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오스카 폰 후티어 Oskar von Hutier | |
이름 | Oskar Emil von Hutier 오스카 에밀 폰 후티어[1] |
출생 | 1857년 8월 27일 에어푸르트 |
사망 | 1934년 12월 5일(향년 77세) 베를린 |
복무 | 독일 제국군(1875년 ~ 1918년) 국가방위군(1918년 ~ 1919년) |
최종계급 |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General der Infanterie) |
주요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 왕관 검 2급 붉은 독수리 훈장 |
친척 | 에리히 루덴도르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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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 폰 후티어는 독일 제국군의 보병대장으로 전격전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는 후티어 전술로도 유명하다.[3]2. 생애
후티어는 1857년 에어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1875년 군에 입대하였다.[4] 1874년 후티어는 이미 프로이센 전쟁대학에 들어갔으며, 장군참모과정을 밟고, 1911년, 후티어는 수석 참모장교가 되었다.2.1.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1차세계대전의 첫 1년은 프랑스에 주둔한 사단의 사령관이었고, 이후 제2군 소속의 제1근위보병사단장으로 보냈다. 마른전투에 참여하였고 1915년 4월까지 서부전선에 있었다. 후티어는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10군 밑의 21 군단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보병대장이 되고, 8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8군의 사령관으로서 리가로 진격하였다. 다우가바를 갑작스럽게 건너면서 리가를 점령하였다. 이후 알비온 작전을 지휘하였다. 그는 리가의 점령과 알비온 작전으로 푸르 르 메리트를 수훈받았다.이후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새로 편성된 18군의 총사령관으로 미하엘 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는 거기서 후티어 전술을 처음 사용하였다. 후티어 전술은 성공적이었고 약 50,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 공로로 후티어는 백엽 푸르 르 메리트를 수훈받았다. 6월 말 그는 누아용을 향해 또 공세를 했지만, 협상국의 거센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전후 후티어는 영웅 취급을 받았고, 1919년 전역하였다. 그는 루덴도르프와 함께 배후중상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죽기 전까지 독일 장교 연맹의 회장으로 역임하였다.