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라틴어: Publius Petronius | |
생몰년도 | 미상 ~ 42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제국 미상 |
사망지 | 로마 제국 미상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조부)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아버지) 플라우티아(아내)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아들 또는 손자) 페트로니아(딸 또는 손녀)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9년 |
전임 |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
동기 |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
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움브리아 출신의 에퀴테스 집안인 페트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는 기원전 25/24년부터 기원전 22/21년까지 아이깁투스 행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는 기원전 19년 화폐 주조관을 역임했다. 그는 7년 아우구르에 선임되었으며, 19년 7월부터 12월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남편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해방노예의 자유에 대한 찬반 투표가 동률일 경우 자유를 지지하는 투표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 유니우스-페트로니우스 법(lex Iunia Petronia)을 제정하고,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12월 10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16일 게르마니쿠스에게 바칠 영예에 대한 원로원 결의를 반포했다.타키투스에 따르면, 21년 말 클루토리우스 프리스쿠스가 페트로니우스의 집에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포상받았다. 이에 고무된 클루토리우스는 페트로니우스의 장모 비텔리아와 다른 귀족 여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 중병에 걸렸던 소 드루수스가 곧 죽을 것이라 간주하고, 그를 애도하는 새로운 시를 낭송했다. 나중에 이 사실이 소 드루수스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전해지자, 티베리우스는 격노해 클루토리우스를 제판에 소환했다.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등이 클루토리우스를 변호했고, 비텔리아는 그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며 부정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기어이 클루토리우스를 사형에 처했다.
클루토리우스 사건은 페트로니우스의 경력에 별다른 장애를 입히지 않았다. 그는 29년에 추첨을 통해 아시아 총독에 선임되었고, 35년 후임자인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가 도착할 때까지 6년간 그 직책을 맡았다. 그의 아시아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수많은 동전이 그의 이름으로 주조되었다. 또한 처음 3년 동안 그가 에페수스 의회에 보낸 3통의 편지가 있는데, 그는 이 편지에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도시에 내린 특권을 확인하고 갱신했다.
아시아에서 돌아온 페트로니우스는 35년 11월 1일 아벤티노 언덕에서 일어난 화제로 인한 피해를 평가하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36년 집정관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후 37년 또는 38년 초에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시리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40년, 칼리굴라가 갈리아에서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리스인들이 시리아에서 승리를 기념해 칼리굴라를 기리는 제단을 세웠다. 이때 일부 유대인들이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이유로 제단을 파괴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칼리굴라는 페트로니우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유피테르의 모습을 한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페트로니우스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주저햇지만, 그 해 가을에 2개 군단을 이끌고 페니키아의 프톨레마이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허사로 끝났고, 소규모 인원과 함께 갈릴리의 티베리아스로 이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 수천 명과 맞닥뜨렸고, 그들은 항의의 표시로 40일간 모든 활동을 자발적으로 중단하고 차라리 죽을 지언정 끝까지 복종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일부 관료들은 페트로니우스에게 유대인들이 완고해서 작업이 진척되지 않는다고 보고하는 서신을 칼리굴라에게 보내라고 촉구했고, 그는 이에 따랐다. 칼리굴라는 페트로니우스의 서신을 읽고,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반항하고 페트로니우스는 명령을 제때 이행하지 않고 주저하는 걸 보고 분개했다. 황제는 긴급서한을 보내 빨리 시행하라고 촉구하며, 끝까지 시행하지 않는다면 자살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서한이 도착한 41년에 칼리굴라가 암살당했고, 페트로니우스는 칼리굴라의 명령을 파기했다. 42년 도르 회당에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동상을 세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중재했고, 얼마 후 시리아에 도착한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에게 직임을 넘기고 귀환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가 유대에 부임한 로마 총독들 중 가장 온화하고 정의로운 인물이었다는 찬사를보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세네카가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에 대한 풍자시인 아포콜로킨토시스(Apokolokýntosis)에서 그를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친우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언어로 웅변하는 사람"이라고 평한 걸 볼 때, 클라우디우스 1세와 가까이 지내다가 그의 치세 도중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페트로니우스는 기원전 1년 집정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딸 플라우티아와 결혼했다. 그 의 아들 또는 손자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는 6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딸 또는 손녀 페트로니아는 비텔리우스의 첫번째 아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