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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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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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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S-Totenkopfverbände.png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다네크

<colbgcolor=#000>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colbgcolor=#000> 한국어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1]
영어 Auschwitz Birkenau[2]
프랑스어 Auschwitz Birkenau[3]
국가·위치 폴란드 마워폴스카 주 오시비엥침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 연도 1979년
등재 기준 (vi)[4]
지정 번호 31
파일:attachment/Selection_Birkenau_ramp.jpg 파일:Auschwitz_Resistance_280.jpg
비르케나우(제2 아우슈비츠) 역에
도착한 유대인들.
화장터에 시신을 불태워서 처리하는 모습.[5]

1. 개요2. 건설과 확장3. 구조
3.1. 기차역: 선별 작업
3.1.1. 예외적인 경우
3.2. 정문3.3. 가스실
4. 수용소에서의 삶
4.1. 수용 시설4.2. 식사와 보급품4.3. 위생 상태4.4. 수용소 내 갈등
5. 수용 대상
5.1. 존더코만도5.2. 앞잡이
6. 폐쇄와 해방
6.1. 희생자 수
7. 잊힌 영웅8. 탈출과 저항
8.1. 브르바·베츨러의 탈출8.2. 존더코만도 봉기
9. 운영 당시 촬영된 사진들
9.1. 아우슈비츠 앨범9.2. 존더코만도 사진 (Sonderkommando photographs)9.3. 카를 회커 앨범 (Höcker Album)
10. 관련 인물
10.1. 수용소 간부, 간수10.2. 수감자 및 피학살자
10.2.1. 생존자10.2.2. 희생자
11. 관람팁
11.1. 교통편11.2. 비르케나우 수용소 관람
12. 관련 창작물
12.1. 회고록과 증언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12.2. 영화, 드라마12.3. 음악
13. 기타14. 관련 문서
14.1.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 수용소 목록14.2. 나치 독일의 주요 강제 수용소 목록

[clearfix]
독일어: Das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KZ Auschwitz, Auschwitz), K.L. Auschwitz
폴란드어: Auschwitz-Birkenau,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KL Auschwitz(Stammlager), KL Birkenau (Auschwitz II) i KL Mniwitz(Auschwitz III))

1. 개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입니다. 수용소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0,000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으며, 이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인한 역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는 주요 사건,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 및 문학 작품 등과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1933~1945)이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증거이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범죄 행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이 수용소는 자유로운 행동과 사상을 억압하고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시도에 끔찍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강한 인간 정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차별 정책,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이며, 또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때에 관한 기억이 모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곳이자, 과격한 사상이나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의 장이기도 합니다.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세계유산 목록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中. #

나치 독일의 노동 수용소[6]이자 절멸 수용소.[7] 헤움노 수용소 및 라인하르트 작전의 절멸 수용소들과 함께 유대인 대학살을 수행했던 핵심 시설 중 하나이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 도시인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위치해 있다.[8]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네스코가 등재한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 즉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브제진카(Oświęcim-Brzezinka)) 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이다.
파일:Holocaust Poland.png
좌측하단 쪽 Auschwitz-Birkenau라고 쓰여진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다.[9]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세운 수많은 절멸 수용소 중 하나이지만[10], 규모가 큰 데다 무엇보다 증거가 되는 시설이 상당부분 남았기 때문에 독보적으로 유명하여 절멸 수용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는 고유 명사로 쓰이기보단 '나치의 절멸 수용소'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 쓰인다. 아우슈비츠가 아닌 다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거나 작품 속 배경이 아우슈비츠인지 확실하지 않은 작품들도 종종 아우슈비츠가 배경이라고 설명되는 이유다. 90만 명이 학살당한 트레블링카, 60만 명이 학살당한 베우제츠[11] 아우슈비츠에서의 희생자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절멸 수용소들이 있었지만 이 절멸 수용소들은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인 1943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 수용소들에 관한 증거를 완전히 인멸했고, 따라서 구조물이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이들 수용소는 그 악명이 아우슈비츠보단 덜 알려져 있다.

절멸 수용소의 경우, 보통의 노동 교화소나 강제 수용소와는 달라서 오로지 반 나치 성향이 의심되는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절멸 수용소 역시 넓게는 강제 수용소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나치는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또는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며 행정적으로도 이들 절멸 수용소와 기타 강제 수용소를 구분했다. 또한 다른 강제 수용소의 존재는 필사적으로 숨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절멸 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 기밀로 다뤘고 적이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다. 대부분의 경우 절멸 수용소에서는 '분류 작업'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소수만 노동 가능 인원으로 선발하던 곳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10~20%에 불과했던 데다 최종적으로 사망 확률이 85%에 이르렀기 때문에 절멸 수용소에 훨씬 가깝다. 분류작업이 아예 없던 소비보르는 99.98%, 베우제츠의 경우 99.989%, 트레블링카의 경우 99.993%, 헤움노의 경우 99.996%였다. 절멸 수용소가 아닌 노동/강제 수용소의 사망율은 수용소마다 크게 달라서 15%(작센하우젠) ~ 59%(슈투트호프)였고, '노동을 통한 절멸'을 시행하던 곳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정치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자', 피지배 지역의 엘리트들, 전쟁포로 등도 주요 수감자였다.
다른 이들의 작품 속 허구적 인물의 모습에서는 더더욱 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책과 영화와 연극에서 전개되는 상황들은 내개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알 수 없다. 그 죽음의 시절을 몸소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그 어마어마한 공포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만이 아우슈비츠에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엘리 비젤

참고로 말라 비틀어진 시체가 가득 쌓인 수용소의 전경을 촬영한 비디오[12]는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보여줄 때 많이 활용되는 시각 자료다. 하지만 이 비디오들은 거의 전부 절멸 수용소가 아닌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 시체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기아와 질병으로 결국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안에 시체가 쌓인 이유는 전쟁 막바지까지 운영되던 노동 수용소가 미처 시체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수용소보다 희생자 수가 월등히 많았던 절멸 수용소들은 홀로코스트의 뼈대를 이루었음에도 나치가 증거를 집중적으로 파기한 탓에 남아있는 시각 자료가 거의 없다.

절멸 수용소의 학살 시퀀스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시각 자료는 단 한 가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존더코만도가 극비리에 촬영한 나체로 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시체를 화장하는 모습을 찍은 4장의 사진이 유일하다.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은 노동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보다는, 잡힌 직후 집단 총살을 당하거나 절멸 수용소로 보내진 직후 가스로 살해되고 시신은 불태워져 그 재가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이 끔찍함을 시각자료 없이 상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2. 건설과 확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Auschwitz_and_environs%2C_1944.jpg
아우슈비츠 지도 노란색 부분이 수용소 부지, 보라색이 IG 파르벤 공장과 SS기지다.
아우슈비츠는 처음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세워지진 않았다. 1939년 폴란드 침공 후, 나치의 첫 목표는 폴란드 지식인의 제거였고 이에 따라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1940년 5월 세워졌다. 초기 이 수용소는 노동 수용소의 성격을 띠었고 다른 노동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무작위 처형이 자주 일어났지만 아직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뒤 엄청난 수의 소련군 포로를 잡은 나치는 아우슈비츠에도 소련군 포로를 이송했고 밀려드는 소련군 포로를 위해 '자리를 만들 목적으로' 1941년 9월 첫 대량 학살이 저질러졌다. 이때 수용소는 '실험'으로 소련군 포로 650명과 250명의 폴란드인을 수용소 지하의 블록 11[13]에 모아 놓은 뒤, 치클론 B를 투입했는데,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치클론 B를 이용해 재소자들을 학살했다. 나치는 1941년 10월 소련군 포로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1 수용소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제2 수용소인 거대한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세웠는데, 공사에 동원된 소련군 포로들은 식량이고 보급품이고 모두 모자라서 굶어죽는 건 다반사이며, 인육으로 생존해야 할 정도로 처절한 상황이었다. 결국 41년부터 42년까지 비르케나우를 짓는 동안 10,000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는 겨우 수백 명이 살아남았다.
파일:odilo globocnik.jpg
[14][15][16]
한편 1941년 10월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소장(Brigadeführer. 여단지도자) 오딜로 글로보츠닉이 수장으로 있는 폴란드 총독령 루블린의 SS경찰 본부에 폴란드 유대인의 절멸을 구두로 지시했다. 이에 따라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이 시행되어 폴란드 각지에 5개의 절멸 수용소[17]가 새로 생겼다. 1942년 1월, 체코 총독이자, 체코의 전 국가 보안 본부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 "절멸(Vernichtung)''로 결정되면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도 절멸 수용소로 개조되었고 1942년 초반부터 1945년 1월 소련군에 해방되기 불과 며칠 전까지 학살이 자행되었다. 다른 절멸 수용소들이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인 1943년 말, 라인하르트 작전이 취소되자마자 폐쇄된 것과는 달랐다.

전쟁이 지속되자 이게파르벤사는 이곳에 화학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이를 위해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가 건설된다. 아스피린의 제조사로 유명한 바이엘BASF, 아그파, 구 훽스트[18]가 이게파르벤을 구성했던 회사들인데 2차 대전 이후로도 크게 소송에 휘말리지 않고, 거의 그대로 전후 복구의 주역이 되었다. 다만 강제 노역 배상기금에 참여하여 간접적으로 어두운 과거를 인정한 바 있다.

3. 구조

수용소마다 수감 인원과 구조가 조금씩 달랐다. 우리가 자주 듣는 가스 살인 공장은 제2 수용소(비르케나우)로, 이곳은 여성과 노인 등 노동 능력이 떨어져 곧 제거될 인원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후술할 모든 희생자의 절반 이상을 기차역이 있는 여기서 우선적으로 죽였기 때문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시체 처리실이 가장 컸다. 상대적으로 노동 능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1, 3 수용소에서 수용 후 강제 노역을 통해서 서서히 말려 죽여갔다. 물론 제1 수용소에도 가스실은 있었다.

화학 공장이라 유독 화학품에 대한 위험이 높았으나 여기에 대한 안전 장치는 전무해서, 노출된 많은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럭저럭 생산이 돌아가던 소련의 굴라그와는 달리, 노동 의욕이 매우 낮아 생산성이 아주 낮았다고 한다.

수용소 건립 초기에는 친위대의 각 사단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직접 교도관 등의 역할을 위해 근무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될수록 젊은 장병들의 숫자가 부족해지자, 이들은 대부분 일선으로 보내지고 독일 국방군 육군공군에서 주로 3~50대의 중장년층 예비역들이나 국민척탄병들을 받아와 투입했다.

3.1. 기차역: 선별 작업

파일:Freight-train-tracks-Auschwitz-Birkenau-Nazi-Germany-Oswiecim.jpg
나치 독일 점령지와 추축국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들은 처음에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기차역으로 모두 모여서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들로 나뉘어진다.[19] 그리고 곧이어 군의관이 약식으로 성인 남녀 중 노동 가능/불가능자를 나눈다.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헝가리의 소설가 케르테스 임레(Kertész Imre, 1929-2016)가 쓴 자전적 소설 <운명>을 보면,
"수감자들이 몰려들어 나이를 묻자, 우리는 각자 나이에 따라 14살, 13살 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안 된다는 손짓을 하며 저마다 "15살" 이라고 토를 달았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될 대로 돼라…' 하며 "좋아요, 그럼 난 이제 15살이에요." 하고 말했다. 의사 앞에 나갔을 때, 몇 살이냐고 묻자 "15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말에 의사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는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모스코비치에 이르렀을 때, 그는 "15살입니다. 일할 겁니다." 하고 계속 반복했으나 큼직한 손이 그를 다른 줄로 끌어냈다. (중략) 이후 쾨베시와 동료들은 다시는 모스코비치를 보지 못했다. 가스실로 끌려간 것이다.

자전 소설 <나이트(night)>로 아우슈비츠 학살을 고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비젤은 이렇게 증언했다.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자 수감자가 다가와서 몇살이냐고 물었다. 내가 열다섯이라고 하자 '멍청아, 너는 열여덟 살이야'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십이라고 하자 '당신 나이는 사십이야'라고 했다"고 고백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으면 입소 단계에서 곧장 '선별'돼 '굴뚝'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20]

사람을 나눌 때 구분 기준은 제멋대로라 수용소의 남은 자리에 따라, 가끔은 정리하는 놈의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분류 작업을 거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수용소에 남는 자리가 없으니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분류 작업은 SS 군의관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분류 작업은 Sonderkommando(존더코만도. 특수 직무반이라는 뜻)라 불리는 남성 유대인 수감자들이 담당했다.

이렇게 노동 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 임산부,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이 불가능한 성인들은 정리 후 즉시 가스실로 직행하게 된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등록되지 않은 희생자의 수를 집계하기 힘들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차역에서 어린이 몇 명을 데려가 특별 대우해 주는 SS 대원이 한 명 있었는데, 다른 수용인들이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이 SS 대원의 정체는 생체 실험으로 악명높던 요제프 멩겔레 박사로, 이렇게 선별된 '멩겔레의 아이들'은 상당수가 인체실험으로 사망했다.
파일:external/wagner.wpengine.netdna-cdn.com/Auschwitz-tattoo.jpg
이 분류 과정이 끝나야만 비로소 등록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수감자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나마 찍던 사진도 초반에만 찍었다. 여기에서 생활하면 얼굴이 변형되어 사진으로 신분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개인 수감 번호를 부여하는데, 대부분의 유대인 수용소를 포함한 수용소는 수감 번호는 옷에 새겨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수감자의 왼 팔뚝에 숫자 문신을 새기게끔 했다. 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새 수감자와 아픈 자, 죽은 자의 신원을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1942년에 시범 도입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3년에는 도입 이전 수감된 인원과 여성 수감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일련 번호 문신을 부여했다. 유대인의 경우 일련 번호 아래 역삼각 도형이 추가로 새겨졌다. 다만 수용자들은 이 번호를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카포나 SS 대원들에게 번호를 불리면 곧 죽는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3.1.1. 예외적인 경우

특기할 만한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1943년 9월과 12월에 프라하 근처의 테레지엔슈타트[21] 게토에서 온 약 18,000명의 체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분리 작업이 없었다. 그들은 BIIB 수용소라 불리는 일종의 가족 수용소에서 단체로 수용되었는데 머리가 깎이지 않은 것은 물론, 가지고 온 옷가지와 짐들까지 모두 가지고 있던 채로 약 6개월 가량을 대기했다. 노인과 아이들까지도 따로 선별되지 않고 가족과 그대로 머물 수 있게 허락받았다.

수감자 중 하나로서 당시 BIIA 수용소의 등록 업무를 맡고 있던 루돌프 브르바(Rudolf Vrba)의[22] 증언에 따르면 수용 기간 동안 이들의 생존률은 4분의 3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여전히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은 사망률이지만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독보적으로 높은 수치였고, 노약자들까지 포함한 경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SS가 이들에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중에는 BIIB 수용소 내에 어린이 수감자들을 위한 자체적인 학교까지 건립되고, SS 대원들도 유대인들의 연극을 관람하러 가거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등[23] 아우슈비츠의 일반적인 살풍경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기도 했다. 때문에 수용소 내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던 브르바는 이들을 레지스탕스에 가담시켜 아우슈비츠의 학살 공정을 잠시나마 막아 보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비록 노약자가 상당수 섞여 있기는 했으나, 수천 명이나 되는 건강한 수용자들이 함께 봉기를 일으킨다면 학살 공정을 파괴한다는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6개월 수용 뒤 1944년 3월에 결국 살해당할 운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BIIB 캠프 자체가 테레지엔슈타트의 유대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SS의 속임수였기 때문이다. 가령 BIIB 수용소의 체코 가족 수감자들은 잘 대우받으며 지내니 걱정 말라는 편지를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이 지급받은 식별 카드에는 '6개월 격리 후 SB' 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특수 처리'라는 뜻인 Sonderbehandlung의 약자였다. 아우슈비츠에서 '특수 처리'는 가스실 살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1944년 2월부터 각 수용소 소각장과 대량의 석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존더코만도들로부터 들어오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레지스탕스 측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으나, 자그마치 6개월이나 잘 대해주고는 갑자기 몰살한다는 비상식적인 처사를 이해하지 못한 체코 가족 수용자들은 이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이들이었다. 봉기에 가담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죽을 것이 확정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을 것이 확실한 전장으로 끌고 간다는 선택을 부모로서 쉽사리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SS가 선수를 쳐 전 수용소에 통행금지령을 내렸으며, 체코 가족 수용자들은 하이데브레크로 이송된다는 명목으로 가스실에서 살해당한다.[24] 역시 체코슬로바키아 유대인이자 존더코만도 중 하나였으며 레지스탕스 일원으로서 현장에 있었던 필리프 뮐레르(Filip Müller)의 증언에 따르면 체코 가족 수감자들은 그제서야 자신들 역시 학살의 대상이며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동요했다고 하며, SS에게 항의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질이었다. 결국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와 유대인들의 국가인 하티크바를 부르며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았다. 동향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던 뮐레르는 그들과 같이 최후를 맞고자 가스실로 뛰어들었으나, 오히려 그를 알아본 한 유대인 여성이 죽지 말고 살아서 자신들의 죽음을 후대에 전하라며 그를 설득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25][26]

이후 브르바는 다른 수감자인 알프레드 베츨러와 함께 탈출해 서방에 학살 소식을 전하게 된다.

3.2.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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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beit macht Frei[27] - 제1아우슈비츠 정문의 표어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Works sets You Free 뜻 출처)
제1 수용소 입구의 유명한 표어인 '노동이 자유를 가져온다(Arbeit macht Frei)', 직역하면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또는 '노동을 자유롭게 하리라' 는 수용소장 회스 중령의 좌우명이었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끝내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하였고, 강제 노동을 하다가 허약해지면 가스실에서 학살당하여 시신은 화장터에서 소각 처리되었다. 정문을 자세히 보면 ARBEIT(노동) 중 유독 B가 이상하게 거꾸로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28]

2009년에는 저 문의 간판을 고물상에 팔겠다고 한밤중에 전부 떼어간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도 사흘 뒤에 폴란드 북부지역 모처에서 간판이 발견되었고, 범인인 20~30대 5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표어 부분은 레플리카로 교체하고, 해당 문구는 아우슈비츠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참고로 범인은 네오나치였다.

3.3. 가스실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 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 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 치클론 B를 이용한 처형 실험 직후에 대한 루돌프 회스 중령의 고백록[2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uschwitz_I_death_block_11_04.jpg
아우슈비츠 11번 구역 사진. 벽면에 보이는 길고 하얀 자국들은 최후까지 살고자 몸부림쳤던 희생자들의 손톱자국이다.[30]
네메시 라슬로 감독의 헝가리 영화사울의 아들》 의 도입부에서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비르케나우의 가스실 시퀀스. 열차로 이송되어 비르케나우에 도착한 희생자들이 존더코만도들의 안내를 받아 수용소 내로 들어오면 친위대 장병들은 거짓말로 그들을 안심시킨다.[31] 그동안 희생자들은 탈의하고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 수용된다. 문이 닫히는 즉시 치클론 B 가스가 투입되며, 안에서 사람들이 가스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동안 존더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의 짐을 모아 정리한다.

최초의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 살해도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는데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치클론 B를 투약했다.(출처 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었고 나치 친위대(슈츠슈타펠)은 이전에 쓰던 차량 엔진 배기 가스 방식 가스실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간편하며 싼 값에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32] 이후 실험을 했던 11번 구역은 몇 가지 개조를 거친 뒤 가스실로 사용했지만, 규모가 작아서 대량 학살을 원했던 슈츠슈타펠은 1942년부터 비르케나우에 빨간 집이라 불리는 벙커 1과 하얀 집으로 불리던 벙커 2에서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에 슈츠슈타펠은 기존에 있던 2번 화장장(Crematorium 2)를 개조해서 가스실로 활용했고, 단 반 년 만에 비슷한 구조의 가스실을 3개 더 만들어 이곳에서 대량 학살을 벌였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작은 공장처럼 생겼고 지하에는 샤워실처럼 꾸며진 가스실이 있었다. 나치는 가스실을 샤워실처럼 꾸미고 희생자들에게 지금부터 샤워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스스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치와 SS는 철저할 정도로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했는데, 수감자들의 죄수복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죄수복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 신규 입소자에게 지급되었다. 초기에 학살을 시작할 시기에는 수용소 기간병들이나 카포들이 강제로 옷을 벗기고 가스실에 밀어넣었지만, 알다시피 이건 다수에게 해야 하는 데다 저항도 발생해서 대단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다 어느 날 '피해자들이 스스로 죄수복을 벗고 잘 개켜서 한곳에 모아준다면 매우 효율적이고 일사천리로 학살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고, 아주 악마적인 창의력을 동원해 위와 같은 탈의실로 위장된 학살준비실을 건설한다. 가끔 눈치빠른 희생자가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시 입을 수 없는) 옷을 벗어둔 옷장을 잘 기억해 두라는 나치의 거짓말에 속아넘어 갔다. 그야말로 편의주의와 잔인무도함의 결합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물인 셈이다.

다만 이때도 반발은 있어서 한 수감자가 막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에게 학살의 진실을 알려주는 일도 있었고[33] 회스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학살 준비실에서 탈의를 하던 희생자들이 학살 사실을 눈치채고 SS에게 저항하여 무기를 빼앗고 총격전을 벌였던 사건도 있었다.[34]

이렇게 탈의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면 고체 치클론 B를 굴뚝을 통해 주입해서 살해했는데, 농도와 인원에 따라 3분에서 3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쥐'에 수록된 존더코만도의 증언[35]에 따르면 시체는 주로 유일한 탈출구인 문 앞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위에는 힘센 남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학살이 끝난 후 당연하게도 시체를 독일인이 만지기는 싫었으므로, 뒤처리는 유대인 특수직무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 시신은 머리카락과 금니 같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뺀 후 처리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체 매장으로 끝났으나 카틴 학살 현장을 발굴 사건 뒤 매장은 훗날 쉽게 발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예 시체들을 소각로에서 화장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매장된 시신도 도로 파내어 소각하는 경우가 많았다.[36]

원래 유대인들을 독가스로 죽이자는 발상을 한 것부터가 총살로 처리했더니 처형 작업에 동원된 장병들이 막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폴란드인을 혐오하던 친나치적 성향의 군인들이라도, 무력한 민간인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총살하는 건 일부 사이코패스를 제외하면 엄청난 정신적 압박일 수밖에 없었다.[37] 독가스로 대체된 후로도 너무나 비인도적인 수용소 현실에 처음 배치된 인력들은 경악하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았지만 대개는 다른 장병들의 폭력, 협박에 손쉽게 굴복했다. 이후 존더코만도들을 동원하면서 자신들이 직접 무언가를 하는 일은 줄어들었고, 감독 역할 정도만 했다.

그나마 화덕으로 화장을 하는 방법은 덜 죽일 때 이야기이고, 전쟁 말에 이탈리아헝가리에서 끌고 온 유대인까지 대량 학살할 때는 화덕이 모자라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넣어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38]

전쟁 후반기에는 독일의 동맹국들인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 대량의 유대인들이 잡혀왔다. 특히 헝가리는 1944년까지 유대인 학살을 하지 않았고, 같은 추축국이라 전쟁 중인 소련이나 영국으로 탈출하는 것보다는 수십 배는 탈출하기 쉬워서 많은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탈출했다. 그러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실권을 잃고[39] 파시스트인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한 44년부터는 헝가리도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40] 그 결과 아우슈비츠의 수용 인원을 초과하는 인원이 실려 들어왔고, 시시각각 악화되는 동부 전선의 상황 속에서 수용소를 운영할 물적, 심적 여유가 부족했던 나치는 거의 대부분의 입소자를 가스실에서 바로바로 처리했다. 이를 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거대한 규모의 샤워실을 빙자한 가스실들이 증축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전쟁 초반에는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탈리아 본국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유대인들도 보호되었다. 무솔리니는 독일과 다르게 다문화 제국 정책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독일의 부하 국가가 아니니 고분고분 따르진 않겠다는 일종의 자존적인 표현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고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일군이 직접적 영향력하에 들어간 후로는 이탈리아 유대인들도 예외없이 학살당했다. 이탈리아 유대인들은 우선 중간 계류지 역할을 하는 집결 수용소인 볼차노 수용소에 잠시 수용되었다가 다하우, 라벤스베르크, 아우슈비츠 같은 노동 또는 절멸 수용소들로 보내졌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바로 이 일을 소재로 한 영화다. 그리고 발칸 반도 점령지들의 유대인들은 우스타샤나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학살 당했다.

4. 수용소에서의 삶

4.1. 수용 시설

노동 겸 절멸 수용소였기 때문에, 일단은 수용 시설이 있었는데, 당연히 열악함 그 자체였다. 침대들이 닭장마냥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간신히 누울 정도로 좁았다. 그리고 침대들이 늘어서 있으면 그 가운데 통로에 구멍 뚫린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것도 아침과 저녁 한 번씩만 이용할 수 있었다.

나치는 화장실 수와 사용 횟수를 극히 제한하여 수용된 인원들이 배설물 속에서 고통받았다. 당연히 병으로도 죽어갔고, 점점 축사 짐승처럼 모습이 변해갔다.

수감된 유대인 사이에서 가장 악명높은 수용 시설은 10호와 11호 건물이었는데, 10호 건물은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여러 의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라서 거의 모든 수감자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었다. 운 좋으면 정상적인 진찰을 받고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이 건물에 들어간 유아와 쌍둥이들은 다시는 살아 나오지 못했다. 11호 건물은 카포나 군인들에게 밉보인 수감자들이 채찍을 맞거나, 갈고리로 수감자의 손을 묶어 걸어놓는 등, 끔찍한 형벌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군인들은 작은 규정 위반에도 11호 건물에 수감자들을 수감시켰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너무 배고파서 돼지 여물을 먹다가 들켜 끌려온 경우도 있었다.[41]

그리고 10호 건물과 11호 건물 사이에는 처형장이 있었다. 따라서 두 건물은 수감자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4.2. 식사와 보급품

다들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단다... 아침 식사라고 해봐야 기껏 뿌리에서 짜낸 씁쓸한 차뿐이었어. 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났어. 그래야 화장실을 갔다 와도 차를 배급받을 수 있었거든. 하루 한 번 순무 수프를 배식했어. 줄 맨 앞 가까이 서면 좋지 않았단다. 국물뿐이었거든. 줄 끝 근처가 좋았지. 바닥의 건더기가 떠올랐거든. 하지만 너무 뒷쪽도 좋지 않았단다. ...국물도 없을 때가 많았거든. 그리고 하루 한 번 모래처럼 까실까실한 빵조각을 줬지. 밀가루에 톱밥을 섞은 거야. 그 조그만 조각으로 종일을 버텨야 했어. 대부분 바로 해치워 버렸지만 난 늘 나중을 위해 반을 남겨뒀어. 그리고 저녁엔 상한 치즈나 잼을 먹었지. 재수 좋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내 손가락 두 개만한 소시지를 먹기도 하고. 우리가 먹은 건 이게 겨우 전부였어. 그들이 주는 만큼만 먹었다간 서서히 죽어가기에 딱 맞았어.
2부 2장 中[42]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혹독한 강제 노동 현장이나 가스실에 끌려가 살해당했지만, 수용자들에게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중요한 간접적인 사인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수용자들에게 하루 약 800~1,200 kcal를 공급했는데, 이는 평균적인 성인의 기초대사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으로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사무 업무만 하는 사람에게도 모자란 수준이었다. 수용소에서 강제되는 노역의 강도를 생각하면 수용소의 배식량은 그냥 천천히 야위어 가다 굶어죽으라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로 배식되는 품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전략)... 가죽장이가 먼저 맛을 보았다. 야릇한 표정이었다. 수저를 받아 입에 넣는 순간,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구 토해 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중략) "이게 바로 그 말린 야채 수프라는 거지." 그는 이전의 전쟁과 지금 진행중인 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것도 장교로서 말이다. "거기서 이 음식을 질리도록 먹어 볼 기회가 있었지. 우린 독일군과 함께 전선에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이런 먹더라고." ...(후략) (운명 - 임레 케르테스 중에서 발췌)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에서는 무와 채소를 넣은 수프를 배급했다고 나오며,[43] 이마저도 매일 지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책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묽은 국이 배급되었다는데, 앞줄에 서면 건더기 없이 국물만 있었다고 하며 그렇다고 너무 뒤에 줄을 서면 아예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몇 개 언급된다. 그 중 한 이야기에 따르면, 묽은 국을 배급받을 때는 배급하는 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만 국자를 밑바닥까지 내려서 퍼온 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저 상한 야채국의 건더기조차 제대로 못 먹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 이런 식사를 하다 보니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운명>에서 서술된 또다른 부분을 보자면,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수프를 먹었고, 그 이튿날에는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했다." (중략) "점심 식사는 수프였는데, 놀랄 정도로 이른 시간에 나왔다. 이어, 해거름까지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다가 점호 전에 빵과 마가린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자, 배고픔의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형편없는 식사조차도 주는 간격을 매우 띄워서 굶주림의 고통을 극대화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는 곧 같이 수감된 사람들과 함께 부헨발트로 옮겨갔지만, 다른 수감자들은 계속 쭉 이런 생활을 겪었을 것이다. 부헨발트도 강제 수용소라는 건 변함없지만, 이쪽은 주 목적이 학살보다는 강제 노동이었던지라, 곤궁하지만 아우슈비츠보다는 나은 수준의 식사가 배급되었다고 적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겠다면서 이 커피를 마시지 않고 세수하거나 양치하는 데 쓴 수용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놀랍게도, 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한 데 비해 존엄을 지킨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빅토르 프랑클이 그중 하나였다. [44]

이런 식사를 하며 몇 주만 지내도 건강에 치명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달도 버티지 못 했다. 죽기 전에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어도, 이미 건강에 치명타를 입어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이동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4.3. 위생 상태

극히 열악했다. 제3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화장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화장실은 조명이 어둡고, 통풍이 잘 되지 않았다. 벽돌 바닥은 축축한 진흙으로 대충 쌓아 올려진 것 같았다.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은 마실 수 없었는데, 그것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물은 종종 단수되곤 했다.

카포와 군인들은 오전 4시 30분에 벨을 울려 수감자들을 화장실에서 강제로 씻게 만들었는데, 불응하는 사람이나 행동이 굼뜬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곤봉 세례가 날아들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고 지정 시간이 있었기에 화장실은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났는데, 수용자들은 운이 좋으면 수천명, 운이 나쁘면 수만명과 함께 좁은 화장실을 사용해야했다. 화장실은 상태가 매우 불량했고, 절대적인 수요도 감당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비르케나우에는 구역당 화장실이 단 두개 뿐이었고, 수도꼭지 수는 90개에 불과했다. 또 막사 5~6개당[48] 화장실이 하나에 불과해 수감자들은 화장실을 정상적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화장실은 오물이 제대로 청소되지 않았고 죄수들을 동원해 허약하게 지었기 때문에 언제나 바닥이 질척거렸다. 이는 야윈 수감자들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기본적인 정수도 되지 않은 것이었고, 물을 마시는 것은 커녕 세수를 하는것조차 수감자들에게 메스꺼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카포와 군인들의 신발은 가죽제였지만 수감자들의 신발은 나무로 만들어진 나막신이었다. 그나마도 크기고 나발이고 아무렇게나 막 지급했기 때문에 신발이 맞지 않아서 맨발로 다니는 수감자도 있었다.

막사에는 평균적으로 700~1,200명이 수감되었다. 규정상으로 최대 수감 인원은 400~600명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1,000명 이상이 수감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944년 수십만의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면서 전쟁 말기에 막사는 말 그대로 미어터져나갔다. 사람들은 누울 자리도 찾을 수 없었고,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 좋은 자리에 누워서 잘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머리, 어깨, 발을 맞대고 자거나 좁은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서로를 밀쳤다. 전쟁 말기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법의학자 니즐리 미클로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다.
각 막사에는 800명에서 많으면 1,000명이 몰려있었는데, 잠을 잘때는 몸을 뻗을 수 없어서 새우잠을 잤다. 그리고 발이 다른 사람의 머리에 걸치기도 했고, 때로는 가슴이나 목에 걸치기도 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자려고 인간적 존엄성을 포기한 채 서로를 밀고, 물고, 발로 차면서 몇 센티미터의 공간이라도 더 차지하려 노력했다. 그러한 잠마저도 잠을 잘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기에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나마 이정도도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는데, 나중에 가면 침대도 아깝다고 지푸라기 위나 흙바닥 위에서 잠을 자게 한 막사까지 있었다.

저녁 7시부터 자유 시간이 주어졌는데, 점호가 끝날때까지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탈출한 수감자들이 생길때는 무한정 서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1940년에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한명이 수용소에서 탈출하자 군인들이 19시간동안 수감자들에게 앉거나 눕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명령을 거부하면 구타당했고, 운이 없으면 가스실에 던져질수도 있었다. 이런 제한된 자유시간조차 유대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일부는 자신의 유대교 신앙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유대교 커뮤니티 속에서 랍비로 존경받던 몇몇은 시계나 달력이 주어지지 않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다른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아 안식일과 주요 명절을 계산하기도 했다. 또 유대교 제사 용 달력을 만들기도 했는데, 발각되면 엄한 처벌에 처해지거나 가스실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랍비들의 집념은 꺾이지 않아, 달력은 전후에도 2개나 살아남았다고 한다.

4.4. 수용소 내 갈등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은 경제적 계급, 정치 성향, 출신 지역, 심지어 종교도 다른 경우가 빈번했기에[49], 수용소 내에서 단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나마 동방상련의 처지라서 서로 뭉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작은 빵 한조각이나 누울 자리 1센티미터를 위해 싸우는 일이 잦았다.

또 아주 작은 보상을 노리고 사람들을 돕는 랍비나 선량한 카포를 밀고하는 악질적인 부류도 있었다. 너무 오래 굶주리다보니 사리분별을 못한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5. 수용 대상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집단별 추정 수감자 수 및 비율[A]
<rowcolor=#000,#fff> 집단 수감 인원 총 사망자 수감 비율 사망률
유대인 1,100,000명 960,000명 84.1% 87.3%
폴란드인 145,000명 74,000명 11.1% 51.0%
집시 23,000명 21,000명 1.8% 91.3%
소련군 15,000명 15,000명 1.1% 100.0%
기타 동유럽 민간인 25,000명 10,000명 1.9% 40.0%
<rowcolor=#000,#fff> 총합 1,300,800명 1,080,000명
폴란드의 역사학자이자 후일 아우슈비츠 박물관 역사부분 관장이 되는 프란시예크 파이퍼(Franciszek Piper)는 면밀한 조사를 통해 대략 130만명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중 약 85%인 110만여명이 살해당했다고 추정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유대인이 희생자 및 수감자 중 85% 정도를 차지했고 폴란드인 정치범이 10%, 집시 및 나머지가 5% 내외를 차지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에서도 이 수치를 공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집단별 추정 사망자 수 및 비율[A]
<rowcolor=#000,#fff> 집단 기록 사망자 추정 사망자 총합 비율
유대인 95,000명 865,000명 960,000명 88.9%
폴란드인 64,000명 10,000명 74,000명 6.9%
집시 19,000명 2,000명 21,000명 1.9%
소련군 포로 12,000명 3,000명 15,000명 1.4%
기타 동유럽 민간인 10,000명 최대 15,000명 10,000
(~15,000명)
0.9%
<rowcolor=#000,#fff> 총합 200,000명 880,000명 1,080,000명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특히 유대인 중에서 기록되지 않은 희생자들이 많았는데, 노동불능인구라고 판단된 여성, 어린이, 노약자, 병약자 등이 도착과 즉시 기록도 되지 않은채로 처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망률을 보자면 로마족이나 소련군 포로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모두 살해당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유대인 역시 85% 가까이가 살해당했다. 반면 동유럽이나 폴란드 출신 정치범들은 그나마 사망률이 낮았다.[52]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집시, 러시아인, 프랑스인, 체코인, 네덜란드인 등 나치 독일의 핍박을 받던 약 30여 개국 인종이 수용되었다. 또한 독일인 수용자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중범죄자, 나치당에 반대하던 독일인, 정신장애인, 혼혈[53],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54],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등 나치가 보기에 독일 사회에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이었다. 핑크색 삼각형을 붙인 동성애자를 찍은 사진. 1938년.
블라덱[55]: 어느 노인이 있었는데 우리가 점호 받을 때마다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회상)
남자1: 난 저 유태인 놈들과 폴란드 놈들 사이에 있을 수 없어요! 나도 당신들처럼 독일인이란 말이요! 난 황제에게서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구요!
블라덱: 하지만 때리고 비웃기만 했지.
(회상 끝)
아티[56]: 그는 정말 독일인이었나요?
블라덱: 누가 알겠니? 독일인 죄수들도 있었으니까... 허나 독일인들에겐 이 친구 역시 유태인이었지!
2부 2장 中.[57] 이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서 경비병에게 폭행당해 사망했다고 한다.[58] 물론 그 사람이 유대인일 가능성도 있는데, 왜냐하면 '혈통'만 유대인이지 본인의 정체성은 완전히 독일인으로 자리잡은 사례가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홀로코스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심지어 본인은 전혀 숙청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자진해서 가족과 함께 이 지옥행을 자처한 사람도 있었다. 어느 독일인 여성은 집시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남편과 자녀들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자 자진해서 함께 떠났다고 한다. SS들이 몇 번이나 그녀를 꺼내주려고 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부해서 소용이 없었고, 결국 그녀는 가스실에서 자녀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일:오시비엥침 수감자 뱃지.png
특별 감시가 필요한 죄수들의 경우 위 표와 같은 삼각형 패치를 죄수복에 달고 다니게끔 했다고 한다. 현재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분홍색 역삼각형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위 표의 반 사회분자의 경우 집시노숙자 같은 이들을 의미한다. 물론 인종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독일인들은 피수용자 중에서는 비교적 좋은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인 같은 경우에는 적십자에서 소포도 받았다고 했으니. 그런데 그 비교적 좋은 처우의 예를 들자면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다하우 노동 수용소의 일이긴 하지만) 독일인 수용자의 주검에서 가죽을 벗기는 것이 금지된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다른 인종들 중 깨끗한 등과 가슴을 가진 자, 특히 문신을 한 자는 독극물로 죽여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 친위대원들이 자기 장갑이나 실내화, 말 안장을 만들어 쓰거나 핸드백을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하거나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59]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친위대원은 가죽을 벗겨 악기를 만들기도 했을 정도. 절멸 수용소가 아닌 노동 수용소에서 조차 가죽을 벗겨 치장품을 만든게 발견 되었을 정도니, 절멸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60]

이후 소련군이 접근하자 나치 독일은 6만여 명의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수용자들은 한밤중에 소집되어 서쪽으로 죽음의 행진을 했다.[61] 초반에는 낙오하는 자들을 친위대가 사살했으나 눈이 오는 추운 밤 등 악천후가 계속되자 친위대가 굳이 사살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쓰러져서 죽거나 걷다가 넘어지면 밟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걷다가 가축 수송용 열차에 한 량당 100명씩 실어서 옮기기도 했는데, 엘리 위젤의 증언에 따르면 내리지 못하면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열차가 멈췄을 때 겨우 내릴 수 있는 건 100명 중 열댓명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빵과 물 같은 기본적인 식량 배급이 끊기자 곧잘 다툼이 벌어졌고, 아들이 아버지의 음식을 빼앗아 먹고 죽게 내버려 두는 아수라장도 흔하게 벌어졌으나 누구도 그것을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이동시키지 못한 수용자들도 있었으며, 6,00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이들을 해방하러 오기 전 그 끔찍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무기와 폭탄을 준비해 최후의 저항을 일으켜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 후술할 비톨트 필레츠키처럼 자진해서 아우슈비츠에 들어가 3년을 버티고 수용자들에게 식량과 외부 정보를 전달한 인물도 있었다.

소련은 이 수용 시설을 접수한 후 한동안 감옥으로 사용했는데, 아주 운이 나쁜 사람들은 나치에게 수용당한 건물에서 스메르시(소련 방첩대)에게 심문을 받은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고 한다.

5.1. 존더코만도

네 개의 소각장 중 하나로 가게 됐지. 마치 큰 빵공장 같았단다... 가스실에서 땅 밑으로부터 환기를 위해 설치해 놓았던 파이프와 팬을 떼어내야 했었어. (중략)...여기선 특별한 죄수들이 별도로 작업했어. 더 좋은 빵을 받았지만 몇 달 마다 그들도 굴뚝으로 사라져 갔지.
2부 2장 중.[62]
아우슈비츠가 학살공장으로 확장되자 시신처리같은 슈츠슈타펠 자신들이 하기 싫은 업무들도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öss)는 유대인 수용자들을 모아 자기들 학살업무의 보조를 맡겼는데, 수용자들을 특수직무반이라는 의미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라고 불렀고[63] 시체처리와 희생자 분류작업, 기타 학살 보조업무들을 떠넘겼다.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존더코만도들 덕분에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의 저항이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 일례로 존더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이 처음 입소할 때 즉시 살해 대상과 노동 대상을 분류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설마 같은 유대인들이 우리를 죽이겠냐며 안심했다고...[64]

존더코만도의 주요 업무는 학살 피해자의 시신 처리였는데 업무 특성상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고, 이들이 저항을 했다가는 아우슈비츠 업무 자체가 마비되는지라 슈츠슈타펠은 약간의 혜택를 주었는데 그 혜택라는 게 톱밥이 덜 섞인 빵을 준다든가, 담배를 좀 더 많이 준다든가, 혹은 의료품을 좀 더 주는 등이었다. 하지만 혜택과는 별개로 나치는 '최종 해결책'[65]의 증거인멸을 위해 존더코만도들을 3개월 마다 주기적으로 학살했다. 때문에 900여명이나 편성되었던[66] 존더코만도는 오히려 생존자가 매우 적어서 해방될 때는 겨우 14명만 남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존더코만도가 되어서 처음 하는 일은 가스실에서 전임자의 시신을 치우는 일이었다.[67]

회스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머잖아 자신들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임을 알면서도[68] 매우 능숙하게 학살 작업을 처리했으며, 연고자의 시체를 발견하거나 진짜 재수없으면 탈의실에서 아직 살아있는 모습으로 상봉할 수도 있었는데, 동요할지언정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의 시체를 보고서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도 있었다.

분명 존더코만도들도 학살의 피해자인데 슈츠슈타펠의 일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피해자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대표적으로 수용자였던 니슬리 미클로쉬(Nyiszli Miklós)는 자신의 저서에 존더코만도를 두고 같은 유대인들이 희생당할 때 자신들은 슈츠슈타펠에게 빌붙어 혜택을 누리는 일종의 배신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존더코만도들은 만약 조금이라도 연민을 보였다가는 자신들의 위치가 정리하는 쪽에서 정리당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시체를 처리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존더코만도들도 이런 수용자들의 시선과 학살을 도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69]

독일이 패망해가던 1944년, 거의 마지막 기수였던 존더코만도들은 자신들의 숙청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봉기를 일으킨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살아남은 존더코만도들도 전후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는데 메타마우스에 실린 슈피겔만의 단편만화에 따르면 유대인 친목 모임에 존더코만도가 나타나자 완전히 유령 취급을 당했다는 회고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아트가 블라덱에게 왜 저 사람을 다들 피하냐고 묻자, 블라덱이 저 사람은 살겠다고 자기 아버지와 아들을 가스실에 집어넣었다고 대답한다.

최후의 존더코만도 생존자였던 다리오 가바이(Dario Gabbai)는 지난 2020년에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5.2. 앞잡이

하지만 일부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나치의 앞잡이 카포였다. 이들은 수용된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6. 폐쇄와 해방

해방 직후 소련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 내부의 참상.
시체가 많이 나오니 시청할 때엔 주의를 바란다.
전쟁 전까지 나는 음악인 집안에서 자랐어. 특히 독일 음악들을 좋아했지. 바흐, 베토벤. 아 위대한 바흐! 하지만 나는 이 사랑하는 이름들을 내 세상에서 지워버렸어. 나중에 화장터를 보여주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 말이야.... 아, 산더미처럼 쌓인 여자 옷가지며 아이들 장화... 회색 잿더미.... 그 재들을 들판으로 내가서 양배추에 뿌리고.... 상추에 뿌렸다는 거야.... 정말이지 더 이상 독일 음악을 들을 수가 없더라고.... 내가 다시 바흐에게 돌아가기까지, 모차르트를 다시 연주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렸어.
아우슈비츠 해방에 참가했던 소련군 여군 아글라야 보리소브나 네스테루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에서

1943년 11월 라인하르트 작전이 중지됨에 따라 이 작전의 일부로서 세워졌던 절멸 수용소들은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를 제외하곤 모두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나치 최대의 절멸 수용소로서 학살을 자행했고, 다른 지역의 학살 시설이 줄어들어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자 이들을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학살했다. 1944년 말 소련군의 당도가 너무나 확실해졌을 때 마이다네크 절멸 수용소와 다시 문을 열었던 헤움노 절멸수용소도 폐쇄되었지만, 오로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는 학살이 계속되었고 1945년 초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이미 바르샤바까지 소련군에게 함락되었던 1월 17일에야 힘러는 이 수용소에 폐쇄명령을 내렸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제소자들은 그 추운 겨울에 도보로 이동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미 극도로 쇠약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했다. 제소자들을 모두 이동시킨 뒤 SS는 조직적으로 수용소의 시설을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소련군이 너무 가까이 와 있었기에 제3 수용소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건물만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고 비르케나우의 터, 그리고 제1 수용소는 그대로 남아 학살의 물증이 되었다. 수용소가 폐쇄된 지 불과 9일 뒤인 1월 26일 소련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제60군이 이 지옥을 해방했다. 그리고 이 수용소 참상을 목격한 이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원수는 참상에 대해 전해 듣고 그 지옥을 직접 보면 정신에 타격이 가 작전 지휘에도 영향을 끼칠까봐 일부러 수용소에 방문하지 않았다.[70]

6.1. 희생자 수

희생자 수는 학자마다 논란이 가장 큰 부분으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기록말살과 시신소각을 지시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6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건 아니다. 나치의 주요 절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포함 6군데[71]로 알려져 있고 이들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310만에서 350만 정도로 집계된다. 600만의 유대인 사망자 중 나머지는 절멸 수용소가 아닌 기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거나[72] 게토에서의 기아 사망과 학살, 아인자츠그루펜 등이 저지른 집단학살[73]로 희생당한 것으로 본다.

처음 가스실 희생자는 매장했으나 이후 다시 화장했는데 이때 집계된 시신이 17만 구였다. 그나마 남은 나치의 기록상 아우슈비츠 수용자는 20만이지만 그보단 더 많은 수용자가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희생자 수는 불확실한데,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처음엔 200만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100만명으로 수정 집계 했으며, 전쟁 후 소련은 300만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이것은 과장이라는 평가가 대다수다. 2005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국립 박물관은 최대 130만 명 정도가 수용되어 그중 110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데, 이것은 현재 희생자 수로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수치이다.

이렇게 인원에 대해 지금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한 것은 이 수용소의 수용 구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자 등록 이전에 분류하는 과정에서 수십 %는 반드시 죽었고, 가끔은 기차역에 도착한 인원 전부를 학살해버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학살당한 인원은 애초에 집계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치가 부여한 식별번호의 숫자로 수용인원이나 희생자 숫자는 파악하기 어려울 듯하며, 모든 인원이 번호를 받았을 거라는 보장도 없기에 수용한 인원 파악은 더더욱 어렵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인 편차가 나오는 실정인데, 공식적인 사망자 수치인 110만명을 넘어 희생자가 15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7. 잊힌 영웅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지옥과도 같은 아우슈비츠에 자진해서 들어간 사람이 있다. 폴란드의 장교였던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라는 사람으로, 수용소 내부에서 저항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예상보다 참혹한 현실과 조건에 저항 조직만으로는 수용소를 탈환할 수는 없었지만 수용소 내부의 상황을 외부로 전하고 기밀 서류를 훔쳐내는 등 첩보 활동을 훌륭히 수행하고 탈출했다.

하지만 화물 열차 정권으로 위세를 떨쳤던 폴란드 공산당은 여기서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다. 폴란드 해방 후 필레츠키를 서쪽, 즉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으로 망명해 연합국 측에서 싸운 폴란드 망명 정부와 내통한 국내군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해버린 것이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 SS는 상당수의 입소자를 서쪽으로 이송시켰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탈환한 뒤 공산 폴란드 정권과 소련군은 서쪽으로 이송된 폴란드인의 명단을 그에게 요구했는데, 그는 그들이 겪을 고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명단 제공을 거부했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견뎌내었고 결국 바르샤바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뒤늦게 2006년 폴란드의 흰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지만 드라마틱한 삶에 비해 지명도는 낮다.

8. 탈출과 저항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지만 어디에나 능력자는 있는 법. 탈출에 성공한 예지 비엘레츠키라는 인물도 있다. 이사람은 2011년 9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탈옥에 성공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철저한 계획, 기발한 발상(예를 들면 결혼식 작전이라든가), 불굴의 정신력, 그리고 귀신 같은 체력이다. 3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뛰었단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기필코 살아남은 그들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그들 모두가 다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그뿐 아니라 눈부신 성과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필레츠키 외에 특기할 탈출 및 저항 사례는 아래와 같다.

8.1. 브르바·베츨러의 탈출

1944년 4월 24일, 체코슬로바키아 유대인인 루돌프 브르바알프레드 베츨러가 수용소의 내부 구조와 학살 규모를 기록한 자료를 확보한 뒤, 수용소 내부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친위대원으로 변장해 탈출했다. 브르바와 베츨러는 탈출에 성공한 후 이탈리아 유대인 기자인 조르주 만텔로[74]를 통해 서방측에 참상을 알렸다.

당시 브르바와 베츨러가 작성한 보고서인 브르바-베츨러 보고서의 작성 경위는 2021년 영화인 아우슈비츠 리포트의 소재가 되었다.

8.2. 존더코만도 봉기

1944년 10월 7일, 가스실의 존더코만도 소속 수용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게슈타포 3명과 나치군들을 사살하고 소각장 하나를 폭파시켰다고 한다. 이후 일부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 외의 인원들은 진압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이 봉기를 위해 군수공장에서 탄약을 빼돌린 4명의 여성 수용자들은 구타와 성고문 끝에 여성 수용소 앞에서 교수형을 당해 매달려있었다고 한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아들 아트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블라덱 슈피겔만은 그 4명의 여성 수용자 얘기를 하며 ''다 소스노비에츠에서 온 아냐의 친구들이었는데, 오래오래 매달려 있었어. 휴우."라고 언급한다.

9. 운영 당시 촬영된 사진들

전무후무한 학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우슈비츠 1 수용소의 건물들과 비르케나우의 폐허 뿐, 당시 아우슈비츠 내에서 벌어지던 학살과 강제 노동을 기록한 영상은 존재하지 않고 사진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사진들이라도 당시의 참상을 제한적으로나마 보여주며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고 있는데, 그 사진들은 다음 3가지로 나누어진다.

9.1. 아우슈비츠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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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을 알 수 없는 수용소의 SS간부가 1944년 5월 27일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출발해 아우슈비츠에 막 도착한 헝가리 유대인들을 찍은 193장의 사진이다.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대부분 사진들의 출처가 이 앨범이며, 아우슈비츠를 기록한 가장 대표적인 사진집으로 꼽힌다. 이 앨범의 충격적인 점은, 사진속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 여성, 노인들이 촬영된 지 얼마 안 되어 가스실에서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사진 속에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담담하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고 수풀에 편안히 앉아 웃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나치는 이 사진 말고도 더 많은 사진들을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용소 폐쇄과정에서 대부분 파기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파기되지 않았고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발견되었는데, 아우슈비츠 수감자였던 18세의 헝가리 유대인 릴리 야코브(Lili Jacob)는 수용소에 함께 왔던 가족들을 모두 가스실로 떠나보냈고 자신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폐쇄됨에 따라 아우슈비츠에서 640km 넘게 떨어진 튀링겐의 도라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녀는 끝까지 살아남아 도라 강제수용소에서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수용소의 SS 병영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침대 바로 옆의 찻장에서 이 앨범을 발견했고, 앨범 속에서 자신과 죽은 가족들도 발견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극소수라는 점, 두 수용소 간의 거리가 엄청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엄청난 우연이었다. 전후 그녀는 이 앨범을 공개했고 1980년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기증했다.

9.2. 존더코만도 사진 (Sonderkommando photo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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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육군 대위 출신 유대인인 알베르토 에레라(Alberto Errera, 1913~1944)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75],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가 찍은 4장의 사진으로, 당시 아우슈비츠 가스실 주변에서(나아가 모든 절멸 수용소의 가스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이다. 이곳에서 실제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하고 귀중한 물증으로, 촬영자 또는 내부 조력자들이 필름을 치약 튜브에 넣고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반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극도로 은밀하게 찍은 사진이라 구도와 노출이 좋지 못하고 초점마저 맞지 않은데, 당시의 현장이 어떤 곳인지 고려하면 공포감을 들게 하는 사진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이 사진 촬영을 오마주한 장면이 나온다. 나체로 가스실에 끌려가는 여성 희생자들의 모습, 학살당한 뒤 구덩이 옆에 쌓여 화장되기를 기다리는 시체들, 은밀하게 찍느라 각도를 너무 올린 나머지 나무만 찍은 사진으로 구성되며, 흐릿하고 선명하지 않지만 대단히 무서운 사진들이다.

수용소 내 저항군의 일원이었던 에레라는, 사진기를 찍은 필름만 빼낸 뒤 땅에다 묻은[76] 이후 카포들 몇몇을 설득해 탈출하려 했으나 거부했고, 이후 같은 카포들을 기절시킨 뒤 수용소를 탈출했으나 2~3일만에 곧 붙잡혀 고문당한 뒤 처형되었다. 시신은 경고의 의미로 수용소 입구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9.3. 카를 회커 앨범 (Höcker Album)

설명글.
사진들.

아우슈비츠의 간부였던 카를 회커가 수용소를 관리하는 SS간부, 경비병들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들을 담은 앨범으로, 총 116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기 게양을 시작하는 모습부터 개를 돌보는 모습, 수용소 근처에 휴가를 나와 웃고 즐기는 이들의 모습까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의 내용 사진들을 보면 아우슈비츠에서 찍은 사진들 중 가장 끔찍한 사진일 것이다. 학살당할 유대인의 모습, 수용소의 참상이 완전히 배제된 이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전혀 살인공장의 간부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 부대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부대라는 인상을 준다. 젊은 남녀간부들이 휴가지에서 모여 웃고 있는 사진은 마치 부대 추억사진 같은 느낌도 준다. 이 사진집에서는 요제프 멩겔레도, 루돌프 회스도 그저 좋은 아저씨일 뿐이다. 하지만 이젠 모두가 알고 있듯, 같은 시각 가스실에서는 이들의 명령에 의해 1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있었다.

카를 회커는 전후 SS의 간부였기에 나치 재판에 회부되었다. 첫 재판인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재판에서 자신은 그 유대인들의 죽음이나 수용소로 가는 유대인의 선정 과정 등에 대해 개입한 바가 없다고 주장했고 이를 반박할 물증도 찾을 수 없어 방조죄로 7년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끝났고 1970년에 퇴소했다. 이후 1989년 5월에 빌레펠트에서의 두 번째 재판에서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독가스로 사용할 지클론 B를 대량 공급받은 혐의가 인정되어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카를 회커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변호를 하다가 죽었다.

인간의 끔찍한 이중잣대를 보여주는 이 앨범은 홀로코스트를 아는 사람에겐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사진집이다.

10. 관련 인물

10.1. 수용소 간부, 간수

10.2. 수감자 및 피학살자

10.2.1. 생존자


10.2.2. 희생자

11. 관람팁

현재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다. 현장 티켓 판매도 하지만, 시간대 별 입장 관광객 수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방문하는 게 안전하다.

관람 시간은 오전 7시 30분부터이고, 겨울에는 문을 빨리 닫는다. 12월에는 오후 2시, 11월과 1월에는 오후 3시, 2월에는 오후 4시에 문을 닫으므로 겨울에 간다면 오전에 가는 것이 좋다. 문 닫기 1시간 30분 전에 입장을 마감한다. 연중무휴로 운영하지만 1월 1일성탄절(12월 25일), 부활절은 휴무한다. 특히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바뀌므로[77] 만약 3~4월 중 일요일에 관람을 한다면 부활절과 겹치는지 꼭 확인해야 된다.

오전 10시부터는 유료로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으나, 한국어 가이드는 한국 여행사를 통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었다. 한국 관광객 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입장은 관람 후에 식욕을 상실한다는 이유로 점심시간 이후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2019년부터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가이드도 생겼다. 개인 가이드 블로그

이곳의 첨탑에 걸려 있는 시계는 시간이 멈춰져 있는데, 관리 소홀이 아니라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한 바로 그 시각에 맞추어서 상징적인 의미로 멈춰 놓은 것이다.

11.1. 교통편

대개 동유럽 쪽에서 넘어온다면 크라쿠프를 거치고, 서유럽 쪽에서 넘어온다면 카토비체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크라쿠프에서 넘어온다면 버스를 많이 타는데, 두 개의 버스회사가 있다. 회사에 따라 미니버스와 대형버스로 나뉘는데, 미니버스는 약간 불편하고 정류장에서 10분 정도 걸어가야 하지만 배차 간격이 짧다. 반면 대형버스는 아우슈비츠 박물관 주차장에 바로 내려주기 때문에 이동이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유레일 패스가 있다면 오슈비엥침까지 가는 열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배차는 대략 1시간에 한 번 정도. 기차역에서 박물관까지 버스 혹은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역에서 박물관까지는 약 1.6 km 정도로, 걸어서 20~30분 가량 걸린다.

11.2. 비르케나우 수용소 관람

아우슈비츠 2(Auschwitz II) 수용소라고도 부른다. 원하는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 둘러볼 수 있다.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아유슈비츠를 다룬 여러 영화에서 나오는 2층 첨탑이 있는 정문으로 선로가 놓여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두 수용소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다닌다. 하절기에는 10분 간격, 동절기에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버스를 타고 약 10분 정도 걸린다. 걸어간다면 두 수용소 간의 거리는 약 2km 정도 된다.

여기에서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으로 나온,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면 나오는 철로를 볼 수 있다. 안쪽으로 쭉 걸어서 들어가면, 사망한 수감자들의 시체를 화장한 다음 그 재를 뿌린 연못이 있다.[78] 1945년 1월 26일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가 해방되고 나치 독일이 멸망한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못의 물빛은 여전히 잿빛이다.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는 가이드를 해 주지 않는다. 패키지 여행의 빡빡한 시간관계상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수기에 운이 좋다면 비르케나우까지 설명을 해준다. 위에 링크된 개인 한국어 가이드는 비르케나우까지 해 준다.

참고로 비르케나우에서 아우슈비츠로 돌아오는 버스는 동절기 오후 5시, 하절기 오후 7시 정도까지만 운행한다. 주위에 숙박 시설은 커녕 아무것도 없으므로 꼭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막차 출발 시간은 수용소 운영 종료 시간과 같으므로 최소한 운영 종료 30분 전에는 나갈 준비를 하자. 만약 버스를 놓친다면 식당 비슷한 것도 없어서 슈퍼마켓에서 산 크래커로 식사를 때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근처는 영어도 거의 통하지 않는다.

12. 관련 창작물

12.1. 회고록과 증언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잘 그린 작품으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유대인)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아트 슈피겔만이 자신의 아버지인 블라덱 슈피겔만(유대인)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인《》도 추천한다. 또한 아우슈비츠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 중령이 연합군에 체포된 뒤 감옥에서 쓴 자서전 성격의 진술서인 《헤스의 고백록》#(정확히는 '회'스가 옳은 표기이며 오기한거다. 루돌프 헤스라는 인물은 따로 있는데 이 인물의 저작이 아니니 혼동하지 말것.)도 있다. 참고로 그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학창시절 홀로코스트 피해자로부터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타데우쉬 보로프스키(Tadeusz Borowski)(폴란드인)의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도 읽어볼 만한 책으로, 아우슈비츠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비젤의 회고록 '밤'도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 안네 프랑크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긴 하지만 아우슈비츠 시점에선 기록을 하지 못해서 안네의 일기는 1차 사료라고 부르긴 어렵긴 하지만, 안네의 일기 판본들 대다수나 안네의 일기 2차 창작물들은 안네 프랑크의 아우슈비츠 생활을 다룬다.

12.2. 영화, 드라마

※ 홀로코스트의 상징적인 장소이니만큼 웬만한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등장하는 편이다.

12.3. 음악

13. 기타

회스 중령의 최후는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서 이루어졌는데, 전범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샤워실에 보내는 대신 교수형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화장터 옆, 수용소와 회스 중령 자신의 사무실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회스 중령만을 위한 특설 교수대가 설치된다. 그는 그렇게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처형 당시 과거 수용수들도 몇몇 참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언급으로는 회스 중령은 최후에 매우 담담하게,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출처 - BBC 다큐: Auschwitz: The Nazis and the 'Final Solution.) 회스의 교수대 근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곳이라 그럴 것이다.

당연하게도, 해방 당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독소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던 소련군들조차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의 나치의 참상에 기겁하였다. 일단 소련도 굴라크라 불리는 수용소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재소자들은 열악한 환경과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곳은 그래도 '수용소'라는 본래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반면 나치의 수용소들은 말 그대로 나치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이거나, 극한의 강제 노동을 통해 소모해버리는 방식이었다. 즉 소련의 수용소와 스탈린의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나치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그것들이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로 악랄했다.

해방 75주년 때는 이 곳에서 홀로코스트 추모식을 가졌다.#

Pokémon GO에서 독가스 포켓몬인 또가스가 이 수용소에서 출현하여 논란이 된 바 있었다. 덕분에 가라르 리전 폼[79] 진화형 또도가스는 공장 굴뚝을 달고 나온 생김새 때문에 이 사건과 맞물려 게임이 출시 된 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포켓몬 애니메이션에서 엑스트라 배경몬 그 이상도 아닌 사실상의 불근신 포켓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사태 당시 아우슈비츠 박물관 측에서 코로나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는데, 그 조치 중 하나가 하필이면 소독 가스를 살포해서 출입인원의 전신을 소독하는 소독문 설치였다. 소독 효과는 물론이고 안전성도 이미 검증된 장치이지만, 우연히도 아우슈비츠의 가장 끔찍한 그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사례이다.

14. 관련 문서

14.1.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 수용소 목록

나치가 세운 수많은 수용소가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는 아래의 6곳이고 그 외는 강제 수용소(Arbeitslager)이다. 다른 강제수용소에서도 부차적으로 인체실험이나 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이루어졌으나, 절멸수용소는 1차적인 목적이 노동이나 교화가 아니라 오로지 살인(절멸)만을 목적으로 운용되던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강제 수용소와 차이가 있다.#

14.2. 나치 독일의 주요 강제 수용소 목록

강제 수용소(Arbeitslager)는 나치가 점령한 각국에 소재하였으며, 1차적인 목적은 나치에 반하는 인물들의 형벌 및 교화, 노동이라는 점에서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강제 수용소는 부차적으로 인체실험, 총살 등이 행해지긴 했어도 주된 운영목적은 아니었으며, 기본적으로 처형이나 기아, 질병, 피로때문에 사망률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1]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2]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3] Camp allemand nazi de concentration et d'extermination (1940-1945)[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사진에서는 그냥 대충 땅을 파고 그 자리에 사람을 집어넣은 다음 석유를 들이붓고 불태우는 방식으로 화장을 진행했다. 해당 사진은 존더코만도 사진(sonderkommando photographs)의 일부다. 자세한 건 후술.[6] 제1 수용소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 모노비츠.[7] 제2 수용소 비르케나우.[8]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오슈벵찜'이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소속의 국경 도시였지만, 1919년 제국이 멸망한 이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로 읽은 이름이다.[9]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 내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들의 지도이다. 절멸 수용소들은 해골이 들어간 검은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전술했듯이 좌측 아래 크라쿠프 근교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그 외 검은 사각형들은 절멸 수용소들을 제외한 여타 수용소들, 육각성은 게토, 검은 배경이 없는 해골은 집단 학살 발생지이다.[10] 주요 절멸 수용소는 6개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외에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데네크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도 말리트로스테네츠, 야세노바츠 등이 존재했다.[11]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는 완전한 절멸 수용소로서 분류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어 잠시라도 살아남을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수용소에서는 1943년까지 학살 속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빨랐다. 마이다네크는 아우슈비츠처럼 절멸-노동 수용소인 데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희생자 수가 앞서 열거한 수용소들보단 적었다. 1943년 말 앞서 열거한 수용소들은 라인하르트 작전의 종료로 마이다네크를 제외하고 모두 폐쇄되었는데 이 때문에 아직 살아남아있던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학살 속도는 본격적으로 빨라져서 점차 '순수' 절멸 수용소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한편, 폐쇄된 수용소들 중 헤움노 수용소는 1943년 말 폐쇄된 뒤 우치 게토에 남아있던 약 3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1944년 6개월간 다시 가동되었다.[12] 대표적인 것이 다하우와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영상들이다.[13] 수용소의 규칙을 어긴 제소자들을 처벌하고 고문하는 곳이었다. 또한 독방들이 있었는데, 작은 창문이 나 있는 90cm x 90cm의 공간에 4명이나 집어넣고 학대했다.[14] 폴란드 총독부 루블린의 SS경찰 사령관이었던 친위대 중장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čnik).[15] 친위대 대령 당시 찍힌 사진이다.[16] 보통 힘러가 지어준 지구라는 뜻의 '글로부스'(Globu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7] 신설된 곳은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세 곳이다. 이들은 라인하르트 작전 이전부터 운영 중이던 헤움노 절멸수용소와 더불어 완전한 학살공장이었다. 이에 더불어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가 노동 겸 절멸 수용소로 개조되었다.[18] 현재 프랑스 기업인 사노피-아방티스에 흡수되어 사라졌다.[19] 초창기에 이송된 유대인들은 일반 승객용 객차로 운송되었다. 소수의 독일군을 제외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싣고 돌아갈 화물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수용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유대인들은 좌석도 제대로 없는 화물열차로 운송되었고, 객차는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물자들을 싣고 다시 타 지역으로 이동했다.[20] 이때 그와 아버지는 일단 살아남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은 바로 선별되어 살해당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해방까지는 살아남지 못하고 부헨발트에서 사망했다.[21] 체코어 이름은 테레진.[22] 체코계 유대인 생화학자이며,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증언한 귀중한 자료인 브르바-베츨러 보고서를 작성한 장본인이다. 학살에서 생존했으며 2006년에 사망했다.[23] 브르바는 이 아이들과 SS가 꽤나 친밀했다고 증언했다.[24] 정확히 말하자면 3월의 학살에서는 노약자들을 우선으로 3,800명이 한번에 살해되었고, 7월에는 3,000명이 선별되어 기타 노동수용소로 보내진 후 남은 이들 중 7,000명이 살해당했다.[25] 뮐레르는 결국 살아남았고, 아우슈비츠 폐쇄 후 마우타우젠으로 이송되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전후에는 평생에 걸쳐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의 진상 규명에 힘썼다.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에도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독일 극우파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2013년 향년 91세로 독일 만하임에서 사망했다. 그는 전후에도 독일에서 살았던 유일한 존더코만도였다.[26] 출처: 클로드 란츠만, "쇼아", 필로소픽, 218~234p[27]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28] 이는 당시 이 표어를 만들었던 포로 노동자들의 최대한의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29] 총살을 당하면 즉사하지만 가스 처형은 15분 가량 끔찍한 고통을 받다가 죽는다는 점에서 이 말은 헛소리이다. 벽면의 손톱자국만 봐도 알 수 있다.[30] 실제로 유튜브 댓글에서 어떤 한국 사람이 저곳에 가서 손톱자국이 남는지 실험해보려고 직접 가서 손톱으로 긁고 긁고 손이 아플 때까지 긁었지만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고통속에서 죽기살기로 참혹하게 긁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벽을 자세히보면 손톱 자국이 남은 위치는 사람의 팔이 닿는 위치인데 검은색으로 변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얼룩들의 정체는 . 한마디로 손톱이 빠질 때까지 벽을 긁었다는 뜻이다.[31] 우선 위생을 위해 샤워를 실시한 후, 각자의 직무능력에 따라 적합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안내한다. 샤워를 마친 후 본인의 옷을 찾을 수 있도록 옷걸이 번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통해 별 일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머뭇거리는 희생자들에게는 식사로 나온 수프가 식고 있다고 재촉한다. 물론 이렇게도 진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친위대원들이 몽둥이질을 가하면서 그들을 강제로 가스실에 밀어넣는다.[32] 대부분의 절멸 수용소들은 자동차 또는 전차에서 떼어 온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오는 일산화탄소를 이용해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이 문서 위쪽 표에 나온 다른 수용소들의 구조에서 가스실 뒤편에 처형용 엔진이 있는 게 이 때문. 치클론 B가 사용된 것은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 둘뿐이다.[33] 이 수감자는 산 채로 소각장에 던져졌다고 한다.[34]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9장 6편 학살. 나치는 유대인을 게토에서 수용소로 보낼 때 모든 짐을 싸들고 나오게 만들어 수거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편의주의와 잔인무도함을 동시에 실천했다. 이렇게 하면 굳이 남은 물건 수집하러 게토를 뒤질 필요가 없다. 게토 소개 시 짐을 싸게 한 다음 가방에 이름을 쓰게 했고, 그 짐들은 별도의 열차로 옮길 테니 두고 가라고 한 다음, 유대인 경찰들을 시켜 분류해 털어갔다. 이 장면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잘 묘사된다. 유대인들이 짐을 싸며 가방에 이름을 적어넣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다른 유대인들이 이들의 짐을 수거해 쓸모있다 싶은 것들은 전부 분류하는 모습이 나온다. 의류의 경우 전시 경제 체제로 인해 의류 공급에 제약을 받던 민간인들을 위한 중고 의류 수요를 채우거나, 개조 등을 통해 군용 피복으로 전용되기도 했다.[35] 출처는 쥐 합본 233-236페이지로 작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버지가 존더코만도에게 들은 증언을 넣었다.[36]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유대인들을 부려가며 이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감독하던 한 무장친위대 하사반쯤 미쳐서 비명을 질러대고 권총을 소각장에 난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분 30초 무렵, 성인 인증 필요) 이걸 보고 "죽일 때는 그렇게 신나게 죽여놓고도 이런 짓은 맨정신으로는 못 버틸 정도로 끔찍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는 환희와 기쁨에 날뛰는 모습이다. 이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인 무장친위대 부사관 알베르트 후야르(Albert Hujar)를 모티브로 하였으며, 후야르는 자제심을 잃고 아무에게나 총질을 하는 등 미치광이들 집단인 나치 내에서도 광적일 정도로 학살 행위를 즐기던 사이코패스였다. 이 장면에서 그가 외치는 말은 독일어로 "So ist es! Walhalla! Walhalla läuft hier!(바로 이거야! 발할라라고! 발할라가 여기 도래했어!)"라는 의미이다. 배우는 노어베르트 바이서(Norbert Weisser)로, 재미있게도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 아돌프 히틀러 역(목소리 출연)으로 출연하였으며 이 외에도 브레이킹 배드에서 독일계 조직원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37] 전장에서 군인들이 가장 충격을 받는 요소는 의외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거부감이다.[38] 이 와중에 나치는 불탄 유대인들의 시체에서 나온 기름을 뽑아 다시 불 위로 퍼부어 불이 더 잘 타오르도록 했다. 사탄 오늘도 1패[39] 호르티는 추축국의 일원이었지만 국내 파시스트를 탄압한 이질적인 인물이었다.[40]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이렇게 잡혀온 헝가리 유대인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41] 아우슈비츠 11호 건물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3부에 나오는 "4번 수감실"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42] 합본 213p.[43] '운명'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대목을 보면 사료용 무와 알줄기 양배추로 만든 수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수용소의 식사는 대체로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44] 지금 보면 이게 사람 사는건가 싶겠지만, 재미있게도 이렇게라도 씻고 관리하려고 노력을 보인 수용자들은 독일군이 잘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인이 하등 종족이라 치밀하게 세뇌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들도 인간이라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그들을 해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이 경험에서 빅토르 프랑클이 의미치료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45] 교도소에서 담배가 금지된 것은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 심지어 현대 독일에서도 주마다 다르지만 상당수의 교도소에서 흡연을 허용하고 있다. 출처[46] 한국군에서도 2009년까지 군인에게 지급되는 면세 담배가 있었으며, 현재도 외국 파견병력에 한해 면세담배가 지급된다. 직접적인 사용을 제외하고도 수용시설 내에 최소한의 경제가 돌아가게 해서 통제에 도움이 된다. 현대에도 후진국의 열악한 교정시설들은 담배나 시중화폐 등의 사용을 용인해서 부유하고 힘있는 수감자들이 자체적으로 수용인들을 관리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이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관리 실패의 결과물이므로, 선진국의 정상적인 교정시설들은 이런 행태를 철저히 막는다.[47]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병사들에게 하루에 12개비를 지급하였고, 혐연가로 유명하던 히틀러가 지배하던 나치조차 하루에 7개비는 주었다. 이를 감안하였을 때 하루에 3/7개비는 감질난다 수준을 넘어서 그냥 안 주는 것만도 못한 행위였다.[48] 막사 하나 당 평균 수감자 수가 1,000명이었으므로, 대략 5,000~6,000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한 것이다.[49]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할아버지의 혈통 때문에 영문도 모른채 끌려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A] 프란치예크 파이퍼, <Auschwitz 1940–1945>에 수록된 자료에서 발췌[A] [52]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판명된 유대인이나 열등인종 취급당한 러시아인들에 비하면 폴란드, 동유럽 출신 정치범들은 처형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낮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53] 친족들 대부분 순혈 독일인인데 외할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되기도 하는 등 조금이라도 다른 인종과 섞여있다면 수용되었다.[54] 나치 독일은 군국주의 국가였는데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교리상 군대를 부정한다.[55]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아티의 아버지.[56] 아트 슈피겔만. 블라덱의 아들이자 쥐의 작가.[57] 합본 214p.[58] 블라덱은 어느 날 점호에 이 사람이 똑바로 서지 않자 경비병이 그를 끌고 가서 쓰러뜨리고 목을 우악스럽게 밟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가스실로 보낸 것 같다고 하는 등 어떻게 죽었는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59] 출처: 존 캐리의《역사의 원전》146. 다카우 수용소의 의학 실험(1941~45)/ 프란츠 블라하[60] 이 외 과시를 목적으로 머리카락을 모아다 카펫을 만들어 전시한다거나 가스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인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구덩이에 집어던져 산채로 불태운 뒤 유대인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을 다시 퍼부어 더 잘 타오르게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들이 버젓이 일어났다. 다만 홀로코스트 당시부터 알음알음 언급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유대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는 실제 샘플도 발견되지 않았고, 신빙성도 없다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유대인들을 "땔감으로도 못 쓸 종자들"로 취급했던 나치가 자신의 몸을 닦아내는 데 쓰는 비누를 유대인들의 기름으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안 그래도 피골이 상접했던 유대인들을 아무리 불태운다 한들 넉넉한 기름이 나왔을 리는 없고.[61] 생존자인 블라덱 슈피겔만은 당시 수용자들에게 담요 하나와 소시지 하나가 공급되었다고 증언했다. 참고로 이때 블라덱은 매우 운이 없었는데, 블라덱에게는 나치 관리들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독일군 측의 분위기를 읽어 소련군의 진격과 아우슈비츠의 소개를 예측했고 블라덱을 포함한 몇몇 유대인들과 모의해 철수가 시작되면 안 쓰는 방에 숨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 세탁소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제복을 빼돌렸고, 식료품(배급받던 빵의 반이라고 언급된다.)과 관련 서류까지 다 모았으나 최후의 날 그 친구가 뛰어오며 나치가 이 수용소를 불지른다고 한다고 외치는 바람에 죽음의 행진 최후반 대열에 끼여 수용소를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군의 진격 때문에 정신이 없던 관리들은 수용소를 불태우지 않았다.(다만 이는 블라덱이 수용되어 있던 아우슈비츠 이야기이고 비르케나우라 불리던 제2아우슈비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아우슈비츠도 30%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블라덱 일행은 며칠간의 행진 끝에 바이에른의 다하우 노동 수용소에 도착했다고 한다.[62] 합본 235p.[63] SS가 학살을 위해 따로 편성한 학살부대도 존더코만도라고 불렀다.[64] 출처 루돌프 회스: 고백록[65] 반제 회의에서 결정된, 나치가 학살을 공식적으로 부른 명칭.[66] 출처 Concentration Camps in Nazi Germany: The New Histories, p.73[67] 출처 Auschwitz: A Doctor's Eyewitness Account[68] 열심히 일하면 자기들은 봐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일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학살을 위한 학살상황에서는 어쨌든 다 죽이고 나면 자신들 차례임은 인지했을 것이다.[69] 다만 예외는 있었다. 니슬리 미클로쉬는 유대인이었지만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제법 대우를 받아 본인도 멩겔레의 인체실험을 보조했고, 나중에는 SS장교에게 뇌물을 바쳐 아내와 딸을 처형 수형소에서 노동 수형소로 이송시켜 살리는 등, 다른 희생자 입장에서는 존더코만도보다는 배신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70] 미군 측도 다를 바 없었다. 조지 S. 패튼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평소 공공연히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서슴치 않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뒤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고 전해진다.[71] 트레블링카(Treblinka), 베우제츠(Bełżec), 헤움노(Chełmno), 소비보르(Sobibór), 마이다네크(Majdanek). 이 중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만큼이나 악명높던 곳으로 70만 ~ 90만명이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를 제외한 이들 다섯 수용소에서 약 200만명이 학살당했다. 이 수용소들은 모두 폴란드에 있었고, 이들 6군데 외에 벨라루스에 트로스테네츠(Trostenets)라는 소규모 절멸 수용소가 있었다.[72] 다하우, 작센하우젠 수용소 등. 쉰들러리스트에 나오는 프와쇼프 수용소도 노동 수용소로 두 수용소와 성격이 비슷하다. 강제/노동 수용소는 수만명의 제소자들을 수용하고 있어야 했기에 건물이 많았고 부지의 규모가 컸다. 참고로 강제 수용소나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의 사망률은 수용소에 따라 15%(작센하우젠)~59%(슈투트호프) 정도였다. 다른 악명높은 강제 수용소들을 살펴보면 다하우는 약 20%, 부헨발트 24%, 그로스-로젠 32%, 베르겐-벨젠 42%였다. 이것은 해당 수용소에서 사망한 희생자 수만 집계한 것으로, 수감자들 중 유대인은 수시로 강제 수용소에서 절멸 수용소로(주로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된 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73] 소련, 리투아니아 등 폴란드 동쪽의 유대인 희생자 상당수는 SS나 국방군에게 총살당한 사람들이었다.[74] 헝가리 출신이며 헝가리식 이름은 만들 죄르지(György Mandl).[75] 당시 그는 수용소에서 Alex 혹은 Alekis로 불렸다.[76] 이 사진기는 후에 발견된다.[77] 부활절은 춘분 후 첫 보름달이 뜬 뒤에 오는 일요일인데, 알다시피 보름달이 뜨는 시기와 양력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날짜가 매년 바뀐다.[78] Birkenau Ash Pond[79] 다른 지역에서 진화하면 그냥 풍선 형태의 외형을 가진 독가스 포켓몬이다.[80] 루블린 절멸수용소라고도 부른다.[81] 1941년 강제수용소로 만들어졌고 추후 총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행해졌으므로 절멸수용소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희생자 숫자나 경향 등에서 타 강제수용소에 비해 뚜렷히 구분되는 측면이 없어 최신 경향에서는 위의 6곳만 절멸수용소로 분류하고 있다.[82]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처럼 절멸수용소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마찬가지로 희생자 숫자나 경향 등에서 논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