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라틴어: Gaius Licinius Mucia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제국 미상 |
사망지 | 로마 제국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미상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64년 |
전임 |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투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
후임 |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
임기 | 70년 |
전임 |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
동기 |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
후임 |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불명 |
임기 | 72년 |
전임 |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
동기 |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
후임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1]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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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내전기를 끝내고 로마 황제로 등극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2. 행적
이름으로 볼 때 노빌레스 가문인 무키우스 씨족이었다가 리키니우스 가문으로 입양된 인사로 추정되나, 부모의 신원 및 초기 행적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명예로운 경력을 착실히 밟으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신임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55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휘하 레가투스를 맡아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다.64년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투스 안토니우스 마케르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 해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려 했던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유대 반란군을 상대로 예루살렘 공방전과 베트 호론 전투에서 참패해 6,000여 명의 병력을 상실하자, 네로 황제는 갈루스를 해임하고 그를 시리아 총독으로 삼았으며,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대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와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로 심각하게 갈등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세금 수납과 고리대금업을 주업으로 삼는 세리 집안의 자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인 자신의 상관이 되어서 이래저래 명령하는 상황이 고까웠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반란 진압을 능숙하게 이끄는 것을 보고 그를 인정하게 되었는지, 69년 무렵에 화해했다.
68년 네로가 원로원과 군대의 탄핵을 받고 자살한 뒤 갈바가 새 황제가 되었을 때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충성을 맹세했고, 69년 1월 갈바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시해된 후에는 오토를 지지했다. 그러나 오토가 라인 군단병들을 등에 업은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해 자결하고 비텔리우스가 새 황제가 되자, 두 사람은 이번엔 비텔리우스의 황제 즉위를 선뜻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들에게 수치를 안긴 비텔리우스에게 원한을 품은 도나우 군단병들이 그에게 사절을 보내 황제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타키투스는 그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내세운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는 방종과 에너지, 예의와 오만, 선과 악이 기묘하게 혼합된 인간이었다. 여가 시간에는 지나치게 방종했지만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는 놀라운 자질을 보였다. 공적으로는 칭찬을 받았지만, 사생활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음모를 위한 미묘한 선물로 부하, 동료 및 전우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황제가 되는 것보다 황제를 세우는 것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무키아누스가 공화국 말기 원로원 의사록과 의원들의 연설과 편지 등 여러 자료를 수집 및 편찬한 <원로원 기록(res gesta senatus)>을 집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근거로 그가 일찍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세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가 황제가 되기를 거절한 것은 스스로 황제의 직위를 감당할 역량이 되지 않음을 자각하고, 네로, 갈바, 오토가 잇따라 피살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험부담이 매우 큰 황제가 되기보다는 자신보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내세우고 배후에서 암약하면서 이득을 챙기기로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 해 7월 베리투스[2]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시리아와 유대의 5개 군단과 함께 남기로 하고 무키아누스는 6군단 페라타와 2,600명의 벡실라티오(Vexillatio: 임시 기동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발칸 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지휘하는 도나우 군단이 먼저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비텔리우스를 따르는 라인 군단을 격파했다. 다키아 왕국이 그들이 도나우 전선을 이탈한 틈을 타 모이시아를 침략하자, 무키아누스는 직접 모이시아로 달려가서 다키아군을 격파했다.
비텔리우스가 도나우 장병들에게 살해당한 다음날인 69년 12월 21일 로마에 도착한 그는 라인 군단과 도나우 군단의 시가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로마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70년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잠재적인 정적을 처단하는 데 골몰했다. 특히 비텔리우스의 핵심 지지자였던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처형했고, 루키우스 피소의 사위로 은둔 중이던 칼푸르니우스 피소 갈레리아누스를 체포한 뒤 로마에서 아피아 가도를 통해 40마일 떨어진 어느 요새로 끌고 간 후 독극물을 강제로 먹여 죽였다.
70년 10월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가 탄 말의 고리를 잡고 로마로 안내했으며, 72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함께 세번째로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의 권세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의 권고에 따라 은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들은 비텔리우스 추종자들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역시 비슷한 시기에 기록에서 사라진 것 역시 은퇴를 종용받고 물러났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기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는 동방의 동식물과 지리를 다룬 논문을 집필했다고 하며, 소아시아 해안과 인근 섬들에서 가져온 예술 작품들을 집에 전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생전에 집필한 저서들은 현존하지 않으나, 대 플리니우스가 집필한 <박물지>에 부분적으로나마 인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