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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5E5DF><colcolor=#000>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Rupprecht, Kronprinz von Bayern | |||
이름 | 루프레히트 마리아 루이트폴트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 (Rupprecht Maria Luitpold Ferdinand von Bayern) | ||
출생 | 1869년 5월 18일 | ||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사망 | 1955년 8월 2일 (향년 86세) | ||
서독 바이에른 자유주 슈타른베르크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마리 가브리엘레 여공작 (1900년 결혼 / 1912년 사망) | ||
룩셈부르크의 안토니아 공녀 (1921년 결혼 / 1954년 사망) | |||
자녀 | 루이트폴트, 이르밍가르트, 알브레히트, 루돌프, 하인리히, 이르밍가르트, 에디타, 힐다, 가브리엘레, 조피 | ||
아버지 | 루트비히 3세 | ||
어머니 | 외스터라이히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제 여대공 | ||
형제 | 아델군데, 마리아 루트비가, 카를, 프란츠, 마틸데, 볼프강, 힐데가르데, 노트부르가, 빌트루트, 헬름트루트, 디틀린데, 군델린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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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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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이자 독일 제국군의 원수였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이론상의 자코바이트 계승권을 물려받은 자코바이트 계승권자이기도 했다.[1][2]1918년, 독일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바이에른 왕국에서의 그의 경칭은 바이에른 왕세자 겸 공작이자 프랑켄 공작, 슈바벤 공작, 라인 궁정백이신 루프레히트 마리아 루이트폴트 페르디난트 전하[3]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루프레히트는 1869년,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주로 별장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학업 외에도 무역, 승마 등에 대해서도 배웠고 목공을 배우기도 했다.1896년 6월 4일, 루프레히트는 소령으로 임관한다. 31세의 나이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의 여동생인 마리 가브리엘레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의 첫번째 아내는 1912년, 34세의 나이에 죽었다. 1913년, 자신의 친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 그렇게 루프레히트는 바이에른의 왕세자가 되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루프레히트는 제6군의 총사령관으로 국경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왕실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덕에 제6군을 잘 이끌었다. 제6군은 슐리펜 계획에서 오른쪽 날개의 일부였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독일군 총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줄여서 OHL)와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4]제6군이 너무 빡빡하게 제1군과 제2군의 진군을 저항하는 바람에 전황은 본래대로 자루처럼 프랑스군을 고립시키는 계획과 점점 멀어졌으며 루프레히트는 검은 숲(Black Forest)으로 프랑스군을 유인하는데 별 거부감이 없었던 반면[5] OHL은 프랑스군에게 독일 영토를 내주는데 큰 거부감을 보였다.[6]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딱히 논란이 되지는 않았고 루프레히트는 문제없이 1916년에 독일 제국군의 원수가 되었고, 힌덴부르크의 팔켄하인 반대파의 일부였다. 8월 28일에는 북부 집단군 즉, 1군, 2군, 6군, 7군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여담으로 북부 집단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은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구성국의 왕족 출신이어야만 했는데 루프레히트는 역대 북부 집단군 사령관들 중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는데, 서부전선에서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나름 잘 싸웠다. 루프레히트는 당시 타 장성들과는 다르게 영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였고 영국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며 효과적인 작전을 추구하였다.[7] 영국군은 루프레히트를 잔인한 장군으로 평가하였지만 루프레히트는 영국군 포로들을 학살하지 않았다. 1918년 미하엘 작전에서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꽤나 큰 승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갈라놓기에는 힘들었다. 리스 전투에서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갈라놓기 직전까지 갔으나, 전략적인 문제로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한번 시도했으나 프랑스군의 필사적인 저항 때문에 불가능하였다. 소아송 전투를 계획하여 또 한번 돌파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독일군의 화력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후 루프레히트와 그의 참모장 헤르만 폰 쿨은 독일이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루프레히트는 1918년 11월 11일, 즉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일에 사임하였다. 루프레히트는 혁명 국면으로 인하여 스페인의 외교적 도움을 받아[8] 란츠베르크(Landsberg)라는 가명을 통해 네덜란드로 한동안 도피하였다가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2.3. 전간기
이후 그는 1921년, 룩셈부르크의 안토니아 공주[9]와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미뤄졌던 결혼식을 올렸고[10] 총 6명의 아이(1남 5녀)를 낳았다.1921년 안토니아 공주와의 결혼식 |
루프레히트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군주제를 지지하였기에 바이마르 공화국을 못마땅하게 보았지만 프로이센 가문과는 달리 나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반나치주의자로 바이에른 주지사였던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가 나치에 기울어지는 것을 막았다.[11] 이후에도 그는 계속 군주제를 지지하였지만, 독일에는 두 번 다시 군주국이 설립되지 않는다.
2.4. 나치 정권
1939년 12월, 루프레히트는 반나치 인사라는 이유로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루프레히트는 독일이 이번 전쟁에서도 패배할 것이라고 하여 나치 독일의 반감을 제대로 샀다.아이러니한 건 아돌프 히틀러는 과거에 루프레히트의 부하였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바이에른 왕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는 계속 이탈리아에 있었기에 체포를 피했지만 헝가리에 있던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헝가리가 점령당하자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 일로 몸이 크게 상한 아내 안토니아는 1954년 스위스에서 사망한다.
2.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말년의 루프레히트 |
이후 루프레히트는 86살의 나이로 바이에른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고# 가문의 수장 자리는 장남인 루이트폴트가 1914년에 요절했기에 차남 알브레히트 공작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첫 부인 사이에서는 3남 2녀,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는 1남 5녀가 태어났는데, 알브레히트는 첫 부인 소생이다.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 수장인 프란츠 공은 차남 알브레히트의 2남 2녀 중 장남(셋째)이다. 프란츠 공(1933년생)이 자녀가 없고 동생인 막스 공(1937년생)이 딸만 다섯[12]이기 때문에, 이들 형제가 모두 사망한다면 6촌(이자 4촌이다. 왜냐하면 루이트폴트의 어머니가 알브레히트 공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이다.)인 루이트폴트(1951년생)가 계승할 예정이라[13]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은 루프레히트의 후손이 아니게 된다. 다만 루프레히트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물려받은 이론상의 자코바이트 계승권은 여계 계승을 허용하는 영국의 왕위 계승법 때문에, 막스 공의 장녀이자 리히텐슈타인 공세자빈 조피를 거쳐 리히텐슈타인 공가로 넘어갈 예정이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바이에른에서의 마리 가브리엘레 여공작 (Marie Gabriele Herzogin in Bayern) | ||||
1남 | 바이에른의 세습 왕자 루이트폴트 (Luitpold, Hereditary Prince of Bavaria) | 1901년 5월 8일 | 1914년 8월 27일 | |
1녀 | 이르밍가르트 공주 (Princess Irmingard) | 1902년 9월 21일 | 1903년 4월 21일 | |
2남 |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Albrecht, Duke of Bavaria) | 1905년 5월 3일 | 1996년 7월 8일 | 마리아 드라스코비츠흐 데 트라코스찬 여백작 슬하 2남 2녀 |
마리옌케 케글레비츠흐 데 부진 여백작 (Prinzessin Antonia von Luxemburg) | ||||
3남 | 루돌프 왕자 (Prince Rudolf) | 1909년 5월 30일 | 1912년 6월 26일 | |
룩셈부르크의 안토니아 공녀 (Princess Antonia of Luxembourg) | ||||
4남 | 하인리히 왕자 (Prince Heinrich) | 1922년 3월 28일 | 1958년 2월 14일 | 안 마리 드 루스트락 |
2녀 | 이르밍가르트 공주 (Princess Irmingard) | 1923년 5월 29일 | 2010년 10월 23일 |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왕자[14] 슬하 1남 2녀 |
3녀 | 에디타 공주 (Princess Editha) | 1924년 9월 16일 | 2013년 5월 4일 | 티토 토마소 마리아 브루네티 슬하 3녀 |
구스타프 크리스티안 슈미트 슬하 3남 | ||||
4녀 | 힐다 공주 (Princess Hilda) | 1926년 3월 24일 | 2002년 5월 5일 | 후안 브라드스톡 에드가르트 로케트 데 로이자 슬하 3남 1녀 |
5녀 | 크루이 공작부인 가브리엘레 공주 (Princess Gabrielle, Duchess of Croÿ) | 1927년 5월 10일 | 2019년 4월 19일 | 제14대 크루이 공작 칼 슬하 2남 1녀 |
6녀 | 아렌베르크 공작부인 조피 공주 (Princess Sophie, Duchess of Arenberg) | 1935년 6월 20일 | 제12대 아렌베르크 공작 장 슬하 4남 1녀 |
4.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의 유명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대전쟁에서 동맹국이 승리했기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되어 있다.[15] 브리튼 연방에서 스코틀랜드 왕국이 떨어져나오면 그곳 왕이 되어 떠나는 이벤트도 있다.[16] 0.23 패치 이전에는 독일 제국군 원수로도 등장했으며 패치를 거치며 독일이 전쟁에 돌입할 시 이벤트가 뜨며 원수가 아닌 장군으로 등장한다.[1] 제임스 2세의 후손이 단절된 이후 이론상의 자코바이트 계승권은 찰스 1세의 막내딸의 여계후손에 해당하는 사보이아 왕가로 넘어갔다 사보이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여계를 통해 다시 모데나 레조 공국의 공가이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분가인 다스부르고에스테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 가문도 단절되면서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의 조카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통해 루프레히트에게 계승권이 돌아갔다. 자코바이트의 주장을 따른다면 루프레히트의 명목상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의 재위명은 로버트 1세&4세가 된다. 스코틀랜드 국왕 중 '로버트'라는 이름을 쓴 국왕은 3명이 있지만 잉글랜드 국왕이나 기존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 중에는 로버트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 없기 때문.[2] 물론 자코바이트 운동은 제임스 2세의 직계후손이 단절된 후 사실상 막을 내렸기 때문에, 생전에 특별히 관련 활동을 하거나 자코바이트 계승권자임을 내세운 적은 없다. 만약 자코바이트 계승권자임을 공식적으로 내세우려고 했다면 경칭에는 'Kronprinz von Bayern, England, Schottland, Frankreich und Irland'같은 형태의 칭호가 들어갔을 것이다.[3] 獨 : Seine Königliche Hoheit Rupprecht Maria Luitpold Ferdinand Kronprinz von Bayern, Herzog von Bayern, Franken und in Schwaben, Pfalzgraf bei Rhein.[4] 독일 제국 육군은 프로이센 왕국의 장교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센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바이에른의 왕세자 루프레히트와 독일군 총사령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5] Holger Herwig의 <The Marne, 1914>에 의하면 오히려 적극적(more than willing)이었다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루프레히트는 프로이센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바이에른 출신이었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를 내주는 것을 내심 좋아했을 수도 있다.[6] 독일군의 철수 계획을 보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지금껏 독일군이 포기한 영토는 어디까지나 알자스-로렌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검은 숲은 독일의 본토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알자스-로렌을 포기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7] 그렇기에 베르됭 전투를 굉장히 반대하였다.[8] 당시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가 루프레히트와 이종사촌간이었다. 정확히는 알폰소 13세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루프레히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부 여동생이었다.[9] 기욤 4세의 넷째 딸이다. 마리아델라이드와 샤를로트의 동생, 전처 마리 가브리엘레의 이종사촌이기도 하다.[10] 루프레히트는 두 번째 결혼이었으며 안토니아 공주와 루프레히트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이었다.[11] 이로 인해 카르는 장검의 밤에서 살해당한다.[12] 그 중 장녀는 현재 리히텐슈타인의 공세자비 조피[13] 루이트폴트에게는 3남 2녀가 있는데, 차남 하인리히 루돌프(1986년생)가 아들 1명(막시밀리안, 2021년생)을 두었고, 나머지 두 아들은 아직 미혼이다. 그 외에도 루이트폴트의 다른 사촌들 및 그들의 자녀 등 남자 후손들은 아직 꽤 있다.[14] 친숙부 프란츠(1875 ~ 1957)의 아들로 친사촌이다.[15] 생디칼리슴 체제가 아닌 국가로 독일을 점령한 뒤 바이에른을 괴뢰국으로 해방시키면 지도자로 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다.[16] 비텔스바흐 가문이 이론상 스코틀랜드 왕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자세한 사항은 자코바이트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