누스는 소방대와 프라이토리아니를 동원해 화재의 진화에 노력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 결과,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그 공적을 칭찬받았다.
2.3.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서기 22년에서 23년으로 넘어갈 무렵,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Socius Laborum(내 수고로움의 동반자)"라는 거창한 칭호를 수여받을 정도로 신임을 굳힌다. 그는 1만 2천명의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을 전부 지휘하게 됐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기사계급에 불과한 그에게 이례적으로 법무관으로 추천해 원로원 의원이 될 길을 열어줬다.23년, 당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제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요절했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로는 티베리우스의 친아들로, 율리우스 가문 남성 중 가장 연장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6],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삼남 가이우스 카이사르[7], 소(小) 드루수스가 리빌라와 결혼해 낳은 일란성 쌍둥이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 형제가 있었다. 그 외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자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로, 티베리우스의 친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도 있었다. 헌데 그는 어릴적 앓게 된 소아마비 장애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생전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제위 후보에서 일찌감치 배제된 상태였다.[8]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 황제는 서기 22년 폼페이우스 극장 화재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한 세야누스를 칭찬하면서, 세야누스 전신상을 폼페이우스 극장에 세워줬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 주변으로 야심 많은 추종자들이 몰려들고 세야누스의 형제, 친척, 친구들은 속주 총독, 지방 장관, 고위 관료로 승진했다. 세야누스는 이탈리아 기사계급 야심가들의 롤모델이 됐고, 그가 가진 근위대장 자리는 어떤 원로원 의원, 황족들보다 막강해졌다. 이렇게 되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런 부황의 조치에 강하게 반발했다.
사실, 서기 20년부터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었다. 소 드루수스는 인격자로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예의바른 황족이나, 세야누스를 경계해 그를 요주의 인물로 여겼다. 그는 아직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과는 달리 나이와 경험이 출중했다. 서기 4년 직전부터 아우구스투스 생전,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와 격려 아래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티베리우스 사후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제왕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요절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였고, 황실 내 음모도 중재자로 완만히 해결해, 권좌에 대한 야망을 이루려는 세야누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런 드루수스의 반발과 개입은 세야누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당시 소 드루수스는 인기 없고, 냉혈한으로 단단히 찍힌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달리 원로원, 평민,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모두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는 판노니아 총독으로 파견돼, 뛰어난 행정력과 외교 능력을 선보였고 로마군을 이끌며 탄탄한 능력을 선보였다. 축제가 열리면 매우 무관심한 아버지와 달리, 과거의 아우구스투스처럼 열정적으로 평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줬고 부정부패에 대해선 굉장히 엄격하고 공정해 원로원 귀족, 기사계급 관료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런 드루수스가 개입하자, 세야누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황태자 드루수스는 서기 20년 자신의 처남이며 사촌동생인 클라우디우스의 어린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자기 사위로 맞이려는 세야누스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다. 그 전인, 서기 15년 판노니아 파업 사태부터 세야누스를 직접 데리고 다니며 그 인성과 비열함도 알고 있어 경계 중이었다. 따라서 서기 22년, 세야누스가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총애만으로 황족, 원로원 의원 중 개선장군 수준의 공을 세운 인사들도 못 받는 특권을 선사받은 것을 프린키파투스 체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판단 그대로, 원로원 귀족과 각 속주 총독들은 "세야누스가 황제 배경만 믿고 설친다"고 불만을 표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인사들과 만나 그들의 입장을 들은 뒤, 아버지 티베리우스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노골적으로 세야누스를 간신이라고 칭하면서 울분을 토했고 아버지에게 공화정 전통을 위협하는 세야누스와 그 일당을 없애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는 세야누스를 감싸는 아버지에게 객관적 증거를 거론하면서, 논리적으로 따졌다. 이는 효자로 이름난 드루수스가 일평생동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행동이라서, 티베리우스는 그런 아들을 되려 크게 혼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린다. 이 당시 드루수스는 아버지와 공동 집정관을 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를 잡아내고 수도 사업 등 로마의 주요 행정 조치의 문제점, 비용 처리 문제 등 어렵고 복잡한 사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원로원에게서 자발적 지지를 얻어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날, 세야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헛소리를 하면서 국정 과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드루수스는 논리적으로 세야누스가 내린 판단을 지적했다. 이에 세야누스는 자신이 서기 4년 직후부터 윗사람으로 모신 드루수스에게 막말을 퍼부었고, 이는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인격자로 이름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격분케 했다. 그 결과,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회의 중 논쟁이 붙은 세야누스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다가, 세야누스의 비열함에 격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주먹으로 세야누스를 때려 단번에 내리치고 그를 땅바닥에 때려 눕혔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원로원 안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처지가 됐다. 이 사건 직후, 세야누스는 자기 부하들에게 "황제가 고령이라서 서거하면, 곧 황제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손자 놈이 제위에 오를 것이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세야누스는 이 발언 후, 주눅들기는 커녕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반드시 제거해야 될 정적으로 점찍는다. 결국 세야누스는 자기 본심을 알아채 마찰을 빚고 있던 황태자 소 드루수스를 제거할 계획을 짜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내로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었던 리빌라(Claudia Livia Julia)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 이는 손쉬운 계략이었다. 리빌라는 엄청난 미인이나, 어릴 적부터 2살 위인 오빠 게르마니쿠스, 1살 위인 오빠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에게 열등감을 느껴 이들을 숙적으로 여기고, 바로 아래의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자기 앞길을 막는 짐짝으로 여겨 구박할 정도로 거만하고 질투심 많은 공주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기 남편인 1살 위의 소 드루수스가 어릴적부터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 부부와 친형제, 친남매처럼 사이가 깊고, 자기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챙긴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이 부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이런 황실 내 분위기를 이용해, 야심 많고 불만 가득한 리빌라에게 접근. 온갖 말로 리빌라를 구워삶아 그녀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때 세야누스에게 푹 빠진 리빌라의 요구에 따라 세야누스는 3명의 아이를 낳았던 아내 아피카타와 이혼하고 리빌라와 결혼 약속을 했고, 장차 제위를 소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이어 리빌라에게 할아버지 같은 시종이자 주치의 에우데모스, 환관 류그도스도 끌어들여 소 드루수스 암살을 계획했으며, 드루수스의 술잔 관리인, 집사 등도 포섭한다. 여기에 큰 도움을 준 이는 리빌라였는데, 그녀는 시종들과 함께 소 드루수스에게 약간의 독을 서서히 먹여서 병사로 위장하는 방법으로 암살에 성공했다.
25년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었던 리빌라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티베리우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2.4. 티베리우스의 은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받으며 공식 후계자가 되었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자,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티베리우스는 고령이었고, 드루수스는 호민관 특권을 받기 전 집정관을 하며 원로원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고 인기가 많았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자연스레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가운데 이미 성인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로 좁혀졌다.근위대의 힘과 정보력을 이용해 세야누스는 이 2명과 그들의 후원자인 대 아그리피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이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측을 이간질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빌라 역시 오빠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고, 리빌라와 소 드루수스의 딸 율리아 리비아도 어머니와 한통속이 되어 남편 네로 카이사르를 쥐잡듯 구박한 터라 세야누스의 이간계는 손쉬웠다. 따라서 그는 이런 상황을 적극 이용했으며, 시누이 대 아그리피나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리빌라 역시 자기와 유대관계가 돈독한 딸 율리아 리비아를 포섭. 모녀가 이 음모에 가담했다.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게르마니쿠스 일가의 파멸을 위해 고발과 협박, 음모를 통해 '게르마니쿠스 파'들을 제거했다. 먼저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들, 대 아그리피나의 동조자를 차례차례 고발. 이들을 은퇴시키거나, 실각시키면서 대 아그리피나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다.
25년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로 출발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낙반 사고가 일어났는데,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
27년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떠나 카프리 섬에 거처했다. 이때부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거대한 권세를 누렸다. 세야누스의 생일은 공식적으로 경축되었고, 티베리우스의 동상과 함께 세야누스의 동상이 놓이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파벌도 급격히 성장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형과 대립하고 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 포섭했다.
2.5. 권세의 절정
29년, 로마에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이었던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가 사망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대 아그리피나 일파를 숙청할 수 있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위조한 증거를 내밀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큰 아들이자 죽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죄로 고발해 유죄를 받아낸 뒤 추방해서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때 아그리피나의 친구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손녀 등도 함께 묶여 추방하거나 자살로 내몰아 제거했다.네로 카이사르는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폰티아로 추방된 이후,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인 31년 폰티아에서 자결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24년 티베리우스의 후원과 격려 속에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역임하며 인품과 능력 모두 평가가 상당히 좋았다. 그는 먼 친척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는데, 세야누스는 리빌라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밀리아를 유혹해 간통을 한 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함정에 빠뜨렸다. 이때 악명높은 카시우스 세베루스가 위조된 증거로 만들어진 스캔들을 이유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고발했고, 세야누스에게 포섭된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공격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에게 고발당해 30년부터 로마의 팔라티누스 궁전 지하실에 유폐되어 병사의 감시 아래 놓였다.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콘술(집정관)이 되었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비록 황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집정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 세력은 권세의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티베리우스는 점차 세야누스를 경계하게 되었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무렵,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인 소 안토니아[9]는 티베리우스에게 은밀히 자신의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노예 팔라스를 보내 죽은 대 드루수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세야누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마저 파멸시키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끝장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호소였다.
티베리우스 역시 섬에 틀어박혀 있어도 돌아가는 정국을 손바닥보듯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좌를 위협하며, 자신의 가문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관습적으로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은 로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세야누스는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때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의 서신, 면회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세야누스의 통제가 사라지자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야누스 일당의 힘은 티베리우스조차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 표면적으로는 세야누스를 신뢰하며 모든 속주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프로콘술 명령권[10]과 함께 향후 5년간 공동 집정관 권한을 주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황제의 3가지 권위 가운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31년 그간 반대했던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자 세야누스의 불륜관계였던 리빌라와의 약혼을 허락해 한층 세야누스의 경계심을 늦추었다.
2.6. 몰락
화려한 권력을 누리던 세야누스는 그 최후도 극적이었다.31년 5월 초,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집정관을 사임했다.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사임하게 되었다. 5월 9일, 2명의 후임 보궐 집정관이 취임했으며 이 중 1명이 그만두고, 6월 1일 세야누스의 동료인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가 취임했다. 10월 1일, 또 한 명의 집정관으로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가 취임했다.
이 시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경계하게 되어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사트리우스 세쿤두스에 의해 누설되어 티베리우스에게 입수되었다.
10월 17일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에 의해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가 세야누스 대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에 임명되어 서한을 가지고 로마에 갔다. 밤에 도착한 마크로는 그날 밤 집정관 레굴루스, 소방대장(Praefectus Vigilis)[11] 그라이키누스 라코 등에게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전달했다. 마크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권을 접수한 다음, 세야누스에게 찾아가서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도 알려주었다. 이는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였고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집정관 레굴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서한 낭독을 시작했다.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해 혹시 모를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레굴루스는 낭독을 계속했다.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은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다음 세야누스는 경비병들에게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단은 큰 장애없이 이루어졌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근위대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대처도 치밀했는데 세야누스가 근위대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게 대항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다만 이때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미 지하실에서 굶어 죽은 뒤였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속주의 군단으로 도망치는 상황까지 고려해 선박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2.7. 사후
생전 악행이 대단한데다 세야누스의 삼촌과 자녀들부터 심지어 집안 해방노예와 노예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음모에 가담하는 등, 온갖 나쁜 짓을 다한 터라 세야누스 일가의 숙청으로 티베리우스 치세의 후반은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가 됐다.세야누스의 시체는 대역죄인들에게 내려진 형벌대로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르 강에 버려졌으며, 세야누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었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 세야누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형 이후, 그의 가족과 일파 역시 반역죄로 숙청되었다.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블라이수스는 세야누스가 처형될 때 즉시 처형됐고 아직 어린 차남과 장녀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녀는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12] 아울러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도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때 아피카타는 유서로 소 드루수스 암살의 정황을 밝혔다. 따라서 모든 정황을 알아낸 티베리우스에 의해 세야누스의 남은 가족 전체와 그 노예들까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됐고, 그를 지지했던 친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들, 세야누스와 간통해 소 드루수스 암살과 게르마니쿠스 아들들의 몰락에 일조한 며느리 리빌라까지 몰살당했다.
세야누스의 악행에 놀아났다가 본인과 가문 전체까지 없어질 뻔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물론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어머니와 두 형에 이어 고모부까지 모두 잃은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는 살아생전 원로원 앞에서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울분을 토하고 이를 갈았던 만큼 세야누스 일가를 향한 황제들과 황실 자체의 보복도 벤데타 그 자체였다. 이는 판결을 담당한 원로원도 예외가 아니라서 매일 같이 황제와 피해자 가족들의 고소장이 법무관들에게 전달되고, 세야누스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거나 과거 그의 발언에 동조한 것이 확인되면 기소돼 사형, 유배형, 재산몰수 등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티베리우스의 종손으로, 차기 제위계승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아사돼 지하감옥에서 발견됐을 때 절정을 찍어 노황제가 원로원에게 서한장으로 "복수가 나쁘다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을 위해 복수하겠다"며 대대적인 세야누스파 청산이 시작됐다. 따라서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재위 후기부터 그 다음 황제인 가이우스 시대까지 원로원 전체에서 벌어진 반역죄 기소는 거진 세야누스 사건 조사 등을 통해 밝혀진 옛 세야누스 일당 처단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도망가면 황제와 원로원은 과거 술라 시대를 연상시키듯 추격대까지 보내 모조리 처벌했다.
세야누스 사건은 그 파장이 엄청난 만큼,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으로 티베리우스의 조카, 가이우스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시대 초반까지도 세야누스파 추적과 제거 작업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3. 평가
로마 제국의 역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중 악랄함과 비열함으론,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최악의 악인으로 항상 거론된다. 인맥, 지연, 혈연과 입양 등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출세한 것은 관점에 따라 그 평이 갈린다고 해도, 세야누스는 한 사람이 출세와 권력을 쥐기 위해 벌인 일은 로마사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처럼 다양하고 비양심적이었고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로마 제국 안에서의 폐해는 심각했다. 실제 기록상 그가 사용하지 않은 방법은 근친상간 외에는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로마인들에게 사후 그 일족 전체가 말살당하고도 수십년 간 세야누스 일당은 증오의 대상 그 자체였다.따라서 네로의 두 근위대장이자 총신 티겔리누스와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서기 2세기 말의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가 있고 잔혹함과 부정부패로는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가 세야누스와 함께 거론되지만, 이 네 명 중 세야누스와 동등한 수준의 악인으로 평가받는 이는 티겔리누스와 플라우티아누스 정도였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세야누스와 같은 나쁜 쪽의 완전체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유일했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말하고 있다. 사후에도 나쁜 쪽으로는 쭉 악명을 떨친 악인이었고 황제 자리를 경매로 팔아치운 라이투스를 경험한 디오에게조차 라이투스 윗급은 확정된 셈.
따라서 왕정 ~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전체를 통틀어 로마사와 동로마사 전체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음흉한 인물로 거론되고 있으며, 세야누스가 개인적 야심으로 벌인 악행은 종국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단명까지 이어졌다고 평가받는다. 오죽했으면 티베리우스를 극도로 미워한 타키투스나 전지적 원로원 입장에서 기록한 디오 카시우스 같은 후세 로마인들조차도, 대역죄인 외의 가족 구성원을 처벌하지 않는 로마 사회에서 전 국가적으로 연좌제까지 적용해 직계 가족과 방계 혈족 심지어 해방노예와 노예들까지 죄다 없앤 부분을 세야누스와 그 가족 및 노예들이 한 인과응보라는 식으로 서술했을 정도. 다만, 극도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미워하다 못해 혐오하고 증오한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어느 정도 쉴드를 쳐줬다. 그 이유는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의 부하인 것은 사실이고, 최종결정권자가 티베리우스인데다 원래부터 카이사르와 그 가족들의 악행은 유명하지 않았냐는 건데 이는, 티베리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타키투스가 "세야누스가 벌인 악행이 티베리우스의 치세를 망가뜨렸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근대 이후 학자들 주장처럼 그냥 수에토니우스 특유의 헛소리로 생각하면 편하다.
평가가 최악인 사람인 만큼, 로마 사회에 사후에도 온갖 악영향을 미쳤다. 살아생전 악행들은 티베리우스 치세 후반을 공포정치, 공안통치로 몰아넣은데다, 사후에는 세야누스파 제거 때문에 그 여파가 클라우디우스 1세 초반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니 로마사회에서 세야누스라는 사내가 바이러스 같은 악마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악행 못지 않게 그가 입안한 정책이나 기술은 의외로 꽤 오래 살아 남았다. 그가 건의하여 만들어진 로마시 근교의 근위대 병영은 티베리우스가 최종결정해 세운 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세야누스가 벌인 악행은 로마 황제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무기로 활용하면서도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경우 혹은 세야누스처럼 개인적 야심으로 그 자리를 악용하면 어떻게 되는 지 제대로 선례를 남겼고,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가진 취약점과 함께 서기 3세기 제국의 내란을 심화시켰다. 또 세야누스가 건의한 고발자 제도 활용,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정적 제거 등은 네로와 그 휘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에게 좋은(?) 선례가 되어 이후에도 황제들이 원로원이나 기사계급, 지식인들을 반역죄로 엮어 줄줄이 숙청할 때 널리 활용돼 공화정 회귀론자들에게 제정 체제가 가진 단점으로 늘 거론됐다.
좋던 나쁘던 간에 권력의 최정점 직전까지 찍었고 로마 제국을 좌지우지한 전력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문학 작품 등에서 권력무상의 대표적인 예시로 거론되고 있다.
4. 미디어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의 모습. 배우는 패트릭 스튜어트 |
[1] 혹은 세야누스의 아내가 되는 아피카타가 아피키우스의 딸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2] 클라우디우스가 첫번째 결혼에서 맞이한 아내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사이에서 얻은 장남이다. 풀네임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와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에서 각각 따와 지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이복 여동생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장녀이자 파우스투스 술라의 아내였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있었다.[3] 정확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로 혈연상 외종손이고,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차남의 아들로 법적으론 양손자, 의붓손자다. 허나 손이 많지 않고, 아내의 아들 대 드루수스를 양자로 삼아 친아들로 대우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와 그 형 게르마니쿠스를 늘 "우리의 사랑하는 손자"로 불렀고, 사후 공개된 유언장에도 자기 친혈육이라고 분명히 명시했다.[4] 후일의 클라우디우스 1세[5] 보통 친삼촌이자 장인인 대(大) 드루수스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小) 드루수스라고 불린다.[6] 소(小) 드루수스[7] 훗날의 칼리굴라[8] 다만, 양할아버지이자 외종조부인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비범함과 훌륭한 인성을 알고, 일찍부터 그에게 로마귀족이자 자신의 직계혈육으로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시켰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담당한 품성 교육, 식사예절과 원로원을 다루는 대화법, 웅변술부터 각계 최고 명사와 역사가들이 직접 담당한 학문 수업, 각 속주 상황과 속주민들의 풍습 교육 등도 포함됐다. 따라서 일찌감치 현실적인 한계로 제위 계승에서 배제됨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약관의 나이부터 알아주는 역사가이자 교양인이 됐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정치 활동을 만류했다. 허나 자신의 보좌사제는 반드시 맡게 하고, 그가 가문 클리엔테스, 귀족들 앞에서 연설 등을 할 때 반드시 참석해 자기 혈육임을 귀족들에게 인식시켰다. 또 사후 발표될 유언장에 "내 친혈육이자 손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재산을 남긴다"고 명시해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했다.[9]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리빌라의 어머니이다.[10] Imperium proconsulare maius(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 이 권한의 직책명이 임페라토르이기 때문에 로마 황제의 칭호 중 하나로 임페라토르란 말을 쓴다.[11] 치안까지 관할하는 집단이라, 근위대와 함께 로마의 무력집단이었다.[12] 일설에 따르면 바로 처형할 수 있게 교수대에서 목에 밧줄을 걸어놓고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처형할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번 삽입만 하고 바로 처형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