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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덕 제15호 관리소의 위성 사진 | |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 요덕수용소(耀德收容所) 용평완전통제구역(龍坪完全統制區域) |
설립 | 1959년 ~ 1964년 |
목적 | ✔ 체제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 및 응징 ✔ 정치범을 격리하여 체제 위협 방지 ✔ 정치범의 강제노동을 통한 착취 |
규모 | 부지면적 378km2[1] 수감인원 34,000여 명(2024년 6월 기준)[출처] |
상위 조직 | 국가보위성 농장감시국 |
운영 여부 | 운영 중 |
주소 | |
요덕 제15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 / 대숙리 / 평창리 / 입석리 / 용평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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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다. 일명 요덕수용소로 불린다. 구금 인원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하면 현존하는 세계 최다 인원의 구금 시설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수용소다. 1980~1990년대 북한 수용소의 대명사 하면 아오지 탄광이었지만 21세기에는 뮤지컬 요덕스토리,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의 대중 매체를 통해 외부에 알려지고 생존자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중에서는 매우 많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4] 아오지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유명세를 탔다. 이름도 요단강과 어감이 비슷하기도 하고 북한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용평이라는 별명으로 청진 제25호 관리소와 쌍벽을 이루는 공포의 수용소다.
데일리NK 기사에 따르면 2014년 해체 후 정치범들은 개천 제14호 관리소와 명간 제16호 관리소로 이송되었다고 하지만 2019년 9월 4일 기사에 따르면 요덕에 수용된 수감자 일가족이 자살했다고 북한 소식통을 통해 전해졌는데, 기사에 따르면 일부 시설이 축소됐으나 수용소는 여전히 운영 중이라고 언급한다.
수용소 정문 남쪽으로 1.5km 지점에 62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가장 가까운 역은 평라선 요덕역으로 도로를 따라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구글맵 링크(최신 위성 사진), 38노스 링크(상세 수용소 시설 정보), 오픈스트리트맵 링크(수용소 경계).
2. 규모
수용 인원은 약 50,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개천 제14호 관리소의 3배, 명간 제16호 관리소의 4.5배에 달하는 크기다.수용소의 경계는 동북쪽에 모도봉(毛都峰, 높이 1,883m), 서쪽으로는 덕산(德山, 높이 1,250m), 남쪽으로는 병풍산(屛風山, 높이 1,152m)로 삼면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 해당 수용소에 지류로 흐르는 강이 입석천이다.
수용소의 전 경계는 3~4m 정도의 철조망이나 2~3m의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일부는 구글 어스상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감시탑의 높이는 7~8m이며 1k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경비대원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며 경비견도 딸려있다. 마을에는 2명의 감시자가 매 시간마다 있으며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함정도 설치되어 있다.
구글에 Yodok Concentration Camp Location으로 검색해서 뜨는 위치의 대부분은 요덕읍을 잘못 표시한 것이긴 한데 요덕읍과 수용소의 거리는 2.5km에 불과하다. 2.5km라고 해서 연상이 안 간다면 보통 한국 고속도로, 국도의 나들목 예고 표지는 최소 2.5km 내에 설치하며 시내버스 6정류장 또는 지하철 2정거장 반 정도 거리밖에 안 떨어진 셈이다.
2.1. 혁명화구역
이 수용소의 특징은 바로 혁명화구역이 있다는 점이다.[5] 다시 말하면 재교육 후 일정 기간 또는 당성에 따라[6] 석방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해당 구역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사람들의 증언이 있어서 다른 곳보다 더욱 유명하다. 거꾸로 말하면 여기는 살아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곳으로 다른 완전통제구역보다는 처우가 낫다.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수감실은 벽이 말려진 진흙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나무 널판지 위에 지푸라기가 올려져있는 물이 새고 썩은 상태라고 하며 바닥은 말린 지푸라기로 만든 매트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수감실은 약 50m2이며 이 수감실 안에 30~40명 사이의 수감자들이 취침한다고 한다. 당연히 냉난방이 안 되어서 겨울에는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져 수감자들이 동상에 걸린다고 한다. 각기병과 각종 폐 질환들도 수감자들 사이에서 만연하다.
그나마 혁명화구역이라 조선로동당 기준으로 사람으로 보는지 학교가 있고 학교 교실에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있기는 한데[7] 그 학교에서 수업이랍시고 하는 게 기초적인 덧셈, 뺄셈, 그리고 글 읽기와 쓰기 정도와 김씨 일가 우상화 교육이지만, 북한에서는 김씨 일가 우상화 교육을 시키는 곳만 그나마 공민으로 본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곳 중 일부가 바로 혁명화구역이다. 마찬가지로 개천 제18호 관리소도 혁명화구역에 속한다.
이곳에서 풀려났거나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있어서 증언들이 상당히 자세한 편인데 후술할 증언들은 모두 혁명화구역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용평 완전통제구역은 이보다 상황이 훨씬 참혹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8] 애초에 정치범수용소 자체가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한 기관이라지만 여기는 100% 사람을 학살하기 위하려고 만들어둔 곳은 아니다. 물론 목적만 그럴 뿐이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어나는 극악의 인권 유린과 중노동은 똑같기 때문에 살아나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혁명화구역 수감자 출신 강철환은 9살에 수감되어 19살에 석방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김부자를 비판하는 속칭 말반동으로 잡혀가서 당사자는 완전통제구역 중에서 승호리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어머니는 강제 이혼, 할머니, 아버지, 여동생, 막내삼촌과 같이 수감되어 9년 8개월간 수용되었다고 한다. 일단 어린이들도 모두 강제노동에 동원되는데 완전통제구역과 노동 강도는 비슷하지만 1시간 늦게 일어나고 1시간 일찍 잘 수 있다고 한다. 즉 2시간 정도 노동 시간이 짧은 편. 거기다 김부자 생일과 신정에는 쉴 수 있었으나 그 정도가 좋은 점의 거의 전부라고 한다.
원래 재일교포들은 절대 석방되지 않았는데, 때마침 재일교포들에게 연락이 안 되는 친척들에 관한 수용소 이야기가 일본 조총련에 퍼져 조총련측의 항의와 함께 일본에서 보내지는 송금액이 급격하게 줄어버리자 김정일의 특별 지시로 일본에 친척이 있는 재일교포들만 선별적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석방될 때는 수용소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한 비밀 준수 원칙을 약속해야 나올 수 있다. 이 약속을 어기고 조금이라도 발설하게 될 경우 완전통제구역 내지는 처형을 당할 수도 있다.
2.1.1. 크기
안혁[9]에 따르면 거의 군 하나와 맞먹는 넓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혁명화구역은 입석리, 구읍리, 대숙리에 있으며 이 중 대숙리에는 안혁과 강철환[10]이 억류되어 있던 마을이 있고 입석리와 구읍리에는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돌아온 조선적들이 수용된다고 한다.[11] 평전리에는 노동 단련소와 집결소와 완전통제구역이 존재하며 용평리에도 완전통제구역이 있으며 비밀 처형장이 있다고 한다.강철환의 말에 따르면 구읍리에 있는 시설은 석고 광산과 금광이다. 800명 정도의 남성이 여기에서 일하는데 사고의 위험이 높아서 가장 힘든 일로 간주된다고 한다.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돌아온 재일교포나 조선적들은 양조장에서 일하는데 주로 옥수수, 도토리, 뱀술을 담근다는 등의 일을 하며 일부는 구리 세공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토끼를 길러서 인민군들의 겨울 옷을 만들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땔감이나 인삼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해야 했다. 참고로 이 금광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금광이라고 한다.
강철환이 수용된 마을에는 2,000~3,00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매년 100여 명씩 영양실조와 병, 특히 극심한 설사로 인한 탈수 증세로 인해 숨진다고 한다.
2.1.2. 처벌
혁명화구역에서 음식을 훔치려고하면 심한 형벌이 뒤따르는데, 구류장 수감형이 있고 보위부원에게 반항하면 본인은 처형 당하고 가족이 완전통제구역으로 이끌려가는 등의 심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이영국[12]이 본 바로는 탈출을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한승철이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차에 질질 끌려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끌려다녀 죽었다고 한다. 정치범수용소/북한 항목에 서술되어 있는 일화가 바로 이 일화다. 다른 수감자인 안승은은 잔혹 행위를 비판했다가 그 자리에서 총살 당했다. 김태진은 수감자들이 모여서 목이 매달린 시체에 돌을 던지는 것을 강요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시체 훼손을 강요 당했는데 일부 수감자는 기절할 정도였다니까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것이다. 강철환은 15회의 사형을 더 목격했다고 한다.2.2. 완전통제구역
여기 한 번 수감된 자는 김정은의 명령이 있거나 탈출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아 돌아올 수 없다. 평창리, 용평리 소재.- 용평 완전통제구역에 대한 증언으로 김영순(1937년생)의 증언이 있다. 이 PDF 파일(열면 다운로드 없이 바로 브라우저로 열람할 수 있다) 56~58쪽(PDF로는 70~72쪽) 참조. 1970년부터 요덕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다가[13] 1975년 용평 완전통제구역의 작업반장으로 선임되었고 그곳에서 3년간 일한 뒤 석방되었다.[14][15]
다음은 그녀의 증언이다.
"수감자들은 모두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누더기 같은 옷은 항상 더러웠고, 자주 씻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자기가 담당하던 돼지가 죽으면 어디론가 끌려갔고, 자기가 담당하던 논이 마르면 짐승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조선로동당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면서 살아 있는 범죄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된 자들은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이 보기에 구제불능인 반혁명분자들의 직계 가족들이다. 이들의 가장(반혁명분자)은 이미 처형되었거나,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었거나, 탈북하여 남한으로 간 경우가 보통이다. 지주, 부농, 왜경, 종교인의 후손, 탈북자의 가족들이나 그 자손들이며 심지어 겨우 김일성의 초상화와 흉상을 '잘못' 취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통제구역에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정치범수용소 규모의 한계 때문에 모든 적대계층이 요덕과 같은 완전통제구역에 수용되는 것은 아니고, 149호라고 해서 탄광이나 광산 지역으로 혹은 국경과 해안에서 이격된 내륙 산골로 추방하기도 하는데 이 중에서 유명한 게 국군 포로들이 쫓겨간 아오지 탄광이다.
- 완전통제구역에는 북한 어디에나 걸려 있는 김씨 3대의 사진이 안 걸려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수용자를 절대로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학교에서도 김씨 일가 사상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북한에서 가르치기로는 '육체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정치적 생명'이 죽은 사람들로 석방 계획이 없는 종신 수형자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육체적 생명'보다 '정치적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 완전통제구역에서도 학교는 있으나 인민학교 4년, 중학교 3년까지 총 7년만 가르치고 어디까지나 수감자 어린이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운영하며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국어와 산수 정도만 가르친다. 교사는 역시 보위부 요원으로 오전에만 수업하고 오후부터는 강제 노동에 투입된다.
- 혁명화구역 출신 강철환은 작업 중에 완전통제구역으로 넘어간 양떼가 있어서 보위부에 통보하고 경계에서 완전통제구역 출신과 조우할 수 있었는데, 비날론으로 만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고 혁명화구역보다 더 처참한 몰골을 해서 놀랐다고 기억했다.
3. 여담
- 최승희의 제자 김영순의 증언에 따르면 배우 강효실의 부친이자 배우 최민수의 외조부인 영화배우 겸 감독 강홍식이 1971년에 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무용가 최승희와 만담가 신불출도 이곳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인 김현희가 자살에 실패하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자, 김정일은 '여자는 요물' 이라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의 가족들을 모두 이 곳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 1992년 요덕에서 빠져나온[16] 김태진의 말에 의하면 혁명화구역의 인구 수는 거의 2,000~3,000명 가까이 줄었는데 그 이유는 풀려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완전통제구역으로 압송되었기 때문이다. 더 넓어지고 있으며 현재진행형이다.
- 김영순[17]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에 15호 수용소의 입구에서 우측으로 가면 정신병자 수용소가 존재했다고 한다. 특히 전국적으로 김씨 왕조에 대해 비난이라도 한 정신병자들은 별도로 마련된 17호 수용소라는 곳에 따로 모아 거의 매일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로 몰살했다. #
- 오타쿠 내지는 오타쿠들이 주로 모이는 사이트/게시판의 멸칭인 수용소는 해당 수용소에서 유래하였다. 어감 때문에 오덕 수용소라는 말도 연상되기도 해서 북한의 오타쿠들은 요덕 수용소로 끌려간다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19]
- 애니메이션 붉은 태양의 배경도 주인공이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 끌려오면서 생기는 일들을 내용으로 한다.
- 2000년대 일본의 한 방송에서 요덕 수용소의 영상[20]을 입수하여 방영한 적이 있다. 주변은 위성 지도로 봤을 때와 같이 황량하며 영상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겨울 때의 요덕 수용소의 북쪽 입구라고 한다. 입구에 김정일 찬양 문구가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21]
4. 관련 문서
[1] 경상북도 고령군 전체 면적과 비슷하고, 유럽의 미니국가 몰타와 강화도보다도 넓다.[출처] 데일리NK.[3]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과 선흥면.[4] 14호 관리소는 김용 1명만 살아남았고 16호, 25호 관리소는 검증된 생존자가 아무도 없다.[5] 개천 14호, 명간 16호, 청진 25호는 100% 완전통제구역으로 운영되며 이는 석방될 희망이 없는 죽음의 수용소임을 의미한다. 그곳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우상화물이 없으며 그런 교육도 하지 않는다.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개천 18호도 100% 혁명화구역으로 운영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악질 정치범으로 판명된 인물들을 14호로 옮긴다고 한다.[6] 물론 일정 기간이라는 기준이 분명하지 않아 언제 나갈지 모른다. 장소가 로동교화소 대신 정치범수용소이고 기본적으로 무기로동교화형을 사는 것과 같다.[7] 이게 북한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교육 시설이 있고 교육 시설 내에 우상화 사진이 있다는 건 "수령님과 장군님께서는 너희에게 실망하셨지만 그래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으니 두 분께서 아직 지켜보신다는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반성하고 만족 시켜 드려라. 그러면 용서 받고 여길 나갈 수도 있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것조차 없는 수용소들은 과거 나치의 절멸수용소마냥 애초에 살아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후술하는 이른바 '육체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이라는 개념과 결합해서 보면 더 무서운데, 혁명화구역이라 함은 북한에서는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 '정치적 생명'을 자기네들이 떠받드는 수령님과 장군님이 새로 부여해준다는 의미라서다.[8] 완전통제구역은 처음부터 수용자를 가둬두고 착취하다가 죽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같은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수감된 사람은 처음부터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짜낸 다음 죽도록 방치해두는 노예로 취급되며, 이는 수감된 경우와 현지에서 태어난 경우 모두 동일하다. 이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면 갖은 고생을 겪은 혁명화구역의 사람들도 용평 완전통제구역이란 말만 들어도 몸서리 칠 정도다. 수용소의 노래에서도 용평 완전통제구역에 대해 언급되는데 이곳에선 남자는 16세만 되면 가족들과 강제로 떨어져 깊은 골짜기나 지하에서 일만 해야 하는 곳이라 절대 집에 가지 못한다고 한다. 용평은 아니지만 역시 완전통제구역이라 용평 쪽 상황을 추정하는 데 쓸 수 있는 개천 제14호 관리소 출신 김용이나 회령 22호 관리소 경비병이었던 안명철의 글, 또는 3년간 용평 완전통제구역을 '체험'한 요덕 수용소 혁명화구역 출신의 김영순의 증언을 보면 말 그대로 살아있는 지옥이 따로 없다.[9] 정치범으로 요덕 수용소에 3년간 수용됨, 1992년 탈북.[10] 안혁과 강철환은 수용소에서 만난 친구 사이. 친구지간에 살아남은 게 정말 용하다고나 할까. 강철환의 가족도 일본에서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돌아왔다가 '김일성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수용된 케이스다.[11] 귀국 동포라고 불렸던 사람들인데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안명철의 저서인 완전통제구역(2007)에도 남편과 함께 이곳에 끌려온 일본인 처의 이야기가 나온다. 강철환의 저서인 《수용소의 노래-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에는 강철환의 할아버지-할머니가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지내다가 귀국하였으며, 이후 소설 중에서 이때 북한으로 온 일본인 처들이 조선 사람보다 고생을 덜했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빨리 죽는다는 내용의 서술도 있다.[12] 함경북도 무산군 출생으로 김정일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이는 그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무산과 평양의 생활에 큰 차이를 느끼고 체제에 회의감이 들던 중 KBS 라디오를 듣고 1994년 탈출하려다가 그만 베이징에서 북한의 국가보위부 요원의 함정 수사에 걸려드는 바람에 평양 감옥에 6개월간 수감되고 극심한 고문을 받은 후에 요덕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사촌이 김정일의 운전 기사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까지 같이 수용소로 끌려가지는 않았으며(일반적으로 탈북자가 나오면 그 탈북자의 가족은 모두 수용소로 직행이다.) 1999년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는데 이때 그의 몸무게는 1994년 94kg에서 58kg으로 엄청나게 줄어 있었으며, 본인은 김정일의 개인적인 개입으로 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풀려나자마자 중국으로 도피해서 간신히 탈출했다. 그때의 고문으로 여전히 정강이가 멍투성이고 이가 6개나 부러졌다고 한다.[13] 김정일의 내연녀였던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참고로 그녀가 수감되면서 그녀의 부모와 자식들(최연소는 3세, 최고령(?)은 10세)도 요덕으로 강제로 끌려갔으며 수감 기간 동안 수용소에서 부모와 자식 1명을 잃었다고 한다.[14] 이후 그녀는 '아무에게도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를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석방되었고, 잠깐 동안 청진 근처 산 속에 위치한 광산에 위치한 황금 공장에서 이전보다 편하게 일하다가 1980년에 함흥으로 이사를 가 양복점으로 일했다. 1988년에 석방된 자식들이 탈북하려다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지만 2001년에 탈북에 성공하여 하얼빈에서 2년 반 동안 가사노동자로 일했고, 이후 중국 대륙을 거쳐 2003년 11월에 서울에 안착했다.[15] 그녀가 일종의 파견근로자였기 때문에 용평 완전통제구역을 체험하고 석방될 수 있었다. 수감자로서 완전통제구역에 보내졌다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용평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사람도 탈출한 사람도 2012년에 작성된 PDF 파일 기준으로 아직까지 없었고 현재에도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16] 탈북 시점은 요덕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로 보인다.[17]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18] 이건 어쩌면 그가 있었던 곳이 혁명화구역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19]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정부에 반항하지 않는다면 규제하는 선 안에서 덕질이 가능하기라도 하지 북한에서는 덕질은 꿈도 꿀 수가 없다. 하물며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 생기면서부터는 북한의 오타쿠들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해졌다.[20] 한 탈북자가 목숨을 걸고 촬영한 것이다.[21] 청진 수용소 같은 경우도 구글 어스로 입구 쪽을 확대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체제 찬양 문구가 적혀있는 구조물이 보인다. 다른 수용소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