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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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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崔承喜 | Choi Seung-hee
파일:external/www.noonbit.co.kr/01.jpg
<colbgcolor=#878787><colcolor=#fff> 출생 1911년 11월 24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69년 8월 8일 (향년 57세)
평양시
묘지 애국열사릉
본관 해주 최씨 (海州 崔氏)
가족 배우자 안막
안성희
아들 안병건
학력 숙명여학교 (졸업)
신체 165cm, 55kg[1]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
2.1.1. 보살춤
2.2. 북한
2.2.1. 월북
2.2.1.1. 안막
2.2.2. 승승장구
2.2.2.1. 최승희 무용 연구소
2.2.3. 숙청2.2.4. 복권
3. 안성희4. 대중매체에서5. 그 밖의 이야기6. 참고서적

[clearfix]

1. 개요

북한의 무용가 겸 안무가. 고전 무용의 현대화를 이끈 시초이자, 무용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비극적으로 숙청당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그녀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당시 윗대가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가로, 아버지 최준현(崔濬鉉)은 1894년(고종 3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836위로 급제하여# 마을에서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름이 성녀, 또는 용경이라고 전해지는데 아버지에게 첩이 한 사람 있었으니 전주 이씨인 이재원이었다. 최승희의 위로는 큰오빠인 승일(承一), 작은오빠인 승오, 언니인 영희가 있었고, 최영희를 뺀 최승일, 최승오, 최승희 모두 후에 월북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단 최승오는 월북할 때 자식들을 남겨두고 가서, 현재 남한에도 최승희의 혈육들이 생존해 있다.

최준현은 아들들이 월북하는 바람에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최승희의 남편 안막[2]의 양부인 안창선의 집 문간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6.25 전쟁 도중 사망하였는데, 그의 자식들은 모두 부친인 그의 사망 사실을 몰랐고, 그의 장례는 그의 조카이자 최승희의 육촌 동생인 최병창이 혼자 치렀고, 그의 시신도 최병창이 화장을 하여 산에 뿌렸다고 한다.

아버지 최준현은 한학자로, 집에 한문 서당을 설치하여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선비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자식들 모두 신식 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보통과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며, 소학교 시절에는 내내 전교 1등을 하다 2번이나 월반을 해 같이 입학한 동기들보다 2년 일찍 졸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다닐 때 가세가 기울어, 최승희는 장학금을 받아가며 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하루 끼니를 걱정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큰오빠인 최승일이 경성 방송국 연예부에 취직하여 아나운서 노릇도 하고,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며 나름대로 적은 돈이나마 봉급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냥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려운 생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용가로 성공한 이후 최승희는 금전적인 문제에서는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매우 인색해졌으며, 이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서도 돈 문제로 의가 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최승희는 지나칠 정도로 사치를 심하게 부렸고, 남편 안막이나 주변인들은 최승희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하였으나 그 습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월북 후에도 그 습성은 고쳐지지 않아 최승희의 호화 사치 행각은 계속 되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들은 최승희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여 최승희에게 도쿄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으나,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입학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최승희는 교사로 취직하여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의 입학시험을 봤다. 100명 모집에 860명이 응시한 이 시험에서 7등으로 합격하였지만, 입학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승희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낙심했지만, 결국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일본의 대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을 시작하며 이시이 바쿠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조선에선 최승희의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최승희가 일본인에게 300엔에 팔려 일본으로 기생이 되러 갔다는 헛소문이 났다. 숙명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러한 헛소문에 분개하여, 학교의 이름을 더럽힌 최승희의 졸업장을 박탈하고 최승희를 동창회에서 제명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의 이런 헛소문과는 별개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에서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은 점점 망해가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이시이 바쿠는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고 심지어 이시이 바쿠가 곧 실명한다는 말 까지 나올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최승희는 제발 무용단에 남아 달라는 스승의 간절한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한다. 병든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세간 사람들의 비난까지 받으면서 호기롭게 스승의 밑에서 독립하여 경성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개설하며, 드디어 독립을 하였으나, 당시 조선에서 무용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현시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안막이 일본 제국 경찰에 구속되고, 또한 임신 & 출산 후 후유증으로 급성 늑막염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스승 이시이 바쿠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 활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이시이 바쿠에게서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진 이후 안막의 수완으로 인해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운형, 마해송[3], 가와바타 야스나리[4]등 지금 봐도 거물급 인사들이 후원을 하였다.

최승희는 지방의 춤꾼들을 따라 다니며 전통춤을 배우기도 했다. 심지어는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 다니면서 까지 전통춤을 배울 정도의 열의였다고 한다.특히 한성준에게서 승무를 비롯한 전통춤을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 춤과 한국 춤을 결합한 신무용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의 용합을 시도해 신무용의 창시자가 되었고, 오늘날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의 무용계에 끼친 그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 사실 한국의 본격적인 현대 무용은 최승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니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290149289.jpg
리릭 포엠 中

또한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유럽, 남미 등으로 세계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의 당대의 저명 인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 할 정도였다. 특히 로버트 테일러는 최승희와 굉장히 친밀했었고,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해 주며 최승희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는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최승희의 헐리우드 진출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아울러 최승희는 이러한 인기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모던걸, 패션 스타로서 조선과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였고, 심지어는 음반도 여러 장 내게 된다. <향수의 무희>는 최승희의 자작곡이며, <이태리의 정원><A Garden In Italy>의 번안곡이다. 아마도 번안이 아니라 무단 도용으로 추측되지만,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으니.

최승희는 음악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는데, 특히 리듬 감각이 매우 예민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춤을 추던 도중에 가야금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어쩌다가 실수를 하면 추던 춤을 멈추고 연주자에게 어떤 부분에서 틀렸다고 바로 지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도의 무희>를 포함하여 영화에도 여러 편 출연하였는데, 이 중 무용 영화 <반도의 무희>는 최승희가 주연을 하였지만, 일본에서 제작되고, 일본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고, 일본인 배우들이 출연한 일본 영화다. 내용은 최승희의 자전적인 성공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백성희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인을 찾아 상경했다가 굉장한 무용가의 눈에 띄어 뛰어난 무용가로 성장했지만 스승의 죽음을 모른 채 화려한 무대에 선다는, 그런 내용이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의 원래 본명은 안승자 였지만, 광복 후에 안성희로 개명하였는데, 성희라는 이름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 백성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영화는 평가부터 하자면 극영화로는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 실린 혹평을 보면 당시의 반응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자체가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고, 돌연히 은사의 죽음이 설정된 이유도 불분명하다. 그 밖의 스토리 전개 또한 매끄럽지 못하다. 그리고 조선 로케가 무엇 때문에 필요 했는지 알 수가 없고, 무대가 동경으로 바뀌었다 해도 동경과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또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센다가 무엇 때문에 출연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최승희의 무용만이 돋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극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된다."

-아사히 신문 1936년 3월 21일자 기사

또한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의 친구이자 화가인 안석주는 <반도의 무희>에 다음과 같은 평을 하였다.
나는 그녀가 주연한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 또 이 영화에 나온 그를 정말 최승희로는 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 영화 중에서 홀로 무용 선생에게 훈련과도 같은 기본 연습을 맹렬히 할 때의 그 모습은 틀림없이 최승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영화배우로서는 마땅치 않음을 어서 빨리 깨닫고 무용가로서만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승희를 거의 친동생처럼 생각했을 정도로 아꼈고, 최승희와 친했다는 사람마저 이런 저주에 가까운 극언을 할 정도면,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는 정말 상상 이상의 개판이자 망작이었고, 그 영화에서 최승희의 연기가 정말 눈뜨고 봐주기 힘들 수준이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자체는 그럴싸하게 나왔던 모양인지라 최승희의 인기 덕분에 무려 4년이나 장기 상영되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고, 영화사도 돈을 많이 벌었으며, 이 영화의 감독과 최승희도 그 동안 내내 영화사에게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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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작 <옥적(玉笛)의 곡(曲)> 에서

최승희와 최승희의 춤이 이뤄낸 미적, 예술적 성과에 대해서는 링크를 참조하자.

그러나 최승희는 본인이 가진 실력과 그 명성에 비해 한 개인으로의 인간성은 일제강점기 당시나 북한에서나 많이 비판받던 편이었으며, 매우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대표적인 일화들로는 한 인터뷰에서 "팬레터를 받으면 대충 보고 그냥 던져 버린다."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말한 일, 면담을 요청하는 수많은 제의들을 "조선 땅에서 나를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라며 차갑게 거절한 일, 심지어는 당시 공연 관람 예절에 익숙하지 않았던 조선인 관객들이 공연 관람 도중 소리를 낸다고 추던 춤을 중단하고 관객들에게 조용하라고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낸 일 등이 있다.

제자들에게도 박하게 굴었는데 세계 순회 공연에 제자를 제외시키고 일본에 혼자 남겨 놓아 자신의 딸 안성희를 돌보게 하였고, 제자가 이에 불만을 품자 무용단에서 쫓아내 버렸다. 또 평소에 제자들을 하녀 부리듯이 마구 부려먹었다고 하며, 심지어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용을 배우러 온 제자들에게 이랬을 정도니, 하녀로 곁에 두었던 공옥진에게는 얼마나 더 잔인하게 굴었을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공옥진과의 일화는 해당 문서를 참조.

사실 여기까지의 행보로만 보자면 성격은 개차반이었어도 처절한 인생에서 빛낸업적이 있기에 한국 무용의 레전드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1940년대 들어서는 일본군 위문 공연에 출연하고 국방 헌금도 여러 번 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펼쳤으며, 그래서 광복 이후에 친일파로 몰려 여러모로 압박을 받고 욕을 많이 먹었으며 먼 훗날인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게 된다.

최승희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친일 행보가 최승희 본인의 자발적인 행보가 아닌 일제에 의한 강요된 행보, 혹은 친일 행보는 페이크였고, 실제로는 뒤에서 몰래 민족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최승희와 가까웠던 관계거나 혹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하고 있고, 그 사실 관계가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았다.

기자 출신으로 최승희와 친하게 지냈고, 최승희의 평전을 쓰기도 했던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의 친일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승희는 일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황군 위문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센티멘탈하지 않았다. 그 본심은 일본군을 위문하여 재일 조선인 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대접받고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 여자는 일본군 위문을 갔지만 군이 기대한 것과 같은 전의양양을 위한 무용 같은 것은 일체 추지 않았다. 만몽의 광야에 지쳐빠진 군인들에게 상냥스러운 <견우직녀의 칠월칠석>을 춤추어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고향의 어릴 때의 평화로웠던 시대의 칠석놀이를 생각하며 일본병들은 모두 울었다."

그리고 1940년대 당시 최승희의 공연에서 반주를 맡았던 지영희는 "최승희가 일본군의 돈을 받고 춤을 추었지만, 그 돈을 연안독립동맹에 보냈다."고 증언했고, 최승희의 육촌 동생 최병창도 자신이 최승희로부터 연안 독립 동맹에 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증언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증언일 뿐 확실하게 사실 관계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최승희와 가까웠던 지인들이나 혈육들에게만 나온 증언이고, 이 증언의 사실 관계가 정확하게 입증 되려면 돈을 받았다는 쪽, 그러니까 그 연안 독립 동맹의 관계된 사람들이 직접 이런 증언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쪽에서는 이런 증언이 없다. 반면 애국 헌급 납부, 일본군 위문 등의 최승희의 친일 활동은 일단 엄연히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지라.....

최승희의 명성과 재능을 아꼈던 사람들, 혹은 최승희와 가까웠거나 친했던 사람들이나 제자 등 주변인들은 최승희의 친일 행보가 사실이더라도 그녀의 춤과 그녀가 한국 무용에 남긴 업적까지 폄하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뭐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2.1.1. 보살춤

무용가 최승희의 일제강점기의 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춤으로써 동양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추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일제강점기 어느 시점엔가 그녀가 보살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언뜻 보기에는 관음보살의 자비행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보현보살의 행원을 형상화했다고 보는 설이 정설이다. 이러한 정설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최승희의 제자이자 동서인 김백봉이 공개한 공연 프로그램 〈보살춤〉이다. 이 공연 프로그램에는 “조선시대의 명화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무용화하였으며, 동양의 불교 예술에 표현된 조형적인 여성의 미를 그린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무용가 최승희의 보살춤은 한 자리에 머물러 추는 것이 특징인 춤으로, 불상에서 나타나는 자세와 여기서 나오는 정서적 영감 그리고 감성적 환영을 춤으로 승화시킨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기예가 돋보인다. 또한 조명을 뒤에서 비추어 후광처럼 처리함으로써 보살의 환영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으며, 역광을 통해 실루엣으로 처리된 신체의 선은 더욱더 그 신비스러움을 배가시킨다.

보살 춤을 해석하여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는 등의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2. 북한

2.2.1. 월북

광복 직후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앞서도 말했지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최승희의 주변인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 본인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나름 반성하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승희 자신이 일본군 위문도 했고 친일적인 행위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편 안막이 일본 제국 경찰에 많은 수모를 겪었고, 연안 독립 동맹에도 가담하였으며, 자기 자신도 나름의 민족 의식을 가지고 좋은 일도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

최승희는 중화민국에 억류되어 있다가 1946년 5월 29일에야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 가진 기자 회견에서 "그 동안에 일본에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친일을 했다는 것은 변명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나 최승희가 해방된 조국에 와서 속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것으로 이바지하겠다." 라는 인터뷰를 하였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최승희의 발언을 왜곡, 곡해하여 "일본 놈들 앞잡이 노릇 하던 최승희가 이제는 코 큰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이제는 미국 놈들의 앞잡이가 돼서 발레라는 것을 하려고 한다." 라는 자극적인 보도를 하였다. 저 보도로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돼서 최승희를 당장 반민 특위에 넘겨야 한다고 들끓었으며, 이로인해 최승희는 더욱 겁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광복 직후 월북했기 때문에 혼자 귀국한 최승희를 보고 어떤 기자는 "당신의 남편은 평양으로 갔는데, 당신은 이 곳에 왜 온 것인가?" 라고 면전에서 대놓고 빈정대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승희가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기자에게 험한 말을 하였는데,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이런 최승희의 태도에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다고 더욱 신나게 깠으며, 그래서 최승희의 이미지는 더욱 추락하였다고 한다.

이를 견디다 못한 최승희는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를 만나 자신을 선처해 달라,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하였으나, 하지의 대답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라는 짧은 말이었으며, 그는 최승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월북했던 안막은 몰래 남한에 내려와 최승희에게 월북을 종용했지만, 최승희는 월북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급기야 안막은 "여기 있으면 당신이 갈 곳은 감옥 밖에 없다. 나랑 같이 북으로 가면 여왕처럼 대접 받을 것이다." 라며 최승희를 협박하며 달래기까지 했다.

이 때 믿거나 말거나한 일화지만 최승희는 무당에게 자신이 서울에서 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평양에서 사는 것이 좋은가를 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무당의 대답은 "당신은 젊었을 때는 세계를 누비며 명성을 올렸지만 말년에는 비참하다." 라는 말이었고, 특히 북으로 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무당에게 점을 칠 때까지만 해도 최승희는 월북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안막의 계속되는 설득과 협박에 결국 마음을 바꿔 1946년 7월 20일 오빠 최숭일과 함께 기어이 월북하고 만다.# 뒤에 후술되겠지만, 월북 후에 최승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결국 그 무당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고 만 셈이다.

애초에 최승희는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했던 편이 아니었고 그저 도피성 월북이었다는 점에서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남한에 남았다 해도 월북한 남편 안막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입지가 곤란해졌을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사실 저 시점에서 최승희는 이미 사면초가인 상황이라 도피가 필요하긴 했다.

사실 최승희가 월북하기 직전에 그녀가 월북할 거란 소문이 있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말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이승만도 최승희에게 남한에 남아서 일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보면 최승희의 월북은 도피성이라기보단, 그저 김일성이 최승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기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해석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안막이 최승희가 월북하기 전까지 뻔질나게 남과 북을 왔다 갔다 했었던 정황을 볼 때, 최승희가 안막을 통해 월북 후 자신이 북한에서 누리게 될 특권에 대한 교섭을 김일성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최승희의 월북은 자신이 친일파로 단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남한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활동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는 게 중론이다.

안막의 형인 안보승은 남동생인 안막과 큰아들 안병찬이 월북하는 바람에 성악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고, 결국 성악을 그만둔 후 개인 사업을 하였다. 안보승은 최승희의 월북을 끝까지 말렸고, 안막이 최승희에게 계속 월북을 종용하자 "너는 가도 되지만 제수씨는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동생을 혼내기까지 했는데, 후에 최승희의 월북을 회고하면서 <최승희 이름 석 자> 라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오대륙을 누비시고
환국하신 제수님
북쪽에는 안 가겠다
무당집도 찾으셨지
아- 기어코 넘으신지
반세기가 되옵는데
무지한 손아귀에
지고야 마시다니

1946년 7월 21일자 민주일보에는 최승희가 기고한 「해방민족의 기수로 무용창조」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최승희가 자신의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해 스스로 쉴드를 치는 내용이었는데, 이 글이 신문에 실리기 전날에 최승희가 월북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신과 고통, 그리고 우리 민족이나 민족의 형과 선과 색과 음까지도 빼앗아가려 했을 때에 나는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 음악으로 조선의 형과 선과 색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줄기 영광을 만들려고 애써 왔다. 이것이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내가 조선의 딸로서 걸어왔던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 날 일제는 이미 파멸되었고, 우리 민족에 빛나는 발전의 대로가 열려졌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된 조선 예술의 기수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 예술사에 찬한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한다.
2.2.1.1. 안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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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와 안막. 최승희가 안고 있는 아기는 딸인 안성희이다. 사진 속의 피아노는 최승희가 영화 <반도의 무희>에 출연해 받은 돈으로 산 것이라고 한다. 즉 저 사진은 1936년에 찍은 것이다.

최승희는 1931년 오빠 최승일의 소개로 문학 평론가이자 좌익 활동가인 안필승과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에 안필승은 최승희의 요청에 따라 최승희의 스승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이름을 딴 안막(安漠)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안막은 최승희와 결혼 이후 문학 활동에서 손을 뗀 채 오로지 최승희의 뒷바라지에만 열중했다. 이는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가 안막에게 했던 "작가는 많이 있으나 최승희와 같은 무용가는 나오지 않으니 최승희를 높여주시오." 라는 충고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안막은 최승희의 매니저로서 공연의 기획, 선전, 자금을 끌어 오는 일 등 온갖 업무를 도맡아 했다. 이러한 일들에 적성이 있었는지 안막은 제법 수완을 보였다. 최승희의 단발도 안막의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안막은 단발머리가 최승희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최승희의 머리를 단발로 고정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 말에 안막과 잘 알고 지냈던 가토 구니오라는 사람은 안막의 수완에 대해 이런 증언을 남겼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극장 예술 공연은 허가제로 바뀌었고, 그 내용이 '황국 신민' 운동에 도움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무용이면 공연 종목에서 반드시 전쟁 수행 고무에 직결된 군사 무용이 있어야 허가를 했는데 최승희의 공연에는 이러한 춤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는지의 비결은 일본 사람들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모두 안막이 짜낸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 이후 안막이 연안 독립 동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정치에 몸을 담기 시작하자, 이후 안막이 하던 업무들을 최승희의 두 오빠 최승일, 최승오와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이 분담하게 된 것이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부용산의 작곡가인 안성현은 안막의 조카로, 그 역시 숙부를 따라 월북하였다. 다만 안성현이 정말로 안막의 조카인지는 좀 더 신중히 따져봐야 할 게, 일단 안막의 아버지 안기선은 자식을 무려 12명이나 낳았으나 안막을 포함하여 단 3명만 살아남고, 나머지 9명은 불행히도 모두 일찍 죽었다. 안막은 살아남은 3명 중에 차남이었고, 안막의 형이 안보승, 남동생이 안제승인데, 위키백과에는 안성현의 아버지의 이름을 안용승이라고 적어 놨다. 그 서술이 사실이라면 안성현은 절대로 안막의 조카가 될 수 없다는 건데, 물론 안용승이 일찍 죽은 9명 중 한 사람일 수도 있다. 또 호적상 안막은 숙부 안창선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안용승이 그 안창선의 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안막이 안창선의 양자로 입적된 이유가 안창선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다시 말해서 안성현의 아버지 이름이 정말로 안용승이고 안막과 같은 승자 돌림인 걸 감안하면 안성현은 안막과 친척 관계가 되고, 안막의 조카일 수도 있는 확률은 높겠지만 애초에 안성현의 아버지의 이름이 정말로 안용승인지도 불분명 하니 무조건 안성현이 안막의 친척이나 혹은 조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철저한 연좌제 사회인 북한에서 안성현이 안막의 숙청 후에도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쩌면 안막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안성현의 부친은 민족 음악가 안기옥이라고 하며, 위키 백과 자료에 의하면 월북 이후 판소리 발성에 관련하여 김일성과의 갈등이 있었고, 1974년 혜산에서 타계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립 국악원에 있는 성우향 구술 채록(PDF 파일)에 의하면 안기옥의 동생이 명창 안기선인데, 안막의 부친 안기선과는 동명이인이다. 정리하면 안성현과 안막은 친척이 아니다. 아마도 동명이인 안기선으로 인해 잘못된 자료가 전해진걸로 추측된다. 참고로 안막의 부친 안기선은 천안 초등학교의 전신인 천안 사립 영진학교의 설립자다.

2.2.2.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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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ce4> 고려인 화가 변월룡 화백이 1954년에 그린 최승희의 초상화
일반적으로 당시 대중들에게 각인된 최승희의 화려하고 세련된 서구적인 이미지 대신 후덕한 전형적인 중년 아줌마의 강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 흥미로운데, 아마도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담으려 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실제로 중년의 최승희는 젊었을 때보다 살이 많이 불은 상태였다.

월북 후의 최승희는 그간의 명성으로 공훈 배우 칭호를 받고 김일성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평양에서도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세워 소장을 맡아서, 북한 각지의 전통 무용들을 발굴하여 북한 지역의 무용을 발전시켜나가는 등 한동안 승승장구하였다.

김일성의 최승희에 대한 특별 대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최승희 무용 연구소의 수입을 최승희가 고스란히 다 가져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용 연구소는 지금의 옥류관이 있는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3층 건물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요정 동일관이었는데, 김일성의 지시로 개조를 하였고 최승희 가족도 이 건물에서 생활하다가 후에 집을 따로 지어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리고 무용단원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으며 단원들에게는 400원의 국비가 제공되었는데, 이는 최소한의 식비와 생활비였다고 한다. 무용가 전황은 이 국비가 적다고 최승희와 안막에게 징징대었고, 결국 300원을 더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무대에 서기 시작하면 800원의 월급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최승희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으며 인민 배우가 되었다. 또한 1951년에는 주은래의 지지로 중국 중앙 희극 학원에도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개소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중국 전통 무용과 경극의 현대화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중국의 유명한 경극 배우이자 광복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매란방과 함께 중국 무용, 경극, 예술 등에 대해 대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당시 최승희를 사사했던 중국 무용가 서교(舒巧)의 회고에 의하면, 최승희가 딸 안성희에게 작품을 지도할 때 종종 문틈으로 몰래 엿보곤 했는데, 어찌나 무섭게 호통을 치는지 몰래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 겁을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서교뿐만 아니라 최승희의 다른 제자들의 증언 역시 대체로 다 비슷하다. 최승희가 워낙 제자들을 혹독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최승희의 제자들은 최승희를 존경하면서도 무서워 했다고 한다. 최승희의 제자로 1.4 후퇴 당시 월남하였던 무용가 전황(1927년 ∼ 2015년)은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서의 공연에서 3인무 '옥중 투사' 를 공연하던 도중 객석의 부모와 지인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만 춤 순서를 잊어먹고 말았는데, 당연히 그 날 공연은 망쳤고, 공연이 끝난 후에 화가 난 최승희를 피해 도망가려 했지만 붙잡혀서 그녀의 긴 손톱에 살이 뭉개지고 피가 날 정도로 계속 꼬집힌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 날 함흥 공연은 바쁜 일정으로 인해 사전에 아무런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퀄리티가 전체적으로 개판이었으며, 최승희는 관객들에게 직접 사과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공연에 참가한 모든 제자들이 기합을 받는 와중에, 공연을 망친 주범으로 지목된 전황은 더욱 혹독한 체벌을 당한 것이다. 이 날 최승희의 분노는 대단해서 심지어는 모든 단원들을 다 쫓아내려고까지 했었다는데, 제자들이 그야말로 싹싹 빌고서야 최승희의 분노는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전황은 배우 전옥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누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큰 조카와도 나이 차이가 불과 3살밖에 나지 않았다고 하며, 그 큰 조카와는 숙질간이 아니라 오누이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 큰 조카가 바로 배우 최민수의 어머니이기도 한 강효실이다.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 강홍식과 함께 평양에 살고 있던 강효실을 전황이 데리고 월남하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황이 아니었다면 최민수는 태어나지도 못했을지도. 그러나 강효실의 두 남동생은 안타깝게도 같이 월남하지 못했고, 전옥은 평생 두 아들을 그리워 하며 살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강홍식도 이시이 바쿠한테 음악을 배운 제자로 최승희와는 사형 사제로 볼 수 있다. 그런 처남이었던 인물도 그냥...

아무튼 최승희가 중국 무용과 경극에 남긴 업적은 최승희가 중앙 희극 학원에 있을 때 최승희의 조교를 했던 왕시영(王時英) 교수의 "최승희가 경극 발전에 끼친 첫 번째 공은 경극 무용 동작의 기초를 정립한 것이고, 2번째는 경극 무용의 신체 훈련법을 만든 것이다." 라는 평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955년 8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민족예술발전을 위한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으로 선정되어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7년 7월 1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민족무용의 고전적 유산을 계승하는 사업에서와 해방 후 공화국 정부의 문예정책로선에 립각하여 자기의 창조적 로력으로써 조선민족무용을 창작발전시키며 수많은 후진 무용가들을 육성하는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데뷔 30주년 기념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2.2.2.1. 최승희 무용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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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맨 앞줄의 왼쪽의 인물이 남한의 원로 무용가 김백봉 경희대학교 명예교수(1927~2023)이다. 김백봉은 최승희의 수제자이며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의 부인으로, 최승희에게는 손아랫동서이기도 한데 스승인 최승희를 따라 월북했다. 최승희는 서울 출생이기 때문에 월북이 맞겠지만 원래 김백봉은 평양 출생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김백봉은 월북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 당시 부친, 남편과 함께 월남하였고, 남한에서 최승희의 무맥을 이어 받았다. 남편인 안제승(1922~1996)도 경희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대학교재를 쓰고 연극 연출가,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참고로 저 사진처럼 최승희가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는 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최승희는 주로 조선 춤에 한해서 가끔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였고, 나머지는 주로 안성희나 김백봉 같은 경력이 오래된 제자들이 교관이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수업의 내용은 조선 춤부터 현대 무용, 발레, 소련의 민속춤, 인도의 춤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속춤 등 다양한 종류의 춤을 배웠다고 하며, 소련의 민속춤 같은 경우는 소련에서 온 무용가가 지도하였다고 한다.

최승희 무용 연구소의 단원들은 최승희가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뽑았다고 한다. 최승희에게 발탁되어 입단에 성공하였어도, 수업 태도가 태만하다거나, 실력에 발전이 없거나, 몸 관리를 못해 살이 찌거나 빠지면 가차 없이 쫓겨났으며, 그렇게 쫓겨나 울고불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단원들 간의 위계 질서도 강한 편이었으며, 최승희의 눈에 들어 무대에 빨리 서기 위해 같은 단원들끼리도 질투와 경쟁이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최승희가 무대에 설 단원을 뽑는 기준도 상당히 엄격했는데, 무용 실력도 무용 실력이지만 키와 외모도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한다. 춤을 아무리 잘 춰도 키가 작고 외모가 떨어지면 절대로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2.2.3. 숙청

1949년 김일성은 아내인 김정숙을 잃었고, 이 시기가 김일성 본인에게는 인간적으로 굉장히 외로웠던 시기였다. 이 때 최승희의 명성이 워낙 세계적이었고, 그 미모도 빼어났기 때문에 외국에서 국빈이 왔을 때 최승희가 와서 공연을 해주면 김일성은 이를 무척 고맙게 생각했으며 또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 활동이 신생 국가 북한의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김일성은 최승희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금세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나 최승희는 애초에 공산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더욱이 김일성의 우상화와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사건건 마찰이 있었다.

1958년, 한설야를 제거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남편 안막이 부르주아 비평가로 몰려 카프 계열 문학가들과 함께 숙청되면서 그녀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북에서 월남한 이철주라는 사람이 쓴 <북의 예술인> 이라는 책에 보면 안막이 숙청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58년(1958년인지 1959년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일성 일파는 안막을 김일성 일파를 위해 충실했고, 또 한설야와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을 인정하나 그 경향성이 부르주아적 영웅주의로부터 출발한 공명심이 좌우했다고 단정하고 그를 숙청하는데 이르렀다. 그 결과 김일성 일파는 안막을 이승화, 임화 사건과 동일하게 미국 고정 간첩으로 내몰았으며 비공개리에 재판을 받고 투옥하였으나 형기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 비서실장 고봉기의 유서> 라는 책에서는 시바다 사노루라는 일본인이 쓴 <춤을 출 수 없게 된 여류무용가 최승희> 라는 글의 내용을 인용하여 안막의 숙청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비밀 경찰은 1958년 들어와 안막에게 반당 종파 분자의 용의를 품고 평안도 출신의 작가로 최승희의 평전을 쓴 서만일과 함께 체포했다. 비밀 경찰은 안막이 김일성의 궁정 작가라 불리는 한설야의 직계이고 이태준을 숙청하는 데 공적이 있었기 때문에 표면화하지는 않았지만 안막이 일제강점기도쿄에 있었던 사실에 착안하고 비합법 시대에 공산주의자로 자칭할 수 있었던 것은 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의 숙청에 나선 수사관들은 안막 체포 후의 자택 수색에서 많은 귀금속 제품을 발견하고 이것이 적의 스파이인 증거라고 단정하였다."

하지만 고봉기 유서는 1960년 1월에 고봉기가 이미 처형된 후에 고봉기의 이름만 빌려서 나온 것으로 위작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정설이다. 다만 저자가 북한과 아주 관련 없는 인물도 아니고 북한 건국 초기 조선인민군 군보 기자로 활동했던 김학철이라고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북에 남은 인맥이나 북중 국경지대에서 살면서 얻을 수 있던 정보로 썼을 가능성이 있으니 완전히 거짓이라고 보기는 조금 섣부르다.

위에 인용된 글의 내용에서도 보듯 안막이 체포된 후 가택 수색을 했을 때에 집에서 최승희의 사치로 인한 금, 은, 보석 등 온갖 패물들과 외제 물품들과 보물, 미술품, 골동품들이 많이 나와 안막은 미국의 간첩으로 몰리고 최승희는 부르주아적인 무용가라고 비판 받는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안막은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 등과 똑같이 미국 간첩 누명을 쓰고 숙청된 걸로 추정된다. 여기서 굉장히 아이러니한 사실은 안막과 최승희 부부는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 계열과는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로당 계열의 문화인들과 소련파 계열의 문화인들 쪽에서 최승희를 김일성에게만 아부한다며 눈엣가시처럼 여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1958년 중국 공연을 준비하던 도중, 당 간부들은 최승희에게 국립 교향 악단과 가수들을 동반하여 종합 공연을 나가라고 요구하였고, 무용의 단독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최승희는 이에 빡친 나머지 직접 김일성을 찾아가 이럴 수 있느냐며 항의하고 따졌다. 최승희는 불편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직접 김일성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즉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 때는 험한 말이 오갔다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로 김일성과 대판 싸운 걸로 추정 되는데...

결국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단만을 이끌고 독자 공연을 강행하였다. 그래서 김일성이 빡쳤을 만도 한데, 사실 최승희는 김일성과 당의 간부들이 무식하고 교양이 없고 예술을 모른다며 불만을 가지며 김일성을 무시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최승희의 명성과 그 능력 때문에 그녀를 우대했지만 내심 최승희가 오만방자하다고 여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1958년 출판된 자신의 저서 <조선민족무용기본> 에서 최승희는 대단히 큰 실수(?)를 했는데...
끝으로 나는 이 무용 기본을 발표함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준 조선 민족 무용 기본 연구 위원회 위원을 비롯한 여러 동무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책에서 저자의 말에 김일성에 대한 찬양 및 헌사를 빼놓은 것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은 예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부 작가 예술인들은 잘한다고 칭찬이나 하고 상이나 주어야 좋아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았다.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은 당과 인민을 위해서 일을 더 잘하라고 당에서 지도와 방조를 주었으나 그는 돈을 많이 받고 칭찬을 듣고 상을 많이 타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고, 시비질을 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내세우던 나머지 마치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 예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 처럼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최승희의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여기서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어떤 예술인' 이라는 지칭은 누가 들어도 최승희를 저격한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최승희를 공개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최승희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나 잠시간의 자숙의 시간(?)을 보낸 후 이 시간 동안 1년 뒤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저우언라이 총리가 김일성에게 최승희를 복귀 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있는데, 자숙의 시간(?) 동안 최승희는 집에서 주로 독서로 소일하였으며, 최승희의 조카인 최호섭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사건 후 최승희는 기가 많이 죽어 모든 일에 있어서 소심해 졌다고 한다.

월간 말의 1995년 8월호에 수록된 <월북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비극적 최후>라는 글 내용에 최승희의 제자였던 김해춘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이 때 김일성이 근신중인 최승희에게 옥백미 2가마를 보내라고 지시하며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사람 좀 되라고 했는데, 지금쯤 어깨가 쭉 늘어져 있을테니 찾아봐 주어라." 뜻하지 않은 쌀가마를 받은 최승희는 쌀가마를 부둥켜 안은 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 증언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최승희의 행보에서 김해춘의 증언과 최승희의 혈육인 최호섭의 증언이 서로 엇갈린다. 앞의 서술한 대로 최호섭은 이 사건 후 최승희가 기가 많이 죽어 모든 일에 있어서 소심해졌다고 한 반면에 김해춘은 이 사건 후에도 최승희는 여전히 기세등등하여 김일성과 당 간부들과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후 1967년까지 최승희는 '문예총 중앙 위원', '조소 친선 협회 중앙 위원', '무용가 동맹 중앙 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함을 달고 활동하였으나 이 직함들은 전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1960년대 이후 최승희의 무대 출연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승희는 1966년 3월 평양의 문학 신문에 <조선 무용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 이라는 논문을 4차례에 걸쳐 연재하였고, 1958년에는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이라는 책을, 1964년에는 <조선아동무용기본>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은 남한에서도 용케 출판되기도 하였다.

1967년 이후 최승희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국립 영상, 사진 보관소의 아카이브 목록을 보면 최승희의 1966년 공연을 촬영한 기록 영화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쩌면 이 기록 영화가 영상으로 남아 있는 최승희의 최후의 모습일수도 있다.

베네수엘라 공산당원이었고, 1966년에 스페인어 통역자로 북한에 초청받았다가 김일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7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던 시인 알리 라메다가 1979년 국제앰네스티에서 간행한 <내가 양심수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겪은 일> 이라는 수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것이 나의 최후 무대가 될 터이니 잘 봐주세요." 그 여자는 김일성의 탄압이 가까워 진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1967년이었다. 최승희는 반당,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 같다.

1967년에 남한과 일본의 언론에 의해 최승희의 숙청설이 보도되고, 최승희의 조카 최호섭과 최로사가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67년은 갑산파가 숙청되었고, 김일성의 5.25 교시 후 도서정리사업이 시작되며 김일성의 우상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이며, 김정일이 문화계의 전면에 나서며 혁명 가극, 영화 등을 창작하며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다. 1968년 소련대사관에서 최승희가 숙청당하고 공민권을 박탈당했다고 보고했다. 황장엽과 신상옥은 모두 최승희 숙청에 대해 증언했는데, 신상옥은 조선영화동맹위원장 리순덕으로부터 최승희가 중국 망명을 시도하다가 체포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고, 황장엽은 최승희가 지방으로 추방당한 후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1969년 5월 1일 교시에서 "조선 사람은 무용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인민은 노래 부르고 춤도 추는 것을 좋아한다." 라고 말했고, 김정일은 자기가 쓴 <무용예술론>이라는 저작에서
"그 전에 우리 나라에서는 무용극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 때 만든 무용극은 우리 인민의 민족적 정서에 맞게 우리 식으로 만들지 못하고 서양식 무용극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무용극이 우리 인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서양식 무용극을 절대화 하는 그릇된 관점과 낡은 틀을 부수고, 「피바다」식 가극이라던가, 「성황당」식 연극과 같이 우리 인민의 사상, 감정과 정서에 맞는 우리 식의 새로운 무용을 만들어야 한다."

라고 적어 놓으며 최승희의 무용극을 매도하였다. 즉, 결국 북한의 무용수들에게 최승희의 무용극을 배격하고 자신들을 우상화하는 공연을 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원쑤'이자 적인 최승희와 최승희의 무용, 무용극들은 반혁명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 하여 매장되었고, 최승희의 사진들이나 관련 자료들은 모두 불태워졌으며, 최승희의 제자들이나 최승희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지방으로 추방당하거나 숙청된 것이다.

최승희의 제자로 무용가로 활동하다 탈북한 김영순[5]증언에 의하면 최승희의 무대 데뷔 40주년[6]을 기념하여 최승희의 제자인 남자 무용가 오몽희가 닭 40마리[7]를 털을 다 뽑아서 잡았는데, 개인 우상화를 했다 하여 오몽희는 잡혀가 죽었고, 이 사건이 최승희 숙청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최승희가 직접 창작하고 주연했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도 비판을 받았고, <사도성의 이야기> 역시 숙청의 이유였다고 한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가 중국에서 1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 대본을 탈고한 후 1954년 초연되었으며, 최승희가 창작한 무용극들 중에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이후 김일성의 지원으로 1956년 영화화까지 되었다. 참고로 이 영화는 북한 최초의 컬러 영화라고 하는데, 물론 촬영 기술은 북한의 기술이 아닌 소련의 기술이었지만 당시의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보면 매우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참고로 <사도성의 이야기>의 영화 버전은 1998년 남한에서 중앙일보러시아에서 수집하여 공개되기도 하였다. 수집 당시 뉴스 보도 영상에 등장하는 조희문은 그냥 무시하자.

남한 최초의 컬러 영화는 1949년작 <여성일기> 인데, 현재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고, <여성일기> 이후 컬러 영화가 제작되지 않다가 1958년 임화수가 홍콩의 쇼브라더스와 합작하여 <이국정원> 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고, 1960년 <여성일기>의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남한 컬러 영화의 효시다.

<사도성의 이야기>의 영화를 연출한 정준채는 이후 8월 종파사건에 휘말려 숙청되었으며, 그의 동생 작곡가 정추는 소련 유학 도중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비판하였고, 북한은 소련에 정추의 송환을 요구하였지만 당시에는 북소 관계가 경색되던 시기라 소련은 북한의 송환 요청을 씹고 정추를 카자흐스탄알마티로 유배보냈다. 정추는 그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는데 소련 해체 이후 무국적자가 되었고, 결국 2013년 객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다만 카자흐스탄의 음악 교과서에 그의 작품 60여곡이 수록 되어 있을 정도로 카자흐스탄 음악계가 존경하는 위대한 거장으로 우대받았다. 남한에서는 월북자라서, 북한에서는 배신자라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어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고 잊혀진 비운의 인물이다.

정준채는 <조선예술>지에「첫 천연색 예술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를 끝내고」라는 글에서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의 연출 후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 작품은 이미 형성된 무용으로서 또 무대에서 상연된 작품인 만치 모든 것이 생각과 달랐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무대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무대에서 해결 못지은 점들을 영화 언어로써 해결하면서 무용을 살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원작을 충실히 잘 살린다는 것, 즉 원작의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나의 기본 태도였고, 이와 아울러 무용이 가지는 아름다운 선을 잘 살려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무용은 그 표현 형식에 있어서 리듬과 템포를 소유하고 있다면 영화도 리듬과 템포를 소유하고 있다. 이 표현 형식을 적절히 배합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 첫 번째 무용극 영화이며, 첫 솜씨의 천연색 예술 영화인 만큼 허다한 부족점들이 내포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경험을 거울로 삼아 보다 우수한 새 작품을 창조하는데 정성을 기울일 것을 맹세하자."

다만 <사도성의 이야기>가 안막의 숙청 후, 위에 상술한 김일성의 1958년 최승희 공개비판 사건 이후 당과 언론으로 부터 비판의 난도질을 당한 건 사실이지만 <사도성의 이야기>가 최승희 숙청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김영순의 개인적인 견해다. 그리고 김영순이 해당 인터뷰에서 <옥련못의 이야기>를 <사도성의 이야기>로 착각하여 잘못 말하거나 혹은 인터뷰를 한 기자가 착오로 잘못 적지 않았나에 대해서도 의심해 봐야 한다.

최승희가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와 연출을 맡아 1964년 공연했던 무용극 <옥련못의 이야기>는 김일성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혁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과 난도질을 당했고, 결국 이 작품이 최승희의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최승희는 자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무대에 다시 설 수 없게 되었으며 무용 생명이 끊어지고 말았다. 즉 <사도성의 이야기>보다 <옥련못의 이야기>가 오히려 1967년의 최승희의 숙청에 결정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옥련못의 이야기> 공연 이후 안성희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갔지만, 안성희 본인이 대본을 직접 쓴 게 아니고 안무와 연출만 맡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르기만 했다는 자기 비판을 하는 선에서 대충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에 안성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 안무한 <당의 딸>이라는 무용극은 김일성에 충성을 다하는 어떤 여인의 삶을 그렸는데, 안성희로서는 어떻게든 북한의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노력, 혹은 일종의 최후의 발악이었던 셈이다.

최승희의 정확한 사망 연도와 날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애국렬사릉의 그녀의 무덤의 묘비를 보면 1969년 8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의 남편과 절친한 관계였다는 황장엽은 1969년 8월 8일은 최승희가 숙청된 날이고 실제 사망 날짜가 아니라는 다른 이견을 내놓았다. 또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1979년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탈북자들의 말이 다 신뢰가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 말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또한 최승희의 제자인 김해춘은 최승희가 1969년 지방으로 추방된 후 1975년 량강도 풍산군에서 간암으로 투병 중 사망하였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 확인되지 않은 말이다.

상술된 김영순의 증언에 따르면 북창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도 정확한 사실은 아니고,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 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신상옥 감독은 이 수기에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 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을 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잘못된 정보였다. 예를 들자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때문에 이 이야기 역시 잘못된 정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 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그 개연성도 충분하다. 남편 안막부터 간첩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숙청된 이상 최승희에게도 간첩 혐의가 붙는 건 북한의 연좌제 때문에 성격상 당연한 것이다. 중국으로 망명한 전 인민군 군의관 이복순이라는 사람은 "최승희는 국제 스파이였음이 탄로나서 숙청되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또한 1950년대부터 일본에선 최승희의 초청 공연을 계속 추진했었고, 최승희 역시 일본으로 공연을 가고 싶어 했으나 공연은 번번히 무산되었고 최승희는 계속 일본에 가고 싶다고 징징댔다고 한다. 그러다 한 번은 일본사회당의 대표단이 방북한 적이 있었는데,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의 아무런 허가 없이 만나서 자신의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정상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당국에서 이 면담을 문제삼아 뒷조사를 한 뒤에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하여 간첩 활동을 하였다는 누명을 씌웠다고 한다.

연변 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8]도 최승희가 중국 대사관으로 망명을 요청했으나 중국 대사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주은래가 최승희의 광팬이었고 최승희의 중국 내 명성을 생각하면 의외일 수도 있지만, 저 당시나 지금이나 북한 안에서 외교공관을 통해서 달아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시민이 자기나라 대사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월북미군들도 소련 대사관과 중국 대사관에서 모두 쫓겨났고, 최은희 수기에 따르면, 북한에서 알게 된 마카오 처녀 공씨가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가서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모두 북한 측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것이 탄로나 대동강에 있는 쑥섬에 감금되었다.라고 신상옥 감독의 수기의 내용과 비슷한 증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탈출하다가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위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물증이 없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

참고로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은 안막과 최승희의 숙청을 미리 예언했다. 한국 전쟁 당시 안제승은 안막에게 "우리들의 출신 성분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다간 언젠가 숙청당할지도 모르니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내려 가는 게 어떻겠냐."며 형을 설득하였으나 안막은 화를 내며 동생의 말을 무시하였고, 결국 안제승과 김백봉 자신들 부부만 월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말년과 최후가 비참했던 최승희 부부에 비해 이 부부는 한국에서 정말 잘 나갔다. 안제승과 아내인 김백봉 두 사람 다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는 등 약간의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대학교수를 하고 문화 훈장을 여럿 받았을 정도로 한국무용계의 중요 인물로 대접받았다. 이들 부부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 무용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무용으로 손꼽히는 부채춤과 화관무가 바로 김백봉의 창작무용이다. 최승희도 이 때 월남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안제승이 이런 예언을 한 배경에는, 그만큼 최승희의 평소 언행과 행동이 북한 사회에선 매우 위험 수위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해볼 수 있다. 안막은 문화 선전부장의 자리에 있을 때 최승희 때문에 타격을 많이 받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최승희가 사사건건 김일성, 당 간부들과 싸우면서 눈 밖에 날 언행과 행동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승희는 김일성이나 당 간부들과 싸울 때마다 항상 "내가 그 위대한 최승희인데, 니들 따위가 나한테 감히 개겨?" 이런 식의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심지어 어떤 고위 간부는 최승희와 싸우다 최승희에게 뺨을 얻어맞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2.2.4. 복권

그나마 사후에는 1980년대부터 "그래도 최승희의 무용이 최고였지."라는 김일성의 말 한 마디로 복권의 기조가 보였다. 1994년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불쏘시개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와 최승희의 춤에 대해 호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사실상 복권 되었으며, 2003년 2월 9일,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9] 심지어 2011년에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며 <사도성의 이야기>를 리메이크 하여 공연하였다고 한다. 영상

지방으로 쫓겨났던 최호섭과 최로사는 쫓겨난 지 20년이 지난 1987년에야 평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들이 1995년 5월 김정일을 접견했을 당시 김정일은 이들에게 "편협한 자들 때문에 최승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고, 최호섭, 최로사가 20년간 지방으로 쫓겨가있어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날렸다고 한다. 지가 말한 그 편협한 자들에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도 포함되니, 결국 셀프 디스인 셈.

최호섭과 최로사의 어머니는 유명 여배우 석금성이다. 남편인 최승일과 시누이인 최승희가 월북했을 당시, 석금성은 시아버지를 병간호 하느라 따라가지 못했다. 후에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들인 최호섭과 딸인 최로사를 좋은 형편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월북하려는 황철을 통해 남편에게로 보냈다. 그 후로 그녀는 아들과 딸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었다. 석금성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과 재회하길 간절히 바랬었지만, 그녀가 노환으로 타계하는 1995년까지 자녀들과 그 바램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1991년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녀들의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는데, 최로사는 북한에서 시인이 되었고, 최호섭은 고모의 뒤를 이어 무용가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최호섭이 무용가가 된건 최승희가 큰오빠 최승일에게 "집안에 남자 무용가도 1명 있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최호섭에게 무용을 시킬 것을 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금성 본인이 증언한 자녀들의 월북 경위는 여기 서술된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평소에 남편은 북한에 가자고 했고, 나는 한국에서 연극을 하겠다고 하여 자주 언쟁을 하는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내가 부산에 연극하러 갔다 왔더니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북한으로 떠나 버렸어요. 무정한 사람이었어요." 라는 증언을 하였다.

3. 안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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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모스크바 공연에서 안성희와 김백봉, 참고로 한국 전쟁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와 그녀의 제자들은 중국, 소련을 비롯한 해외로 공연을 다니고 있었고, 당시 북한 내에서도 이를 까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진의 모스크바 공연은 1950년 6월 25일에 했고, 최승희를 비롯한 공연단은 공연이 끝난 후 공연단의 인솔자인 허정숙으로 부터 한국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귀국 이후 최승희는 다시 중국으로 피난하였다.

안성희는 김백봉, 전황 등과 함께 무용 위문단으로 뽑혀 서울에 내려왔고, 이후 목포 까지 내려와서 공연을 하였다. 이 당시 그 공연을 관람하였던 원로 무용가 이매방이 안성희에 의해 납북될 뻔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엔군인천 상륙 작전 의 성공 이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며 유엔군에 의해 돌아가는 길이 차단 되면서 안성희는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길이 차단 되었기 때문에 산을 탔는데, 밤에만 움직이는 통에 발 하나를 쓰지 못할 만큼 큰 상처를 입었고, 추위로 인해 동상까지 입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말라리아까지 걸려서 그야말로 거의 다 죽어갔었다고 한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평양으로 도망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평양의 인민일보에는 안성희가 남조선에서 공연하고 돌아오다 전사했다는 오보가 실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최승희가 당시 중국에서 창작하고 공연했었던 무용극 <조선의 어머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둠속에서 미군기가 평양을 폭격하는 가운데 어머니는 자기 딸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딸을 찾는 순간에 폭탄이 주변에 떨어진다. 어머니가 달려가 상처투성이인 딸을 만질 때 판소리가 나온다. "아이고, 이 일이 웬일이냐"하고 어린 딸이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 그리고 이후 그 어머니가 원수를 갚으려고 유격대 들어가 미군들과 싸워 승리한다.' 당시 최승희는 인민일보의 오보를 보고 안성희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무용극을 창작한 것인데, 이후 안성희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풀리긴 했지만, 이 무용극은 그대로 공연되었다.

최승희의 딸인 안성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최승희에게 무용을 배웠다. 최승희의 여러 제자들 중 안성희, 김백봉, 장추화가 수제자라 할 수 있는데, 김백봉은 최승희의 손 아랫 동서이기도 하였고, 또 최승희가 가장 신임하던 수제자였지만, 최승희는 딸 안성희가 무용가로서의 재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자 김백봉을 딸의 경쟁자로 여기고, 알게 모르게 김백봉을 견제하였는데 김백봉의 월남에는 이러한 이유도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최승희는 안성희가 아직 말도 제대로 못 알아 듣고, 말을 할 줄도 모르는 아기였을 때부터 "너는 꼭 엄마보다도 더 유명한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어야 한다."라며 안성희를 세뇌(?)시켰다고 한다. 김백봉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어린 안성희는 연습 도중 꾀를 부리다가 최승희에게 맞기 일쑤였다고 한다. 6살부터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서며 무용가로 활동했다.[11]

안성희는 1953년엔 소련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로 발레 유학을 갔다. 유학 생활 도중 1956년 모스크바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집시춤'으로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귀국 공연에서는 김일성이 공연을 관람하였고, 공연 후에는 그녀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중국조선족으로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 이 공연을 관람하였던 김예화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날 안성희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여러가지의 춤을 추었지만 관객들이 제일 열광했던 춤은 바로 '집시춤'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훈 배우가 되어, 최승희가 총 감독을 맡고, 안성희가 안무 지도를 하는 방식으로 어머니와 여러 작품들을 합작하며 그 명성이 최승희에 버금갔고, 국립평양무용극원[12]의 원장으로 재임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조선족 출신 무용가 진향란이 북한에서 무용 유학을 하였고, 안성희에게 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안성희가 국립평양무용극원의 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안성희의 나이가 불과 31세였으니, 이건 북한 정부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에서 이렇듯 안성희를 높이 띄워준 건, 후에 다시 서술되겠지만 최승희를 견제하기 위한, 혹은 최승희가 없어도 우린 그녀의 딸을 이용하여 북한의 무용을 발전 시킬 수 있다라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인민배우가 되었지만 상술했듯이 아버지는 숙청되고 어머니는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그녀의 입지 역시 매우 위태했고 그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어머니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향간에는 그녀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인 최승희를 고발하였고, 어머니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소문일 뿐,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아버지가 숙청되고 어머니가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 딸인 안성희만 혼자 승승장구했다 보니, 안성희가 부모를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한 제물로 희생시켰다는 류의 소문이 돈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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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최승희와 딸인 안성희의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모스크바로 발레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는 서양 무용에 능통했고, 최승희는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조선 사람은 조선 춤을 춰야 한다."고 항상 딸에게 자주 말했다고 한다. 최승희의 조카인 최호섭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파 간부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를 내세워 모녀간의 갈등을 민족파 VS 현대파의 대립 구도로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모녀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두 모녀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1959년에 안성희가 모친 최승희를 공개 비판했다는 건, 그녀의 자의가 아닌, 주위에서 강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안성희 문서의 평가에도 언급된 말이지만, 최승희는 딸인 안성희를 자신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지만 안성희는 자신을 최승희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어머니와는 다른 독자적인 계파의 무용가로 여겼으며,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했던 최승희는 그런 딸에게 내심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최승희의 활동이 끊긴 1967년 이후 딸 안성희의 활동도 같이 끊기고, 사촌인 최로사와 최호섭이 지방으로 쫓겨난 걸 보면 아마도 안성희도 최승희와 같이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김영순은 안성희도 최승희와 함께 북창수용소로 끌려갔다고 증언하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지방으로 추방된 후 농사를 짓다 탈곡기에 한쪽 손을 잃었다는 말이 있는데, 재일교포 2세 출신의 논픽션 작가 김찬정이 저술한 <춤꾼 최승희>라는 책에 저자와 절친한 사이인 어떤 재일교포 무용가가 1999년 북한을 방문하여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까지 북한 무용계에서 직접 활동하던 사람으로부터 "안성희는 무용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농촌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다가 탈곡기에 손목이 잘려 한쪽 손이 없는 상태이지요."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안성희가 2001년 사망하였다고 들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최승희 모녀와 관련된 그들 모녀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탈북자들의 증언들의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가 않고, 엇갈리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들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안성희가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로사와 최호섭이 1987년 평양으로 돌아온 걸 볼 때 적어도 1987년 이전에 사망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만일 1987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최로사와 최호섭이 평양으로 돌아올 때 안성희도 같이 돌아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또 1980년대 이후 최승희의 복권 분위기에도 그녀의 이름은 북한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걸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때 안성희가 최승희의 숙청 후에도 남동생 안병건과 함께 피바다가극단에 소속되어 안성희는 무용 안무를 담당하고, 안병건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떤 교포 음악가에 의해 바로 반박되었다. 이 사람은 자신도 피바다가극단에 가보았지만 안성희나 안병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10년 넘게 최승희에 대한 자료를 모아 2002년 최승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던[13] 정수웅은 1992년 러시아에서 과거 소련 시절 KGB에서 일했다는 사람으로부터 "안성희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저 증언을 한 사람이 정말로 KGB에서 일했는지도 모르겠고...

최승희는 안성희 말고도 안병건이라는 아들도 낳았다. 안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안문철은 개명한 이름이고, 안병건이 본명이다. 참고로 안막의 형인 안보승의 아들들의 이름이 안병찬, 안병국, 안병창이고 안제승과 김백봉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이 안병철, 안병주, 안병헌인 걸 볼 때 항렬이 병자 돌림이었던 것 같다.

안병건은 안성희와는 나이 차이가 무려 14살이 난다. 10대 시절부터 작곡가로 활동하며 어머니와 누나의 무용극의 곡을 쓰기도 했지만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어머니, 누나와 같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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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최승희로 분한 채시라가 최승희의 보살춤을 재연한 모습, 실제 최승희와 제법 비슷하게 싱크로율이 맞다 보니, 어떤 무식한 기자가 최승희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 스틸 사진을 실제 최승희의 사진이라고 올려 놓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MBC에서 1995년 광복절 기념으로 최승희에 대한 2부작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원작은 정병호 교수의 저서 <춤추는 최승희>이며 최승희 역은 당대의 인기 스타였던 채시라가 맡았고, 안성희 역은 선화예술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국무용을 전공했던 배우 이주영이 맡았다. 채시라와 이주영은 이 드라마의 촬영을 위해 최승희의 수제자 김백봉에게 매일 4~5시간씩 한국 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그 외에 박영규, 박상조, 박찬환 등도 출연했다. 연출은 <억새바람>과 <폭풍의 계절> 등을 만든 이관희 PD였다.

JTBC의 전신인 TBC에서도 과거 1974-5년 최승희의 삶을 소재로 금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최승희 역은 고은아, 안성희 역은 안인숙, 참고로 이 쪽의 내용은 "무용가 최승희가 북괴 사회에서 겪고 당하는 사건을 통해서 그 사회의 배리(背理)를 파해친다."라는 기획의도에 걸맞게 대놓고 반공 드라마로 제작된 지라 그 내용이 심하게 막나간다. 안성희가 한국 전쟁 도중 조선인민군 소좌에게 무참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은 안성희가 최현의 성노리개가 되는 내용까지 나온다. 최현이 누구냐 하면 김일성에게 끝까지 충성한 김일성의 충신으로 최룡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 외 1970년대 - 1980년대 제작된 수많은 반공 드라마들에도 단골로 등장하지만, 비중은 공기고, 심한 경우 김일성의 애첩으로 나오기까지 한다.

극단 미추에서 2003년과 2004년 최승희의 삶을 뮤지컬로 제작하여 공연한 적도 있다. 연출은 극단 미추의 대표 손진책이고, 최승희 역은 연출자 손진책의 부인인 배우 김성녀가 연기하였고, 당시 50대의 나이였던 김성녀는 최승희를 연기하기 위해 무려 8kg를 감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성희 역은 배우 최수현이 연기하였다.

이 뮤지컬은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에 대해 조금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는데, 안성희는 항상 어머니 최승희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애정을 갈구했지만, 유명인이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고, 그런 부분에서 애증이 있었다는 뭐 그런 식으로 표현되었지만 물론 실제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최승희로 분한 김성녀가 부르는 향수의 무희의 음원이 올려진 링크, 김성녀의 보살춤 의상
참고로 보살춤 의상의 저 구슬의 원가가 무려 1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춘앵전(한승희, 전진석 작)이라는 제목으로 만화화 되기도 했다.

5. 그 밖의 이야기

최승희가 강원도 홍천군 출생이라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일단 국내에서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최승희 전문가인 무용 평론가 정병호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는 최승희의 모교인 숙명여학교의 학적부를 근거로 하여 최승희의 고향이 홍천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이 저술한 최승희의 평전이자 이 문서의 참고 서적인 <춤추는 최승희>에도 최승희의 출생을 서울이라 기록하였다.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최승희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고, 숙명여학교 재학 당시에는 종로구 체부동 137번지의 초가집에 거주했다고 분명히 적혀있다.

최승희의 홍천군 출생설은 1989년에 강원도민일보 기자였던 함광복이 최승희에 대해 취재하던 중 누군가로부터 “최승희 고향이 홍천”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약 15년간 자료를 뒤진 끝에 최승희의 5촌 조카 최경희의 “최승희의 고향은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증언과 1938년 미주 공연을 마친 뒤 교민 신문인 신한민보에 실린 “최 여사의 약력을 듣건대 그는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 씨 영애로 일찍이 경성 숙명여학교를 필업하였고…”라는 기사를 주요 근거로 하여 2006년에 최승희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해당 기사의 내용을 보면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 씨의 영애로' 라는 말이 분명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최승희가 홍천군에서 태어났다고 해석하는 건 분명히 무리가 있으며,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의 출생지가 홍천이었을 수도 있지만 최준현의 집안, 그러니까 최승희의 집안이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가 출신인 걸 감안하면 이 역시 가능성이 떨어진다. 한 마디로 신한민보의 보도가 오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고 무엇보다 최승희의 출생 당시 조선총독부토지 조사 사업 기록을 보면 최준현의 주소지는 분명히 경성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최승희는 홍천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거주했던 적도 없다.

모교인 숙명여자중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는 당연히 학교를 빛낸 '위대한 선배님들'의 반열에 올라와 있고, 심지어는 전교에 최승희 포스터가 1장 ~ 2장씩은 붙어 있다 한다. 이를 본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최승희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 왜 이렇게 찬양하느냐"며 따지고 들자 교장은 오히려 최승희의 행보를 두둔하며,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했기에 예술을 할 수 있었다"는 망언을 했다고 한다.[14]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 한국어 위키백과, 중국어 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에 모두 최승희 문서가 개설되어 있지만, 한국어 위키백과의 경우 오히려 중국어 위키백과 보다 그 내용이 상당히 많이 부실한 편이다.

광고 모델로도 자주 출연했다. 아지노모도는 물론, '대학목약'(산텐도제약(現 산텐제약)에서 개발한 안약)이라는 안약 광고에도 등장했다.

'나빌레라'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조지훈의 시 '승무'가 최승희의 무용에서 그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한다.

이태준의 단편 소설 '복덕방'의 주인공인 안 초시와 무용수인 딸 안경화의 모델이 최승희와 그녀의 아버지인 최준희라는 해석이 있다.
파일:1936 손기정 무용수 최승희.jpg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마라토너 손기정과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지금 현재 최고의 스포츠 스타와 최고의 연예인이 같이 찍은 사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진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당시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명월관에 여러 유명인사들이 모였고 최승희도 초대되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진행되던 도중 누군가가 일본에서 공연을 하는 최승희를 친일파라고 비난을 하였고, 이에 최승희가 조용히 자리를 뜨려고 하자 손기정이 화를 내면서 "그럼 일장기를 달고 뛴 나도 친일 행위를 한 것이란 말이냐?" 라고 변호를 해줬다. 그러나, 최승희를 친일파라고 비난한 그 사람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지 훗날 최승희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고 친일 공연에 출연하는 등, 진짜 친일파로 변절하고 말았다. 정작 최승희를 친일이 아니라 감싸준 손기정이야말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북한이탈주민 출신의 연예인 강나라 씨의 어머니 최신아 씨가 최승희의 제자로부터 춤을 배운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벌써 시각적으로 우릴 사로잡는 거죠. 그러더니 조명이 싹 귀퉁이로 산같이 동그랗게 비춰요. 모두가 다 보죠. 거기에 음악이 탁 나와요. ”봄이 왔네, 봄이 와.“ (멜로디로) ”봄이 왔네. 봄이 와.“ 거기에 맞춰서 최승희가 초립동이 춤추죠. 빨간 옷 싸악. 첫 눈에 반해버려요.

최승희는 그 눈이 그렇게 아름다워. 일본 사람들의 소설을 보면 여자의 아름다운 눈을 가리켜 ‘흑요석 같은’ 그러거든. 요석이란 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흑요석. 반짝반짝반짝. 약을 친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몸매가 날씬한 게 보통 우리 한국 여성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었어요. 최승희가 170cm이고, 그리고 보통 사람은 160cm 안팎에서 160cm만 되도 괜찮았다고. 미스코리아도 165cm도 나왔으니까. 지금이야 175cm 돼야만 되지만은. 뭐 아무튼 그런데, 그렇게 우리는 키 큰 여자는 별로 안 쳤거든요. 자고로 여자는 품 안에 들어야지 키가 크면 재수 없다, 팔자가 쎄다 그래서 큰 사람은 굉장히 쇼크를 먹었는데 그 쇼크를 먹을 만한 최승희가 무대에 나와서 하는데 이건 뭐 미의 극치에요. 그러니까 하나 끝났는데 징 하고 들어가고 박수를 쳤지요.[15]

그래 나는 이게 처음 무대면 요만큼 앉아 있다가 나중엔 끌려서 맨 앞에 무대, 무대가 이러고 나는 구경하는 거예요. 그러면 최승희가 춤추다가 내 눈하고 맞잖아요. 그런 그 최승희, 지금 생각하니까 객석에 있는 어떤 사람들을 지적해 그 사람하고 눈을 맞추는 거예요. 이것은 배우술에도 필요하다고. 그러면 객석에 있는 사람이 아, 저 배우가 나를 보고 있다 할 때, 부끄러 외면하는데 눈이 마주치면 같이 교류, 교차된다고 그랬었더라고요. 그래 나도 나를 보고 이렇게 웃으면 나도 웃는 거죠. 그런 일이 있더라고요. 야, 춤이라는 게 저렇게 좋은 것일까. 그러고는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 진짜 잠을 못 잘 정도로..."

-출처 : 차범석 구술, 김성희 채록, 『200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48: 차범석』,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범석은 13세에 최승희의 공연을 처음 관람했고, 그 후 부터 최승희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자신의 어머니의 치마를 몰래 입고 최승희의 춤을 흉내내다 어머니에게 들켜서 혼난 적도 있다고 한다. (...)

"그 때 나는 불상적인 아름다움에 완전히 끌려 들어갔다. 최승희 최후의 리사이틀이 제국 극장에 있었을 때에 최승희의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와서 보니까 반나체 불상춤 사진이 있었다. 몸에 보석이 장식된 반나체 사진을 보고 어쩐지 에로틱하게 생각되었다. 그때에는 스트립쇼와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최승희의 이러한 반나체춤은 전쟁 중에 허가된 최후의 반 스트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승희의 반나체 불상춤은 지금의 전 나체의 스트리퍼보다 훨씬 더 에로틱한 자태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최승희의 몸에서 무엇인가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 불상춤의 환상은 그 얼굴이 불상과 비슷해서 어디엔가 불상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더 요염한 맛을 낸 것이 아닌가 본다."

미시마 유키오의 <나의 사춘기> 中'
최승희는 1944년 1월 27일 부터 2월 15일까지 제국 극장에서 20일 동안 23회의 투어를 했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그 투어의 공연을 본 것이다. 참고로 최승희는 이 투어 후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갔고, 중국에서 광복을 맞이 하였는데,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최승희와 안막 부부는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일본이 망할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미리 중국으로 도망갔다." 라고 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글에서 보듯 최승희는 1930년대 - 1940년대 당시에 이미 무대에서 에로티시즘을 구현하고 있었다. 참고로 최승희의 공연 레파토리나 의상은 공연하는 나라마다 달랐는데, 심지어는 똑같은 춤을 추더라도 공연하는 나라마다 약간씩 다 달랐다고 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외세의 외풍의 탐류 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취하고 민족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보대감이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를 때였다. 바로 이 시대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 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춤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 등을 하나하나 찾아 내며 현대 조선 민족무용 발전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 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장 무대에 성악 작품, 기악 작품, 학술 작품이 오르는 예는 있어도 무용 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 작품들을 창작해 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 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中

제자 김백봉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최승희는 월북한 직후 김일성과 대담에서 "최승희 동무, 다니러 왔어요? 살러 왔어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살러 왔다는 대답을 들은 김일성은 모란봉 밑에 있는 요릿집(동일관)을 연구소로 내주었다고 한다.

6. 참고서적



[1] 1940년에 멕시코에 입국할 때 작성한 입국신고서에서 최승희 본인이 1.65m(165cm)라고 기재했다. 170cm나 175cm라는 설은 힐을 신고 잰 키였던 것으로 보인다.[2] 소설가 안회남의 육촌 동생이다. 안회남의 아버지는 우화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인 안국선이다. 숙부는 안경수이다.[3] 1905년 - 1966년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바위나리와 아기별>의 저자이며, 광복 후에도 아동 문학 창작에 힘쓴 인물이다. 아들이 의사 겸 시인으로 유명한 마종기다. 여담으로 나혜석화백의 제자인 장욱진화백이 서울에 살 때에 이웃사촌이다.[4]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5] 성혜림친구였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요덕수용소에 10년 동안 수감된 적이 있다.[6] 김영순은 30주년이라고 말했지만 최승희가 처음 무대에 선건 1927년이다. 고로 40주년이 맞다. 아마도 인터뷰의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걸로 추측된다.[7]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김영순은 30주년을 기념하여 30마리를 잡았다고 말을 했지만, 위의 각주에도 설명했다시피 30주년이 아니라 40주년이다. 따라서 닭도 30마리가 아니라 40마리를 잡았을 거라 추측된다.[8] 이 사람은 평안도가 고향으로 평양에서 최승희와 직접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최승희는 꽤나 권세가 있어 보였으며 자신이 어떤 북한 문화계 사람에게 "안막, 최승희, 안성희가 다 해먹는다."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9] 이때 한설야 등 다른 예술인들도 같이 복권되어 안장되었다.[10] 소련북한의 합작 영화 <잊지말라 파주블!>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안성희, 참고로 최승희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 형제의 모친 역으로 출연하였다고 한다.[11] 안성희의 검무를 그린 그림엽서 1950년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12] 국립평양무용극원은 국립평양예술대학의 부지 안에 있었는데, 그 부지의 3분의 1을 점유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시설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이 국립평양무용극원은 국립 최승희 무용 연구소가 개편 된 것으로 추측된다.[13] 이 다큐멘터리는 2002년에 KBS1에서 방영되었고, 이후 정수웅은 2004년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최승희> 라는 최승희의 화보집을 출간하였다.[14] 첨언하자면,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태평양 전쟁 시기 전시 예술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 본인들도 전시 프로파간다에 해당하는 예술이 아니면 검열받았기에 본토에서조차도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긴 했다. 다만, 그런 압박에 시달려서 결국 아예 심해진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공개적인 대중예술을 잠깐 포기하고 절필한다거나 잠적했던 예술가들도 있었던 걸 떠올리면 그 말이 핑계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15] 1910년대생 식민지 조선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0cm 정도이고 남성 평균 신장이 160cm대 초반이었음을 생각하면 실제 170cm는 엄청난 장신이지만, 이는 증언자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적었든 1940년에 실제 최승희 본인이 밝힌 키는 164cm였다. 164cm라고 해도 웬만한 남자 키만큼 컸다는 이야기므로 작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