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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熙文
1957년 1월 26일[1]~ ([age(1957-01-26)]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 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본관은 풍양(豊壤)[2].2. 생애
1957년 1월 26일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났다. 상주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문과대학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였다.한양대학교 졸업 후 1981년 경인일보에 입사해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고, 그 사이 1983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학 전공으로 연극영화학 석사 학위[3]를 취득하였다. 1992년에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 박사 학위[4]를 취득했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상명대학교 천안캠퍼스 영상학부 영화학 전공 교수,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2007년부터 인하대학교 영화예술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이 사이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2000년대 중반 뉴라이트가 한창일 때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선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2009년 9월 7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후술할 여러 문제 때문에 2010년 11월 8일 해임되었다.
2020년 6월 현재 영화평론가 및 조희문영화아카이브 대표로 있다.
3. 논란 및 사건 사고
3.1. 통신사 할인 논란
2000년대 중반에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통신사(SK/KT/LG) 할인혜택을 대폭 축소하자, "이제 한국영화는 끝났다"면서 저주의 글을 언론에 기고하였다. 참고로 이때는 실미도 - 태극기 휘날리며 - 왕의 남자 - 괴물이라는 천만영화가 매년 터지던 시점이었다. 그야말로 작품성과 대중성이 조화된 걸작들이 쏟아지면서 한국영화의 최전성기라고 하던 시점이었는데, 조희문은 한국영화를 오로지 통신사 할인 같은 각종 쿠폰과 티켓가격 깎아주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품이라고 폄하하면서, 통신사 할인혜택이 대폭 축소되면서 이제 끝났다는 망언을 하였다.3.2. 영화 시 0점 사건
2010년 때 이창동 감독의 영화인 시가 0점이라는 어이없는 점수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 정부투자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는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할만한 작품에 대해 제작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원할 영화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인 조 위원장[5]이 독립영화제작 지원심사 과정에서 조 위원장 자신이 출연한 다큐물과 북한에 삐라를 살포하고 있는 반북 단체의 영화를 선정해 달라고 압력을 행사하고, 정작 이 영화는 0점을 주었기 때문이다.규정에 의하면 최하점수는 0점을 줄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며, 조희문은 또한 이전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여러번 0점을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조 위원장의 0점 채점으로 인해 "시"는 영진위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참여정부에서 장관직을 지낸 이창동에 대한 당시 정권의 반감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6] 그러나 시는 조희문의 심사를 비웃듯이 당당하게 칸 영화제 각본상을 타냈고, 조희문과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중견연기자 출신 유인촌은 구설에 올랐다.#
3.3.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비하 발언
세계적인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박찬욱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연이 생겨 친한 사이인데, 이를 두고 조선일보에서 타란티노가 저질 영화를 찍는다며 헐뜯으면서 박찬욱까지 싸잡아서 비판한 경력이 있다. 나아가 올드보이는 미국 상류층이 싫어할 영화라고 발언하며 깎아내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3.4. 나운규에 대한 폄하
일제 강점기 때의 전설적인 민족주의 영화감독인 나운규를 두고 '아리랑(영화)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 스모리 슈이치가 연출한 작품이다'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키노 1997년 8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희문의 주장을 조선일보가 대서 특필했지만, 근거가 희박하여 영화계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7]3.5. 교수채용 비리 및 뇌물수수 범죄
온갖 구설수 끝에 2010년 11월 8일 영진위에서 해임됐다. 이에 조희문은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며 해임취소 소송을 내는 등 저항하였지만 2011년 12월에 패소한다.2014년 3월에는 한예종 교수채용 비리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어 동년 7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로 감형됐다.
4. 여담
[1] 음력 1956년 12월 26일[2] 전직공계(殿直公系)-호군공파(護軍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29세 희(熙) 항렬.[3] 석사 학위 논문 :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광복기 영화연구 : 항일 영화를 중심으로, (1983)[4] 박사 학위 논문 : 초창기 한국영화사 연구 : 영화의 전래와 수용(1896-1923)(1992)[5] 원래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인 공연윤리위원회 시절부터 심의위원이었다.[6] 그런데 훗날 조희문은 이명박 정부때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장이 된다. 그런데 독립영화 지원사업 심사에 개입해서 특정 작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 1년 만에 해임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후 조희문은 태도를 180도 바꿔 본인이 그렇게 아부하던 이명박 정부는 좌파정권이라며 비난하는 등 추한 모습을 보였다.[7] 1926년 개봉 당시 조선일보 광고에 스모리 슈이치가 감독으로 나와있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 영화계에서 제작자로 유명하던 스모리 슈이치의 이름을 썼을뿐, 실제 연출은 나운규가 직접 했다는게 정설이다. 실제 1930년대에 조선과 일본에서 나온 각종 영화계 자료들은 하나같이 나운규를 아리랑의 연출자로 표기하고 있다.[8] 이명 조의연(趙義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