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Scipio | |
| 생몰년도 | 기원전 15년 ~ 52년 |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 지위 | 파트리키 |
| 국가 | 로마 제국 |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아버지?) 성명 미상의 여인(첫 번째 아내) 대 포파이아 사비나(두 번째 아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장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차남) |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 로마 제국 집정관 | |
| 임기 | 24년 |
| 전임 |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
| 동기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
| 후임 |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
1. 개요
로마 제국의 집정관.2. 생애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명한 고대 로마사 역사가 로널드 사임은 2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의 아들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 추정이 옳은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불분명하다. 브레시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서기 15년 사투르누스 신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아에라리움 산티우스(Aerarium sanctius)의 프라이토르(praetor)를 맡았다고 한다.서기 22년 무렵 아프리카에서 9군단 히스파나의 레가투스를 역임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총독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가 로마군에서 탈영한 뒤 누미디아 도적단을 이끌고 10여 년간 저항하던 무슬라미족 출신의 티크리피나스를 상대로 벌인 군사 작전에 참여해 렙투스를 방어하고 가라만테스로 가는 티크파리나스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공적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브레시아의 비문은 그가 로마의 최고 계급 사제인 폰티펙스에 선임되었다고 밝혔다.
24년 7월부터 12월까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와 함께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다. 32년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소 드루수스를 독살한 아내 리빌라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고 세야누스의 몰수된 재산을 제국 국고로 옮기는 안을 원로원에 제출했다. 41년에서 42년 사이에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56년 집정관을 역임한 장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낳았고, 서기 9년 집정관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의 딸이자 네로의 두번째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의 어머니인 대 포파이아 사비나와 재혼해 68년 집정관이 될 차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를 낳았다.
47년, 아내 대 포파이아 사비나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간통한 혐의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아내인 발레리아 메살리나에게 고발당해 감옥에 갇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포파이아가 사망한 지 며칠 후, 스키피오와 함께 식사하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무시코 스키피오에게 아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스키피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자연의 빚을 갚으러 갔습니다."
얼마 후 원로원에서 포파이아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포파이아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켜보고, 나도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따라하곘소."
51년, 스키피오는 원로원에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영향력 있는 해방노예 팔라스가 아르카디아 왕실의 혈통을 지니고 있는 데도 클라우디우스 1세의 보좌관이라는 직위에 만족한 것에 대해 국가가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듬해인 52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