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 Konzentrationslager (KZ) Dachau(독일어)
Dachau Concentration Camp(영어)
1. 개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다.2. 역사
하인리히 힘러가 버려져 있던 군수 공장을 기초로 정비해 최초로 개관했을 때는 정치범수용소로 이용되었는데 곧 강제노역 목적으로 확대되었다가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럽 전역에서 끌려와 수용되었다. 집시, 동성애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범죄자들은 물론 독일이 점령한 국가들의 국민들까지 잡아가둬 나치의 독재와 인권침해,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장소다. 서류상으로만 3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해방 당시 3만 명의 수용자들 가운데 무려 만 명이 환자였다.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엄청난 존재감으로 인해 가려진 편이지만 다하우는 아우슈비츠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강제수용소이며 현재 독일 영토 내에서는 단연 최대 규모의 수용소였다. 산하에 노역소로 기능한 100여 개의 부설 강제수용소를 거느리기도 했는데,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에 흩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나치가 세운 최초의 강제수용소로써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이후 나치의 여러 수용소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부대가 다하우 강제수용소 관리경비대인 일반친위대 '토텐코프 연대(토텐코프페르반데)' 소속에서 분화했으며 이전 수용소장은 동부전선의 악마 테오도어 아이케였다.
해방 후엔 전범 재판을 기다리는 친위대를 수용하는 용도로 사용했고 전후 독일에 주둔하던 미군의 기지로 이용되기도 하다가 1960년 재사용이 완전히 중지되었다.
수용소와 내부의 박물관 및 전시관 입장은 무료이며 오디오 가이드는 3.5유로에 대여할 수 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이 있으며 한국어는 없다. 부대 시설로 식당, 기념품점, 무료 화장실 등이 있다.
3. 주요 수감자
- 프랑스 총리 레옹 블룸[1]
- 바이에른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 독일인 목사 마르틴 니묄러
- 폴란드계 유대인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 독일 국방군 보병대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 그리스 육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 독일 국가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
- 오스트리아 황족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 독일 사민당 당수 쿠르트 슈마허
-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
- 독일 국방군 상급대장 프란츠 할더
- 독일인 언론인 프리츠 게를리히
4. 다하우 포로 해방 후 보복사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4월 29일 미합중국 육군에 의해 해방될 때 이곳의 무장친위대 소속 경비병들은 항복했지만 미 육군 장병들은 대참상을 보고 분노해 그들을 즉결처형해 버렸다. 또한 해방된 수용자들에게 아예 복수하라고 넘겨주고 삽 같은 걸 던져 주기도 했다. 이 경우 쳐맞는 걸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시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경비도 있었다. ## 당연하지만 이미 제3차 제네바 협약까지 비준된 상황이었으므로 항복한 독일군을 미군이 즉결처형한 것은 분명히 전쟁범죄에 해당된다. 뒤늦게 미 육군 장교가 나타나 제지했지만, 이미 500명 넘는 SS 대원들이 학살된 뒤였다. 학살을 막아야 할 장교들조차 이를 묵인했고 이 중 육군 군의관은 부상당한 SS 대원들의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처벌받은 미군은 없다. 그냥 놔두면 곤란해서 형식적으로 조사만 했을 뿐. 미군 내에서도 무장친위대, 일반친위대에 대한 증오가 막심하다는 증거. 이례적으로 학살치고는 여론이 긍정적인 편이다.[2] 다만 이때 살해된 상당수의 친위대원들은 학살이 극심했던 1933년-1944년 사이 수용소 근무자들이 아닌 교체된 신참들이었다. 오히려 가장 극악하게 괴롭혔던 친위대원들은 그전에 서부전선의 다른 곳으로 차출되어 전사했거나[3] 내륙 지역으로 미리 재배치된 상태였다. 물론 이들 대부분 종전과 함께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물론 이것도 운이 좋은 케이스고 자신의 전쟁범죄가 드러난 채 잡힌 1933년-1944년 사이 수용소 근무자들은 재판이고 나발이고 교체된 신참들처럼 끔찍한 최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일부 약삭빠른 무장/일반 친위대 경비대원들은 미군이 도착하자 수용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수용자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 동안 당한 수모에 악이 받친 수용자들을 앞세운 미군의 검문에 걸려 끌려 나왔다. 이후 이들의 생사는 불명. #[4][5]
이 장면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있으니 참조.[6] 다만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적십자 깃발을 들고 항복하는 무장친위대 병사를 밀어내고 병원에 누워 있는 부상병들을 모두 끌어내 총살하는 것이고, 사진 상으로는 처형에서 살아남은 SS 무장친위대 포로가 3명 정도 존재하는데 비해,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전원 사망으로 처리. #
이 사건은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5. 기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된 독일 제국과 같이 붕괴된 옛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과도 연관이 있는 장소다. 당시 루프레히트는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이탈리아 왕국으로 추방당했는데 1944년 10월 연합국과 강화를 모색하려던 헝가리 왕국의 호르티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체포될 뻔했다가 겨우 탈출했다. 그러나 일가족은 모두 체포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옛 영지가 있는 뮌헨 인근의 이 다하우 수용소로 이송되어 미군에 해방될 때까지 수감되었다. 그중 루프레히트 왕세자의 아내인 안토니아 왕세자빈은 가혹한 수감생활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쳐서 거의 죽을 뻔했다.[7]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돌프 히틀러는 1차 대전 중에 루프레히트의 부하였다. 1차대전 당시 루프레히트는 독일 제국군 소속인 바이에른 왕국군을 지휘했는데 히틀러는 이 바이에른 왕국군 소속으로 참전했기 때문이다.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는 그 독재의 잔혹성 때문에 '아프리카의 다하우'라고 불렸다.
JTBC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톡파원 25시에도 소개되었고 타일러의 할머니의 이모도 조현증이 있어서 다하우에 강제 수용되었다고 한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후반부의 주요 배경 무대가 되기도 했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이 기존에 수용소 생활을 하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노동 및 절멸 수용소가 폐쇄되자 다하우로 이송되었는데 다하우에서 수용생활을 하던 중 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을 뻔 하는 등 작중 블라덱이 가장 고난을 겪은 곳이다.[8]
[1] 프랑스 정치범들은 대부분 이터성에 수감되었으나 레옹 블룸은 사회주의자 + 반파시스트 + 유대인(...)이라는 환상적인 조합 덕에 온가족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본인도 다하우에 수감되었다.[2] 사실 아르덴 대공세에서 펼쳐진 말메디 학살로 인해 미군은 무장 친위대에 단단히 분노하여 연합군 사령부에서 친위대들은 더이상 교전권이 있는 단체로 취급하지 않겠으니 즉석에서 처형해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공식문서화했으니 딱히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3] 절멸수용소였던 소비보르, 트레블랑카 등의 근무 인원에 대해, 나치는 아예 이런 학살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숨기기 위해 이들을 유고슬라비아 등의 전방에 재배치해 자연스럽게 사살당하는 것을 유도했다. 여기 또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4] 이 동영상의 2:05부터 2:34 참조. 피골이 상접한 유대인 수용자들의 시체가 나오는 관계로 성인인증 필요.[5] 이들의 생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간의 만행들로 단단히 눈이 돌아버린 미군들에게 최소한 린치, 더 가면 즉결처형됐을 가능성도 있다. 후반에 가담한 후임 세대 신참 병사들과 젊은 장교들인들,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은 적었기 때문.[6] 해당 애니메이션은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더 리버레이터: 500일의 오디세이》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끄는 한 장교와 그 부하들의 서부전선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7] 그녀는 1954년에 사망했다.[8] 아우슈비츠 생활도 인간 미만의 취급을 받는 생활이긴 했으나 아우슈비츠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이리저리 살아남을 수 있었고 건강 또한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지만, 다하우에서는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티푸스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구조받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