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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1:39:14

기록말살형

1. 개요2. 고대, 중세 시대의 형벌3. 근, 현대의 사례
3.1. 스포츠
4. 창작물에서의 예5. 위키에서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roshilov%2C_Molotov%2C_Stalin%2C_with_Nikolai_Yezhov.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mmissar_Vanishes_2.jpg
사라진 인물은 니콜라이 예조프. 대숙청을 주도한 스탈린의 심복이었으나 그 역시 모함당하여 사형되고 기록이 지워졌다.
There will be no glory in your sacrifice.
I will erase even the memory of Sparta from the histories!
Every piece of Greek parchment shall be burned. Every Greek historian, and every scribe shall have their eyes pulled out, and their tongues cut from their mouths.
Why, uttering the very name of Sparta, or Leonidas, will be punishable by death!
The world will never know you existed at all!

네놈들의 희생에는 영광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스파르타를 역사에서 한 치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니!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버리고, 그리스의 모든 역사가들과 서기들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입에서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스파르타레오니다스의 이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해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세상은 너희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사
모든 기록을 지워버림으로써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고대 로마의 형벌이다. 라틴어로는 Damnatio Memoriae.[1]

2. 고대, 중세 시대의 형벌

고대 로마에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고 불린 형벌로 로마 엘리트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처벌이었다. 로마에서 대역죄인이나 폭정을 일삼은 황제나 처형된 황후(클라우디우스 1세의 황후 메살리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황후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혹은 태후(율리아 마마이아), 이를테면 로마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간신으로 평가받는 세야누스, 폭군으로 규정된 네로, 도미티아누스[2], 콤모두스, 카리누스나, 공주 중 악행이 심해 이 형벌을 받은 리빌라 등의 인물들에게 내려지던 형벌의 하나였다. 현세에 세운 모든 공적들이 박탈됐고, 형벌이 통과될 당시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형벌에 처해져 당사자가 기소 전 자살하더라도 이 형벌로 기소되는 순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기록말살형은 현세와 명예를 소중히 하는 로마인에게는 조선의 부관참시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능가하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따라서 이 형벌에 처해지면, 대상자만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고 해도, 해당 가문까지 살아생전 명예와 사후 명예, 업적까지 모조리 부정되는 조치와 똑같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가족들에게도 그 내상이 심각했다. 왜냐하면 기록말살형 대상자의 이름은 사회에서 인간쓰레기,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운 자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욕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복권 자체가 무척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 당시, 황제의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일방적인 원로원 의원, 장군들에 대한 기록말살형 조치 결정처럼 논란의 여지가 심하거나 악감정으로 황제나 실권자들이 이 조치를 악용하는 것 역시 로마 사회 안에서 범죄로 인식됐다. 특히 황제가 이 형벌에 처해지는 경우, 조치가 통과된 순간 콤모두스 사례처럼 다음 황제가 이를 뒤집어 신원을 복구시켜주는 조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로마인들의 관습상 '집=모든 영혼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 형벌에 처해진 순간, 로마인들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은 파괴되고, 조상들의 조각상은 후손, 친척들의 집에서 강제 회수되고 파괴됐다. 따라서 바닥, 벽면에 설치된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억까지 지워지고 철거됐다. 황제, 원로원 의원, 선출직 공직자, 관료, 장교라면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대상자의 이름을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대상자의 초상 등을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버렸다. 이들의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들이 밞고 다니는 도로 재료 등으로 쓰여 모욕당하게 만들었고, 심할 경우에는 해당 인물이 살던 집도 완전히 철거됐다.

황제의 경우, 당사자와 그 자손 및 직계 친척들까지 특권이 박탈되고 황제는 개인이름(프라이노멘)으로 사용이 허락된 임페라토르까지 박탈됐다. 네로의 사례처럼 아예 동판을 통해 그 정통성이 철저히 무시됐으며, 이들의 조각상은 모든 공공건물에서 철거되고 발행주화는 회수됐다. 여자 황족이나 황후, 태후의 경우에도 비슷해 이 형벌에 처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똑같이 집행됐다. 때문에, 율리아 마마이아나 파우스타처럼 살아생전 명예는 공적으로 언급이 철저히 자제됐으며, 리빌라의 예처럼 추가 조사를 통해 원로원 의결로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황제와 황후, 태후, 황족 외의 원로원 의원, 장군, 장교 이상의 관료들, 세야누스 같은 극악무도한 반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로원 의원, 장군, 관료의 경우에는 세야누스처럼 국가 전복 시도와 함께 그 악행이 끔찍하지 않는 이상, "본인이 한 잘못만 처벌받는다"는 로마법 원칙에 따라 연좌제는 적용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 당사자에 한하여 원로원 회의록과 관보 안에서 기록된 공훈이 모조리 지워지고 조각상 등이 파괴됐다.

다만, 기록말살형이 완전히 이뤄지는 경우는 이 조치를 명령한 황제, 원로원이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기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여러 이해관계와 물리적 한계 때문에 소요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고 보상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네로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당시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 각 속주의 총독 관저 및 관청 외에서 네로가 새겨진 주화, 조각상이 모두 파괴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늘날처럼 통신이 빠르지 않아 모든 명령이 동시 집행되는 것이 힘들 뿐더러, 제약조건도 많았기 때문이다. 화폐라면 보상 없이 회수해서 폐기해버린 터라 소유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존속살해하고 동생을 기록말살형 선고할 당시, 카라칼라는 몇년 동안 제국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동생의 주화를 온전히 폐기하지 못했다.[3]

더욱이 비텔리우스가 네로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콤모두스를 일부 철회, 완전 철회하는 경우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공문이 하달되더라도 모두 집행하지 않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당장 두 사례만 해도 이 조치 회복 조치로 인해 동상 복원 명령이 하달되거나, 일방적으로 파괴를 명한 이들이 징계를 받았으니, 더 큰 불똥이 튈 속주들의 경우에는 만약을 위해 그냥 치워두는 경우가 수두룩했던 것이다. 아울러 메살리나엘라가발루스 사례처럼 제위계승자와 황실이 피해자 내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통과 후에도 공문을 만들지 않고 몰래 집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한 인물의 이름과 명예를 지우는 것을 가혹한 형벌로 여긴 점은 한자문화권의 사고방식과는 대조적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고 해서 반역이나 폭정 등의 악행은 기록으로 남겨져서 역사의 이름으로 두고두고 기억되는 것을 더욱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4] 다만 한자문화권에서도 공신녹권 문서나 해당 인물이 간행에 참여한 서적의 목판 같은 경우는 먹칠로 지워버리거나 목판을 파버리거나 불태우는 등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사례 역시 존재한다.

기록말살형은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최악의 적이다. 아무래도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는 만큼, 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기록마다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한 역사적 기록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주제를 다룬 다른 기록들과 비교를 해 봐야 한다(=즉, 교차검증을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기록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말.

고대로 갈수록 당시의 기록 자체가 현재까지 오면서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유실되는 경우가 빈번하다.[5] 거기에 만약 그 시절 당시에 작정하고 기록을 없애버리게 된다면? 그 시절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렇게 될 경우 자료를 얻는 것은 사실상 답이 없게 된다. 결국 남은 것은 유물이나 (사문서로나 남아 있을)[6] 당대의 평판, 혹은 추정 정도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 아케나톤과 그 후계자 스멘크카레, 투탄카멘, 아이아문 대신 아톤을 섬겼던 까닭에 정권을 찬탈한 호렘헤브에 의해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존재의 부정이지만 당대에는 존재의 소멸과도 비슷한 큰 충격을 준 형벌이었다. 벽화의 경우 도굴꾼에 의해서 훼손된 흔적과는 다르게 이름과 얼굴에 집중적으로 훼손이 일어난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대부들의 교육기관의 성균관의 재학기록을 영구적으로 지워버리는 영삭부황(永削付黃)이라는 명예형이 있었다. 이는 누런 종이에 죄목을 적고 재학기록에서 삭명하는 것이다. 또한 팽형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조선의 팽형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니,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 또한 산자를 죽은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다. (팽형은 실제 존재에 대해 논란이 있다.)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불에 타 없어졌는데[7] 방화범인 헤로스트라투스는 범죄 동기를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자로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때문에 에페소스에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나, 역사가 테오폼푸스가 이걸 책에 적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소원대로 그는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마치 '존재 자체를 없애는 형벌'로 묘사한 바 있는데 이것은 과장이다. 존재는 두되 그가 한 일을 기록에서 전부 뺀다는 것으로 이 자는 기억조차 되어선 안될 극악무도한 자이니 이름만 남기고 관련 기록을 없애버린다는 경고성 메세지에 가깝다. 네로나 도미티아누스도 이 형벌을 받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두고 두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심지어는 오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도 이 형벌을 받을 뻔했다.

3. 근, 현대의 사례

고대 로마 이후로 기록말살형이 공식적인 형벌로 지정된 사례는 없으나, 근대는 물론 현대에도 개념적으로 시행한 사례가 간간히 있다.

3.1. 스포츠

스포츠 분야에서는 개인에게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기록말살형이 내려지기도 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에는 승부조작, 살인, 인종차별, 성범죄 등의 반인륜적 행위, 스포츠맨쉽을 져버린 행위 등이 있다. 선수의 기록이나 포상이 부정되거나 언급을 안하게 된다.

4. 창작물에서의 예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5. 위키에서

6. 관련 문서



[1] 담나티오 메모리아이(교회 라틴어로는 담나치오 메모리에). 직역하면 '기록의 죽음'. damnatio(동사 으뜸꼴 damnare)는 우리가 아는 그 Damn의 어원이다.[2] 함께 언급된 네로, 콤모두스와 달리 폭군은 아니었지만, 암살 직전까지 개인우상화가 지나쳤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최악인데다 황제가 대놓고 고발인으로 정적을 기소 후 고문까지 벌여 원로원 의원 여럿을 죽인 탓에 만장일치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3]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난 뒤 후대 황제들에게 게타 기록말살형에 폐기되면서 결정이 뒤집어지는 촌극도 벌어졌다.[4] 대표적으로 황소의 난안록산의 난 등등이 있고, 연산군만행조선이 망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것도 이 사상의 영향이다. 그러나 만적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 같이 기록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생겨났다.[5] 삼국유사가 불교 편향적이고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삼국사기가 마찬가지로 사대주의적이고 신라 편향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도, 역사 교과서에 그 두 가지 역사서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외의 역사서는 아예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까. 삼국시대 이전 한국사 연구의 진전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6] 다른 문명이면 모를까, 로마 공문서와 기록체계의 수준은 현대 기준에서도 철저했으니.[7] 사실 이 사원도 과거 홍수 때문에 쓸려가버린 원래 신전을 재건축한 것이다.[8] 그런데 2022년에 현철해 소개편집물에서 나타났다.[9] 예시(장성택 숙청 전후 북한 기록영화 모습)[10] 백석은 엄밀히 말해 월북이 아니다. 정치성향 상관없이 고향이 이북에 있고 이북에서 쭉 살았으므로 6.25 이전에 서울을 떠나 이북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기 때문이다.[11] 10.26 사건 이후 지휘관으로 재직했던 3군단6사단에서 사진과 기록이 삭제되었으나, 2019년 4월 국방부의 훈령 개정으로 2019년 8월 1일부터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걸리게 되었다. 김재규의 공과야 어떻든 김재규의 존재 자체는 기억하기로 한 것이다.[12] 뉴턴이 미분을 발견한 해는 1666년이고 라이프니츠는 1676년으로 10년의 시간차가 있고, 이 순서는 엄연한 사실이다.[13] 왕립학회장이라는 지위를 악용하여 이를 판정할 심사위원 한명 한명을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으로 세심하게 고르는 등.[14] 뉴턴과 훅의 관계는 당시에도 유명해서(훅은 뉴턴이 뭘 발표하면 본인 것을 표절했다고 우겼고, 뉴턴도 훅에 대해서 실험 감독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막 깠다) 그 당시에도 뉴턴이 없앴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실제로 그랬는지 확인된 건 아니다.[15] 원본 영상은 어디에도 없으며, 인터넷상에 떠도는 해당 영상은 프레임 수를 낮추는 등 편집을 가해서 문제의 여지를 없앤 거다. 참고로 한국 방송분에는 해당 화가 아예 삭제되어 방영됐다.[16] 전역을 3일 남겨두고 적발당했다.[17] 다만 보컬의 EZ2DJ까지는 지우기 힘들었는지 그대로 놔뒀다.[18] 기존의 EZ2DJ 이지투디제이 AMUSEWORLD EZ2DJ 6th 어뮤즈월드였던게 EZ2AC 이지투에이씨 SQUARE PIXELS EZ2AC 스퀘어픽셀즈로 바뀌었다.[19] 패턴은 그대로라서 해당하는 부분의 노트는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프리뷰에서는 EZ2DJ 부분이 그대로 나온다.[20] KBS 예능 아카이브 채널인 깔깔티비에서는 정준영이 나오는 부분을 아예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변조했으며, 시즌 4의 첫 화에서도 다른 멤버가 의도적으로 가린 장면만 회상으로 처리하면서 아예 없는 취급을 하고 있다. 다만 스티브 유의 경우 음악 방송에선 편집되지 않고 나왔으며, 시즌 4의 경우 이후 1명이 또 사고를 치면서 해당 방송 분량이 모두 날아갔다.[21] 박씨는 본관이 여러 개가 있지만(밀양, 반남, 함양 등) 전부 박혁거세 계열이다. 오릉 문서 참조.[22] 당연하지만(?) 같은 가문의 박형준의 압도적 격차로 부산시장에 당선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다.[23] 그래서 지금까지도 라파즈라파즈홀심 홈페이지를 치면 자동으로 현 홈페이지로 리다이렉트 된다.[24] 헐크 호건은 2018년 7월 복권되었다.[25] 다만 이 쪽은 살해 의혹만 있을 뿐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기에 제명은 불합리하단 의견도 많아서 말이 많았다.[26] 2012년 조 패터노 감독 사후 장학금 대폭 감소, 6000여만 달러의 벌금, 4년간 포스트시즌 진출 금지, 1998~2011년까지의 14시즌(총 111승) 기록이 말소되는 등의 징계를 받았으나 2015년 1월부터 111승 기록은 다시 살아났다.[27] 영화 십계에서는 바로 이 학설을 그대로 영화에 담았다. 첫 장면에서 이디오피아의 정복자로 모세가 나오고 있으며 파라오가 죽기 전에 스스로 그 칙령을 어기겠다고 하고 모세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28] 다만 이 영화는 1971년 영국 해머 영화사에서 만든 미이라의 저주 Blood from the Mummy's Tomb를 1980년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도 여자 파라오에 대한 기록이 말살되었다는 설정이다.[29] 초반부에 윈스턴 스미스가 오길비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그의 영웅적인 행적에 대한 빅 브라더의 칭찬과 함께 "우리도 오길비 동무를 본받아야 한다"고 편집했다.[30] 신발 생산량이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자 목표량을 낮춰 생산량을 초과달성한 것으로 속인다.[31] 유라시아가 인도를 공격할 것이란 빅 브라더의 주장이 틀리자 아프리카로 왜곡하여 빅 브라더의 예측에 맞게 바꾼다.[32] 애초에 이 소설의 오세아니아 정부 4개 기관 이름은 전부 다 이런 식이라 반동분자를 고문하고 세뇌하는 '애정부/애정성', 툭하면 배급량만 깎는 '풍요부/풍부성', 전쟁을 총괄하는 '평화부/평화성', 이렇게 이름과 활동이 완전히 반어법처럼 묘사된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라고 밝혔다.[33] 정확히는 엑스보다는 네오 아르카디아의 인류가 주도한 결정이지만 엑스도 이를 반대하지는 않은 듯 하다.[34] 한 예로 영웅 친구들끼리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자기가 묻은 게 사라진 건 물론이며 단체로 사진을 찍었는데 자기만 쏙 빠졌다.[35] 작중에서는 아스가르드 왕궁의 천장화를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왕궁 천장에는 평화 조약같은 오딘의 선정과 그에 힘입은 아스가르드의 번영을 묘사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이 파괴되자 그 밑에 있던 진정한 과거를 그린 천장화인 오딘 부녀의 정복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 드러난다.[36] 2천년이 지나 다섯 영웅의 후신인 기라를 포함한 네 국왕에 의해 사면된다.[37] 차단 회피자의 기여분이 90%가 넘으면 휴지통 처리 된다.[38] 심각한 불쾌감을 주는 내용, 개인정보 및 국가 기밀 등 민감한 정보 유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